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거친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땅으로 내려오자 자그마한 강태식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바싸고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호오, 그대가 직접 온 것이오?”
“오랜만이라고 인사할 필요는 없겠지? 얼마 전 7 아르카니아에 나타났었으니까.”
“그런데 그 모습을 이렇게 함부로 드러내도 괜찮은 것이오? 이곳은 많은 신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말이오.”
바싸고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고양이가 쥐 생각한다니, 지금 딱 그 꼴이지 않은가?
앞발로 변한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며 바싸고에게 말을 건넸다.
“채널이 꺼진 것도 모르나 봐?”
“끌끌, 재밌구려. 그런데 그대가 생각보다는 똑똑하지 않은 모양이오.”
“무슨 소리지?”
“네놈의 힘으로는 날 막을 수 없으니까!”
“……!”
말을 마친 바싸고는 히죽 미소를 지으며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건 꽤 위험한데?
확실히 강태식의 영혼을 흡수한 뒤 현재의 공간을 제어할 수 있는 간섭력이 많이 늘었다.
그때 성진아의 옆에 서 있던 루크레시아가 재빠르게 날아오르더니 마력 사슬을 바싸고에게 던지며 외쳤다.
“움직이지 마라!”
“끌끌, 시간에 간섭하는 힘이 적은 그대는 날 막을 수 없소!”
바싸고가 저렇게 친절한 놈이었나?
내가 바싸고라면 그냥 무시하고 마력을 끌어모으는 데 집중했을 텐데….
바싸고와 루크레시아가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을 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성진아가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관리자님인가요?”
“네.”
“지금 이게 원래 모습이에요?”
“네, 혹시 놀라셨나요?”
“조금요.”
성진아는 실제로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
하긴, 그녀에게는 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놀랄 만도 하지.
일단,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바싸고를 처리해야 하기에 성진아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루크레시아 님은 오래 못 버틸 겁니다.”
“루크레시아가 바싸고보다 더 상위의 신 아닌가요?”
“음, 그건 맞는데… 설명하려면 굉장히 복잡하거든요? 저도 얼마 전에 들은 거라서요. 혹시, 다중 차원 이론은 알고 있으신가요?”
“멀티유니버스?”
“어, 음… 대충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거예요.”
물론, 영화에서 나오는 다중 차원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느 정도 맞는 부분도 있다.
세상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다는 것까지는 맞았으니까.
물론, 나 역시 카르나 님에게 듣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몰랐다.
행성끼리 나뉘는 것까지는 이해했어도 그 행성을 다시 1계, 2계 이런 식으로 나누는 사실은 처음 들었으니까.
다른 차원의 신에 관해 물어볼 때마다 이계라고 말해서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인 줄 알았지만, 물리적 거리로는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꽤 흥미로웠다.
허나, 지금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성진아에게 설명해줄 방법은 지구에서 가장 유행하던 영화에 나오던 이론이었다.
“아무튼, 그 차원과 시간 간에 행동할 때. 간섭력이라는게 생깁니다. 이곳에서 가장 간섭력이 강한 건 성진아 씨와 강태식이에요. 반대로 가장 약한 건 아무래도 2계에서 온 루크레시아 님이겠죠?”
“이해했어요. 한마디로 원래 가진 힘은 더 강한데, 여기서는 아니라는 소리죠?”
“네.”
“알겠어요.”
고개를 주억이는 성진아를 잠시 바라본 뒤.
그녀에게 재차 말을 건넸다.
“성진아 씨.”
“네.”
“저를 믿으시죠?”
“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그녀의 눈빛은 결의에 차 있었다.
어떠한 불구덩이라고 해도 스스럼없이 들어갈 것 같은 그녀의 결의에 찬 표정을 바라보며 말을 마저 이었다.
“이거 받으세요.”
“이, 이건?”
“복제품이 아닌 진짜 천부령입니다.”
“…제가 이걸 쓸 수 있나요?”
“음, 쓰지는 못할걸요?”
“……?”
황당한 표정을 지은 성진아가 날 물끄러미 올려다볼 때 재차 말을 건넸다.
