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를 관리하는 법-103화 (103/121)

103화

제3천계 올림포스.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화로가 비추는 장소에는 두 명의 사내가 상반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얀 수염을 굵게 기르고 있는 제우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고도 심각했지만,

한쪽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가린 안대를 한 의문의 사내의 표정은 오묘했다.

한쪽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말려 올라가서일까?

얼핏 보면 웃고 있는 표정과도 비슷한 표정을 지은 안대를 찬 사내가 제우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어떻습니까? 제 제안이.”

“흠… 확실히 마음에 드는 제안이오.”

제우스가 그의 제안을 수락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안대 사내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뒤 앞에 놓여 있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간 이르카라는 반신 때문에 얼마나 골치가 아프셨습니까?”

“쯧, 힘으로 누른다면야 못 누를 것도 없지만… 그동안 그 빌어먹을 반신 녀석 때문에 잃은 게 너무 많긴 하구려.”

“훗, 저와 거래하신 걸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꼭 그랬으면 좋겠소. 이번에 녀석을 흔들기 위해 빙의부와 거래를 한 것부터 당신과 계약을 한 것까지 포함하면 지출이 너무 크니 말이오.”

제우스가 빙의부와 거래해 길가메시를 보낸 일을 언급하자 안대 사내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곧 고개를 갸우뚱거린 안대 사내가 제우스에게 자신이 생각한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건넸다.

“음? 올림포스는 꽤 부유한 신계에 포함되지 않습니까?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뭐, 차고 넘칠 만큼 풍요롭던 예전과 비교하면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었소.”

“호오, 그렇군요. 하긴, 이번에 헤라클레스가 이탈을…….”

안대 사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올림포스를 이탈한 헤라클레스라는 말을 들은 제우스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

이내 제우스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안대 사내가 손을 좌우로 내저으며 다시 말을 건넸다.

“제가 실언을 했군요.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뭐, 든 자리는 티가 나지 않아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하지 않소.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렇소.”

위대한 영웅이자 제 아들인 헤라클레스가 있을 때는 그의 자리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떠나고 난 자리를 바라보는 제우스의 마음은 공허했다.

그 어떤 미녀를 안아도.

상위 신의 자리에 오른 다른 자녀들이 질 좋은 신물을 선물해도.

그 누구도 묵묵히 충언을 바치며 제 일을 해내던 헤라클레스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던 것.

헤라클레스가 보고하러 올 때 항상 서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 제우스의 얼굴에 씁쓸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떠나보내면 안 되었거늘…….’

표정의 변화를 일으킨 제우스를 한쪽밖에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안대 사내가 그에게 말을 꺼내기 전.

갑작스레 씰룩이던 제우스의 입술이 열렸다.

“지구의 놀이인 체스를 아시오?”

“체스 말입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호오? 즐겨 하시오?”

“아뇨. 그냥 말만 구분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안대 사내는 대답을 마친 뒤.

제우스가 왜 지구의 보드게임인 체스 얘기를 꺼냈을까 생각했다.

딱-!

사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제우스가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자 사내와 제우스와 마주 보고 앉아있던 탁자에 체스판과 백과 흑으로 이뤄진 각양각색의 말이 생겨났다.

뜬금없이 나타난 체스판을 물끄러미 바라본 사내가 고개를 들며 자신 없다는 목소리로 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한 수 가르침을 내려주시려는 겁니까?”

“아니오.”

“그렇다면? 이건 왜……?”

사내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제우스를 다시 바라봤다.

체스를 두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왜 체스판을 소환했을까?

그때 제우스가 체스판 위에 있던 폰을 앞으로 옮기며 혼잣말을 하듯 말을 꺼냈다.

“이건 폰이라고 하는 졸병이오. 졸병답게 가장 수가 많소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제우스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말을 움직이더니 말을 꺼냈다.

“이건 뭔지 아시오?”

“나이트 아닙니까?”

“호오, 잘 알고 있구려. 그러면 이것도 뭔지 아시겠구려.”

사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제우스가 손에 들어 올린 것은 바로 자신의 킹이었다.

킹을 힐끔 바라본 사내가 조금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킹 아닙니까?”

“껄껄! 맞소이다.”

“체스 말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래서 말하는 거요.”

“네?”

제우스는 말을 마치더니 사내가 앉아있는 쪽에 있던 백색의 폰을 자신의 흑색 나이트로 때려 부수더니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4지구에 보낸 버러지들은 폰. 이렇게 쉽게 부서지는 거라오.”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을 말씀하신 겁니까?”

“그렇소. 그리고…….”

말을 이리저리 만지던 제우스가 백색의 킹을 만지작거리더니 자신의 흑색 나이트를 부쉈다.

“이것이 헤라클레스요.”

“...허어.”

사내는 장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 헤라클레스를 장기 말로 취급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은 사내를 바라본 제우스가 킹을 제외한 백색과 흑색의 모든 말을 부수더니 백색의 킹을 손에 쥐고는 스산한 눈빛으로 킹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체스란 말이오. 킹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오.”

“그게 이르카입니까?”

“훗.”

까드득-!

입가에 미소를 지은 제우스가 이내 손에 쥔 백색의 킹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제우스가 백색의 킹을 부수고 난 뒤.

체스판에는 흑색의 킹만 오롯이 서 있을 뿐.

그 아무것도 서 있지 않았다.

그때 제우스가 체스판에 입김을 불어 넣자.

가루로 만들었던 모든 체스 말들이 복구되었다.

신기에 가까운 장면을 보여준 제우스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그대를 지켜보겠소. 킹의 멱을 딸 유용한 말이 될지, 가장 먼저 부서질 폰이 될지 말이오.”

“재밌군요.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음?”

“폰은 가장 먼저 사라지는 병사지만, 그렇기에 숫자가 가장 많죠. 거기다가. 그 폰이 끝까지 가면 킹을 제외한 모든 말로 변할 수 있죠.”

쉽게 이용하는 장기 말이 되지 않겠다는 표현에 제우스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확실히 거대한 제안을 해온 사내인 만큼 그 배포 또한 크다는 것을 느낀 제우스가 고개를 끄덕일 때.

사내가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거리더니 폰을 만지작거리며 재차 말을 건넸다.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 킹이지만, 가장 강한 것은 퀸입니다.”

“허허, 재밌구려. 기대하겠소.”

말을 마친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일어날 때.

체스판을 정리하던 제우스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사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대쯤 되는 신이라면 그까짓 눈을 긁힌 상처 따위는 신력을 이용해 복구할 수 있는 것 아니오? 지혜를 얻자고 눈을 바친 멍청한 옆 동네 노인네도 아니고 말이오.”

지혜를 구하기 위해 눈을 바친 아스가르드의 주신 오딘을 멍청한 옆 동네 노인네 취급하는 자신감을 내비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안대 사내가 자신의 눈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상처를 만지작거리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빚을 좀 진 게 있어서 말입니다. 지구의 놀이를 가르쳐 주셨으니 저도 사자성어를 하나 말씀드리죠.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동양의 속담을 아신다면, 이건 제게 곰의 쓸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호오? 그대쯤 되는 신에게 그런 상처를 준 자가 누군지 궁금하구려.”

“뭐, 이미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살펴 가시오.”

“그럼 이만.”

제우스의 신전에서 빠져나온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손에 하얀 담배가 생겨났다.

불이 피어오른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려 불을 붙인 그가 폐부를 찌르는 하얀 연기를 들이마실 때.

스르륵-

그의 뒤에 흑발의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여인이 나타나 말을 건넸다.

“또 지구의 담배라는 물건을 즐기십니까?”

“그래. 이 담배라는 게 내가 이르카 녀석을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꽤 맛 들였지 뭐야.”

“그런데 라스티아 님, 왜 제우스에게 헤스티아가 이르카시우스에게 도움을 준 사실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된 일일까?

여인은 놀랍게도 이르카 아니, 이르카시우스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이제는 잊힌 이름이었어야 할 이르카의 이름을 들은 안대 사내 라스티아는 혀를 끌끌 차며 여인에게 대답했다.

“쯧쯧, 에루실라도 아직 멀었어.”

“죄송합니다.”

“이거 참, 그렇게 딱딱하게 대답하지 말라니까? 같이 지낸 세월이…….”

“응.”

“응? 아무리 그래도 반말은 하지 말자.”

“알겠습니다.”

“…….”

살짝 황당한 표정을 지은 라스티아가 흑발의 여인 에루실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곧 어이가 없다는 듯 입가에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우리도 카드 몇 개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잖아? 그래야 이용하고 버리지.”

“바싸고처럼 말입니까?”

“그래. 뭐, 그 정도면 일회용치고는 잘 써먹은 거 아냐?”

놀랍게도 그동안 이르카와 그가 관리하는 회귀자들을 꾸준히 괴롭혔던 바싸고의 이름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하늘을 슬쩍 올려다본 라스티아가 생글생글 웃고 있던 표정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히며 중얼거렸다.

“녀석을 다시 만날 시간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저도 기대되는군요.”

“그래. 이제 만나봐야 하는 녀석의 이름이 뭐였지?”

“빙의부의 베르미우스라는 자입니다. 성격이 조금 폭급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뭐, 두들겨 패면 알아서 말을 듣겠지. 귀찮으면 소멸시켜 버리고.”

“그건 곤란합니다.”

“응? 왜? 그런 놈 하나 없애는 건 쉽잖아?”

