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화면에 비친 성진아의 모습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차오르는 긴장감에 양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과연 괜찮을까?
이 방법에 녀석이 낚일까?
계속되는 걱정에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싸고를 잡기 위해 내가 그녀에게 제안한 계획이긴 했지만 이건 너무 위험한 계획이었으니까.
물론 낚일 확률은 높다.
그가 채널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놨음에도 7 아르카니아에서 요한과 아르한의 앞에 나타난 것을 보면 분명히 내 채널을 염탐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루크레시아와 함께 그를 낚기 위한 함정을 파놓기로 한 것이지만, 조금 위험한 계획이었기에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화면에 비친 성진아를 바라보며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어때요? 7살짜리 꼬마 아이로 돌아간 기분은요?]
[성진아: 으음…. 그리 좋지는 않네요. 옷도 좀 그렇고, 몸이 너무 작아요.]
[이르카: 네, 알고 있습니다. 많이 불편하시겠지만, 이제부터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세계에는…….]
[성진아: 훗, 알고 있어요. 이르카 님.]
[이르카: 네.]
말을 마치고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부서진 영혼석을 힐끔 바라봤다.
바로, 강태식의 영혼이 담겨있던 영혼석이었고,
그의 영혼도 성진아와 함께 이동한 상황이었다.
옆에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젤라가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성진아 씨의 정신력이 버텨줄까요?”
“버텨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 아니, 버틸 거야. 마리가 도와주고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기억 파편을 구현화해서 영혼을 집어넣는다니…….”
말을 마친 안젤라는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진아를 바라봤다.
기억 파편.
기억이라는 것은 스스로 쌓이고 지워진다.
가끔가다가 느끼는 데자뷔(deja vu)와 같은 현상이 있지 않은가?
처음 가본 곳인데 이전에 와본 적이 있다고 느끼거나 처음 하는 일을 전에 똑같은 일을 한 것처럼 느끼는 것 같은 경우 말이다.
사람의 뇌는 생각보다 뛰어나다.
생각보다 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스치듯이 한번 본 것도 대부분 잊어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저장하는데, 이런 정보들이 잘게 파편처럼 갈라져서 뇌에 저장이 되고 그다음에 더 잘게 갈라져 영혼에 각인이 된다.
이건, 사람이 아니,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필시 미쳐버릴 수밖에 없으니까.
모든 기억을 저장할 수 없어서 잘게 나눠서 잊어버리는 것이었고, 그것을 보통 기억 파편이라고 불렀다.
그 기억 파편들이 모이면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을 정도였고 지금 하고 있는 것은 그 기억 파편을 모아서 구현화한 것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워있는 성진아와 손에서 하얀빛을 뿜어내며 그녀의 머리를 치유하고 있는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리, 실수하면 안…….”
“시끄러워, 지금 정신 집중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래. 알았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실수하지 않게 신경 쓰라고.”
“응. 알았어.”
퉁명스럽게 대답한 마리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주고는 시공의 룬을 이용해 그녀의 시간을 조금씩 조정하기 시작하며 채널의 메시지창을 열었다.
[대다수 신이 성진아의 복수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냐며 다시 채널이 열린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어린 성진아의 모습을 본 일부 대악마들이 콧김을 내뿜습니다.]
채널에는 관객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바람잡이인지 모르는 신들이 대거 입장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해하는 신들은 질문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성진아가 갑자기 왜 꼬맹이가 된 것이냐?
그녀의 복수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끝이 난 상황 아니냐? 등의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이제 슬슬 약을 팔아볼까?
[이르카: 관리자 이르카입니다. 너무 질문이 많아 일일이 대답해드리지 못하는 점은 미리 사죄드립니다.]
[왜 성진아가 저런 꼬맹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신들이 질문을 퍼붓습니다.]
[이르카: 그 점을 설명해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이렇게 질문이 많으면 제가 대답해드리기 어렵습니다. 잠시 질문을 멈춰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이내 메시지창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역시 궁금한 걸 못 참는 건 신이나 인간이나 똑같지.
[이르카: 네, 성진아의 복수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굽니까? 평범한 회귀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온갖 기행을 펼친 그녀가 과연 복수를 한 번 했다고 해서 만족했을까요?]
마치 대회를 진행하는 방송인처럼 목소리를 길게 늘어트리며 재차 말했다.
[이르카: 그게 아니죠~! 그런 것에 만족하면 성진아가 아니죠! 여러분이 바라는 모습은 또 다른 복수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강태식은 그녀에게만 죄를 지은 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녀의 부모에게도 죄를 지었죠!]
말을 마치고 한참 동안 뜸 들이듯 조용히 그들의 반응이 달아오를 때까지 기다릴 때.
[채널을 지켜보던 모든 신이 빨리 말해달라며 아우성을 칩니다.]
[아우성을 치는 신들의 모습에 또 다른 신들이 흥미를 보입니다.]
왔다.
기다리던 때가 왔음을 깨닫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이르카: 그녀는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가길 원했습니다! 돌아가서 그녀의 부모를 구하는 것이 새로운 소원으로 계약이 된 것이죠! 하지만, 그 일에는 제약이 있었으니… 바로, 그 시간에 강태식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 신분도 아시겠지만, 미래에서 바뀐 사건이 과거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니 말이죠! 그래서 강태식의 영혼까지 풀어놨습니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강태식과 과거를 바꿔 부모를 구하려는 성진아! 과연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함께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나자 메시지창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근래 가장 재밌게 본 성진아의 복수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흥분한 신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화면에 비친 어린 성진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진짜 같겠지?”
