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조금은 주눅이 든 모습으로 말을 마친 이스마엘을 바라보며 녀석에게 다시 질문을 건넸다.
“제대로 본 거 맞아?”
“그렇다니까요? 제가 눈이 사시입니까?”
“너, 은근히 개긴다?”
“개… 개기다뇨! 억울합니다!”
“뭔가 착각할 수 있는 문제니까 그런 거야.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에휴, 이르카 님. 제가 7 아르카니아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확실하다니까요?”
“흠… 그건 맞지.”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말을 수긍하기는 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지울 수는 없었다.
물론, 녀석의 말을 못 믿겠다는 건 아니다.
7 아르카니아에 가장 오래 있었던 인물이자 그곳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자는 바로 이스마엘이었으니까.
여러 세계를 관찰하고 돌아다니느라 깊은 정보는 제대로 모르는 나와 한 세계에서 오랜 시간 살아오고 또 회귀까지 했던 녀석의 정보량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그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태양교가 꼭꼭 숨겨놓고 절대 내놓지 않는다는 녀석들의 정보를 녀석이 어떻게 아는 거지?
“야, 그 태양기사단인가? 뭐시깽인가 하는 놈들 말이야. 넌 어떻게 걔들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데? 그리고 요한이랑 아르한이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건 무슨 소리야?”
“…말 못 합니다.”
“말하고 편하게 정령계에서 쉴래? 아니면 나한테 끌려가서 7 아르카니아로 갈래?”
은근한 어조로 협박성 발언을 하자 얼굴이 하얗게 변한 이스마엘이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이, 이거 억지 아닙니까?”
“응, 아냐. 너 아직 안 죽었잖아.”
“억지 맞습니다! 그때 분명히 계약 종료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제 결혼식 때요!”
“그랬지.”
“그런데 무슨 다시 7 아르카니아로 갑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치 항변하듯 말하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주변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너를 정령계로 보내는 건 계약에 없잖아?”
“……?!”
“내가 편의를 봐준 거라는 생각은 안 드냐? 정상적인 계약이라면 넌 여기가 아니라 7 아르카니아에 있어야 하거든?”
말을 마친 뒤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녀석을 지긋이 바라봤다.
이스마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것이 사실인 걸 어찌하겠는가?
원래 정령계나 지옥, 그리고 천계인 에덴에는 필멸자가 살지 못한다.
단, 한 가지 예외라고 한다면 한번 죽은 인물들.
즉, 회귀자나 환생자는 다시 한번 사망하기 전 소원을 이룬다면 허락을 구해서 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것도 엄연히 말하자면 일종의 편의를 봐주는 것.
지금 이스마엘은 정령 계가 아닌 7 아르카니아에서 살고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 자식 충격받았나?
마치 커다란 충격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이스마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네.
분노, 혹은 충격을 느꼈는지 몸을 잘게 떨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차피 녀석을 7 아르카니아로 보낼 생각은 없다.
그냥 녀석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협박성 발언을 한 것뿐.
이미 이루고 싶은 목표를 이룬 녀석인데 또 고생을 시키는 건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녀석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을 건네려 할 때.
이스마엘이 뭔가 결심한 듯 쥬데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뤼슈타를 힐끔 바라보고는 내게 가까이 와달라는 손짓을 했다.
“응?”
“쉿!”
갑작스레 내 입을 손바닥으로 막은 녀석을 한껏 노려봤다.
막을 거면 자기 입을 막을 것이지 왜 내 입을 막고 난리야?
그때 이스마엘이 좌우를 빠르게 살피더니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한테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마치 큰 결심을 한 듯 한숨을 푹 내쉰 녀석이 말을 꺼냈다.
“예전에… 그러니까 죽기 전 일인데요…….”
“빨리 말해주지 않으렴?”
“제, 제가 태, 태양의 성녀를 납치했거든요.”
“……?”
이런 미친놈을 봤나?
