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관리자의 집무실은 조금 특별하다.
예전에 명계의 실수로 기억을 지우고 환생시켜야 할 환생자가 기억을 가진 환생자로 잘못 분류되어 환생부로 보내진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명계는 난리가 났고 진노한 염라대왕의 영혼을 당장 회수해오라는 명을 받은 차사들이 환생부의 관리자를 찾아갔었다.
하지만, 운이 없게도 관리자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차사들은 관리자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관리자의 집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 영혼을 회수해갔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관리자의 집무실에는 각자 관리하는 계약자들에 대한 수많은 정보가 있다.
그걸 누구나 열람이 가능해진다면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까지 발생한 적은 없었으나 악의를 가진 신이 그 계약자를 대놓고 방해할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계약자가 온다고 알고 있었는데 자신의 집무실이 털린 것을 관리자가 깨달았다면?
그 이후로 관리자의 집무실에는 특별한 보호장치가 생겼고 관리자가 허락하지 않은 자는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왜 나를 찾아오는 신이나 반신들이 귀찮게 노크를 하겠는가?
나와 안젤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허락을 받아야 이곳에 들어올 수 있으니 그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상황은 당혹스러웠다.
내 허락도 없이 처음 보는 백발의 소녀가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너는 누구니?”
“흐음, 이렇게 생겼었구나.”
“저기? 꼬마야?”
“나 꼬마 아닌데? 몸이 이래서 그렇지 이천 살 넘었는데?”
“너도 신…입니까?”
“아닌데? 나 인간인데?”
“…….”
지금 이게 무슨 개소리지?
황당한 소녀의 대답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끼익-!
닫혀있던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안젤라가 들어왔다.
“저 왔어요… 어머? 새로운 계약자예요? 에구, 아직 어린 나이인데…….”
소녀를 발견한 안젤라는 어린 나이에 회귀 계약을 맺으러 온 것으로 착각했는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방긋 웃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너 엄청 이쁘게 생겼다. 이름이 뭐니? 여기는 어떻게 왔어? 설마 계약하러 온 거니? 그런데 하필이면… 이르카 님이랑.”
“나 계약하러 온 거 아냐.”
“응?”
소녀의 말을 들은 안젤라가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소녀의 부모가 누구냐고 묻는 것 같은 표정에 고개를 가로저어 대답했을 때.
소녀가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나를 태어나게 해준 사람, 아니지? 신을 찾아온 건데?”
“태어나게 해줘?”
“응, 뭐 아프게 때리기도 하고 물어뜯기도 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나를 태어나게 해줬으니까.”
“……?!”
소녀의 말을 듣자 대번에 정체를 깨달았다.
아리마태아 요셉. 정체를 끝까지 숨기더니 성배의 정체가 이런 소녀였어?
너무나 황당한 성배의 정체에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을 때, 서리가 내릴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도끼눈을 뜬 안젤라가 나를 째려보고 있던 것.
나를 왜 저렇게 보고 있는 걸까?
“잠깐 따라오세요.”
“응?”
“잠깐 따라오시라니까요?”
서늘한 그녀의 명령에 군말 없이 따라가고 나자 팔짱을 낀 안젤라가 턱으로 성배를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누구예요? 저 애 엄마가 누구냐고요?”
“뭐?”
“후우- 그리고 저런 조그만 애를 때리고 물어요? 뭐, 교육상 그렇게 했겠지만, 이르카 님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네요.”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또 또! 애 아빠면 애 아빠답게 책임감 있게 말해야지 변명부터 하려고 해요?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빨리 불어요. 애 엄마는 누구예요?”
“나도 잘 몰라… 그리고 쟤는 평범한 애가 아니라.”
“그렇겠죠, 그런데 애 엄마도 몰라요? 와, 나한테 사탕발림을 그렇게 해놓고 뒤로는 아주… 올림포스 신들을 욕할 처지가 아니었네요. 이런 짐승! 아니지, 진짜 짐승 맞지.”
“…….”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잔소리에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요즘에 카르나 님이랑 붙어 다니더니 안 좋은 걸 배워온 모양.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잔소리를 퍼붓고 있는 안젤라에게 말을 건넸다.
