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퉁명스럽게 내뱉은 마리의 말을 듣고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유다가 희생을 각오하면서 직접적인 개입을 바라는 것이 별것도 아니라고?
이번 한 번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다가 내건 것은 자신의 영혼이었다.
요한 대신 업을 짊어지기 위해 그는 영혼이 소멸하는 것까지 각오할 정도로 큰 위험이 닥친 것이었으니까.
만약 관리자가 아무런 제약 없이 계약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크나큰 문제가 발생한다.
계약자들을 이용해 관리자의 입맛대로 세계를 바꿔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계약자의 카르마를 손상하는 것으로 막아 놓은 것 아니던가?
실제로, 관리자가 직접 개입해서 계약자에게 닥친 위기를 처리했을 때 벌어졌던 일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마리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잘 모르는 거 같은데, 계약자한테 직접 힘을 쓰는 건 엄격히 금지된 일이거든? 게다가 지금 요한이 스스로 위기를 탈출할 수 있어? 없어?”
“당연히 혼자서는 못하지.”
“그치? 그런 상황에서 남의 도움 특히, 나 같은 관리자의 도움을 얻었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음, 신의 개입?”
“그래, 정확하게는 반신이지만… 어쨌든, 계약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카르마에 손상을 입게 되거든?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위기를 신의 힘으로 벗어난 거잖아. 그때부터 계약자의 업이 망가지는 거야. 이미 업에 신의 힘이라는 것이 끼어 들어버렸으니까.”
“응? 저번에 나 찾을 때 얻은 아론다이트는 그 시커먼 애한테 줬잖아? 그거랑 이거랑 무슨 차이야?”
자꾸만 꼬치꼬치 캐묻는 마리의 질문을 듣고는 두통이 올라왔다.
골치가 아파져 와 머리를 부여잡으며 대답해줬다.
“예전에 건국신화들을 봐봐. 신의 물건을 얻거나 전해주는 것 정도는 업에 손상을 주지 않아. 지금처럼 위험을 직접 해결해주는 게 문제가 되는 거지.”
“흐음, 그래?”
말뜻을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마리를 힐끔 바라봤다.
이제야 직접 개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해한 모양.
다급하게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또다시 마리의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잖아? 그냥 쟤 죽이면 되는 거 아냐?”
“직접 죽이는 것도 안된다니까?”
“그러니까, 쟤는 내버려 두면 알아서 죽을 텐데 왜?”
“...쟤?”
“응, 쟤.”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간 곳에는 요한 아니, 유다가 있었다.
이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걸까?
순간 심한 욕이 욱하고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걸 겨우 삼켰다.
아직, 어린애다. 어린애다.
아니지? 제 입으로 이천 살 넘었다고 했는데 그냥 시원하게 욕해버려?
아냐, 겉보기에는 그래도 꼬맹이 아니던가?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화를 꾸역꾸역 참아내고는 그녀의 헛소리를 무시하기로 했다.
이러려고 성배를 얻기 위해 그리 고생했나?
가슴 속에서 슬금슬금 자괴감이 고개를 드는 기분을 느끼며 안젤라에게 지시를 내렸다.
“안젤라, 지금 바로 개입할 테니까 카르나 님한테 올릴 보고서 좀 작성해줄래?”
“네! 알겠어요!”
안젤라의 대답을 듣고는, 손목에 차고 있던 천부령을 바라봤다.
개입하더라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출을 해야 하니까 자연의 힘을 이용한 기적처럼 연출하는 것이 좋겠지.
요한 구출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마법진이 깨져나간 것으로 연출을 한다.
두 번째로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 불길이 치솟아 대주교들과 다른 인물들이 접근하지 못할 때 구멍이 난 천장으로 요한이 도주한다는 시나리오를 그려봤다.
이건 확실히 나쁘지 않다.
물론, 갑자기 벼락이 딱 정확한 타이밍에 떨어져 내린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엄청 부자연스럽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보통 그런 걸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극악의 확률로 복권에 당첨되거나 하는 예도 있으니까.
요한을 어떻게 구할지 견적이 나왔다.
유다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천부령에 마력을 집어넣은 뒤.
7 아르카니아에 통하는 차원 문을 열었을 때.
옆에서 불퉁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마리가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나 사람 아냐.”
“……?”
“네가 말했잖아. 아론다이트 같은 장비를 이용하는 건 문제가 없다면서? 나는 사람 같아 보여도 이젠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날 이용하면 되는 거잖아 이 멍청아.”
“…….”
당당하게 자신을 이용하라는 말을 내뱉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일견 사악한 미소를 지은 마리가 소파에서 엉금엉금 기어오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일단 죽여.”
이거 진짜 악마 아냐?
* * *
아르한은 피가 흥건히 묻은 해머를 어깨 위로 들어 올리며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가다듬었다.
적들에게 공포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일까?
아르한은 자신의 두꺼운 손에 힘을 주어 대롱대롱 매달려있던 성기사의 목을 꺾었다.
우드득-!
목이 부러진 성기사의 입에서 이내 혀가 길게 나오며 구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괄약근이 풀리며 항문에서 대변이 흘러나온 것.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아르한이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던 수많은 성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흐압! 똥이나 먹어라!”
쾅-!
굉음이 터져 나왔다.
성기사들이 방패를 이용해 날아오는 동료의 시체를 막아낸 것.
물론, 터질 듯한 굵은 팔뚝을 휘둘러 완전무장한 기사의 육중한 시체를 내던지는 아르한의 괴력에 수습기사 하나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외쳤다.
“히익, 괴, 괴물!”