어안이 벙벙해져 이스마엘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자 얼굴이 붉게 변한 녀석이 마치 자신을 변호하듯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똑바로 대답해야 할 거야. 지금 널 패 죽일까 말까 고민 중이거든.”
“오, 오해라니까요? 저도 오해를 했고 그쪽도 오해했고…….”
“오해?”
“네! 오해가 쌓이고 쌓인 겁니다! 저, 저도 피해자라고요!”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거지?
몸을 일으켜 마치 소리를 치듯 크게 외치는 이스마엘을 바라보고는 귀를 후비며 말을 건넸다.
“나한테 감정 있으면 말하지 그랬니? 내 고막 터트리려고 노력하지 말고.”
“죄,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아 그런데 무슨 오해라는 거야?”
“그게 사실은 말이죠…….”
이내 체념한 이스마엘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신이 회귀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과거 태양교의 성녀라고 불리는 여인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태양교는 발칵 뒤집혔고, 그녀를 찾기 위해 대규모 수색을 펼치게 된다.
그 당시 한창 대정령사로 이름을 날리던 이스마엘은 정령들과의 교감 도중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녹색 머리의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것이다.
이런 금사빠 같은 녀석…….
녀석의 성향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이 확실하다.
일관성 하나는 확실하네.
“듣고 계십니까?”
“어어, 듣고 있다.”
“아무튼, 그 뒤에 말입니다…….”
여인은 자신이 태양교의 성녀라는 것을 철저하게 숨기고는 이스마엘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스마엘은 당연히 그녀에게 빠졌기에 그녀의 뒤를 쫓아오는 추적자들을 암살자로 오해를 한 것이고.
세월이 지난 후.
자그마한 오두막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던 이스마엘과 성녀를 찾아오는 인물들이 있었다.
바로 태양교의 이단 심문관들이었고, 성녀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이스마엘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애원했다.
그 당시에 최강자로 손에 꼽히던 이스마엘은 당연히 그녀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했고 압도적인 힘을 이용해 이단 심문관들을 모조리 내쫓았다.
문제는 그 당시 이스마엘을 찾아갔던 이단 심문관 중 한 명이 성녀가 괴한에게 납치당했다고 보고한 것이다.
자신들의 실수를 덮기 위한 궁여지책이었고, 그것은 곧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바로 크게 분노한 교황이 태양기사단을 소집한 것.
어지간한 대주교 이상의 신성력과 최강의 검술 실력, 그리고 태양신의 축복을 받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게 된 태양교의 진정한 전력인 태양기사단이 이스마엘을 추격하게 된 것.
그런데, 얘 그때 안 죽었잖아?
열심히 침을 튀기기며 설명하는 이스마엘을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잠깐만.”
“…그래서 제가 막 운디네랑 네? 왜 그러십니까?”
“너 죽은 건 그때가 아니잖아?”
“에이, 설마 제가 언제 죽었는지 까먹으신 겁니까?”
“아니, 안 까먹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말하겠지? 그때 네가 죽지 않았다는 건 그 태양기사단이라는 놈들을 결국 네가 이겼다는 거 아냐?”
이스마엘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면, 길가메시가 녀석들의 수장에게 빙의했다고 해도 충분히 이길만하다.
결국, 본신의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요한에게 있던 심각한 약점이었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신성력을 쓰지 못한다는 점도 사라지지 않았던가?
아르한 역시 다른 무구를 이용해 최대한 서포트해준다면 충분할 거 같은데?
그때 이스마엘이 고개를 푹 숙이며 우울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졌습니다.”
“뭐?”
조금 전까지 7 아르카니아에서 최강은 자신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우울한 낯빛으로 변한 이스마엘이 아랫입술을 잘게 씹으며 대답했다.
“그 자식들, 자기들이 질 거 같으니까 변하더군요.”
“그거야 이기고 싶은 놈들이면 다 똑같은 거 아냐?”
“그게 아니라 겉모습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신 같은 거라고 해야겠죠.”
