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이르카가 정령계에서 의문의 침입자들을 처리하고 이스마엘과 대화를 나누던 시각.
7 아르카니아.
어느새 일행으로 불러야 할 정도로 수가 많이 늘어난 요한 일행이 서둘러 도착한 할파스 백작령은 처참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프란시스에게 할파스 백작령에 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는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요한이 침통한 표정으로 주변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군요…….”
“이게 어떻게 해서 요한님의 잘못이겠습니까. 독선적인 태양교의 만행이죠.”
“아뇨, 이들이 저와 얽혔기 때문에 피해를 본 거 아니겠습니까?”
“정확하게는 저희라고 해야겠죠. 저도 얽혔으니 말입니다.”
“아르한 님…….”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아르한을 바라본 요한이 무릎을 꿇어 불에 탄 재를 손에 한 움큼 쥐고는 숨결을 불어 날려 보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본 아르한이 요한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을 꺼냈다.
“할파스 백작은 무사할 겁니다.”
“아르한 님, 제가 걱정하는 건 할파스 백작이 아닙니다.”
“네?”
“할파스 백작보다는 영지에 있던 백성들과 경비병들이 걱정이로군요.”
“아…….”
“힘없고 죄 없는 자들에게 너무 냉혹한 현실이로군요.”
요한이 걱정하는 건 할파스 백작이 아니었다.
할파스 백작과 그의 딸 베아트리체는 혼란 속에서도 능히 몸을 뺄 재주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전란의 화마에 휩싸인 일반 백성들이 몸을 뺄 수 있을까?
결론만 말하자면 아니오였다.
어찌어찌 목숨은 부지했다고 해도 그들이 일궈왔던 소중한 땅과 전 재산이 날아갔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던가?
요한이 걱정하는 것은 그런 힘없는 자들이었고 또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태양교는 자신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백성의 보금자리를 불태웠으니까.
그때 반들반들한 머리를 긁적인 프란시스가 요한과 아르한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 일단 할파스 백작을 찾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맞아요. 이곳에 온 이유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할파스 백작은 제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자 같습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백성들을 먼저 구했네요.”
“네?”
“주변을 보세요. 시체가 하나도 안 걸려있잖습니까.”
프란시스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자 그의 말대로 무너진 성과 불타서 재만 남은 집을 제외한다면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맛살을 살짝 찌푸린 아르한이 프란시스에게 질문을 건넸다.
“불태웠을 수도 있잖아. 주변을 보라고 온통 재투성이인데 사람들을 죽이고 태웠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아르한의 물음은 당연하였다.
그러자 살짝 미소를 지은 프란시스가 재차 말을 꺼냈다.
“제가 그쪽에 있어서 잘 아는데 태양교의 이교도 심판 방식은 상당히 잔인합니다. 단순하게 시체를 태우진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데?”
“정화의식이라고 하면서 말뚝에 산채로 꼬챙이 꿰듯 꽂아놓고는 피를 빼는 의식을 하죠.”
“야만적이네… 잠깐? 너도 그런 걸 했다는 거 아냐?”
“저를 뭐로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
“옆에서 지켜봤으니까요. 솔직히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고요.”
씁쓸한 표정으로 잿더미를 바라본 프란시스는 여태까지 항상 태양교의 잔인한 이교도 집행방식은 항상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요한을 만나기 전까지는 태양교의 비리와 쓸데없이 잔인한 방식의 처형식에도 그저 눈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요한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창백한 안색의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곧 부복하듯 요한을 향해 무릎을 꿇은 그가 자신이 보고 온 것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근방에 있는 동굴에서 수상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인도자님.”
“라이오넬. 저를 인도자라고 부르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저는 사람을 제대로 구하지 못한 쓸모없는 사제일 뿐입니다.”
자책하듯 말을 내뱉은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본 라이오넬이라 불린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마저 이었다.
“신성력을 쓰는 순혈의 뱀파이어가 인도자가 아니면 그 누가 인도자라는 말입니까?”