“뒤처리하기 귀찮습니다.”

“그래…….”

말을 마친 라스티아와 에루실라의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맴돌았다.

* * *

갑작스럽게 나타난 헤스티아가 사라지고 난 뒤.

요한에게 다른 늑대인간들과 뱀파이어들이 위험하다고 말을 건네줬다.

길가메시 아니, 제우스의 사악한 계획을 말해주자 요한이 다급하게 길을 나선 것.

할파스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노출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요한에게는 유다가 있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시조인 그가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합성 실험체에 들어가 있는 길가메시보다는 다른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을 빨리 찾을 터.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하나.

그동안 길가메시의 약점을 공략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때였다.

우당탕-!

뭔가 크게 엎어지는 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온 것.

무슨 일 있나?

그때 화를 꾹 참은 것 같은 안젤라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리! 제가 튀김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미, 미안! 치킨이 너무 먹고 싶었어…….”

“에휴, 저한테 말씀하시라니까요? 그리고 닭털도 안 뽑고 그대로 넣으면 어떻게 해요!”

“지, 징그럽게 어떻게 털을 뽑아!”

“다음부터 주방 출입 금지에요.”

“너, 너무해!”

배고프다며 칭얼대던 마리가 사고를 친 모양.

곧 안젤라에게 쫓겨난 마리가 투덜거리며 나오더니 회귀자들이 나오는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왔다.

“쳇! 내가 다시는 요리하나 봐라!”

“응, 하지 말렴. 그게 안젤라를 도와주는 일이란다. 너는 안젤라가 고생하게 만들지만 않아도 할 일 한 거야.”

말을 마치고 화면을 다시 바라보고 있을 때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보나 마나 마리가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겠지.

철없는 마리에게 한 소리를 하기 위해 등을 돌리자 의외로 화난 표정이 아닌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의 귀여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렇게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냐?”

“응? 그게 이상해서…….”

“뭐가 이상한데?”

“너랑 안젤라랑 사귀는 사이야?”

“아니.”

“그럼 결혼한 사이?”

“아닌데?”

“뭔가 이상한데… 너 그러면 안젤라가 그냥 비서일 뿐이야?”

“아니, 절대 아니지. 내겐 둘도 없이 소중하지.”

입을 쩍 벌린 마리가 고개를 세차게 젓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 뭐야. 안젤라도 네가 제일 소중하다고 했는데 너희 이상해.”

“이상할 게 있나?”

“아니, 보통은 그러면 둘이 결혼을 하거나 뭘 하거나 하는 거 아냐?”

“내가 지은 죄가 많아서 그래…….”

“응?”

“내가 옛날에 아주 큰 죄를 지었거든? 그걸 다 갚기 전까지는 난 행복하면 안 되는 놈이야.”

“무슨 일이었는데?”

“말하면 안 되는 일이야.”

“야! 난 네 신력으로 다시 태어났어. 네가 말하지 말라고 하면 난 아무한테도 말 못 해. 그러니까 말해줘! 네가 말해줄 때까지 따라다닌다?”

확실히. 마리가 옆에서 쫑알거리면서 따라다니면 귀찮긴 하겠네.

또 앞으로 아빠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도 그녀의 입에 조금 강제력이 있었지만, 끝까지 지킨 것을 확인했으니…….

“잘 들어. 내가 관리자 일을 하기 전 이야기야.”

과거편: 달빛 아래에서 춤을 (1)

거대한 홀.

거대한 홀에 어울리는 거대한 황좌에 앉아있는 남자는 찬란한 밝은 금발과 루비보다 신비로운 붉은 눈동자를 가진 중년의 사내였다.

하지만 한쪽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중년 사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의 앞에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서로 날카롭게 날이 선 열변을 토로하고 있었기 때문.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바스타 남작의 영지에서 벌어진 쟁탈전에서 남작을 사망케 하다뇨! 이건 중대한 귀족법 위반입니다!”

“허어, 바스타 그 친구가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은 걸 가지고 왜 슈테그 남작의 잘못이라고 하는 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칼스테인 공작님! 눈먼 화살이 최후방에 있던 바스타 남작의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을 수 있습니까?”

“벼락을 맞아 죽는 인간도 있는데 눈먼 화살이 정확하게 날아올 확률이 더 높지 않겠소?”

“궤변입니다! 아무튼, 이번 영지 전에서 상대 귀족에게 피해를 준 슈테그 남작에게 모든 피해를 보상하게 하고 또한 슈테그 남작의 영지는 몰수해야 합니다!”

“영지 전을 건 것은 바스타 남작 아니오? 엄밀히 따지자면 바스타 남작이 자신의 수하들을 암흑가의 일원처럼 속여서 보냈잖소?”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오. 눈먼 화살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잖소?”

젊은 귀족과 늙은 귀족이 서로 잘못이 없다며 열변을 토로하는 장면을 지켜본 금발 사내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이내 지루한 듯 그가 하품을 길게 할 때.

옆에서 기둥처럼 꼿꼿하게 서 있던 은발의 사내가 금발의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을 건넸다.

“폐하. 체통을 지키시지요.”

“…알겠소.”

“네, 지금은 회의 시간이잖습니까? 수많은 대신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은발의 사내의 말에 앞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대신을 바라본 금발의 사내가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리더니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크게 외쳤다.

“회의는 끝나셨소?!”

“네? 폐하 이제 시작이옵니다.”

“그렇소? 흠, 그런데 내 가만히 들어보니 바스타 남작이 먼저 슈테인 남작에게 시비를 걸었다고 하지 않으셨소?”

금발 사내의 질문에 젊은 귀족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또한…….”

“아아, 내 말은 아직 안 끝났소. 그리고 홀랜드 공작의 말을 들어보니 바스타 공작을 사망케 한 화살은 눈먼 화살일 수도 있는 것 아니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폐하.”

이번에는 홀랜드 공작이라 불린 늙은 귀족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반대로 젊은 귀족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말이다.

“흠, 이거 참 쉬운 일 아니오? 고의가 아니더라도 실수를 저질렀으니 벌을 받아야 하는 게 정상. 슈테인 남작의 영지를 몰수하고 사망한 바스타 남작의 식솔들은 모두 황도로 올라오면 되는 일 아니오?”

“그, 그게 무슨…….”

“이, 이르카시우스 폐하!”

젊은 사내 스탈린 공작과 홀란드 공작이 당황하며 황제 이르카시우스의 이름을 불렀을 때.

이르카시우스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재차 말을 꺼냈다.

“두 진영의 싸움이잖소? 그중 스테인 남작령과 바스타 남작령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영토들 아니오? 그간 그 영지를 차지하려고 그대들이 벌인 짓들을 내가 다시 설명해드리면 되는 거요?”

“…….”

싸늘한 이르카시우스의 말에 두 귀족의 입은 마치 꿀이라도 바른 듯 굳게 다물어졌다.

“이제 중요한 사안은 끝난 것 같으니 다른 일은 루데린이 처리할 것이오.”

“이, 이르카시우스 폐하! 어디 가십니까?”

“그걸 내가 그대들에게 보고해야 하오?”

“…….”

나는 보고하는 위치가 아닌 보고를 받는 위치라는 뜻이 담긴 말을 내뱉은 이르카시우스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 마치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짓더니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르카시우스가 사라지고 휑한 황자를 물끄러미 바라본 은발의 사내 루데린이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대신들에게 말했다.

“급한 일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시지요.”

진중한 루데린의 목소리를 들은 대신들이 이르카시우스가 이번에는 투명화 마법을 써서 자신의 뒷담을 하나 지켜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나둘 불만을 토로했다.

“폐하께서 아무리 이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지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허허,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리기 전에 이런 결정을 내리시다니…….”

“매번 이러니, 이럴 거면 왜 정기회의를 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이건 직접 루데린 경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때였다.

두 눈을 감고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루데린이 눈을 뜨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대신들을 훑어보며 말을 건넸다.

“말씀들은 다 나누셨습니까?”

“커흠! 이거 미안하오… 답답한 마음에…….”

“괜찮습니다. 허먼 공작님.”

“뭐, 우리 영지는 별일…….”

헛기침을 내뱉은 허먼 공작이 말을 마치기 전.

루데린이 들고 있던 서류를 뒤적이더니 공작의 말을 끊었다.

“별일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소.”

별일 없다는 보고를 하려던 허먼 공작은 자기 아들이 친 사고가 벌써 루데린의 귀에 들어갔나 살짝 긴장했다.

아무리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를 지닌 허먼 공작의 3공자는 소문난 망나니였다.

게다가 이번에 친 사고는 꽤 큰 사고였기 때문.

바로 암흑가에 몸담은 이들이나 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피폐하게 하는 마약을 만들고 인신매매를 일삼은 그를 혼내고 다급하게 수습하기는 했지만 벌써 루데린의 귀에 들어갔나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루데린이 서류를 뒤적이더니 허먼 공작에게 말을 건넸다.

“세금이 8% 정도 감소했군요. 허먼 공작님의 영지에서 8%라면 꽤 큰 타격이 있었다는 뜻인데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허먼 공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세금이 줄어든 것을 지적한 것.

그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더니 루데린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 일 말이오? 쯧, 이번에 병충해가 들어서 본인도 조금 골치가 아프다오.”

“좋은 약이 있는데 드릴까요?”

“호오? 그런 약이 있소? 그럼 감사히 받겠소이다.”