“네, 당연히 그렇게 보일 것 같아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빨리 해치워야 해. 안 그러면 4 지구의 시간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잘될 거예요.”
“잘돼야지.”
“그리고, 지금 바스테트 님이 4 지구를 잠시 숨기셨대요.”
“그래. 그래야 바싸고가 저곳이 성진아의 기억인지 모르고 들어오겠지.”
루크레시아의 말을 들어봤을 때 아마도 바싸고는 회귀자들을 궁금해하는 것이 분명했다.
바싸고가 궁금해하는 회귀자가 과연 요한과 아르한뿐일까?
아니, 4 무림계에 갔을 때 바싸고는 성진아의 채널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요한과 아르한의 앞에 나타난 것을 봤을 때.
녀석은 성진아 앞에 나타날 이 짧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이유도 제대로 붙여놓지 않았던가?
성진아가 과거로 돌아가 강태식을 저지하고 자신의 부모를 구한다.
미래에서 한번 했던 복수를 과거에서 또다시 한다.
그리고 강태식 같은 경우에 미래에서 한번 패했던 패자의 부활과 같았기에 바싸고의 흥미를 더욱 끌 수밖에 없다.
녀석을 이용하도록 만들려고 일부러 영혼을 풀어놓은 것이니까.
그때 안젤라가 침대에 누워있는 루크레시아를 비롯한 다섯 신을 바라보며 조심히 말을 건넸다.
“그런데 저분들이 잘하실까요?”
“잘해야지. 그리고…….”
“그리고요?”
“아, 아냐.”
궁금해하는 안젤라에게 만약 일이 잘못 돌아가면 내가 직접 들어가겠다는 말을 아꼈다.
설마 그럴 일이 생기겠어?
* * *
자신의 어린 시절 몸으로 돌아온 성진아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르카 님이 바싸고라는 악마를 사냥한다고 했지? 그래서 강태식의 영혼도 풀어놨고…….’
강태식의 영혼을 풀어주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싸고라는 사고뭉치 악마를 잡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이유가 필요했으니까.
과거의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을 바꿔봤자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타임 패러독스(Time Paradox)
즉, 시간 역설(時間逆說)에 관한 이야기였고,
성진아의 부모를 미래에 되살리기 위해서는 강태식이 있는 과거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것이 실제 지구의 시간을 돌린 것이었다면 가능하다는 말이지만 말이다.
복잡한 설명을 골똘히 고민하면서 열심히 말해주던 이르카의 모습을 떠올린 성진아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걱정할 건 없겠네, 신이 다섯 명이나 왔는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일단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그때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건네왔다.
“진아야 무슨 재밌는 일 있어?”
“응? 아니, 오랜만에 아빠하고 엄마 얼굴 보니까 좋네.”
“응? 오랜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은 온종일 우리 진아랑 같이 있었는데?”
남자의 의아한 대답에 옆에 서 있던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건넸다.
“그거야 당신이 맨날 게이트 이상 현상에 관해서 연구한다고 집에 안 들어오니까 그런 거죠.”
그때 성진아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뭐? 게이트 이상 현상? 우리 아빠가 이런 걸 연구했었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성진아의 기억에 그녀의 부친은 정신과 박사였다.
강태식을 심문했을 때, 성진아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이유를 물어봤고 강태식의 대답은 하나였다.
‘자신의 연구를 방해했다.’
답답한 심정에 성진아가 강태식에게 어떤 연구냐고 물어봤을 때 그는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연구라고 대답했고, 성진아는 확실히 자신의 아버지라면 그런 일에 얽혔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부친이 하는 말은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과 같았다.
‘강태식, 이 새끼 거짓말을 해? 다시 한번 찢어 죽여주마.’
그때 성진아의 부친이 머리를 긁더니 우물쭈물 대답했다.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새벽에 들어와서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새벽같이 나가니까 애가 아빠 얼굴을 볼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음, 난 그래도 맨날 봤는데…….”
“어휴, 당신이 본 건 자는 진아 얼굴이고요. 진아가 오늘 아침에 아빠 맞냐고 물어봤던 것도 까먹었어요?”
“어? 하하핫, 그랬던가? 미안하다 진아야. 아빠가 조금 바빠요. 세상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거든.”
부친의 대답에 성진아는 표정을 굳히더니 평소대로 질문을 건넸다.
“아버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
“우, 우아! 아, 아빠는 세상을 구하는 일을 하는 고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데…….”
“엄, 엄마가 보는 드라마 따라 해봐써!”
자신이 현재 7살 아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평소대로 말을 건넸다가 필사적으로 수습한 성진아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그녀의 부친이 턱을 쓸어내리며 골똘히 고민하더니 말을 건넸다.
“이거 어려운 말이라. 우리 진아가 알아들을 수 있나 모르겠는데?”
“치잇! 진아 똑똑하거등?”
“그래? 좋아! 이거 알아들으면 아빠가 진아 선물 사준다! 쉽게 설명해줄 게 잘 들어? 게이트 이상 현상이란 건 말이야…….”
그때였다.
“거기까지.”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성진아의 부친 성민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건넸다.
“엥? 태식이 네가 여긴 무슨 일이니?”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꼬마 강태식이었다.
강태식은 성민혁의 말은 무시한 채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성진아에게 말을 건넸다.
“꼬맹이 흉내는 그만하지 그래?”
“웅? 아빠 쟤가 모라는 고얌?”
“……?”
성민혁의 손을 붙잡고는 갑자기 혀가 반 토막이 난 것 같은 말을 하는 성진아를 바라본 강태식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