“나도 오늘 성배의 정체는 처음 보는 거야.”
“진짜 그렇게 안 봤… 네? 성배라고요?”
“응, 요셉 님이 나한테 정체를 말해주지 않았었잖아. 쟤한테 물어봐. 자기 입으로 성배라고 했거든? 궁금하면 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면 되잖아?”
알로 변한 성배를 놓아둔 방으로 후다닥 뛰어간 안젤라가 잠시 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더니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과일 깎아 갈게요. 아! 차는 뭐 드시고 싶으세요? 내 정신 좀 봐 손님이 왔는데 준비도 안 하고 있었네.”
“안젤라,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냐?”
“흐흫, 오해해서 죄송해요.”
실없이 웃으며 사과하는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준 뒤.
집무실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 구경하고 있는 백색의 소녀. 아니, 성배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성배야? 성배 씨?”
“그냥, 편하게 마리라고 불러.”
“음, 그래 마리가 진짜 성배야?”
“용생을 속고만 살았어? 당연히, 내가 성배지.”
“…….”
인생이 아닌 용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아무래도 진짜 성배가 맞기는 한 모양.
타락한 마리를 구할(?) 때 본래 모습을 드러냈었으니 당연히 아는 사실일 것이다.
당시 본 모습을 드러낸 뒤 성배를 열심히 두들겨 패고 몸에서 박혀있던 머르딘의 영혼을 물어뜯었으니까.
머리를 긁적이며 성배 아니, 마리에게 질문을 건넸다.
“마리는 어떻게 성배가 된 거야? 사실 성배 탐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성배라고 했을 때 나는 어떤 잔 같은 모습이겠거니 했거든?”
“요셉 아저씨가 확실히 말 안 해줬나 보네, 봐봐 이렇게 양손을 모으면 어떻게 되겠어?”
말을 마친 마리는 마치 무언가 받는 것처럼 양손을 모아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했다.
냇가나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마실 때 취하는 모습과 똑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재차 질문을 건넸다.
“확실히 무언가 받는 모습이네, 그렇다면 네가 그분의 피를…….”
“응, 그렇지 뭐. 그때부터 요셉 아저씨가 그곳은 위험하다고 켈트족이 사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 그렇게 해서 아서도 만나고 갤러해드도 만난 거고.”
“그래서 네가 성배라고 불리는 거였구나.”
“응.”
그 뒤로 쭉 이어진 그녀의 얘기를 모두 듣고 나자 그녀가 왜 성배로 불리며 최상위 신물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는지 깨달았다.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창세신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신은 바로 어둠의 신과 빛의 신.
그중 빛의 신이 가진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존재는 마리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요셉은 왜 마리를 지키지 못했으며,
어떠한 이유로 타락했던 것일까?
안젤라가 가져온 과일을 야금야금 먹고 있는 마리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마리는 왜 타락…해서 그런 모습으로 있던 거야?”
“응? 아, 그거 원래 갤러해드가 승천할 때 나도 같이 천계로 올라갔어야 했는데…웬 늙은이가 갑자기 나타나더라고.”
“혹시 마법사처럼 생긴 노인네였어? 살짝 매부리코에 얇은 눈매를 가지고 항상 ‘끌끌….’ 요렇게 웃는 노인네?”
“맞아. 제대로 아네.”
그야 당연히 바싸고의 생김새와 말투를 따라 한 것이었으니, 그런데 그 당시 바싸고가 성배를 이길 힘이 있었나?
“아무튼, 그때 이상한 기계 같은 걸 가지고 오더니 날 순식간에 제압하더라고. 와, 나 그때 진짜 무서웠다?”
웃으며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활짝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황당하게 바라보며 재차 질문을 건넸다.
“그리고?”
“그러고 난 뒤에는 기억이 안 나. 사실 기억하기도 싫고. 아무튼, 지금은 이렇게 풀려났잖아. 이게 얼마 만에 마시는 신선한 공기인지, 머릿속이 탁하지 않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다행이네.”
“그치? 헤헷, 앞으로 잘 부탁해.”