“세피르 광장에 가면 좋은 약이 있을 겁니다. 가는 길에 들르시지요.”

“응? 세피르 광장은 창고가 아니잖소.”

“셀루스 경에게 준비해놓으라고 말해놨습니다.”

“이거, 감사히 받겠소이다.”

허먼 공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설 때.

루데린의 눈빛이 그가 한참 동안 뒤적이던 서류에 닿았다.

서류의 제목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슈타인바이저 허먼 보고서.

바로, 허먼 공작가 3공자의 이름이 적힌 보고서가 말이다.

차가운 미소를 지은 루데린이 문을 열고 다급하게 나가는 허먼 공작의 뒷모습을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서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뭐, 위로 아들은 두 명이나 더 있으니까 상관없겠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3공자를 잠시 떠올린 루데린이 이내 대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텅 빈 회의실을 둘러보더니 이르카시우스가 애지중지하는 비밀화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려하고도 희귀한 꽃들과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비밀화원의 문을 열자.

어느새 본 모습인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던 이르카시우스가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루데린 고생했어.”

“이르카시우스 님.”

“응?”

“아무리 이르카시우스 님이 용신의 후계자라고 하셔도 이번 시험을 잘 치르셔야 하는 건 아시잖습니까?”

“이 정도면 잘하는 거 아냐? 세상도 한번 구했잖아? 황제가 되라는 용신의 명령도 잘 지켰고.”

이르카시우스의 뻔뻔한 대답에 루데린의 이마에 살짝 힘줄이 돋아났다.

대대로 용신이 될 자를 보필하는 달빛 엘프족의 수장인 루데린은 차오르는 화를 삭이며 태평하게 누워있는 이르카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용신께서 황제가 되라는 것은 세상을 배우고, 인간들을 배우라는 소리입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제게 모든 일을 떠맡기고 놀라는 뜻이 아닙니다.”

“에이, 뭘 관리하는 일은 내 적성에 안 맞는걸? 그리고 앞으로 이런 건 다 루데린이 해줄 거잖아.”

“후, 제가 평생 이르카시우스 님을 보필할 수는 없잖습니까?”

“왜? 내가 용신이 되면 루데린도 보좌신이 되는 거잖아. 그럼 늙어 죽지도 않는데……?”

“훗, 그럴 거면 제 두 딸을 저승으로 보내야 하잖습니까?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는 없답니다. 이르카시우스 님도 황태자님을 먼저 보내기는 싫지 않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겠네. 뭐, 렌델로스 녀석도 신으로 만들어 버리지.”

“아직 힘을 각성하지도 못한 하프 드래곤인데 말입니까?”

“루데린 네가 말했잖아? 자식을 먼저 보내는 부모는 없다며?”

이르카시우스가 인간인 황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황태자 렌델로스의 이름을 언급하자 루데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거부하시더니 결국은 부모 자식 간의 정을 배우셨구나.’

루데린의 얼굴을 힐끔 곁눈질한 이르카시우스가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짓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면 루데린이 아니라 안젤리카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인 안젤리카를 언급하는 이르카시우스의 말에 루데린의 이마에 더욱 굵은 힘줄이 솟아났다.

“설마, 대를 이어서 보필하라는 말입니까? 이르카시우스 님처럼 놀기 좋아하는 분을요? 안젤리카가 이르카시우스 님을 보필하는 일은 절대 안 일어날 겁니다.”

“훗, 루데린. 세상에 절대라는 말은 없어.”

“제가 달빛으로 돌아가더라도 안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그 아이가 이런 고통을 겪게 할 수는 없지요.”

“쳇, 알았어. 아무튼, 그 망나니 놈은 잘 처리했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허먼 공작의 3남을 언급하자 루데린의 표정에 살짝 놀라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알고 계셨습니까?”

“응.”

“이거, 제가 모르는 사이에 또 일하셨군요. 대단하십니다.”

그때.

은발과 에메랄드보다 빛나는 녹안을 자랑하는 루데린의 딸 안젤리카가 비밀화원에 들어오더니 루데린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달려들었다.

“아빠!”

“안젤리카, 지금 이르카시우스 님이랑 대화를 나누고 있잖니. 조금 이따 오려무나.”

“응? 이르카시우스 님하고는 어제도 같이 놀았는데? 그리고 어제 일 하나만 하면 다음부터 아무 때나 오라고 하셨어.”

“뭐? 일?”

“응, 뭐더라? 저번에 이르카시우스 님 타고 놀러 갔을 때 봤던 건데, 뭐더라? 허먼 공작의 3 보고서였나? 그런 거 쓰라고 하시던…….”

순수한 안젤라가 숨김없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화들짝 놀란 이르카시우스가 벌떡 일어나며 안젤리카의 예명을 크게 외쳤다.

“안, 안젤라!”

“저희 대화를 좀 나눠볼까요? 위대한 시공의 드래곤 이르카시우스 님이시여.”

루데린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지켜본 이르카시우스가 이미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서늘한 목소리를 들은 이르카시우스의 이마에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살려줘… 오늘은 데이트 약속이…….”

“훗, 오늘은 서류와 데이트를 하셔야겠습니다.”

이내 울상을 지은 이르카시우스가 루데린에게 끌려갈 때.

안젤리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쳇, 황후보다 내가 더 이쁜데… 에휴, 내 팔자야. 언제쯤 날 봐주시려나.”

이르카시우스가 루데린에게 끌려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본 안젤라의 양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 * *

며칠 뒤.

다시 건장한 중년의 모습으로 변한 이르카시우스가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루데린에게 말을 내뱉었다.

“루데린, 내가 진짜 친정을 나가야 하는 거야?”

“네, 그동안 충분히 쉬셨잖습니까?”

“아니, 그래도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황태자도 출정하는데 나까지 출정하는 게 맞는지 말이야.”

이미 황태자가 전쟁에 출정하는데 자신 또한 출정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이르카의 질문은 당연했다,

그때 루데린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건넸다.

“폐하. 황태자는 아직 힘을 각성하지도 못했습니다. 마계와 이어진 통로를 정리하는 일인데 당연히 뒤따라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놈의 폐하는 무슨… 편하게 대하라니까?”

“진짜 편하게 대합니까?”

“응. 솔직히 루데린이 나를 모신 기간만 생각하면…….”

“그럼 편하게 대합니다?”

“당연하지! 루데린은 내가 헤츨링이던 시절부터 날 가르쳐준 스승이나 마찬가지인데!”

“훗, 역시 안 되겠습니다. 나중에 용신이 되어 승천하실 때 편하게 불러드리죠.”

“그게 뭐야…….”

그때.

피가 범벅이 된 전령이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으며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폐, 폐하! 레, 렌델로스 황태자가 전… 전사했습니다.”

“뭐?!”

과거편: 달빛 아래에서 춤을 (2)

황태자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이르카시우스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화살이 눈앞에 날아오는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표정을 지은 이르카시우스를 바라본 루데린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네려 할 때.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은 이르카시우스가 피칠갑을 한 깨진 갑주를 겨우 몸에 걸치고 있는 전령을 다그치듯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황태자가 일선에서 지휘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전사했다는 말이냐! 네놈의 두 눈으로 똑바로 본 것이 맞느냐?”

“폐하! 황태자 전하를 끝까지 보필하지 못한 죄! 벌하여 주십시오!”

황태자를 지키지 못한 죄를 청한 전령이 고개를 숙이며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자 답답한 표정을 지은 이르카시우스가 전령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사정없이 흔들며 대답을 촉구했다.

“어서, 어서 말해보란 말이다! 황태자가 전사하는 모습을 네놈의 두 눈으로 똑바로 봤냐는 말이다!”

“…보았습니다.”

힘겹게 입을 연 전령이 황태자가 전사하는 모습을 봤다고 대답하자 이르카시우스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루데린의 심정은 복잡했다.

비록 이르카시우스가 용신이 되기 위한 시험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이르카시우스는 처음으로 자녀를 얻었고 그 아이를 무척이나 아꼈으니까.

아직까지 힘을 각성하지 못한 아들을 매일 손수 지도할 만큼 각별하게 아끼지 않았던가?

나중에 용신이 된다면 같이 승천시킬 생각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 감았던 눈을 뜬 이르카시우스가 낮은 목소리로 전령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전선은 어떠하냐?”

“……?”

“꿀이라도 먹은 것이더냐? 전선은 어떻냐는 말이다. 황태자가 전사하는 모습을 네 두 눈으로 봤다면 전선은 심각한 상황 아니겠느냐? 제2 근위 기사단이 이 정도로 밀렸다면 말이다.”

“……!”

제2 근위 기사단원 에피로트의 얼굴에 놀란 감정이 떠올랐다.

아들을 잃은 아비가 어떻게 이렇게 냉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방금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보고를 듣고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내가 직접 갈 터이니, 너는 상처를 치료하고 장비를 점검하도록 하라.”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를 끝까지 보필하지 못한 죄. 제 목숨으로 씻겠습니다.”

“그러면 그러도록 하라.”

“충!”

가운데 가슴에 주먹을 부딪치며 경례를 한 에피로트가 몸을 숙이고 있는 모습을 잠시 지켜본 이르카시우스가 그대로 대전을 나섰다.

다급하게 자신이 아끼던 검 명월(明月)을 챙긴 루데린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이르카시우스의 뒤를 따라가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괜찮으십니까?”