“후우, 알았습니다. 그런데 수상한 흔적이라뇨?”
“그 동굴 앞에 제가 진입할 수 없는 결계가 있습니다. 물론 시간만 주신다면 얼마든지 파훼하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대로 왔습니다.”
라이오넬의 말에 요한은 그 장소에 할파스가 숨어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라이오넬은 뱀파이어 마을에서 찾은 가장 재능 있는 추적자 아니던가?
추적술과 안개 변신술에서는 오히려 요한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존재였기에 그가 파훼하지 못하는 결계라면 할파스 백작이 분명했다.
이 근방에 동굴을 은신처로 삼고 있을 자는 할파스 백작밖에 없지 않던가?
게다가 고위 늑대인간이면서 인간들과 함께 섞여 살고도 정체를 들키지 않고 고위 귀족의 지위에까지 오른 그라면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오넬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를 그쪽으로 안내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인도자님.”
말을 마친 라이오넬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안개처럼 변하더니 요한의 그림자에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 프란시스가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짓고는 아르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쟤, 너무 폼 잡는 거 아닙니까? 하나도 안 멋있구먼.”
“왜, 부럽냐?”
“네? 제가 왜 부럽습니까? 쟤 낮에는 밖에 다니지도 못하잖아요.”
프란시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욱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라이오넬은 많은 것을 포기했고, 그중 하나는 낮에는 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도 있었다.
지구의 뱀파이어들과는 다르게 아르카니아의 뱀파이어는 힘을 조금 포기한 대신 인간들처럼 낮에도 다닐 수 있었으니까.
라이오넬은 어떻게 본다면 더욱 강력한 힘을 얻기 위해 하루의 절반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때 오묘한 표정을 지은 아르한이 프란시스의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너는 낮에 좀 떨어져서 걸어라.”
“네?”
“너무 눈부셔.”
“…….”
순간 할 말을 잃고는 입을 헤 벌린 프란시스가 뭐라고 항변을 하기 전.
뭔가 떠올리듯 골똘히 고민하던 아르한이 프란시스에게 재차 말을 건넸다.
“너, 근데 머리 기른다고 하지 않았냐? 지금쯤이면 좀 자랐어야 하는 거 아냐? 밤송이처럼 변해야 정상인데…….”
“머, 머리가 원래 좀 가느다랍니다!”
“그래? 솜털도 안 보이는데?”
“저, 저는 야한 생각을 안 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것치고 눈썹은 또 엄청 빨리 자랐는데…….”
“……?!”
아르한의 말처럼 프란시스가 요한을 향해 몸을 내던질 때 불에 타버렸던 눈썹은 벌써 자라있었다.
똑같이 몸에서 나는 털인데 왜 다르게 자라는 걸까 고민하던 아르한이 손뼉을 치고는 앞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던 요한을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아! 너 그때 치료받았지? 요한님한테 머리에 신성력 좀 써달라고 부탁드려봐라. 자라 나라 머리 머리! 이렇게 말이야. 혹시 알아? 머리도 자라날지?”
“그, 그런 쓸데없는 곳에 신성력을 쓰다뇨? 이런 머리가 아니라 다른 불행한 병자들에게 써야죠! 절대 안 될 말입니다.”
그때 라이오넬을 따라 앞에서 걸어가던 요한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건넸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금 다시 태어난 기분입니다. 그 정도 신성력을 쓴다고 해서 고갈될 것 같지도 않고요.”
“봤지?”
“괘, 괜찮습니다.”
애써 거부하는 프란시스를 힐끔 바라본 요한이 아르한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만 놀리라는 뜻이었지만, 그것을 오해한 아르한이 히죽 웃으며 프란시스에게 재차 말을 꺼냈다.
“흐흐, 네 머리는 이미 회생 불가인가 보다. 혹시 또 아냐? 나중에 네가 대머리 교황으로 불릴지도.”
