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바싸고의 몸이 갑작스럽게 진흙처럼 무너져 내린 뒤 만신창이가 된 루크레시아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대가 해치운 것인가?”
“글쎄요.”
“글쎄요?”
“사실, 저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은 루크레시아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을 때였다.
갑자기 바싸고의 몸이 무너진 자리에서 강렬한 빛과 함께 강력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눈을 태워버릴 것 같은 빛을 막기 위해 날개를 펼칠 때.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잠식해왔다.
설마 성진아가 제때 도망치지 못한 것일까?
설마, 이상을 알아차린 바싸고가 육신을 버리고 영혼 상태로 돌아가 성진아를 상대한 것일까?
계속해서 불길한 예감만이 들었다.
성진아에게 일을 맡긴 게 내 오판이었을까?
설마 내 실수로 인해 성진아의 영혼이 바싸고에게 잡아먹힌 것인가?
불안함, 그리고 초조한 마음만이 계속 맴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마력은 대악마의 마력이었다…….
이를 악물며 그림자의 모습처럼 변한 바싸고에게 달려들며 나도 모르게 외쳤다.
“바싸고! 네놈이 감히 성진아를!!”
“……?”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성진아를 내놔!”
“……!”
나는 아직 성진아의 소원을 제대로 이뤄주지 못했다.
그녀의 부모를 만나게 해준다고 했던 약속은 지킨 셈이지만, 이렇게 엉망진창인 기억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부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길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모와 즐거운 기억을 남길 장소를 바싸고를 끌어들일 함정으로 만들었다.
그것 자체로도 몇 번이고 사죄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녀의 영혼이 바싸고에게 먹힌 것.
으르렁거리듯 바싸고에게 외쳤다.
“그녀의 영혼을 내놔라. 바싸고.”
“…….”
“내가 약속 하나 하지, 그녀의 영혼을 내놓는다면 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
“개자식아! 뭐라고 말해보란 말이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바싸고를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켤 때였다.
“저예요.”
“……!”
그림자 속에서 성진아의 모습이 드러난 것.
그 모습을 보니 더욱 화가 치솟아 올랐다.
바싸고가 그녀의 영혼을 흡수한 것이 확실해졌다.
감히 그녀의 흉내를 내?
크게 들이켰던 숨을 내뱉었다.
크라아아아-!
파멸의 기운을 담은 브레스가 쏘아지자 당황한 바싸고가 재빨리 몸을 피할 때.
룬을 움직여 바싸고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아니, 제한하려고 했다.
[마리: 이 멍청아! 쟤 진짜 성진아라고! 네 손으로 성진아를 죽일 셈이야?]
[이르카: ……!]
갑작스럽게 들려온 마리의 메시지에 다급하게 브레스를 멈추고는 답장을 보냈다.
[이르카: 그게 무슨 소리야?]
[마리: 뭐, 브레스 한 방 맞는다고 죽을 리는 없지만… 아무튼, 쟤 성진아라고. 이 몸이 도와줬는데 바싸고 하나 못 없앴을까?]
[이르카: 그러면, 바싸고가 성진아의 영혼을 잡아먹은 게 아니라… 성진아 씨가 바싸고의 영혼을 먹은 거야?]
[마리: 그러취! 엣헴! 이 누님의 위대함을 이제야 알겠느냐??]
[이르카: 이, 일단 조용히 있어 봐.]
[마리: 뭐라? 이 누님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바로 인사하지 못할망정 이것이 진짜…#%#!#@]
[상대방의 메시지를 수신 차단했습니다.]
성진아가 바싸고의 영혼을 잡아먹어?
조금 황당한 마리의 말에 성진아의 모습으로 변한 바싸고 아니, 성진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 손에는 아론다이트 한 손에는 엑스칼리버를 쥔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건네왔다.
“후훗, 관리자님. 저를 걱정하신 건가요?”
“어… 음… 진짜 성진아 씨가 맞나요?”
“그러면 설마 바싸고일까요.”
“메시지를 보내시지…….”
“어머? 제가 바싸고의 영혼을 흡수하고 난 다음에 이곳에 나타나자마자 바로 제 영혼을 내놓으라고 말하면서 달려 들으신 게 누군데요?”
“…….”
순간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영혼을 내놓으라고 거칠게 달려들면서 브레스를 뿜어댄 건 바로 나였으니까.
그때 성진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죠?”
“네?”
“제가 바싸고의 기억을 모두 흡수했거든요?”
“그렇죠?”