“…….”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이르카시우스가 그저 굳건히 걸음을 내디디고 있자 루데린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

옆에서 이르카시우스의 얼굴은 본 루데린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냉기가 풀풀 흐를 정도로 차가운 눈빛.

건드리면 베일 것 같은 자욱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이르카시우스를 바라본 루데린이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폐하…….”

“스승님. 나 오늘 미칠 거 같거든? 며칠 전에 말한 게 뭔지 알았어. 자식은 절대 먼저 보내는 게 아니네.”

“…이르카시우스 님.”

“스승님. 나 오늘 조금 미쳐도 괜찮아?”

이르카시우스의 말에 기묘한 허허로운 웃음을 지은 루데린이 허리춤에 찬 자신의 애검 명월을 슬쩍 바라보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오늘은 같이 미쳐 드리죠.”

“고마워.”

* * *

마계와 이어진 제5 통로.

시산혈해(屍山血海)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은 아수라장을 바라본 마계의 군단장 레나토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창과 검, 그리고 도끼와 같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뜨거운 불에서 태어나 차갑게 식은 철로 인해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인간의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본 레나토는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옆에 서 있던 부군단장 주르고에게 질문을 건넸다.

“오늘 쟤들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지 않아?”

“단순한 소모전만 하려고 하는 거 아닐까요?”

“단순한 건 네 머리고.”

“저보다는 군단장님이 더 단순 무식하시죠.”

“인제 그만 숨 쉬고 싶냐?”

“아뇨.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대답한 주르고를 향해 레나토가 주먹을 잠시 들어 올렸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내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흠, 이거 진짜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 그렇게 이상하신데요? 그냥 우리 애들이 오늘 온 인간 놈들보다 잘 싸우는 거죠.”

“우리 역할이 뭐냐?”

“제가 그것도 까먹었을까요? 주기적으로 인간계를 침략해 절망의 기운을 가져가는 역활을 맡은 거잖아요.”

“…역활이 아니라 역할 아니냐?”

“뭘 그렇게 따지십니까? 그게 그거죠.”

“무식한 새끼.”

퍽-!

결국, 매를 번 주고로가 레나토에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았다.

붉게 부어오른 머리를 손으로 비비던 주고로가 ‘맨날 머리를 때리니 머리가 나빠지지’라며 투덜거릴 때.

레나토가 손으로 턱을 긁으며 재차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상해. 우리는 솔직히 대충 마을 몇 개 약탈하고 도망가잖아? 게다가 약탈하는 마을도 다 죄수들을 가둬 놓은 곳이고… 저놈들하고 전면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저놈들도 요즘에는 알아서 대충 싸우는 척만 하잖아?”

“뭐, 오늘 저놈들 싸우는 게 좀 어수선하긴 했어요. 그리고 솔직히 저희가 인간들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건 아니잖아요.”

주고로의 말대로 마계에서도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 이 세상이 아니라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계의 일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절망의 기운이었고, 그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나왔으니 그들도 살기 위해 주기적으로 나오는 것이었고 인간과의 전투는 최대한 피해 왔으니까.

주고로의 말을 들은 레나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그건 그렇지, 그 괴물이 있어서 도망가는 거니까 나이젤트르스 대마왕님을 죽인…….”

그때 레나토는 어디선가 다가오는 거대하고도 흉폭한 기운을 느끼고는 이마에서 싸늘하게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가장 인간계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인물이 나타난 것.

바로, 3차 마계 전쟁에서 마계의 6 군주 중 한 명인 대마왕 나이젤트르스를 죽인 인물이자, 현 제국의 황제인 이르카시우스의 기운이었으니까.

온몸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짙은 살기를 뿜으며 다가오는 금빛 적안의 사내를 바라본 레나토가 마른침을 삼키며 주고로에게 말을 건넸다.

“이런 씨… 난리 났네.”

“에이 씨, 똥 밟았네.”

이르카시우스가 온 이상 도주는 불가하다고 생각한 레나토와 주고로는 서로 눈을 맞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도망쳐라!”

“튀어!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어!”

둘이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마계의 일원들을 살리기로 마음먹은 그들이 말을 내뱉고 고개를 다시 돌린 순간.

핏빛보다 붉은 눈동자를 빛낸 이르카시우스가 피식 웃으며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 안녕?”

“반갑다. 마계의 버러지들아.”

“……!”

자신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레나토가 마치 저항하듯 길게 돋아난 검은 손톱을 이르카시우스에게 휘둘렀다.

챙-!

레나토의 두 눈에 경악스러운 빛이 서렸다.

강철도 무를 베듯 쉽게 자르는 자신의 손톱과 맨살과 분명한 팔뚝이 부딪치는 소리라고 믿기 힘든 쇳소리가 들려왔기 때문.

공격을 너무 쉽사리 막아낸 이르카시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히죽 웃자 격차를 실감한 레나토의 머릿속에 둘이 덤벼봤자 개죽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재차 손톱을 열심히 휘두르며 옆에서 지켜보고 있을 주고로에게 크게 외쳤다.

“주고로! 일원들을 데리고 도망쳐!”

“…….”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의아한 기분을 느낀 레나토가 곁눈질로 주고로를 바라보자 그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내, 주고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은…은발의 악마.”

“…이런 씨발.”

주고로의 말에 고개를 돌린 레나토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온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은발의 악마 루데린의 얼굴이었다.

3차 마계 전쟁에서 이르카시우스 다음으로 수많은 마족을 학살한 증오스러운 엘프 루데린이 기다란 은발을 휘날리며 도망치는 마계의 일원들을 학살하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레나토의 곁에 다가온 이르카시우스가 섬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내가 곱게 보내줄 거로 생각했어?”

레나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싱긋싱긋 웃고 있지만 이르카시우스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터질 것 같은 분노였으니까.

오늘 벌어진 이상한 일과 관련이 있나 생각한 레나토가 죽음을 각오하고 이르카시우스에게 질문을 건넸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저항하지 않는 일원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잖소!”

“응, 아냐. 피의 대가는 치러야지?”

“그대의 병사들이 많이 상한 것은 사실이나 우리도 왜 병사들이 중구난방으로 덤벼오는지 이해가 안 갔다는 말이오!”

“중구난방?”

“그, 그렇소! 원래는 그저 우리가 죄수들의 마을을 약탈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한다는 말이오!”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고개를 주억이는 이르카시우스를 바라본 레나토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분노한 이르카시우스와 대화가 통한 것.

살았다고 생각한 레나토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소!”

“아, 혹시 황태자는 누가 죽였냐?”

“화, 황태자?”

“뭐, 네놈들 중에 한 놈이겠지.”

“황태자라니! 우리가 황태자를 왜 죽인다는 말이오! 미치지 않은 이상…….”

레나토는 미치지 않은 이상 황태자를 죽여 이르카시우스의 분노를 살 이유가 없지 않냐고 말했다.

아니, 말하려고 했다.

‘모, 목소리가 왜……?’

이상하게도 갑작스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

레나토는 의아한 기분으로 자신의 목을 만지려 했지만 이내 어떠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목이 사선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목이 베인지도 모를 정도로 속도로 베인 레나토의 귓가에 이르카시우스의 서늘한 음성이 마지막으로 흘러들어 왔다.

“너만 죽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라. 오늘은 마계를 청소하러 갈 거니까.”

레나토를 처리한 이르카시우스가 피눈물을 흘리며 달려든 주고로의 머리를 한 번에 터트린 뒤.

숨을 크게 들이켜며 루데린이 있는 방향으로 소리쳤다.

“나 이르카시우스 엔카나시온이 명하노니! 인간계에 나온 마족들은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르카시우스의 외침에 루데린을 피해 미친 듯이 도망치던 마계의 일원들의 발걸음이 한순간 돌처럼 굳었다.

놀란 그들이 움직이지 않는 발을 잘라서라도 도망치려 할 때였다.

“모두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재가 되리라.”

이르카시우스의 명령과도 같은 말에 마족들의 몸에서 하나둘 불길이 피어올랐다.

화르륵-!

수많은 마족이 그 자리에서 불타오르는 장소는 마치, 세상을 밝히는 태양처럼 뜨겁고도 마족들의 영혼을 재물로 삼아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불꽃을 피워올렸다.

그때 무표정하게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다가온 루데린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르카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언령 마법은 위험한 힘입니다. 지금처럼 신력을 온전히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룬에 무리가 가니 쓰지 마시길…….”

“스승님. 나 오늘은 조금 미치기로 했잖아. 이대로 마계에 가볼까 하는데…….”

“흠, 마계에 가신다면 따라가겠지만, 이르카시우스 님. 저들이 죽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습니다. 그게 조금 걸리는군요.”

“오늘 병사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는 거 말이야?”

“네, 사실 5 통로는 이제 보낼 죄수도 없고 또 관리하기 힘든 지역이라 폐쇄하기로 결정한 것 아니겠습니까? 황태자…….”

“괜찮아.”

“네, 황태자 전하도 그래서 경험 삼아 보낸 것이었고요.”

“흠, 그래. 그랬었지. 방금 죽은 저놈 표정 보여?”

“음, 뭔가 굉장히 억울한 표정이군요.”

“황태자를 죽일 이유가 없지 않냐고 말하더라고. 뭔가 수상쩍긴 해. 근위 기사단이 뚫릴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면… 저놈들이 그런 변명을 하지도 않았겠지.”

