107화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은 뒤.
마치 맹수와도 같은 사나운 눈빛으로 이천웅을 제압하고 있는 창표와 이천웅을 번갈아 봤다.
이거 이대로는 이천웅이 어디 비 맞은 강아지처럼 기를 못 펴겠는데?
“창표야. 후배가 실수할 수도 있지. 그만해라.”
“아, 죄송해요. 이르카 님이 계신데 실수를 했네요.”
“괜찮아. 광철 할배한테 얘기는 듣고 온 거지?”
“네! 지금부터 알아볼까요?”
“응. 부탁 좀 할게.”
“헤헷, 아니에요.”
혀를 쭉 내밀며 미소를 짓는 창표를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 누가 어딜 봐서 저놈의 나이가 400살이 넘었다는 것을 인지할까?
나 역시 처음에는 등선한 신선들만 있을 수 있는 신선계에 웬 꼬맹이가 있나 했으니까.
“야, 너 이름이 이천웅이라고 했나?”
“네? 네… 그렇습니다.”
“나도 이런 모습으로 살고 싶은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이해해라. 내가 내공이 아니라 나이로만 팔 갑자가 넘었거든?”
“파, 팔 갑자?”
“그래. 너는 회귀한 기간 합쳐봤자 삼 갑자 정도잖아?”
“그, 그렇습니다.”
“그리고… 욕해서 미안하다. 아나, 이놈의 성질은 등선해도 고쳐지질 않네.”
“괜찮습니다! 선배님!”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광마 이천웅을 향해 혀를 끌끌 차며 말을 건네줬다.
“갔다.”
“네?”
“갔다고.”
“…….”
황망한 표정으로 바람처럼 사라진 창표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이천웅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하긴, 누가 봐도 꼬맹이처럼 생긴…….
아니지, 영락없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행동을 보고 안에 오백에 가까운 늙은이의 영혼이 들어있을 거로 생각하겠는가?
창표가 쏘아 보낸 살기에 짓눌렸는지 아직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이천웅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쟤, 신선이야.”
“생각했던 모습과 매우 달라서 놀랐습니다.”
“그치? 반로환동(返老還童)을 하자마자 등선을 했다던가?”
“역시, 반로환동의 고수였군요. 그런데 신선의 성격이 왜 저렇게 흉포한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긴, 보통 신선이라고 하면 광철 할배처럼 세월이나 낚아 올리며 너털웃음이나 짓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테니 창표가 조금 특이하긴 할 것이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것도 모자라 저렇게 험한 욕설을 내뱉는 신선은 나 역시 처음 보는 존재였으니까.
물론, 내가 누군지 모르고 꼬맹이라는 말에 대들었다가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후로 고분고분해졌지만 말이다.
“쟤, 신선은 신선인데 살선(殺仙)이야.”
“……?!”
“특이하지? 무림인일 때 별호가 살황(殺皇)이었다던가? 뭐, 너랑은 차원이 달라서 만날 일이 없었겠지만….”
“저를 그만 놀리시지요. 살황이라니… 기나긴 무림의 역사상 그런 오만한 별호를 가진 존재는 없었습니다.”
창표에 관해 설명을 해 주려니 여러 가지 꼬이는 게 많은데?
광마 이천웅은 아직 차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물론, 회귀자들이 알 수 없는 정보였기에 예전에 검성과 천마를 속일 수 있었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줘야 한다?
여러 개로 나뉜 차원에 관한 설명을 하려니 조금 복잡하다.
너는 4무림계의 무인이고, 창표가 활동하던 곳은 8무림계다. 이렇게 설명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 그렇습니까? 원래 있던 차원이 다르니 제가 모를 수밖에 없었군요. 껄껄껄.’
이런 반응이 나올까? 아니면
‘대협. 그게 뭡니까? 차원이라뇨?’
이런 반응이 나올까?
당연히 후자의 반응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그것을 설명하려면 본 차원인 1무림계와 다른 무림계와의 관계까지 설명해야 하니 더욱 골치가 아파진다.
이럴 때는 얼버무리는 게 상책.
창표가 신선인 것을 이용해 조금 양념을 치면 어물쩍 넘어갈 수 있겠지.
입술에 살짝 침을 바른 뒤 천웅이에게 말을 건넸다.
“음… 신선이 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원시천존의 힘이 개입해서 절대자가 있었다는 걸 지워버리는 거지.”
“허어?”
“즉, 네가 기억하고 있는 절대자들은 모두 진짜 절대자들보다 한 수 아니 두 수 이상 밀리던 애들이라는 뜻이야.”