“재밌는 게 대악마나 대천사 같은 경우 신으로 취급이 되더라고요?”
“그렇죠…? 빛과 어둠의 신 직속으로 들어가서 일반적인 신으로 취급되는 거니까요.”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내는 거지?
아, 설마?
“이제 지옥으로 가서 시험을 치르고 정식으로 대악마로 인정을 받는다면 제가 먼저 신이 되는 거네요?”
“……!”
“후훗, 걱정하지 마세요. 관리자님이 신이 되실 때까지는 기다려 드릴게요.”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 그녀를 바라보고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힘들게 찾은 자유가 점차 사라져 가고 있었다.
* * *
이르카가 대악마의 힘을 얻은 성진아 앞에서 쩔쩔매던 시각.
7 아르카니아의 한 심처.
어두운 밤을 틈타 희미한 랜턴 빛에 의지한 채 교황청의 앞에 선 두 인영이 있었다.
그중 앞쪽에서 길을 안내하던 민머리의 사내 프란시스가 침을 삼키며 뒤에서 따라오던 아르한에게 말을 건넸다.
“아르한 님, 계획은 전부 숙지하셨습니까?”
“당연하지.”
“한번 말씀해보시지요.”
“네가 요한 님이 들어있는 관을 가지고 나올 때 뒤따라오는 놈을 전부 때려 부순다. 아냐?”
“어…….”
“어?”
“아! 그 어가 아닙니다! 무의식중으로 나온 말이에요!”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프란시스를 바라본 아르한이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프란시스, 요즘 개김성이 점점 투철해지는 거 같은데?”
“그거 아르한 님 착각입니다.”
“그래?”
“제가 어떻게 아르한 님께 막말을 하겠습니까? 물론, 아르한 님께서 갑자기 저를 고자로 만들지 않나, 선천적인 대머리로 만들지 않나, 여러 가지 착각을 하셨지만요. 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너 그거 개기는 거 같은데?”
“설마요. 계획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아르한 님을 멍청한 오크라고 탓하려는 것도 아닌데요.”
“……?”
“아, 오크가 아니라고 하셨죠? 아무튼,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건 처음 했던 계획이잖아요?”
“너 수정한 계획은 나한테 말 안 했는데?”
“네?”
“네 머릿속으로만 계획을 수정해놓고 나를 멍청한 오크로 만들어? 넌 뒤졌어.”
프란시스의 소심한 복수극의 끝은 유혈사태였다.
물론, 그동안 씨 없는 문어라고 계속해서 놀려대던 아르한에게 행한 조그마한 복수였지만 말이다.
코에 헝겊을 찔러넣은 프란시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말을 꺼냈다.
“첫 번째 계획은 너무 좋은 상황만 생각한 것이었으니까요. 아무튼, 두 번째 계획은 제가 관을 가지러 갈 때 아르한 님께서 교황청을 공격하는 겁니다.”
“왜? 그러면 네가 관을 꺼내오기 힘들어질 거 아냐?”
“아닙니다. 오히려 관을 더 빨리 꺼내려고 하겠죠.”
“왜?”
“교황청을 습격한 게 뱀파이어 여러분이니까요.”
프란시스가 아르한의 뒤쪽에 있는 뱀파이어들을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사실, 뱀파이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뱀파이어의 마을에 찾아가서 요한의 얘기를 꺼냈을 때.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선뜻 도와주겠다고 했고 그로 인해 더욱 안전한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니까.
뒤쪽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뱀파이어를 한번 훑어본 아르한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뱀파이어는 원래 저렇게 마른 거야? 요한 님은 안 그랬는데…….”
“그거야 휴대용 수혈팩이 있으니 그랬겠죠.”
“응? 요한 님 피 안 마시는데? 그리고 휴대용 수혈팩은 또 뭐냐?”
“…….”
속으로 ‘너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던 프란시스가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뱀파이어 마을의 장로 네캄프가 쭈뼛쭈뼛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이단 심문관 나으리. 저희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단 심문관이 아닙니다. 네캄프 어르신.”
“하, 하오나.”
“남자가 왜 이렇게 박력이 없어? 이제 얘 이단 심문관인가 뭔가 하는 뭐시깽이도 아니라잖아. 그러니까 어깨 쭉 펴고 있으라고.”
“네, 네…….”
네캄프가 제자리로 돌아간 뒤.
못마땅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 아르한이 프란시스에게 재차 말을 건넸다.
“저런 애들을 믿고 일을 벌여도 되는 거 맞아?”