이르카시우스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둘은 서서히 몸을 돌려 후퇴해 재정비 중인 토벌대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파벨 후작은 갑작스레 나타난 이르카시우스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바글바글하던 마족을 말 한마디로 몰살시키는 말 그대로 인간을 초월한 힘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과연 이 괴물을 상대로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까?’

잠시 정신이 팔린 파벨 후작이 재차 마른 침을 삼킬 때.

이르카시우스가 지휘부에 마련되어있는 의자에 떡하니 앉으며 말을 건넸다.

“파벨 후작. 내가 물어볼 것이 있소.”

“하명하시지요.”

“황태자는 어떻게 전사했소?”

“…처음 마족과의 전투는 수월했습니다. 다만, 마족의 수장이 나오자 황태자 전하께서 호승심에 달려들었다가…….”

“근위 기사단은 황태자를 뒤따라간 것이고?”

“그,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근위 기사단에서 생존자는 한 명뿐이었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근위 기사가 보고를 하러 왔다라…….”

근위 기사가 직접 보고를 하러 간 것을 곰곰이 생각한 이르카시우스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릴 때.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파벨 후작이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조심스레 이르카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폐하, 황태자 전하의 시신을 보러 가시겠습니까……?”

“시신은 수습해두었나 보구려.”

“그, 그렇사옵니다.”

“루데린, 내가 먼저 보고 올 테니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줄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파벨 후작의 말을 들은 이르카시우스가 생각했다.

‘뭔가 석연치 않지만, 마계를 가기 전에 렌델로스를 보고 가는 것도 좋겠지… 미안하구나.’

루데린을 힐끔 바라본 이르카시우스가 인간계의 일은 루데린에게 맡겨둬야겠다고 생각하며 파벨 후작의 뒤를 따라갔다.

파벨 후작의 뒤를 따라간 장소에는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환으로 장식된 관이 있었다.

이르카시우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과 똑 닮은 렌델로스의 시신을 바라볼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황태자의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향을 맡자 살짝 머리가 어지러워진 것.

‘이건 헤나프라스 꽃잎?’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눈앞이 어지러워진 이르카시우스는 자신이 바라본 연기가 드래곤마저 정신을 잃게 만들 수 있다는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 정도로 어렵지만, 그 무엇보다 강력한 독화(毒花) 헤나프라스 꽃잎을 태우는 향기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푹-!

차가운 금속에 살이 갈라지는 감촉을 느낀 이르카시우스가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비죽 튀어나온 날카로운 검이 이르카시우스의 룬을 꿰뚫은 것.

입을 통해 검게 죽은 피가 튀어나올 때.

“쿨럭!”

“방심하셨군요.”

이르카시우스의 룬이 아닌 마음에 금이 갔다.

검을 바라본 순간 아닐 것으로 부정했지만.

처음 출정을 나가는 기념으로 선물해준, 자신의 뼈를 빼 갈아 넣어준 용 뼈 소재의 보검이 살을 꿰뚫었지만.

아닐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르카시우스의 기대를 한순간 깨버렸다.

“아버지.”

“…….”

바로 황태자 렌델로스의 목소리였으니까.

과거편: 달빛 아래에서 춤을 (3)

자신의 뼈를 갈아 만든 검에 꿰뚫려 삐걱대는 룬보다.

베어진 살갗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붉은 피보다.

이르카시우스는 죽은 줄 알았던 황태자 렌델로스가 살아서 자신의 몸에 검을 찔러넣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헤나프라스의 연기에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은 이르카시우스는 흐릿한 시야 너머 냉기가 풀풀 흐를 정도로 쌀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렌델로스를 힘겹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왜 이런 짓을 꾸민 것이냐.”

“저는 당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인형이 아닙니다.”

“그… 그게 무슨?”

“세상을 구한 영웅이자 혼자 힘으로 대제국의 황제가 된 당신이라는 존재는 제게 우상이었습니다… 당신이 정체를 숨긴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

이르카시우스는 혼란스러웠다.

렌델로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이 드래곤이라고 말한 적도 없거니와 황후 또한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기 때문.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르카시우스를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본 렌델로스가 재차 말을 이어 건넸다.

“아니, 드래곤이라고 해도 상관없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당신은 제 아버지였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당신이 하는 이 모든 것이 신이 되기 위한 시험이라고 하더군요.”

“쿨럭! 그… 그걸 어떻게 안 것이냐.”

“궁금한 것은 저승에 가서 알아보시죠.”

“그걸 누구한테 들었냐는 말이다! 쿨럭!”

입에서 검붉은 피를 토해낸 이르카시우스가 엎드려서 힘겹게 숨을 몰아쉴 때.

렌델로스가 몸을 수그려 창백해진 이르카시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게 주위를 조금 살피면서 살았어야지.”

“……!”

“당신의 장난으로 만들어진 제국이지만, 나는 이 제국이 탐이 납니다. 이미 사대 공작도 내게 충성을 맹세했고, 당신의 편은 이제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아버지.”

“네… 네놈이!”

다 죽어가던 이르카시우스의 눈에 분노의 불길이 재점화되듯 불타오르자 냉랭했던 렌델로스의 얼굴에 살짝 균열이 갔다.

놀라움 혹은 섬뜩함.

복잡미묘한 감정이 담긴 표정을 지은 채 이르카시우스를 바라보던 렌델로스가 옆에 서 있던 파벨 후작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건넸다.

“검을 주시오.”

“네, 폐하.”

스르릉-!

소름 끼치는 쇳소리와 함께 화려한 검집에서 뽑혀 나온 보라색으로 빛나는 검신을 가진 명검을 손에 쥔 렌델로스가 검을 자신의 머리 위로 추켜올리며 말을 건넸다.

“그럼 잘 가십시오.”

마치 사형집행인이 사형을 집행하듯 검을 내려칠 때.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덜덜 떨리는 몸을 붙잡으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이르카시우스가 마치 유언을 내뱉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 이르카시우스 루트 드위치노바 엔카나시온이 신이 될 자격을 포기하며 당신에게 원하오니…….”

이르카가 중얼거린 말은 충격적이었다.

유언이 아닌 언령 마법의 결정체이자 신의 자리에 오른 자가 창세 신에게 소원을 빌 때 쓰는 절대염원(絶對念願)을 발동시킨 것.

황태자의 검이 이르카시우스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릴 때.

쩡-!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오색 찬란한 빛에 황태자가 손에 쥐고 있던 보라색 검이 산산이 부서졌다.

강력한 충격에 손이 저릿해진 황태자가 이르카시우스에게 뿜어져 나오는 눈이 시리도록 부신 오색 빛을 손으로 가리며 외쳤다.

“큭! 이, 이게 무슨!”

“폐하! 놈이 최후의 저항을 하려나 봅니다! 어서 근위 기사단을 부르십시오!”

렌델로스와 파벨 후작이 강렬한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며 외칠 때.

음산하고도 처연한 이르카시우스의 음성이 그들의 귓가를 때렸다.

“모든 인간을 없애 주십시오.”

“……!”

모든 인간을 없애 달라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이르카시우스가 미쳤다고 판단한 렌델로스가 마치 이죽거리듯 파벨 후작에게 말을 건넸다.

“결국, 미쳤나 보군.”

“…….”

“파벨 후작 듣고 있… 헉!”

그러나 파벨 후작은 대답할 수 없었다.

온몸이 회색으로 변한 파벨 후작의 몸이 마치 재처럼 날리기 시작한 것.

‘서, 설마’

화들짝 놀란 렌델로스가 천막을 찢으며 나서자.

끌고 온 모든 병사의 몸이 재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한 렌델로스의 몸이 두려움에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말이 진짜로 일어난 것.

압도적인 공포에 잠식당한 렌델로스가 도망치려 할 때.

“어딜 그렇게 급하게 도망치는 건가요.”

“…루, 루데린.”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당신은 생각도 못 할 겁니다.”

“사, 살려주시오!”

“저는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죽일 생각이 없다는 루데린의 말에 렌델로스의 얼굴에 잠시 화색이 돌았다.

물론,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말이다.

“당신의 생사여탈 여부를 결정하는 건 제가 아니니까요.”

“……!”

루데린의 말에 화들짝 놀란 렌델로스가 고개를 돌리자 비틀거리며 천막에서 나온 이르카시우스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냈다.

검게 죽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올 때.

가슴을 부여잡은 이르카시우스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렌델로스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너를 장난감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아, 아버지! 제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공작들의 농간에 놀아난 것 같습니다!”

“나는 너를 겁쟁이로 키운 적이 없다.”

“나는 네 목숨을 빼앗지 않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그러니 스스로 목숨을 끊거라.”

“……?!”

자신의 가슴에서 뽑아낸 검을 잠시 바라본 이르카시우스가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은 뒤.

렌델로스에게 던져주며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이런 일을 도모한 것은 아니겠지. 네놈이 그런 겁쟁이라면 어차피 사라졌을 제국이다.”

“…….”

땅에 떨어진 검을 바라보며 몸을 덜덜 떨고만 있는 렌델로스를 물끄러미 바라본 이르카시우스가 피를 한 움큼 토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했단다. 내 손으로 너를 직접 죽이게 하지 말아다오.”

부탁일까, 협박일까?

씁쓸한 표정을 지은 이르카시우스를 잠시 올려다본 렌델로스가 검을 들어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대고는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크큭, 나는 당신을 미워했습니다.”

푸욱-!