“뭐? 변신?”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
갑자기 여기서 무슨 변신 얘기가 나온다는 말인가.
그때 이스마엘이 재차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제가 누굽니까? 끈질긴 집념의 사나이 아닙니까?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그 둘을 합쳐서 연구해 놓은 놈들이 바로 그놈들이더라고요.”
“음… 이거 골치 아프네.”
이스마엘이 어딘가 어리숙해 보이고 진중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우습게 본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막말로 실력으로만 따지면 필멸자들 가운데서는 거의 최강자의 반열에 오른 인물.
그런 이스마엘이 패배했다니.
이거 좀 곤란한걸?
그런데 왜 아까는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
생각을 마치고 이스마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녀석 또한 뭔가 알아차렸는지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아까는 그냥 골치 아프다는 식으로만 말했냐? 이건 좀 큰 거 아냐?”
“골치가 아프긴 한데, 아마 그 두 분이라면 어찌어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실력으로는 안 졌어요. 인질을 잡혔으니까 진 거죠.”
“엥? 그게 무슨 소리야?”
“놈들이 성녀를 인질로 잡았어요.”
“…뭔가 바뀐 거 같지 않아?”
성녀를 되찾으러 온 놈들이 성녀를 인질로 잡아?
황당하고도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에 이스마엘을 빤히 바라보자 녀석이 표정을 굳히며 말을 꺼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라는 소립니다. 저도 그래서 놈들에게 한번 크게 당했었고요. 뭐, 제 실력이 워낙 뛰어나 죽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고생 좀 했습니다.”
“태양교에 다시 찾아가진 않았어?”
“찾아갔죠. 그런데 그놈들도 성녀도 모두 사라졌었어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요.”
말을 마친 이스마엘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긴, 금사빠라고 해도 녀석한테는 애절한 사랑이었을 텐데 이거 내가 너무 추궁한 거 같네.
말을 마치고는 아폴론이 화살을 쏘아 보낸 방향을 향해 찍은 흐릿한 사진을 거두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멀리서 찍은 사진인데 용케도 잘 알아봤다? 이렇게 흐릿한데 말이야.”
“기억 못 하는 게 이상하죠.”
“그래? 기억력은 확실히 좋은가 보네.”
그때였다.
쥬데스와 함께 잡은 녀석들의 심문을 마친 성진아가 기척도 없이 내게 다가오더니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다 끝났어요.”
“오, 벌써요? 고생 많으셨어요.”
“후훗, 고생은요.”
“사탄님한테 수련받는 건 어떻습니까? 할 만해요?”
“네, 뭐 조금 힘들 때도 있긴 한데… 할 만해요.”
잘 지내고 있다는 그녀의 근황을 들은 뒤.
뤼슈타와 이스마엘을 감시하고 있던 자들에 대한 정보를 넌지시 물어봤다.
“저놈들이 누군지 알아내셨나요?”
“음, 그게 조금 이상해요.”
“네? 뭐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신지…….”
“녀석들 모두 제우스가 보냈다고 하는데요.”
또 제우스냐?
하긴, 지금 나와 가장 큰 척을 진 건 올림포스.
그 수장인 제우스가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끈질긴 제우스의 간섭에 이맛살을 찌푸릴 때.
성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말을 건넸다.
“묘하게 반응이 다른 놈이 있어요.”
“반응이 달라요?”
“네, 끝까지 참다가 다른 놈들이 제우스라고 말하자마자 녀석도 제우스라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그때 살짝 눈동자를 굴리더라고요.”
“그게 왜 이상한 거죠? 다른 자들이 다 불었으니까 그자도 따라서 불은 걸 텐데요?”
“아뇨, 그자도 살짝 놀란 눈치였어요. 진짜 찰나의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눈빛이 그랬어요.”
이거 봐라?
그러면 그놈은 다른 자가 보냈다는 소리인데…….
과연 또 누가 얽힌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