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마음을 반만 달라니?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뭐?
자신의 가르침을 제대로 써먹어?
사탄은 혹시 모를 바싸고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같이 온 양반이 아니던가?
해명을 요구하든 황망한 눈빛으로 사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날 빤히 바라보던 성진아가 조용히 입을 연 것.
“싫으세요?”
“네?”
“사탄 님한테 들었어요. 이르카 님은 항상 목적을 이루고 계약이 끝나는 회귀자들한테 이제부터 자신을 위해 살라고 하셨다면서요? 방황하지 말고 삶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라고요.”
“그, 그렇죠.”
그거야 당연히 목적을 이뤘다고 회귀가 당장 끝나는 것도 아니거니와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니므로 해주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회귀자들은 삶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 혹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자에 대한 복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목적을 이루고 허무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물 흘러가듯 바람 흘러가듯 살아가다가 죽는 녀석들을 봐왔기 때문에 해주는 말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목적을 이루고 허무하게 죽는 결말은 그리 보기 좋지 않았기에…….
떨떠름하게 대답을 하고는 성진아의 눈을 바라봤다.
“그래서 결정했어요. 물론, 이게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살려고 해요.”
“마음이 가는 대로요??”
“뭐, 첫 번째가 아니면 어때요.”
“네?”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지.”
“……?”
아니, 첫 번째가 아닌 건 뭐고 또 할 수 있다는 건 뭔데?
그때 성진아가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게걸스럽게 꺼내먹고는 머리를 두들기고 있던 마리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당신의 아이가 너무 귀엽더라고요.”
“……?”
“알고 있었어요. 처음 계약을 하러 갔을 때 옆에 계시던 분이 있다는 걸요. 그래서 포기했었는데 사탄 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아니, 뭘 포기했었는지…….”
“신계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고요.”
“……!”
난 죽었다.
안젤라가 이 모습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을 텐데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아니지, 내가 왜 변명을 해?
이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그냥 성진아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 아니던가?
그리고 마리가 내 아이라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이던가?
할 말을 마치고 볼에 홍조를 띠고 있는 성진아를 뒤로한 채 옆에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탄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설마 마리가 제 아이라고 사탄님이 그러셨습니까? 아니죠?”
“응. 나 아냐.”
어디서 오리발을?
뻔뻔하게 말을 건넨 사탄을 바라보며 재차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성진아 씨가 왜 이런 오해를 하고 계시는 거죠?”
“그거야 마리가 네 딸이라고 말했으니까 그랬지.”
“네?”
“제 입으로 말한 거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마리 녀석의 장난이었구나.
어쩐지 성진아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꺼내나 했는데 모두 저 녀석이 원흉이었다.
그녀는 마리가 내 아이라고 착각하고 이런 말을 꺼낸 것이 분명했다.
나와 사탄의 대화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진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성진아 씨가 뭔가 오해를 하셨나 본데, 저는 아직 혼자입니다.”
“네? 그럼 저 아이는?”
“아론다이트랑 같이 얻은 아이예요.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 아이는 아닙니다.”
“분명히 자길 태어나게 해준 게 이르카 님이라고 했는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태어나게 해준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게 해준 거죠. 저 녀석이 제 신력의 일부를 가져갔으니까요.”
“……!”
말을 마치자 크게 당황한 듯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오해가 조금 풀렸으려나?
물론, 여기서 싫다고 거절하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안젤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안젤라?]
[안젤라: 말씀하세요.]
[이르카: 이건 전적으로 일방적인 오해야. 알고 있지? 마리가 장난친 걸 사탄님이 받아준 거 같은데…….]
[안젤라: 괜찮아요.]
[이르카: 괘, 괜찮아?]
[안젤라: 네, 오히려 목적이 생기는 게 더 좋죠. 사실 쟤가 목적을 이루고 난 뒤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더 불안했거든요. 그리고 이걸로 이르카 님이 계약비율 사기 친 것도 다 무마시킬 수 있고요.]
[이르카: …….]
[안젤라: 그러겠다고 하세요. 대신, 지옥에 가서 대군주급으로 성장하면 받아주겠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이르카: 대군주급이라니… 그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
[안젤라: 대군주가 조금 그러면, 대악마급이라도 괜찮아요.]
[이르카: 성진아 씨 재능이면, 대군주는 몰라도 대악마는 한 이삼천 년 수련하면 가능할 텐데?]
[안젤라: 결혼이라는 게 해피엔딩이 될지 헬피엔딩이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때쯤이면 괜찮겠죠.]
[이르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안젤라: 드라마요.]
[이르카: 어? 어…….]
집무실에 돌아가면 지구의 드라마가 나오는 채널부터 바로 삭제해야겠다.
특히, 성진아의 나라인 한국의 드라마들 말이다.
뭐가 그리 막장이 많은지 아직 결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애가 저런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다니 말이다.
저런 건 해본 사람도 조심스레 하는 말인데…….
그리고 대악마급으로 성장하라니?
머리는 조금 달리지만, 신체 능력만큼은 역대 최고급 천재라고 평가받던 레이트라 녀석이 지옥에 간 것이 벌써 천 년 전이다.
그런 녀석이 계속 죽도록 수련해서 올라선 위치가 이제 겨우 군단장급인데 대악마라니…….
성진아가 아무리 뛰어나도 대악마 승급은 쉽지 않을 터.
미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사탄을 슬쩍 바라보고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성진아 씨.”
“네, 네?”
“그래요. 회귀가 끝난 다음에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게 중요하죠. 사탄님의 말씀도 틀린 게 아니고요.”
“그, 그렇다면!”
“네, 계약하죠. 제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대악마가 되세요.”
“네?”