말을 마친 렌델로스가 목에 검을 찔러넣고 모로 쓰러져 내리는 장면을 바라본 이르카시우스는 가슴에서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마치 무언가 찢어지고 부서진 느낌.

그의 마음에 공허함과 무력감이 온몸을 감싸왔다.

상처받은 이르카시우스가 두 주먹을 꾹 쥐고 부들부들 떨어댈 때.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침묵한 루데린이 그저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르카시우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두웠던 하늘이 열렸다.

열린 하늘에서는 긴 흑발의 사내가 나타나 몹시 화가 난 표정으로 이르카시우스와 루데린을 바라보더니 곧 입을 열어 신언(神言)을 내뱉었다.

-감히! 내가 관리하는 세계의 인간을 모두 없애다니! 이게 무슨 짓인가! 용신의 후예여!

“제가 판단한 인간은,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기 때문입니다. 관리 신이여.”

-그대가 뭐기에 제멋대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인간을 봤는가? 아니, 인간들과 얼마나 얽혀있었다고 그런 미친 생각을 한 건가!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관리 신은 자신이 사랑하던 인간들을 모조리 없앤 용신의 후예 이르카시우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상위급 신인 용신이 직접 지목한 후예를 직접 건드리는 것은 하급 신인 자신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끓어 오르는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관리 신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은 이르카시우스가 두 팔을 벌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건넸다.

“크큭, 꼭 모든 인간을 다 봐야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아니잖아? 그대는 아직 용신이 아니다! 그러니 언행을…….

“후우, 나 지금 미칠 거 같거든?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둬주면 안 될까? 나중에 죄를 지은 값을 다 치를 테니까…….”

-실로 오만방자하구나. 오늘 그대는 나와 함께 심판부로 가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부탁할게. 아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나를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지금 반쯤 미칠 거 같으니까.”

-불허한다.

관리 신의 단호한 대답에 이르카시우스의 두 눈에 실핏줄이 올라왔다.

극도로 분노한 이르카시우스가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갈아댈 때.

옆에 있던 루데린이 앞에 나서며 관리 신에게 간청했다.

“관리 신이시여. 달빛 엘프족의 수장 루데린입니다. 미천한 제가 감히 당신께 간청을 드리오니, 오늘은 일단 물러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심판부에는 나중에 찾아가 죗값을 치를 테니 오늘은 잠시 이르카시우스가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아량을 베풀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이르카시우스와는 달리 정중한 태도였다.

게다가 직감적으로 이르카시우스의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루데린이 다급하게 말을 건넨 것.

루데린의 간절한 청원을 들은 관리 신이 무언가를 곰곰이 고민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그 내용은…….

-거절한다.

“관, 관리 신이시여!”

-그런 아량을 베풀어 줄 여유가 있어 보이는가? 이런 크나큰 죄를 저지른 죄인을 지금 그대로 참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니라.

“하오나! 이번 일이 벌어진 데는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 없는 일은 없다. 하지만, 사정이 있다고 해서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관리 신의 단호한 태도에 루데린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 때.

루데린의 제지에 옆에 잠시 물러서 있었던 이르카시우스가 핏발선 두 눈으로 관리 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이, 하급 신 나부랭이. 그만 쫑알대고 덤벼. 어차피 그쪽도 나랑 한판 붙고 싶은 거잖아?”

“이르카시우스 님!”

“루데린, 나는 신이 될 자격이 없는 놈이었어. 이제 나 같은 골칫덩이 말고 제대로 된 놈을 만나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여기서 관리 신과 충돌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미안.”

“…….”

미안이라는 짧은 대답에 담긴 많은 말에 루데린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처연한 미소를 지은 이르카시우스가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관리 신을 바라보더니 말을 건넸다.

“내려올래? 아니면 올라갈까? 아니다. 내가 갈게.”

입술을 비틀어 말을 마친 이르카시우스의 몸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파악-!

이내 드래곤의 모습으로 현신한 이르카시우스의 온몸을 뒤덮은 검붉은 비늘과 폭주하듯 넘실거리는 마력이 심장 주변을 맹렬하게 돌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이르카시우스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빠지직-!

드래곤으로 현신하면서 심장 부근에서 뭔가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이르카시우스의 귓가에 크게 울려 퍼졌다.

렌델로스에게 꿰뚫렸던 시공의 룬이 깨져나가기 시작한 것.

‘분명히 복구되었을 텐데!’

갑자기 벌어진 이상 사태에 이르카시우스의 거대한 검붉은 몸체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어금니를 깨문 이르카시우스가 재차 정신을 집중해서 룬을 복구하는 순간.

-어딜 한눈파는 것이냐!

관리 신이 소환한 물의 창이 이르카시우스의 룬을 재차 꿰뚫었다.

<크워어어어어!>

룬이 물의 창에 꿰뚫린 순간.

이르카시우스의 입에서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세상에 울려 퍼졌다.

물의 창을 던지고 난 뒤 휘청이는 이르카시우스의 거대한 몸체를 바라본 관리 신이 용신의 후예가 저렇게 약했나 고민하는 순간.

이르카시우스의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이 줄기줄기 새어 나오더니 이제껏 듣지 못한 스산한 음성이 관리 신의 귓가에 크게 울렸다.

<크르륵! 렌델로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는 말이냐!>

-……?

<크흐흐, 키히힛, 그래. 다 필요 없어. 이 세상도 신도 다 필요 없어. 어?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아니, 나는 누구지? 응? 너는 뭐야.>

횡설수설 대며 이상한 말을 계속해서 내뱉는 이르카시우스를 바라본 루데린이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관리 신에게 외쳤다.

“도망쳐!”

-뭐라?

그때였다.

푸욱-!

기괴한 미소를 지은 이르카시우스가 번개처럼 날아가 거대한 손톱으로 관리 신의 한쪽 눈을 찔렀다.

과거편: 달빛 아래에서 춤을 (4)

이르카시우스가 관리 신을 공격해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던 시각.

천계에 있는 우리엘의 신전에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혼란스러운 지상을 바라보고 있던 우리엘은 뛰어 들어온 천사를 힐끔 바라보더니 질문을 건넸다.

“세피엘, 무슨 일이야?”

“지금 지상에서 용신의 후예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합니다.”

“알아. 나도 보고 있어. 그런데 저긴 우리 소관이 아니잖아? 미카엘 놈은 뭐 하는 거야.”

저런 문제는 우리엘이 수장으로 있는 파괴부가 아닌 미카엘이 수장인 심판부의 일이었다.

그때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세피엘은 미간을 찌푸리고 지상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엘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심판부에서 지원 요청을 해 왔습니다. 지금 심판부는 지구에 출동했다더군요.”

“그래?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요즘 너무 놀았더니 몸이 찌뿌둥하네.”

“네? 메타트론 님에게 받은 근신이 아직 안 풀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같이 가자고 온 게 아닌데요?”

세피엘의 말에 우리엘은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더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아, 고작 행성 몇 개 부순 거 가지고 그 아저씨는 너무한 거 아냐?”

“…부수지 말라는 행성까지 부쉈으니까 그러신 거죠.”

“어쨌든. 그래서 너희들만 가려고?”

“그래야죠. 뭐, 변종 도마뱀 한 마리 잡는 건데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마치 산책하러 나가는 것 같이 편하게 대답한 세피엘을 물끄러미 바라본 우리엘이 다시 시선을 지상으로 돌리더니 그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조심해라. 저건 하급 신의 힘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하다.”

“뭐, 아무리 용신의 후예라고 해도 하급 신 이상의 힘은 없지 않습니까? 그쪽 관리 신이 방심한 거 아닐까요?”

“글쎄… 뭔가 이상해.”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그저 감이기에 확실한 말을 하지 못해 뒷말을 흐린 우리엘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이 섞인 말투로 세피엘에게 말을 건넸다.

“아씨! 나도 같이 가?”

“미치셨습니까? 근신 기간에 지상에 내려가면 힘을 온전히 받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거기다 무단이탈했다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근신 기간이 또 늘어나는데요? 그러면 저희만 죽어라 고생하는 거죠. 그냥 얌전히 지켜보세요.”

“에이 씨! 알았어! 잔소리 좀 그만해라.”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어, 몸조심하고.”

“네, 구경이나 잘 하십쇼.”

“그래.”

우리엘은 다른 파괴 천사들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는 세피엘의 등을 바라보며 어딘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아니겠지.’

자신이 본 것이 착각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 * *

관리 신의 패배.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성혈(聖血)을 온몸에 뒤집어쓴 이르카시우스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발아래 깔린 관리 신을 비웃었다.

<키키킥, 뭐야? 이거 그냥 벌레잖아? 그러면 밟아 죽여야지!>

-크윽… 어, 어떻게 필멸자가 이런 힘을… 커헉!

<어? 버텨? 이래도 버텨?>

자신의 발길질에도 터지지 않은 관리 신을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은 이르카시우스가 발을 들어 올려 그를 짓밟기 시작했다.

쾅! 쾅!

굉음이 울려 퍼지고 관리 신의 입에서 성혈이 미친 듯이 튀어나올 때.

이르카시우스의 폭주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루데린이 재빨리 이르카시우스에게 달려들었다.

난동을 부리고 있는 이르카시우스의 심장 부근에 손을 가졌다 댄 그는 곧 이르카시우스가 왜 폭주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바로, 룬이 손상을 입으며 룬 안에 봉인되어있던 파괴의 본능. 아니, 짐승의 본능이 눈을 뜬 것.