“아! 그걸 쓰는 건 제가 할 겁니다. 성진아 씨는 그걸 가지고 바싸고의 몸에 들어가는 거예요.”
“……?”
“아! 이건 진짜 저를 믿으셔야 해요. 제가 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루크레시아가 열심히 바싸고를 속박하고 있지만, 머지않아서 풀릴 것이다.
강태식의 영혼을 흡수하고 간섭력이 강해진 바싸고를 외부에서 처리하는 건 어렵다.
사실, 내가 온다고 해서 바싸고를 물리적으로 이길 수는 없다.
다만, 성진아를 바싸고의 내부로 이동시킬 수 있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곳에 온 것이지.
조금 민망하지만 내가 바싸고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는 동안 성진아가 바싸고의 내부에 천부령을 놓고 오면 나와 이어진 마력의 끈으로 천부령을 오버드라이브시킬 수 있다.
바싸고의 몸에서 강태식의 영혼을 강제로 끄집어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므로 여기까지 온 것.
그때 성진아가 천부령을 만지작거리면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마리가 이르카님 별명이 구라쟁이라던데…….”
“그거 다 구라입니다.”
“…….”
“마리가 구라쟁이예요.”
조금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을 때 성진아가 날 바라보더니 활짝 웃으며 말을 건넸다.
“믿을게요.”
“진짜 마리가 구라쟁이…….”
“저는 이르카 님을 믿어요.”
채앵-!
그때였다.
바싸고를 속박하고 있던 사슬이 깨지면서 루크레시아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크윽!”
“끌끌, 내가 말하지 않았소. 그대의 힘으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고! 이제 모두 파멸을 맞이할 시간이오.”
“어이~ 바싸고, 너무 유치하지 않아? 무슨 중2병 감성도 아니고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냐?”
“……?”
“유치하잖아. 게다가 루시퍼 님처럼 어린 소년의 모습을 좋아하면 몰라. 다 늙은 할배 같은 모습을 하고서는 파멸이 어쩌고저쩌고 아오, 내 손이 어디 갔나 했더니 오그라들어서 펴지지 않아요.”
실제로 루시퍼 님이 중2병의 화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낯 뜨거운 말을 즐겨 사용하는 건 유명했다.
하지만 그건 나름 어울리지 않던가?
딱 그 나이 또래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다들 손발이 오그라들면서도 납득이라도 했지.
“생각해봐. ‘파멸을 맞이할 시간이오!’라니? 와, 이건 무슨 영화 대사도 아니고, 아니지 영화 대사라고 해도 유치하다고 해서 사람들 손발이 죄다 퇴화할 거 같은데? 어디서 배운 거야? 설마 멋있다고 생각해서 혼자 연습한 거야?”
“건방진 도마뱀 자식! 네놈의 주둥이를 찢어주마.”
“주둥이가 아니라 아가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 지금 사람 아니잖아? 아, 너도 사람이 아니지? 하긴, 사람이라면 스스로 목매달고 죽을 거야.”
“……?”
“쪽팔리잖아?”
“찢어 죽이겠다!”
“그렇게 개폼 잡고 있을 시간에 덤벼 이 새끼야.”
도발은 성공인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바싸고가 내게 달려드는 순간.
[나, 이르카시우스 엔카나시온이 명하노니. 그대를 간섭하는 시간과 육체의 제약을 벗어나리라.]
룬마법을 발동시켜 품 안에 있던 성진아를 바싸고에게 이동시켰다.
“죽어라!”
“꼭, 그렇게 유치하게 말한다니까?”
말은 태연하게 했지만, 바싸고의 주먹에 실린 마력을 확인하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거 성진아가 빨리 천부령을 놓고 오길 기다려야겠는걸?
* * *
이르카가 바싸고와 격돌한 그 순간.
슈욱-!
마치 형체가 없는 영혼처럼 모습이 변한 성진아가 바싸고의 내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한 영혼의 모습처럼 변한 성진아는 모든 게 투과되는 자신의 팔다리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마리의 말대로 된 것 같은데… 이게 어디에 있는 거지?’
