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서글픈 말을 들은 프란시스가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진짜 예언자를 따라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던 시각.
13지구.
제대로 된 문명이 발생하지도 않은 야만의 시대이자 신화가 태동하던 시대.
아스가르드가 모든 역량을 집중해서 모든 문명을 무(無)로 돌리고 신화의 시대로 돌아가게 한 이유이자 희망인 근육질의 사내 헤라클레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바위에 걸터앉아있었다.
‘이건 내가 예상한 게 아니었는데? 이르카 이놈은 왜 연락을 안 받는 거야.’
갑작스럽게 벌어진 이상 사태에 이르카에게 메시지를 보내봤지만, 돌아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그에게 바쁜 일이 생겨서 그러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일언반구도 없이 이런 상황을 만든 이르카를 원망하며 헤라클레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라그나로크를 해결하기 위해 아스가르드의 신들이 밟았던 길을 걸어가던 도중 갑자기 시간이 돌아가더니 또 다른 근육질의 거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
“이야, 네가 헤라클레스야? 반갑다. 나는 음… 로니라고 해!”
“…….”
“생각보다 과묵하네? 야, 내가 너보다 선배거든? 너 회귀만 몇천 년 동안 해봤냐? 처음 아냐? 그동안 관리자 일 했었잖아. 그치?”
“…….”
“뭐야, 재미없어. 그런데 너 몸이 이게 뭐냐? 왜 이렇게 말랐어? 근육도 하나도 없고. 너 이 형님 따라서 운동 열심히 해야겠다.”
“……?!”
“짜식, 내가 너 태어나기 전부터 열심히 운동했거든? 남는 게 시간인데 운동 말고 할 게 없었잖아? 그리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또 다른 근육질의 사내 로니가 헤라클레스의 자존심을 건드려 버렸다.
로니의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질의 몸을 바라보던 헤라클레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하! 내가 너보다 몸이 안 좋다고? 내가 누군지 알면서 하는 말이냐? 근육을 풍선처럼 부풀렸다고 힘이 더 좋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아닌가? 너도 지구 출신이라면서? 그러면 잘 알고 있을 텐데? 역사상 나보다 힘이 강한 존재는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뭐, 길고 짧은 거야 대봐야 아는 거 아닌가?”
“그걸 대본다는 것 자체가 하수라는 증거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렇게 헤라클레스와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이던 로니가 시선을 물끄러미 헤라클레스의 중요 부위로 옮기더니 뭔가 떠오른 듯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흐흐, 나는 결혼도 안 했다고.”
“못한 걸 안 했다고 포장하지 마라.”
“웃기고 있네, 내 씨를 받겠다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아? 내가 결혼을 안 한 이유는 하나! 몸에서 빠져나가는 단백질이 아까워서 하지 않았다!”
“어?”
“네놈은 결혼을 두 번이나 했지? 자식도 수두룩하고, 그러니까 몸이 안 좋은 거야. 자고로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단백질뿐이거늘.”
“……?!”
어처구니없는 말을 너무 당당하게 내뱉는 로니를 멍하니 바라본 헤라클레스가 로니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친놈인가? 아니, 이르카 녀석이 날 방해하려고 하는 건가? 왜? 내가 올림포스를 먹어야 녀석한테도 도움이 될 텐데? 설마……?’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지 않던가?
자신의 아버지였지만, 제우스는 아주 음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헤라클레스는 이르카가 제우스와 어떠한 거래를 한 뒤 작정하고 자신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대놓고 미친놈을 보낼 이유는 없었기 때문.
그때 쉴 새 없이 떠들던 로니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나는 너를 도와주러 온 거니까.”
“지금처럼 헛소리할 거면 그냥 꺼지시지?”
“에이, 그래도 선배한테 너무한 거 아냐? 원래 나는 너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나는 남자 싫어한다.”
“나도 싫거든? 특히, 나보다 허약한 놈은 더 싫고.”
“진짜 죽고 싶냐?”
“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죽는 게 내 소원이거든!”
“……?”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로니는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헤라클레스도 수많은 회귀자를 관리했던 관리자에 위치해있었던 인물.