‘황태자에게 공격당해서? 아니야. 그 부분은 복구되었다… 그렇다면 이건 왜?’

갑작스레 손상된 룬에 강한 의문을 느낀 루데린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재차 하늘이 열리며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와 수많은 천사가 모습을 드러낸 것.

그들 가운데 서 있던 두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이르카시우스의 발아래 깔려있던 관리 신을 힐끔 바라보더니 붉은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던 이르카시우스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용신의 후예 이르카시우스. 당신을 파괴하겠습니다.

<나를? 파리 같은 것들이 나를 파괴하겠다고? 키키킥.>

-그대는 용신이 될 자격을 잃었으며, 이 세상의 인간들을 모두 소멸시킨 것에 이어 이 세계의 창조신 카르나티우스 휘하의 관리 신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대는 이 세계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 키킥, 날파리들이 재밌는 말을 하네? 잔말 말고 덤벼.>

-모든 파괴 천사들은 들어라! 우리의 목표는 이르카시우스! 파괴의 진을 펼쳐라!

세피엘의 명령에 모든 파괴 천사들이 하나의 대상을 목표로 하는 파괴의 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던 이르카시우스가 짓밟힌 관리 신을 내동댕이치고 하늘로 날아오른 순간.

이내, 천지를 격동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단단한 이르카시우스의 육체가 파괴 천사들의 검에 의해 찢겨 나가고 천사들의 날개가 꺾여 땅으로 추락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전.

몸이 갈가리 찢겨 추락하는 파괴 천사들을 바라본 세피엘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관리 신이 방심해서 당했다고 생각했건만, 그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이르카시우스의 힘이 강력했던 것.

이건 그가 용신의 후예가 되면서 받은 하급 신 정도의 신력이 내는 힘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급 신이 이런 힘을 내는 거지?’

물론, 진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파괴 천사들은 훌륭하게 이르카시우스의 몸을 유린하고 있었고 그는 수세에 몰린 듯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세피엘의 귓가에 서늘한 이르카시우스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잡았다.>

-……!

파괴 천사들의 공격을 한 번에 뚫고 날아온 이르카시우스의 얼굴을 바라본 세피엘이 경악했다.

그는 이제까지 수세에 몰린 척 연기를 펼쳤던 것.

-이, 이건 하급 신의 힘이 아니야!

<하급 신? 키킥, 그냥 죽어.>

세피엘의 몸통을 강인한 앞발로 잡은 이르카시우스가 입을 크게 벌리더니 숨을 크게 들이켜기 시작했다.

곧장 이르카시우스의 가슴 비늘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그의 입에서 파괴적인 숨결이 붙잡힌 세피엘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

엄청난 마력이 포함된 드래곤의 숨결을 맞은 세피엘의 몸이 점차 녹아내릴 때.

-감히! 이 미친 도마뱀 새끼가!

쾅!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

파괴의 천사 우리엘이 근신 기간을 깨고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엘의 강력한 주먹에 땅에 처박힌 이르카시우스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한쪽 날개가 모두 녹아내린 세피엘이 고개를 들고는 자신의 상관인 우리엘을 향해 허탈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왜 오셨습니까? 근신 기간이잖습니까?

-내 새끼들 죽어 나가는 꼴을 지켜볼 수는 없잖아.

-쯧, 어차피 천사들은 죽어도 다시 태어날 텐데요.

-기억을 다 잃어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

-뭐, 그래도 영혼의 본질은 변하지 않잖습니까.

세피엘이 자신의 상관인 우리엘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순간.

땅에 처박혀 있던 이르카시우스의 온몸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느낀 우리엘과 세피엘이 이르카시우스의 숨통을 끊으러 내려갈 때.

이르카시우스의 몸에서 붉은 가시들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가시와 함께 등에서 솟아오른 또 다른 한 쌍의 날개를 펼친 이르카시우스는 전율스러울 정도로 강한 마력이 섞인 울부짖음을 내뱉었다.

<크오오오오!>

한순간 뿜어진 마력의 폭풍에 뒤로 밀려난 우리엘과 세피엘이 경악하며 말했다.

-뭐, 뭐야? 이건 중급 신 이상의 힘이잖아?

-어떻게 필멸자에게 저런 힘이…….

-이거, 마기(魔氣)도 섞여 있는데? 난리 났네. 근신 중이라 나도 중급 신 이상의 힘은 못 내는데…….

이르카시우스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는 사악한 혼돈의 힘 그 자체였다.

근신 중에 지상으로 현현해 힘에 제약이 큰 우리엘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

감았던 두 눈을 뜬 이르카시우스의 입이 쭉 찢어졌다.

<크크크큭, 재밌어. 우리엘과 그 부하들이라… 시험 대상으로는 딱이군.>

-뭐라고?

<오늘은 운이 좋군. 4대 천사 중 한 마리의 피를 마실 수 있다니 말이야.>

말을 마친 이르카시우스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몸이 저릿저릿 떨릴 정도로 강한 마력을 몸으로 받아낸 우리엘이 옆에서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던 세피엘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일단 몸을 피해! 저 녀석은 내가 상대한다!

-하, 하지만!

-피하라면 피해! 너희들은 감당할 수 없어!

이르카시우스에게 느껴지는 힘은 4품 천사인 세피엘이 결코 막아낼 수 없는 힘이었다.

그때 밑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이르카시우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킥, 어디로 피한다는 거지? 그냥 모두 죽어버려!>

힘을 잔뜩 끌어모은 이르카시우스의 몸에서 검은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치 작은 태양과도 같이 크게 떠오른 검은 불꽃이 하늘에서 유성우가 떨어져 내리듯 세상을 모두 불태우기 시작했다.

불타는 것은 땅과 세계뿐만 아니었다.

이르카시우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파괴 천사들의 몸에 옮겨붙은 불은 그들을 순식간에 불태우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불에는 타지 않는 천사들의 성체가 끔찍한 불길에 의해 녹아내리던 순간.

우리엘을 향해 더욱 거대한 검은 불꽃이 날아들었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불꽃을 바라본 우리엘이 다급하게 방어막을 펼쳤을 때.

-이 공격은 제가 막겠습니다!

-미친놈아 저리 꺼져!

-저놈 상태가 안 보입니까? 무방비잖아요! 제가 막을 테니까 우리엘 님은 공격이나 하세요!

세피엘의 말처럼 이르카시우스는 공격에 집중하느라 완벽한 무방비 상태였다.

-이건 네가 못 막는다고!

-이곳이 모두 불타기 전에 저놈을 죽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세상을 모두 태우는 검은 불꽃이 우리엘과 세피엘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바라본 우리엘이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고는 세피엘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죽지 마라.

-걱정하지 말고, 빨리 저놈이나 죽여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피엘을 바라본 우리엘이 불타는 자신의 파괴의 성검을 꺼내 들고는 무방비 상태의 이르카시우스의 심장을 찌를 때.

푹-!

푸욱-!

이변이 일어났다.

상처투성이가 된 은발의 엘프 루데린이 한발 앞서 이르카시우스의 심장에 자신의 애검 명월을 찔러 넣은 것.

<크어어어!>

-……!

이르카시우스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세상을 채울 때. 세상을 불태우던 검은 불꽃이 사라졌다.

검은 불꽃이 사라지고 난 뒤.

우리엘은 황망한 눈빛으로 자신의 불타는 성검을 바라봤다.

타오르는 불꽃에 흐르는 피는 바로 루데린의 붉은 피였으니까.

-네놈이 왜?

“이, 이르카시우스가 왜 이렇게 변했나 살펴봤습니다! 그러던 도중 그의 룬이 오염되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죠… 쿨럭!”

피를 토한 루데린이 우리엘의 성검을 자신의 배에서 뽑아낸 뒤.

힘겹게 말을 마저 이었다.

“그가 이 세계를 구할 때 대마왕의 마기에 오염되어있었습니다… 이건 미리 살피지 못한 제 실수…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우리엘은 차마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학살한 이르카시우스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루데린의 간청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이 세계의 창조신이자 위대한 최상위 신 카르나티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르나티우스…….

-오랜만이야. 우리엘. 저 녀석의 처분은 나한테 맡겨주지 않겠어?

-쯧, 저놈은 언제 폭주할지 모른다. 지금 죽여서 없애야 해.

-내게 다른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여긴 엄연히 내가 만든 세계야.

-후우… 나는 저놈을 용서하지 못한다.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우리엘 검은 불꽃에 거의 불탄 세피엘을 품에 안고 다급하게 천계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본 카르나티우스가 루데린과 쓰러진 이르카시우스를 바라볼 때.

룬이 완전히 파괴되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이르카시우스가 눈을 떴다.

과거편: 달빛 아래에서 춤을 (5)

마기가 침입했던 룬이 파괴된 덕분에 정신을 차린 이르카시우스는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연 시야 너머에 서 있는 황금색의 여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카…카르나티우스 창조신이 여기는 왜?”

-용신 카이젤로스의 후예 이르카시우스 엔카나시온 그대를 만나러 왔다.

먼발치에서 용신을 따라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이 세계의 창조신 카르나티우스의 등장에 이르카시우스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낄 때.

카르나티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르카시우스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저지른 짓이 보이는가?

“제가 저지른 짓 말입니까?”

-주변을 둘러보아라.