“네 이놈! 물러서지 마라! 겁먹지 마라! 한 마리 짐승과도 같은 이교도다!”
멍청한 모습을 보인 수습 기사에게 호통을 친 제3 기사단장 알도스는 괴물 같은 위력을 보인 오크 기사 아르한과 그에게 죽은 수많은 기사의 시체를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그냥 이교도 하나를 처리하는 일인 줄 알았더니…저런 괴물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의 눈에 비친 아르한은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수많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음에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괴물.
아르한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광전사와 같은 모습과 같아 보였다.
알도스와 그의 기사단이 섣불리 다가서지 않고 방진만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한 아르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삼십이라… 요한 님이 걱정이로군.’
신성력이 섞인 혈 마법을 사용하는 요한은 절대 약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 요한은 혈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황.
바로, 아르한과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르한이 다시 해머를 꼬나쥐고 문을 막고 있는 기사단을 향해 달려들기 전이었다.
[이르카: 아르한, 잠깐만 기다려.]
[아르한: 이르카 님? 지금 요한 님이 위험합니다! 제가 빨리 가서 구해드려야…….]
[이르카: 일단, 튀어. 네가 없으면 이 계획은 모두 수포가 되니까.]
[아르한: 설마,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가라는 말씀입니까?]
[이르카: 그래. 일단 튀어.]
이르카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요한을 포기하라고 도망치라니?
무슨 계획인지 몰라도 이건 아니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라는 말을 하다니, 내게 했던 말이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이계 회귀를 하기 전.
즉, 드래곤하트를 몸에 지니고 있을 때 이르카가 직접 강림해서 했던 말들이 떠오른 아르한이 배신감을 느끼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요한과 함께 세상을 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아르한이 배신감마저 느껴 회귀한 것에 회의감마저 느낄 때.
이르카의 메시지가 재차 날아들었다.
[이르카: 걱정하지 마. 요한을 구하려는 거니까.]
[아르한: 제가 도망치면 요한 님을 어떻게 구한다는 말입니까?]
[이르카: 어, 음… 일단 요한을 죽여야 해.]
[아르한: ……?]
아르한은 순간 이르카가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을 구하려면 일단 죽여야 한다는 이르카의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이르카: 아! 물론 죽이는 건 저기 안에 있는 애들이 알아서 할 거거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르한: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요한 님을 죽이다뇨? 계약을 포기하실 생각입니까?]
[이르카: 내가 왜 계약을 포기해?]
[아르한: 아니면, 다시 회귀를 시킬 생각입니까? 제가 요한님을 지키지 못한 것은 잘못이 맞습니다만, 이건 좀…….]
계약이 완료되지 않은 회귀자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광마 이천웅이나 이스마엘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듯, 또다시 회귀하게 된다.
물론, 이계 회귀라는 특수 회귀를 한 그들이기에 어떤 방식으로 회귀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르한이 듣기에 지금 이르카의 말은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르카: 알아, 이게 진짜 미친 소리 같긴 하거든? 그런데, 요한을 죽이고 다시 살릴 거야.]
[아르한: 설마, 요한 님과 저를 다시 회귀를 시킬 생각입니까?]
[이르카: 아니? 왜 그렇게 해? 오히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태양교가 거짓된 종교라는 것을 밝혀야지.]
[아르한: ……?]
[이르카: 난 요한을 부활시킬 거야. 그것도 지금보다 더 강하게.]
[아르한: ……!]
* * *
뒤이어 부활에 관한 설명을 침이 튀도록 해줬다.
그제야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뒤 등을 돌려 도망치는 아르한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마리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건 크게 한 방 먹일 기회가 된다.
그러나, 혹시라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마리는 ‘어? 오랜만에 했는데 안 되네?’라는 말을 하고도 남을 악마 같은 꼬맹이였으니까.
옆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마리에게 말을 건넸다.
“네 말대로 했다. 진짜 가능한 거 맞지?”
“나 못 믿어?”
“응. 아직은 못 믿어. 진짜 부활 가능한 거 맞아?”
“그렇다니까? 속고만 살았어? 그리고 쟤 몸에 쌓인 신성력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신성력에 관련된 건 내 전문 아니겠어?”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니까 오히려 뭐라고 할 수도 없네.
하긴, 그녀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엄연히 성배라고 불리는 최상위 신물이었다.
그것도 생명의 힘을 이끌어 쓸 수 있다니까 결코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아르한에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요셉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내보았고 그의 답변은 ‘가능하다.’ 였다.
성배를 가장 오랜 시간 지켜왔던 존재이자 사라진 성배를 되찾기 위해 자신마저 봉인했던 자의 대답이기에 신빙성이 있었다.
물론, 최악의 경우 요한을 재차 회귀시키는 방법까지 고민해봐야겠지만…….
요한이 대주교들의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겨봤다.
분명 그들은 신탁이라는 말을 했다.
7 아르카니아 태양신의 정체는 올림포스의 아폴론 아니던가?
당연히, 신탁을 내려준 존재는 아폴론일 것이다.
그들이 요한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증거.
성진아에 이어서 요한이라….
이거 제대로 갚아줘야겠는걸?
그때 아르한이 나오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마리가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나는 머리가 빠질 지경인데.”
“아하하! 재밌잖아. 일이 더 쉽게 풀릴 거 같지 않아?”
“뭐?”
“저기 빡빡이 봐봐.”
대머리라면 이단 심문관일 텐데?
마리의 말을 듣고 재빨리 화면을 바라보자 아르한 앞에 백기를 든 빡빡이가 나타나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근데, 쟤가 왜 저기 나타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