물론 이르카처럼 적극적으로 회귀자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들의 소원을 듣고 실현 가능한 것인지 불가능한 것인지 파악하는 일은 꾸준히 해왔었다.
당연히 실현 불가능한 소원은 거절하거나 실현 가능한 소원으로 수정해서 회귀를 시켜줬기에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은 그가 들었던 소원 중에서 가장 황당한 소원이었다.
죽으려고 회귀를 하는 게 말이 되는 소리던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로니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표정을 굳히며 말을 꺼냈다.
“라그나로크를 이겨내겠다고 했다면서?”
“그래. 펜리르가 오딘을 삼키고, 요르문간드의 독에 토르가 죽기 전 그들을 구해낼 거다. 그리고… 아, 이건 아니다.”
말을 이어나가던 헤라클레스는 말을 아꼈다.
오딘의 조언에 따르면 수르트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
아무리 강인한 헤라클레스라고 해도 태초의 불 그 자체인 수르트를 벨 수도 때릴 수도 없다.
그에게 아스가르드가 불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수르트를 이길 수는 없지만 피할 수는 있지 않은가?
거기서 나온 계획이었다.
이미르와 헤임달의 도움을 얻어 가짜 아스가르드를 만들고 시공간의 다리인 비프로스트를 강화하는 것이 헤라클레스가 이 시대로 온 진정한 이유였다.
현재는 실전된 진짜 아스가르드를 현시대로 옮긴다는 것이 헤라클레스가 오딘과 한 거래였으니까.
로니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은 헤라클레스가 진짜 계획을 말하지 않고 있을 때.
로니가 코를 후비며 말을 건넸다.
“뭐, 뻔하지 라그나로크를 이긴답시고 도망칠 거지?”
“흥! 어디서 그런 망발을 하는 거냐?”
“그런데, 그렇게 해서 네가 올림포스를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내 생각에는 절대 불가능이다. 그러면 반쪽짜리 승리잖아? 이거 참, 신격도 반쪽짜리 신화도 반쪽짜리. 이거 반푼이네 반푼이.”
“네놈이 진짜 죽고 싶은가 보구나? 이르카 녀석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몰라도…….”
“지랄하지 말아 줄래? 내가 설득한 건 이르카가 아니라 카르나 누님이야.”
“뭐?”
갑자기 카르나티우스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한 헤라클레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몸에서 불타는 날개를 꺼내든 로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이르카라는 아이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자, 너한테 녀석이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할게. 꺼지지 않는 생명의 불하고 태초의 불하고 붙으면 어떻게 될까요?”
강한 불끼리 맞부딪치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는 태울 게 없어져 둘 다 꺼진다.
불이라는 것은 마치 숨을 쉬듯 산소를 마시며 살아가는 존재였으니까.
헤라클레스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사라지겠다는 말을 내뱉은 로니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맞불…….”
“크으! 정답! 나는 수르트를 죽일 거야. 그러면 네 소원도 내 소원도 다 이뤄지는 거 아니겠어?”
덕분에 자신의 계획이 조금 더 앞당겨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수르트와 함께 산화하겠다는 말을 내뱉은 로니를 바라본 헤라클레스가 허탈하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건넸다.
“이거 참, 내게 도움을 주겠다니 고맙군. 친구.”
“에이, 나는 나보다 허접한 놈 친구로 안 삼는다. 정 원하면 형님이라고 부르던가.”
“에라이 미친놈.”
* * *
중간계 카르나 님의 집무실.
7 아르카니아에서 요한에게 발생한 일을 보고할 겸 아르한에게 지금 필요한 물건을 회수하기 위해 4 지구 출장 보고서를 제출하러 왔다.
어차피 프란시스의 말대로라면 요한을 꺼내올 수 있는 시기는 앞으로 열흘 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그동안 아르한을 재무장시키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정답이었으니까.
물론, 지금 이곳에 온 목적과는 다르게 내 옆에 쭈뼛쭈뼛 서 있던 마리를 보고는 눈이 하트모양으로 변해서 달려든 카르나 님을 먼저 보게 되었지만 말이다.