“대협. 그렇다면 저는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응? 그거야 너는 꽤 오랫동안 기억되겠지.”
“…그렇군요. 천외천(天外天)이라… 저와 독고구패는 정중지와(井中之蛙)와 같은 존재들이었군요.”
자신과 이미 사라진 독고구패를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았다고 치부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녀석이 다시 말을 마저 이었다.
“창표라는 선배님께는 제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소천이를 납치해간 그자처럼 말입니다.”
“그게 벽을 깨부순 자와 벽 앞에서 서성이는 자의 차이지.”
“현경의 벽 위에도 벽이 있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말했잖아. 무인 대부분은 그 벽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해서 벽 앞에서 서성인다고.”
무림인의 기준에서 화경의 벽은 거대하다.
대부분 무인이 평생 수련을 해도 화경이라는 벽을 만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것이 태반이니까.
그러한 화경의 벽을 깨부수면 현경이라는 더욱 거대한 벽이 나타난다.
화경의 경지가 고양이가 쥐구멍을 통과하는 정도의 난이도라면 현경의 벽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난이도에 가까웠으니 그 벽을 깨부순 무인들은 대부분 생각한다.
모든 벽을 깨부수고 무상(無上)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이다.
그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거대한 벽을 바라보지 못하면서 말이다.
너무 거대한 벽은 그것이 벽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으니까 당연하겠지만 말이다.
이천웅도 딱 그 벽에 막혀있는 상태.
벽에 막혔지만, 그것이 벽인지 모르는 상태에 가까웠다.
조금 나중 일이지만, 수많은 방법으로 그 벽을 깨려는 자들이 등장했다.
내공을 끝없이 늘리려는 방법을 선택한 놈들이 만든 흡성대법이라던가,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이 나타났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중 일부는 깨달음에 해답이 있다면서 도를 닦으러 갔고 그들이 결국 벽을 깨고 등선을 하게 되면서 현경 이후의 경지를 개척한 자들은 신선이 되었다.
창표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특이한 녀석이었다.
어릴 때 인신매매를 당해 일회용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하급 살수로 키워졌지만 악착같이 살아남아 결국에는 마음만 먹으면 황제의 목이라고 해도 차 한 잔 마시는 사이에 따올 수 있는 절대 살수의 위치에 올랐다.
무지막지한 그의 살인 감각과 한계를 모르는 능력에 두려움을 느낀 정파와 사파 그리고 그를 키운 마교의 무림인들이 그를 함정에 빠트려 협공했을 때도 그는 모든 무림인을 척살하고 살아남았다.
하나, 그의 마지막 칼날에 목숨을 잃은 이는 바로 그의 아내였고,
그녀가 마교에서 최후에 배신하기 위해 심어둔 첩자라는 것을 깨닫자 무감정하던 그의 마음에 균열이 일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마교가 심어둔 첩자는 점차 창표에게 마음을 내주었고, 결국 오창표를 배신하지 못했다.
아이를 볼모로 잡아 어쩔 수 없이 오창표를 척살하기 위해 떠났던 그녀가 남긴 유언을 들은 오창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마교로 가 그녀의 진혼제를 펼쳤다.
결국, 혼자 힘으로 마교를 멸망시킨 오창표가 죽은 자신 딸의 시신을 껴안고는 슬픔에 빠져 자결을 하려던 아니, 했던 창표는 깨달음을 얻어 반로환동을 하게 되어 살아남았고 원시천존의 명에 의해 살선으로 등선한 것.
그 후 녀석은 가장 현명하고 오래된 신선인 광철 할배 밑에서 인간성을 되찾는 수련을 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녀석도 참 기구한 인생이네…….
어째 내 주변에는 이런 녀석들만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하긴, 회귀자라는 녀석들은 모두 가슴 깊은 곳에 못다 이룬 한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창표: 이르카 님. 이거 운남으로 가야겠는데요?]
[이르카: 운남? 그렇게 멀리 있다고?]
[창표: 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이르카: 응? 뭐가 이상한데?]
[창표: 표적이 하나밖에 없어요.]
[이르카: 설마 죽은 건……?]
[창표: 아뇨, 제가 찾은 건 생기(生氣)예요. 말씀하신 한정룡이라는 아이는 살아있어요. 제가 찾은 것은 녀석의 생기를 찾은 것이니까요.]
하긴, 지금처럼 하계에 내려와 힘이 제한된 상황에서 생기를 읽는 능력은 창표가 나보다 훨씬 뛰어나니 녀석의 말이라면 틀림없을 터.