“대, 대머리 교황이라니! 그런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시죠! 이제까지 이단 심문관들이 교황이 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흐흐, 뭐 모르지. 네가 최초가 될 수도 있잖아.”
“언젠가는 꼭 머리에 좋은 약을 구할 겁니다. 신성력 치료도 꾸준히 받을 거고요. 쳇!”
“괜찮아. 대머리는 정력의 상징이라고 하잖아. 아, 너…….”
무심결에 아래쪽을 쳐다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아르한이 예전에 쓸데도 없다고 말했던 프란시스의 말을 상기하며 말을 줄였다.
아르한의 시선이 자신의 소중한(?) 곳에 닿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프란시스가 붉게 변한 얼굴로 항변하려고 할 때.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요한이 손을 들어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요한의 그림자에 들어가 움직이던 라이오넬이 나타난 것.
라이오넬은 프란시스와 아르한을 살짝 한심스럽게 바라보더니 거대한 덩굴로 숨겨져 있던 한쪽 동굴을 가리키며 요한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이곳입니다.”
“허, 정말 찾기 어려운 곳이네요. 눈치도 못 챘습니다.”
“제가 인도자님께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생하셨어요. 라이오넬.”
“아닙니다. 그러면 해체를 할까요?”
“아뇨. 제가 손을 쓰죠.”
라이오넬에게 결계를 해체하지 말라고 말한 요한이 성큼성큼 동굴 앞으로 걸어가더니 무릎을 꿇고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성스러운 모습에 축 처진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일부러 프란시스를 놀리던 아르한도.
그에게 놀림을 받아 머리가 붉게 물들었던 프란시스도.
힘들게 따라왔지만, 아르한의 말에 피식거리며 웃어대던 뱀파이어들도 모두 숨죽여 요한을 바라봤다.
그때.
요한의 몸에 흰색과 황금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결계가 마치 눈 녹듯 사라졌다.
곧 결계가 사라진 동굴에서는 반가운 얼굴이 놀람과 반가운 마음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요, 요한 님?!”
“오랜만입니다. 베아트리체 양.”
“어, 어떻게 제가 펼친 결계를 이렇게 쉽게…….”
그녀는 당혹스러운 말투와 표정으로 요한을 바라봤다.
결계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베아트리체는 늑대인간 일족에서도 수위로 꼽히는 결계술사.
태양교의 사제들 또한 이곳을 찾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때 동굴 안쪽을 둘러본 요한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베아트리체에게 말을 건넸다.
“설명은 제가 나중에 해드리지요. 상황이 많이 안 좋군요…….”
“아, 아뇨. 그냥 지금은 굶주림이 조금 심한 것뿐이에요. 제가 밤마다 사냥을 나가긴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서요…….”
그간 고생이 많았는지 피곤이 많이 내려앉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요한이 재차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익숙한 경비병들과 경비대장의 얼굴까지는 확인했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인 할파스 백작이 보이지 않았던 것.
“저, 베아트리체 양. 할파스 백작님은 어디 계십니까?”
“아버님께서는…….”
할파스 백작의 안부를 묻자 마치 울먹이듯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베아트리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경비대장 파히르가 몸을 일으키더니 비틀거리며 다가와 요한에게 손을 건넸다.
건장했던 그가 무척이나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본 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그의 손을 붙잡을 때.
그가 쓰러지듯 요한을 꼭 껴안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할파스 백작님이 늑대인간이라는 사실… 사제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
“괜찮습니다. 저희는 모두 그분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까요… 다만.”
“다만?”
“다만…할파스 백작님은 전사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파히르는 복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일까?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태양교의 침입에서 할파스 백작령에서 발생한 유일한 사망자는 단 한 명.
바로, 할파스 백작이었다.
파히르의 말에 요한은 두 눈을 꾹 감고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며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그의 영혼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태양교를 무너트릴 힘을 주시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흐를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쥔 요한이 태양교에 복수를 다짐할 때.
멀리서 요한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