이제야 어린아이처럼 웃는 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이곳저곳을 구경하듯 돌아다녔다.
신기한 듯 집무실을 돌아다니는 마리를 바라보며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리를 통해 빛의 신의 힘을 끌어다 쓸 수 있다면 지금보다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
물론, 그녀의 동의가 있어야 하지만 현재 유일한 보호자인 내 부탁을 안 들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마리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궁금함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로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아까 보니까 어떤 여자애랑 데이트 약속 잡던데 나도 같이 가도 돼?”
“……?”
“응? 아냐? 그 시커먼 옷 입은 여자애가 지구에 강림해달라고 했잖아. 너는 그러겠다고 했고. 나도 오랜만에 지구 가고 싶어. 같이 가자.”
아, 애는 애구나.
그런데 메시지로 보낸 건데 그걸 볼 능력이 있었어?
마리의 신기한 능력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이상한 느낌, 아니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안젤라가 그 표정 그대로 돌처럼 굳어서는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데이트? 데이트? 데이트라고? 그것도 강림해서 데이트라고…?”
“…안젤라? 저기, 안젤라?”
“맨날 바쁘다고 나랑도 제대로 하지 않은 데이트를 성진아 씨와 한다 이거지?”
“데이트가 아니라 중요한 문제로 상의할 게 있어서 그렇다고 한 건…….”
“호호홋, 그렇겠죠. 앞으로 2세 계획도 세워야 하니까 중요한 문제가 맞죠.”
아니, 왜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건데?
폭주하는 안젤라를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있을 때, 이 사태를 만든 마리가 나와 안젤라를 바라보며 피식거리고 웃고 있었다.
저거 성배가 아니라 악마 같은 꼬맹이 아냐?
* * *
이르카가 폭주하는 안젤라와 씨름하고 있을 때.
7 아르카니아.
라 헬스 제국의 수도에 있는 태양교의 교황청.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따사로운 햇볕을 색색들이 물들여 쪼개어 대리석 바닥에 비추고 있었다.
온통 황금으로 치장된 화려한 교황청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줘서라도 빈자를 구원해줘야 하는 성직자의 본분마저 망각한 자들의 탐욕이 빚어낸 장소와 같아 보였다.
우로스와 프란시스의 안내를 받아 교황청에 입성한 요한과 아르한은 그 화려한 모습에 혀를 내두르며 두런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너무 화려한 거 아닙니까?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나서 이렇게 꾸민 것인지…….”
“태양교의 신자들께서 기부를 많이 해주셨나 봅니다…….”
“흠,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허튼 데 돈을 쓰다니…….”
그때 앞에서 묵묵히 걸어가고 있던 우로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다 들립니다. 아르한 님.”
“이크!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로스의 타박에 입술을 샐쭉이 내밀어 불만을 표한 아르한에게 프란시스가 조심스레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이건, 태양신께서 자신의 색을 닮은 황금빛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꾸민 것입니다. 저도 너무 화려한 것 아닌가 생각하지만, 이것이 라헬 님의 가르침이었다고 하니 따라야죠.”
“라헬이 누구요?”
“네?”
“라헬이라는 자가 그리 대단한 인물이오?”
“허, 라헬 님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안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대단하시죠, 인간들을 구원하신 분이니까요.”
구원이라는 말에 눈빛을 빛낸 요한이 프란시스에게 질문을 건넸다.
“어떤 구원 말입니까?”
“아, 사실 아르카니아의 지배 종족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그때 청력을 집중해서 얘기를 엿듣고 있던 우로스가 프란시스를 꾸짖듯 소리쳤다.
“프란시스!”
프란시스는 우로스의 외침을 듣고 이내 입을 다물었고, 그런 프란시스를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우로스가 거대한 문을 가리키며 요한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이 대회의실입니다. 요한 성자님 들어가시지요. 아, 아르한 기사님은 여기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성직자들의 이야기라 어쩔 수 없겠군요.”
“나는 요한 님을 지키는 몸 이 자리를…….”
“그렇게 하시지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우로스 님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말을 건네는 요한의 미소를 바라본 아르한이 불안한 마음이 들 때.
요한이 대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