황당해하는 그녀와 대악마가 되라는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탄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대악마가 되신다면 그 마음 받아들이겠습니다.”
“…….”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맞아요. 저는 너무 많이 봤어요. 목적을 이루고 허무함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녀석들을요. 사실 그래서 가장 불안했던 것도 성진아 씨였고요.”
“어째서죠?”
“목적이 복수니까요. 처음 저한테 말했던 모든 괴물과 헌터의 말살 목적도 복수 아니었던가요? 그게 진짜 목적은 아니었겠지만요.”
“아, 그건…….”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사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성진아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호오? 강태식에 대한 복수가 네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냐? 모든 괴물과 헌터의 말살이라… 재밌는 목적이었구나.”
“사탄님, 모든 괴물을 없앨 수 없는 건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이거 사탄 님의 직속 상관님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크흠, 그건 알고 있다. 영혼석을 이용해…….”
영혼석의 비밀에 대한 말을 꺼내던 사탄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진아를 힐끔 바라보며 말을 줄였다.
아마도 영혼석의 비밀을 말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한 모양.
그런데 이미 쟤 알고 있는데?
입가에 살짝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강태식을 영혼석에 영구 봉인하는 방법까지 알려줬고요.”
“커흠, 그래? 아무튼, 영혼석이야 천계의 그 양반하고 내 위에 있는 그 양반이 회의해서 만든 것이고 7계 신께서 만들어 보내주는 것이니 당연히 없앨 수는 없지, 폭증하는 인구수…….”
“그것도 말했습니다.”
“…참 많이도 말했구나.”
“성진아 씨가 지옥에 가는 것은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으니까요. 지금의 지옥은 진짜 지옥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지요.”
“그래, 폭증하는 인구수를 조절하기 위해 괴물을 만들어 게이트를 통해 보내고, 고갈되어가는 에너지원을 대체할 수단을 만든 것은 그 양반들의 회의 결과였지. 게다가 죄지은 놈이 한둘이어야지. 지옥의 감옥이 예전에는 아주 미친 듯이 미어터졌었다니까?”
이내 자신이 너무 많이 떠들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탄이 헛기침하며 성진아에게 질문을 꺼냈다.
“그래, 이건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과 색다른 계약을 한 것이로구나? 네 진짜 목표는 강태식에게 복수하는 것이었고?”
“아뇨. 그건 사소한 목적이었어요.”
“응?”
자기 목적을 숨기고 나와 계약을 한 뒤.
강태식에게 복수하는 것이 진짜 목적 아니었나?
황당해하는 사탄과 똑같은 표정을 지은 내가 성진아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게 사소한 목적이었다고요? 그렇다면 괴물과 헌터를 모두 죽이는 게 진짜 목적이었단 말입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마지막 원자력 발전소가 사라진 게 30년 전이고 지금은 그것을 대체하는 영혼석 발전소부터 해서 자동차 연료까지… 이미 괴물에게서 나오는 영혼석이 없다면 이 세상은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괴물을 없앨 수 없는데 괴물을 사냥할 헌터가 없으면 안 되죠.”
성진아가 이렇게 이성적인 생각도 할 수 있었나?
내가 아는 성진아가 아닌 것 같은 기분에 머리를 긁적이며 질문을 건넸다.
“그렇다면 진짜 목적은 뭐였죠? 이건 저 역시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이미 사탄을 따라서 지옥에 가기로 했고, 조금 힘든 조건을 붙였지만, 그녀의 새로운 계약요청도 받아줬다.
그런데도 떠오르지 않는 추가 보상 메시지에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꼭 추가 보상을 받고 싶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관리자로서 책임감이다.
계약자가 진짜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계약을 종료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관리자의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
아마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한 것이겠지.
과연 그녀의 진짜 목적은 뭐였을까?
그때 침묵하고 있던 성진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꺼냈다.
“없어요.”
“제 앞에서 거짓말하면 다 티가 납니다.”
“거짓말 아니에….”
“지금도 거짓말입니다.”
“…….”
평범한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이 되고 싶다 같은 허무맹랑한 소원이라고 해도 소원으로 처리되는 것이니까.
그때 성진아가 품에서 영혼석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강태식의 영혼이 벌을 받고 있는 영혼석을 꺼내 들고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강태식의 영혼석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자의 영혼을 가두기 전 수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어요.”
갑자기 이런 얘기를 왜 꺼내는 걸까?
씁쓸한 미소를 지은 성진아가 강태식의 영혼석을 품에 다시 넣고서는 말을 꺼냈다.
“사실 계약을 하기 전 생각했어요. 강태식에게 복수할까? 아니면 그자를 도와준 헌터들을 모조리 죽일까? 여러 가지 고민을 했죠.”
“네.”
“그 목적을 동시에 이루려면 헌터들을 죽이는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수많은 헌터들이 죽을 걸 예상했어요. 그래서 괴물들이 날뛰는 걸 막기 위해 괴물까지 없애 달라고 했던 거고요.”
“아…….”
괴물을 없애고 싶다는 게 이런 뜻이었어?
성진아는 생각보다 정상인이었네?
아니지, 나한테 뜬금없이 고백한 걸 보면 정상인은 아니지.
그때 성진아의 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갑자기 왜 저럴까?
“사실은요, 제가 회귀해서 가장하고 싶었던 거는요… 사실은.”
“힘드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억울하게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었어요.”
강태식의 손에 살해당한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는 성진아와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사탄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말을 꺼냈다.
“그러면 만나보러 가시죠.”
“흐, 흐흑 네?”
“아주 잠깐이면 가능하거든요? 어머니는 뵙고 지옥에 가야죠. 그런데 아버지는 안 보고 싶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