명령 아닌 명령과 같은 말에 이르카시우스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

두 눈을 부릅뜬 이르카시우스는 검은 불꽃에 휩싸여 사라져 가는 세상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비록 창세 신에게 신의 권한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인간을 없애 달라는 염원의 언령 마법을 발동시키긴 했지만, 이 세상을 지우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또한, 그가 말한 모든 인간이라는 것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인간을 말한 것이었으니까.

미련 없이 속세를 떠나기 위한 그의 마지막 소원을 오해한 관리 신이 나타나 공격당한 기억까지만 남아있던 이르카시우스가 검은 불꽃에 휩싸여 무(無)로 돌아가고 있는 세계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카르나티우스가 힘없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이르카시우스에게 재차 말을 건넸다.

-보이느냐? 네가 태어나고 사랑했지만, 결국 네 손으로 파괴한 네 고향이 말이다.

카르나티우스의 말은 이르카시우스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창칼이 되어 찌르는 그녀의 말에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르카시우스가 절망감을 느낄 때.

“이, 이르카시우스 님.”

“루…루데린!”

루데린의 상처는 얼핏 봐도 심각해 보였다.

복부에 난 커다란 상처에 남아있는 신성력이 가득한 불꽃이 그의 몸을 서서히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강대한 마력으로 상처를 겨우겨우 붙잡고 있던 루데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르카시우스에게 힘겹게 말을 건넸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 쿨럭! 했습니까? 언령 마법을 쓸 때는 신중하게 해야 하, 한다고 했지요? 쿨럭! 쿨럭!”

“아…아무 말도 하지 마! 절대 치유!”

다급한 목소리로 루데린의 입을 막은 이르카시우스의 손에서 녹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거의 죽어가는 자라고 해도 멀쩡히 되살아날 수 있는 강력한 마법인 절대 치유의 주문을 외운 이르카시우스의 얼굴에 당혹한 감정이 떠올랐다.

루데린의 복부에 난 상처는 전혀 아물지 않았으니까.

“이, 이게 왜?”

“대, 대천사의 성검에 찔린 사, 상처입니다. 필멸자의 마법으로는 치유할 수 어, 없어요. 쿨럭!”

“나! 이르카시우스 루트 드위치노바 엔카나시온이 신이 될 자격을 포기하며 당신에게 원하오니! 내게 가장 소중한 자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길 바랍니다!”

당황한 이르카시우스는 다시 한번 절대염원(絶對念願)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하늘은 이르카의 소원에 대답하지 않았다.

신격을 잃은 용신의 후예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은 하늘을 허망하게 바라본 이르카시우스가 재차 외쳤다.

“나 이르카시우스 루트 드위치노바 엔카나시온이 내게 주어진 생을 포기하며 그대에게 비오니…….”

턱-!

이르카시우스의 목숨을 대가로 건 언령 마법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힘겨운 표정을 지으며 누워있던 루데린이 이르카시우스의 손목을 붙잡은 것.

끔찍한 고통에도 애써 미소를 지은 루데린은 이르카시우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려고 했다.

허나, 마력이 다해 더는 버티지 못한 오른팔이 신성한 불에 불타 사라졌다.

재가 되어 흩날리는 자신의 오른팔을 힐끔 바라본 루데린이 왼손을 들어 이르카시우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을 건넸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루…루데린.”

“슬퍼하지도 마십시오.”

“내, 내 잘못이잖아! 차라리 혼을 내…….”

“잘못이라 생각한다면, 그 잘못을 갚을 기회를 잡으십시오.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저 책임을 질 기회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일 뿐…….”

목숨을 함부로 걸지 말라는 루데린의 말은 이르카시우스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곧 격한 감정을 느낀 이르카시우스가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미처 하지 못한 말이 그리 많았을까?

루데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건넸다.

“저는 그저 달빛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당신의 어두운 길을 영원히 비춰주겠나이다.”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긴 루데린을 바라본 이르카시우스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더는 떨리지 않는 몸.

또렷한 시선.

바로,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이었다.

죽음을 앞에 둔 루데린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했다.

곧 그는 거친 왼손으로 이르카시우스의 눈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을 닦은 뒤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울지마라 바보 제자 놈아.”

루데린의 말이 기폭제가 되었을까?

슬픈 마음을 꾸역꾸역 참아내고 있던 이르카시우스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곧 이르카시우스는 두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낸 뒤. 쥐어짜 낸 것 같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루데린에게 말을 건넸다.

“알았어. 앞으로는 울지 않을게.”

“그래, 네 놈이 우는 모습을 보면 두들겨 패러 가줄 테다. 그리고… 카르나티우스 님이시여.”

고개를 돌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을까?

흐릿한 눈빛으로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루데린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창조신 카르나티우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말하거라. 달빛 요정의 수장 루데린 이여.

“이 바보같이 착한 아이를 부탁합니다… 아직,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자를 만나고 배워야 하는 아이입니다. 저는 이 아이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했지만…….”

-그가 원한다면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리라.

“감사합니다. 위대한 카르나티우스 신이시여.”

감사의 인사를 마친 루데린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한계에 다다라 빛으로 부서지기 전.

루데린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 이르카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이르카시우스야. 내 딸들을 잘 부탁한다… 그 아이들이라면 나 대신 아니, 나보다 훨씬 잘 너를 도와줄 것이야.”

“응, 알았어…….”

“인제 그만 쉬고 싶구나…….”

힘이 다했을까?

두 눈을 감은 루데린의 몸을 은은한 빛이 감싸더니 그의 몸이 점차 흐릿하게 변해갔다.

그의 몸이 점차 사라지는 하늘을 바라본 이르카시우스가 비틀대며 일어나고는 마치 스스로 다짐하듯 말을 내뱉었다.

“편히 쉬어… 스승님.”

진혼제일까?

아니, 진혼무(鎭魂舞)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맞을까?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이르카시우스의 모습은 마치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

그 모습이 가여웠을까?

이르카시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르나티우스가 그의 앞으로 순식간에 움직였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옷을 입은 카르나티우스를 공허한 눈빛으로 바라본 이르카시우스가 허탈한 미소를 짓더니 보름달이 떠 밝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건넸다.

“저는 루데린과 이 세계에 평생을 치러도 다 갚지 못할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더냐?

“글쎄요. 솔직히 모르겠군요. 일단은 안젤리카와 그녀의 언니를 찾아야겠습니다.”

-그다음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어린 용신의 후예여.

비웃는 것일까?

루데린을 잃은 슬픔과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파괴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허무함에 잠식되어있던 이르카시우스가 카르나티우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건넸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군요.”

-왜지? 과거로 돌아가면 너를 배신한 렌델로스와 인간들을 다시 만날 텐데?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루데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니까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르카시우스의 얘기를 들은 카르나티우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자신이 중간계에서 하는 일이 바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회귀자들을 관리하는 총관리 신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말이 없던 카르나티우스가 이르카시우스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회귀자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아뇨, 모릅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

이르카시우스의 얼굴에 놀란 빛이 떠올랐다.

자신이 회귀자가 된다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카르나티우스의 말에 이르카시우스의 얼굴에 잠시 희망의 빛이 떠올랐을 때.

고개를 가로저은 카르나티우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너는 회귀자가 될 수 없다.

“왜, 왜죠? 저는 왜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는 겁니까?”

-멸망의 업을 가지고 있는 자는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지금 네 룬을 살펴보거라.

카르나티우스의 말에 이르카시우스는 황급하게 자신의 가슴 부근을 바라봤다.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룬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지만, 처음 보는 이상한 검은색 빛이 맴돌고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룬을 가리킨 카르나티우스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것이 바로 멸망의 카르마. 즉, 너의 업(業)이다.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너는 결코 신이 될 수도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카르나티우스의 단호한 말에 이르카시우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건넸다.

“그러면… 이 멸망의 업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발 알려주십시오!”

-중간계로 가서 회귀자들을 관리해 그들의 업을 받아라.

“…회귀자들을 관리? 남들이 과거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라는 말입니까?”

-그래. 그것이 네가 업을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무사히 일을 마친다면 중급 창조신의 권한을 얻어 세상 하나를 온전히 만들 수 있다. 용신의 권능으로는 하지 못하는 일이지.

용신이 아닌 창조신이 되어 세상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카르나티우스의 말을 들은 이르카시우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르카시우스라는 이름을 버려라. 나는 너를 이르카라고 부르겠다. 또한, 네가 이 세계 출신이었다는 것은 모두 감춰라. 멸망의 설화를 가진 자가 관리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르카시우스는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기다려줘.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이 되고 말 테니까.’

* * *

기나긴 이야기를 마친 후.

마저 끝내지 못한 말을 건넸다.

“그 뒤로 안젤라를 찾았는데… 내가 세상을 불태울 때 사람들을 구하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더라고, 내 잘못이지. 그녀가 숨을 거둘 때 카르나 님에게 부탁해서 중간계에 같이 오게 된 거야.”

안젤라가 내 옆에 있게 된 이유를 말하고 난 뒤.

루데린의 전사 소식을 전하고 세상을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밝혔다.

안젤리카 아니, 안젤라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을 부정하던 그녀는 이내 내게 모든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그녀의 말 중에 가장 가슴 아팠던 말은 하나였다.

자신은 구했으면서 왜 언니는 구하지 못했냐면서 말이다.

이상하게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안젤라의 언니를 찾아 명계를 계속 뒤져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흑흑, 뭐야… 진짜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건 너잖아?”

눈물 콧물을 짜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마리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줬다.

“이제는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