“음… 될 겁니다. 저래 보여도 전투에 들어서면 꽤 위협적이거든요.”
“그래?”
“네. 아무튼, 제가 관을 가지러 갈 때 최대한 정신없게 만들어주세요. 저들이 제가 배신했다는 걸 눈치챌 시간을 줘서는 안 되니까요.”
“그래, 알았다.”
아르한에게 신신당부를 한 프란시스가 내심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교황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교황청의 비밀 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프란시스를 발견한 경비병들이 창을 엑스 자로 교차시키고는 질문을 건네왔다.
“정지! 누구십니까?”
“교황청 소속 이단 심문관 프란시스다.”
“증표를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이내 대주교에게 받은 이단 심문관의 증표를 꺼내든 프란시스가 경비병에게 증표를 건네주자 그것을 유심히 쳐다본 경비병이 창을 거두며 외쳤다.
“충성! 경비 중 이상 무! 이단 심문관 프란시스 님의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흠, 그런데 왜 이렇게 경비가 삼엄한 것인가?”
“프란시스 심문관님과도 관련된 일인데… 모르십니까?”
어딘가 모르게 경비병의 의심쩍은 눈초리를 느낀 프란시스가 찔끔 놀랐지만 이내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아, 대주교님의 명을 받고 할파스 백작령에 잠시 다녀오는 길이라네. 그래서 경비가 삼엄해진 이유를 모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 저도 그 사악한 이교도 무리를 처단하는 장소에 가야 했는데…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렇지, 참으로 사악한 자들이었어.”
“그렇죠, 게다가 할파스 백작과 그 딸이 정체를 숨긴 늑대인간이었다니… 천인공노할 노릇입니다.”
“그렇지, 그자들을 내 손으로 잡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야.”
이미 아르한에게 할파스 백작의 정체를 들은 프란시스가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하자 경비병이 완전히 의심을 풀고는 떠들어댔다.
“쯧, 너무 성급하게 들이밀어서 도망칠 시간을 줬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거 아니겠습니까? 이단 심문관님들이 고생이시죠.”
“고생이랄 게 있나? 모두 위대한 라헬 님과 태양신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하나의 시험인 것을.”
“아무튼, 이곳으로 오신 건 이교도의 관 반출 때문이시죠?”
“그렇다네.”
“그러면 우로스 이단 심문관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이 의식을 우로스 선배님이 주도하시는 건가?”
“네? 아, 그렇습니다.”
요한에게 확실한 죽음을 내려주는 의식을 주도하는 자가 우로스라는 말을 꺼낸 경비병의 대답에 프란시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우로스의 시선을 어떻게 따돌리지?’
그때였다.
멀리서 아르한의 우렁찬 사자후가 들려왔다.
‘요한 님을 구하라!’
‘와아아아-!’
아르한과 경비병들의 전투가 벌어지는 모습을 프란시스가 지켜보고 있던 순간.
어둠 속에 은밀하게 몸을 가리고 있던 우로스가 슬그머니 나타나 프란시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말을 건넸다.
“이게 누구신가? 프란시스 심문관 정말! 오랜만이군.”
“아, 우로스 선배님…….”
“그런데, 이곳에는 어찌한 일인가? 나는 이곳에 그대를 부른 기억이 없는데?”
“네? 이교도를 같이 잡으러 가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반출날짜를 맞춰서 온 것이지요.”
애써 태연하게 대답한 프란시스를 물끄러미 바라본 우로스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멀뚱히 서 있던 경비병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대들은 저 성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인가? 사악한 이교도들을 처단하는 영광된 일이라네.”
“저희는 이곳의 경비를…….”
“흠, 이곳에는 이단 심문관도 있고, 안에 대기하고 있는 성기사들도 있다네. 내가 지켜볼 터이니 가보게나.”
“…넵.”
마지못해 대답하는 경비병들을 바라본 우르스가 혀를 끌끌 차며 프란시스에게 말을 건넸다.
“저리 겁이 많아서야. 이교도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순교를 해도 영광이고, 만약 승리를 거머쥔다면 그 또한 영광 아니겠는가?”
“하하, 그렇죠.”
“그런데 자네는 왜 영광된 길을 버리려 아니, 버린 것인가?”
“……?”
“아닌가? 나는 그대가 저 버러지 같은 이교도들과 붙어먹은 것을 알고 있는데 말이야.”
“……!”
화들짝 놀란 프란시스를 향해 품에서 단검을 꺼내든 우로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심문을 하듯 재차 질문을 건넸다.
“아닌가? 프란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