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예상보다 빠른 강태식의 등장에 조금 놀랐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성진아의 반응이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애교라니.
아니, 어린아이의 말투를 따라 한 것이니 애교는 아니던가?
그때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성진아를 바라보던 안젤라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성진아 씨를 살인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이상한 말투도 쓸 줄 아네요?”
“음, 지금 본인도 상당히 부끄러울걸?”
“네?”
“봐봐, 지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잖아. 본인 스스로 수치스럽다 느끼고 있는 걸 거야.”
화면에 비친 성진아의 얼굴은 마치 고추장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건 자신도 상당히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증거.
성진아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 안젤라가 짧은 탄성을 내지르며 말을 건넸다.
“그러네요. 그런데 왜 본인도 감당하지 못할 저런 말투를 왜……?”
“보통 회귀자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이려고 하는 거지.”
“보통 회귀자들이 보이는 반응이요?”
피식 웃으며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젤라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까 나도 민망하지만, 채널에 들어온 신들한테 무슨 약장수처럼 성진아가 뭘 할 거다. 이렇게 홍보했잖아? 그거 바싸고한테 말한 거야.”
“그건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지금 저런 말투를 쓰는 거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표면적인 이유는 성진아의 부모를 살리기 위해 온 거야. 그런데 자신이 사실은 미래에서 왔고 강태식도 미래에서 왔다는 걸 회귀자들이 말할 수 있을까? 보통은 사건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게 정상이잖아?”
“아!”
사실, 미래 정보가 없는 회귀자는 회귀자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성진아가 처음 회귀할 때 판을 아예 뒤집어엎으라고 말했던 것이고 그녀는 그 임무를 성실하게 이행했다.
아예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냈으니.
지금 강태식 또한 그것에서 영감을 받아 이렇게 빨리 모습을 드러낸 것일 터.
그 말인즉슨, 강태식은 이게 진짜 과거라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성진아 역시 강태식이 계속 그렇게 여기도록 저런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었고.
그때 화면에 비친 강태식이 성진아가 아닌 그녀의 부친 성민혁에게 크게 외쳤다.
[크큭, 어이, 성민혁!]
[응? 태식이 네가 아무리 사장님 아들이라고 해도 아저씨한테 반말은 아니지 않니?]
[크크큭,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뭐 어때?]
[너랑 아저씨랑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혹시 산수 할 줄 모르니? 아니, 그 목 위에 달고 있는 거 장식품 아닐 텐데?]
[뭐?]
반문하는 강태식을 바라본 성민혁이 한숨을 내쉬더니 두꺼운 손으로 성진아의 양쪽 귀를 꼭 감싸고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산수도 할 줄 모르는 빡 대가리냐고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
[…….]
[네놈이 사장 아들이지 사장이냐? 아! 그리고 네놈이 말하기 전에 말해주는 건데, 나는 사장이라고 해도 앞에 대놓고 쌍욕 박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 싹수없는 새끼야.]
이제 성진아의 성격이 누구를 닮았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한 성격 하던 인물이었던 것.
그런데 어떻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분명 그녀의 부모가 지은 죄목은 강태식의 부모를 치고 도주한 뺑소니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성민혁은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사장을 치고 뺑소니를 칠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강태식이 한숨을 내쉬며 읊조리듯 말을 건넸다.
[재미없어졌어.]
[뭐?]
탕-!
저런 미친 새끼가?
강태식도 정상인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과거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면서 총을 가져왔다고?
저런 꼬맹이의 몸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강태식과 성민혁을 번갈아 바라봤다.
* * *
갑작스럽게 강태식이 품에서 꺼낸 권총을 바라본 성진아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성민혁과 그녀의 어머니 이현아는 기억 속 인물이었다.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그건 현실이 아니며,
자신의 기억으로 충분히 복구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조금 수치스럽지만, 최대한 어린아이처럼 연기하던 성진아는 강태식이 꺼낸 총의 총구가 불을 뿜자마자 몸을 쏜살같이 날렸다.
총알이 강민혁의 몸을 꿰뚫기 위해 날아갔지만,
성진아의 손이 더 빨랐다.
손으로 총알을 막아낸 기행을 벌인 성진아가 강태식을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말을 꺼냈다.
“아직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나 봐?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걸 보니까.”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그것보다 네년이 망쳐놓은 몸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얻은 게 더 기분 좋은데?”
“축하해. 그리고 나도 기분이 좋은걸?”
“뭐?”
“이번에 또 새로운 장난감을 얻었잖아? 그때 하던 놀이를 또 해야지?”
“…….”
잠시 말을 멈춘 강태식이 성진아를 노려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네년도 힘이 그대론가 보네? 이거 좀 이상하잖아? 과거로 돌아왔는데 힘이 이렇게 남아있는 일도 있던가?”
순간 성진아가 할 말을 잃었다.
강태식의 지적은 당연하였다.
지금 성진아와 강태식은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현재의 시간에 있는 성진아의 기억을 구현화시킨 장소에 있는 것이니 힘을 잃지 않은 것도 당연한 것.
그때였다.
[이르카: 강태식한테 너 같은 빡대가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 왜곡이라고 말해주세요. 아마, 강태식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바싸고는 이해할 겁니다.]
[성진아: 시간 왜곡이요?]
[이르카: …아? 이건 나중에 궁금하시면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진아: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 말할 시간은 많을 텐데요.]