“어머, 너는 어쩜 이렇게 귀엽니? 이름이 뭐라고?”
“에헴! 본좌는 마리라고….”
“어머머! 마리? 어쩜 이렇게 이름도 귀엽니? 그래 네가 성배라고?”
“그건 어떻게 알았어?”
“어머, 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 언니는 나쁜 언니 아냐.”
“그건 알겠는데… 내 볼때기 좀 그만 꼬집어 주면 안 될까?”
마치 찹쌀떡을 가지고 놀 듯 마리의 하얀 볼을 사정없이 늘어트리며 귀여워(?)해 주던 카르나님을 향해 볼멘소리를 내뱉은 마리의 투정을 듣고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말을 건넸다.
“카르나 님?”
“오구오구! 귀여워라! 응? 이르카야 왜 그러니?”
“보고서 읽어 보셨어요?”
“흠… 요한 일 말한 거지? 읽어봤단다, 채널을 통해서 지켜보기도 했고.”
“네, 이거 올림포스에서 작업 들어온 거 맞죠?”
“아마도 그렇지 않겠니? 내가 말했잖니, 7 아르카니아에서 태양교를 세운 라헬이 아폴론이고 아폴론은 제우스한테 어떻게든 점수를 따야 하는 처지라고.”
“그렇죠. 아폴론은 아무래도 서출이라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치, 요즘 세상에 그걸 따지는 게 웃긴 일이긴 한데 아마 아폴론은 이번 일로 점수를 땄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제일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올림포스는 성배 아니, 마리가 저한테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응.”
“왜 이런 짓을 꾸몄을까요? 성배의 힘을 몰라서? 그리고 바싸고는 어떻게 7 아르카니아에 나타난 걸까요? 사탄님이 추적한다고 하시긴 하셨는데, 도무지 답을 못 찾겠어요.”
물론, 올림포스가 성배의 힘을 제대로 모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마리가 부활의 힘을 내려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요한의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바싸고에 대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가 한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어설퍼도 너무 어설픈 행동 아니던가?
사실, 급박하게 돌아간 요한의 일이나 마리가 깨어난 사건 등으로 인해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지만, 재차 생각해보니 바싸고의 행동은 어설퍼도 너무 어설픈 행동이었다.
단순히 약물을 써보고 실패하니 그대로 돌아간다?
그동안 그가 꾸며왔던 일을 생각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때 마리를 놓아주고는 골똘히 생각하던 카르나 님이 천천히 황금빛으로 빛나는 입술을 떼었다.
“경고 아니었을까?”
“경고요?”
“나는 언제든 너희를 노릴 수 있다. 이런 경고 말이야.”
“사탄 님의 추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요?”
바싸고가 아무리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탄의 추격을 받는 상황에서 그렇게 쉽사리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다.
이미 지옥에서도 추방된 몸 아니던가?
“아무래도, 바싸고를 비호해주는 세력이 있는 것 같아. 사탄 아저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런 곳 말이야.”
“천계요?”
“미친놈.”
“…….”
어이없어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 깊은 한숨을 내쉰 카르나님이 마리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사실, 나도 마리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성배의 정체를 몰랐단다? 워낙 에덴에서 철저하게 숨기기도 했었고. 그런데 바싸고는 마리를 타락시켰던 놈 아니겠니?”
“네.”
“너는 바싸고가 마리의 힘을 역이용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니?”
“네?”
바싸고가 마리의 힘을 역이용한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그는 카르나 님도 몰랐던 마리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던 자 아니던가?
그때 보고서를 유심히 살피던 카르나 님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흠, 어디 보자 이번에 4지구에 성진아랑 얘기하러 간다고 했지? 회수해올 것도 있고 말이야.”
“네.”
“마리한테 지구 구경시켜줄 겸 같이 간다고 했지?”
“네.”
“마침, 잘됐네! 어쩌면 바싸고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오! 진짜요? 어떻게요?”
“사탄 아저씨하고 같이 가렴.”
“…네?”
사탄이 4 지구에 직접 강림한다면 성진아는 그대로 끌려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