루크레시아가 나타난 뒤.
이르카와 사탄 그리고 루크레시아가 바싸고를 낚을 계획을 짜고 있을 때.
사건의 당사자지만 한걸음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던 성진아가 마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너 이르카가 좋아?’
‘응.’
‘왜? 구라쟁이에 사기꾼이잖아. 너한테도 계약 조건으로 사기 쳤다면서?’
‘그건 사기가 아니야. 나한테 해주신 게 얼만데 그걸 사기라고 하겠어? 그런 놈이 있으면 주둥이를 찢어놔야지.’
‘그래? 그런데 네가 대악마가 될 때쯤이면 이르카는 이미 신이 되어있을 텐데 쟤 마음의 반을 얻을 수 있겠어? 너도 봤겠지만, 쟤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애 있잖아. 안젤라라고.’
‘영웅은 삼처사첩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했어.’
‘그건… 네가 하기엔 조금 이상한 말 같은데?’
‘네가 처음에 이르카 님의 딸이라고 했을 때 나는 당연히 안젤라 님하고 사이에 낳은 딸인 줄 알았어. 아니라면서? 그러면 뭐 어때. 첫 번째는 안젤라 님이라고 해도 두 번째는 내가 되면 되는 거잖아.’
‘너 의외로 순정파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 이르카한테 빠진 거야?’
‘간단하잖아. 이 빌어먹을 세상에 버림받았을 때 유일하게 날 도와준 게 이르카 님인데 두 번째면 어떻고 세 번째면 어때.’
‘그으래? 진짜 그렇다 이거지? 그런데, 너 도와준 애들도 있지 않았냐? 한진우라던가…….’
‘진우 씨는 착한 사람이야. 나와는 다르게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지 나는 거짓된 행동으로 세상에 피해를 끼치고 또 이득을 취했잖아. 그는 나와 가는 길이 달라.’
‘흠, 좋아! 너라면 배신은 안 하겠네. 내가 너 대악마가 되는 시기를 조금 앞당겨 줄까?’
‘어떻게?’
‘이것만 기억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뒤로 이어진 마리의 말을 떠올린 성진아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당돌한 꼬맹이 같으니.”
쾅-!
콰아앙-!
그때 바싸고의 몸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르카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모양.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성진아가 재빨리 바싸고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리의 말을 따르면 흡수한 영혼은 심장 부근에 머문다고 했어.’
모두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
이곳은 성진아의 기억 파편을 구현한 곳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성진아는 강태식을 보자마자 없앨 수도 있었다.
성진아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힘을 더 증폭시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강태식의 영혼과 함께 바싸고의 영혼을 얻기 위해서였다.
자신에게 패배했지만, 4지구의 최강자였던 강태식의 영혼과 세상을 어지럽힌 대악마 바싸고의 영혼에 담긴 힘은 어마어마할 터.
그 힘을 온전히 빼앗기 위해 처음부터 마리와 짠 계획이었다.
이제 그 계획을 실행할 시간.
바싸고의 심장 부근까지 이동한 성진아가 바싸고의 안에 잠들어있는 강태식의 영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적.
그리고 영혼을 소멸시킬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을 감추며 영혼석에 봉인을 해뒀던 그의 영혼이지만, 이곳에서는 소멸시킬 수 있었다.
아니, 그의 힘을 온전히 빼앗고 흡수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성진아는 강태식의 머리에 손을 대고는 마리가 알려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성진아가 주문을 외운 지 얼마나 지났을까?
흐릿해진 강태식의 영혼이 감았던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앞에 서 있는 성진아에게 말을 건넸다.
“빌어먹을, 완전히 끝인가 보구나.”
“그래.”
“쯧, 결국은 이렇게 끝까지 처발렸네.”
“그래.”
“큭, 내 기억을 잘 살펴보라고. 네 부모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그래.”
“……?”
“이젠 지구에서 있던 일은 아무런 상관이 없어.”
“큭,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말을 마친 강태식의 영혼이 모래가 무너지듯 사르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바싸고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