이르카와 대화를 마친 성진아가 강태식을 바라보더니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하는 고차원적인 일이란다. 이 빡대가리야.”
“설마 관리자냐?”
“왜? 아, 네 관리자는 없지?”
“관리자가 없어도 일 대 일로는 원래 너한테 이겨.”
“그래? 그런데 그땐 왜 졌니?”
“…….”
강태식을 한껏 놀린 성진아는 주변을 살피면서 생각했다.
‘슬슬 바싸고라는 놈이 지켜보고 있다면 나타날 때가 된 것 같기도 한데? 2계에서 왔다는 신들이 이곳을 4지구와 연결한다고 했으니…….’
그때 성진아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치 뭔가 머리를 헤집으며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 것.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바싸고라는 녀석인가?’
성진아는 처음에 이르카가 미끼를 쓰자는 말에 황당한 기분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미끼를 자신이라고 했을 때는 살짝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끼로 쓸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곳에 오기 전 이르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싸고는 성진아 씨와 제가 관리하는 다른 회귀자들을 궁금해하는 게 분명했습니다. 얼마 전에 조금 일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성진아 씨가 다시 회귀한 것처럼 꾸미면… 녀석은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 계획은 확실히 들어맞았다.
바싸고라는 녀석이 이곳을 4지구의 과거로 착각하고 들어온 것이 느껴졌으니까.
성진아가 기감을 집중해 주변을 살필 때.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민혁이 말을 건넸다.
“진아야?”
“응.”
“방금 태식이가 한 말이 뭐니? 그리고 네가 한 말은 또 뭐고?”
“어, 음….”
그녀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이르카의 메시지가 재차 날아왔다.
[이르카: 아직, 말하지 마세요. 어차피 당신의 기억에서만 벌어지는 일입니다.]
[성진아: 그런가요…….]
[이르카: 사실은, 성진아 씨의 기억 파편을 구현화해서 부모님을 만나 뵙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써서 죄송합니다.]
[성진아: 아니에요, 아! 그리고 바싸고라는 녀석이 들어온 것 같아요. 뭔가가 머리를 헤집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르카: 바싸고로군요. 다른 신들에게 말을 하겠습니다. 이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성진아: 네. 알았어요.]
메시지를 끝내고 성진아가 몸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이르카: 부모님은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성진아: 네?]
[이르카: 일을 끝마치고 인사는 해야죠.]
[성진아: 감사합니다…….]
성진아가 이르카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나자 성민혁과 이현아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살핀 강태식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건넸다.
“흥! 관리자라는 놈이 꽤 힘을 쓰나 보네? 큭, 하지만 나까지 과거로 보낸 건 그 자식의 실수야. 네년은 여기서 모가지가 날아갈 거니까.”
“태식아. 나는 네가 참 좋다.”
“……?”
뜬금없는 성진아의 말에 강태식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강태식을 위아래로 훑어본 성진아가 피식 웃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사실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고 있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거든? 그런데 변치 않는 네 모습이 참 좋다. 또 죽여도 죄책감이 덜할 거 같거든.”
“미친년. 네년이 죽인 사람이 몇인데……!”
쉬익-!
강태식이 말을 채 마치기 전.
성진아가 비호처럼 날아들며 외쳤다.
“난 사람 죽이는 거 싫어한다니까!”
“이런 미친년이!”
순식간에 날아간 성진아가 발로 강태식을 걷어찼다.
쾅-!
이내 양팔을 교차시킨 강태식이 그녀의 발차기를 받아내고는 폭음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뒤로 쭉 밀려 나갔다.
자그마한 체구를 지닌 어린아이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뽐낸 둘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어둠 속에 숨어서 강태식과 성진아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바싸고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시간 왜곡 때문에 저 둘이 저렇게 힘을 가지고 과거로 왔다? 흠, 뭔가 이상하긴 한데… 함정일까?’
성진아와 강태식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을 때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물쩍거리다가는 성진아를 놓칠 가능성이 너무 컸다.
그녀는 이 일을 끝내고 지옥으로 가는 것이 확정되어있었기 때문.
이 천금과도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바싸고가 뱀과 같은 눈으로 성진아를 바라봤다.
사실, 바싸고가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예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미래는 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무료한 기분에 살펴보던 4 지구에 성진아가 처음 등장하고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
바로, 그녀의 미래를 볼 수 없었던 것.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져 그녀의 관리자를 찾아보고는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바싸고는 이르카의 과거는 볼 수 있었다.
현재도 보였지만, 미래가 마치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게다가 가면 갈수록 현재도 안개가 낀 것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 현상은 이르카가 관리하는 요한과 아르한에게도 똑같이 발생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이것이 이르카와 관련되었기에 발생한 일인지 아니면, 성진아와 요한, 아르한 덕분에 발생한 것인지는 그도 알지 못했기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이르카를 함정에 빠트려 제거할 계획을 세운 것.
하지만, 이르카는 함정을 무사히 빠져나오며 성배까지 구해왔다.
그 뒤로 바싸고는 요한과 아르한에게 마수를 뻗칠 계획을 세웠지만, 성진아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줬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강태식이라는 녀석의 몸을 차지해야겠어.’
생각을 마친 바싸고가 강태식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 그림자의 형태로 변해갈 때였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
“……!”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루크레시아…….”
“님은 붙여야지 이 새끼야.”
쾅-!
루크레시아의 주먹이 빛처럼 변해 바싸고의 얼굴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