한정룡은 분명히 운남에 살아있다.
그런데, 녀석을 납치해간 녀석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설마 함정인가?
아니, 표적을 감시하지도 않으면서 함정을 파는 바보는 없다.
약물을 먹여서 잠재웠을 가능성도 있지만, 확률은 희박했다.
아무리 화경의 벽도 뚫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한정룡은 무인.
몸에 있는 기 덕분에 독에 대한 내성이 일반인들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기껏 납치해놓고 그런 그가 언제 깨어날 줄 알고 내버려 둔다는 말인가?
의문투성이인 납치.
납치범의 목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별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꼬리를 뺄 수는 없잖아?
일단 가봐야 녀석이 원하는 게 뭔지 확실히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천웅아 가자.”
“찾았습니까?!”
“그래. 운남에 있다네.”
“운남 말입니까? 그 짧은 시간에 어찌…….”
“그러게, 날아가지 않는 이상 그렇게 빨리는…….”
어?
잠깐만, 날아가?
아니지, 이건 너무 억측이다.
꼭 날아가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막말로 창표가 쓰는 축지법처럼 땅을 접어서 갈 수도 있으니까.
하긴, 무림계에서는 오히려 축지법을 쓰고 갔다는 것이 더 현실성이 있다.
내가 요즘 너무 예민해져 있는 걸까?
나와 비슷한 기운을 풍기는 자라는 이천웅의 말을 들었을 때도 올림포스의 빌어먹을 놈들을 떠올리기보다 같은 드래곤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았던가?
요즘 쓸데없는 고민이 너무 많아져서 이런 것이겠지.
그때, 창문 너머에서 창표의 목소리가 날아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르카 님. 지금 출발하실까요?”
“아, 창표 왔니?”
“네, 그런데 운남까지 어떻게 가실 것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텔레포트?”
“에이, 여기는 금지되어 있잖아요. 중원인들이 그런 마법을 보면 깜짝 놀란다고요.”
“쯧, 귀찮게 되었네. 창표야. 너 땅 접을 수 있지?”
“음… 접을 수야 있죠.”
“접을 수야 있죠?”
뭔가 부정적으로 들리는데?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걸까?
그때 창표가 턱짓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이천웅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쟤가 못 따라와요.”
“아, 그러네.”
신선이나 쓸 수 있는 축지법은 평범한 인간이 못 따라온다는 걸 잠시 까먹었다.
이천웅을 어찌해야 할까?
아, 어차피 천웅이는 있으나 없으나 도움이 안 되잖아?
재빨리 마법 보따리를 풀어 상점창을 열었다.
[스킬북][천마군림보][SS]: 50,000P
.
.
[소모품][대환단][S]: 15,000P
으… 포인트 아까워 죽겠네.
아니지, 포인트에 연연할 때는 아니잖아?
그리고 어차피 이걸 녀석 혼자 먹고 죽을 건 아니다.
녀석이 먼저 배워두고 한정룡에게 가르쳐주면 그리 상관없는 일이 되는 것 아니던가?
천웅이를 통해 얻은 포인트가 훨씬 많으니까 재투자라고 생각해야지.
그나마 속이 덜 쓰리겠지.
무림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이고 빠른 경공이라는 천마군림보와 녀석의 기가 떨어질 때 먹을 대환단 세 개를 사들인 뒤.
이천웅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너는 이걸 보면 바로 익힐 수 있을 거다. 이거 쓰면서 운남으로 따라와라. 뭐, 네가 왔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나 있겠지만… 그리고 오다가 기력 떨어지면 이거 먹고.”
“이, 이건 대환단 아닙니까?”
“응, 비싼 거니까 쪼개서 먹어.”
“감사합니다. 대협.”
“기력을 회복하는 데는 조금만 먹어도 효과가 좋으니까 하나만 쪼개 먹어.”
“…네. 대협.”
십만 포인트면… 집무실도 화사하게 바꾸고 눕기만 하면 삐걱대는 침대도 괜찮은 녀석으로 바꿀 수 있을 텐데.
아니지, 마리랑 안젤라를 위해서 부엌부터 바꿔줄 수 있을 텐데… 이번에 좀 바꿔줄까?
잡다한 상념에 빠져있을 때.
조심스러운 이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대협?”
“응?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손에 쥔 걸 아직 주시지 않으셔서 말입니다.”
“아?”
그제야 내 손이 천마군림보와 대환단을 놓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헛기침하며 녀석에게 스킬북과 대환단을 건네준 뒤.
창표를 따라 한정룡과 납치범이 기다리고 있을 운남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