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갑작스러운 헤라클레스의 탈퇴에 이은 행방불명이 올림포스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12 주신과 12 주신에 속하지는 않더라도 하데스와 같은 올림포스와 관련된 모든 최상위 신들이 긴급 소집된 것은 거의 이천 년 만에 처음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 천계였던 올림포스가 에덴에게 천계와 지옥의 위치를 내줄 때 소집된 이후로 처음 벌어진 일이었으니 이 소집이 가지는 의미 또한 대단할 터.
소집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뒤.
모든 최상위 신이 모인 것을 확인한 제우스는 웅성거리는 회의장을 쭉 둘러봤다.
무슨 일 때문에 소집한 것인지 궁금해하는 신들을 바라본 제우스는 그들을 향해 헤라클레스의 배신과 그 처벌을 논의하기 위한 말을 꺼내 들었다.
“헤라클레스가 올림포스를 배신했다.”
“네? 헤라클레스가요?”
“그래. 우리 올림포스가 되찾아야 할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할 녀석이… 우리의 뜻을 거슬렀다.”
“그 미천한 녀석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당장 요절을 내겠습니다!”
헤라클레스는 기간토마키아를 막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 뿐, 신들로 태어난 다른 신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병기로 태어난 존재였다.
저번 회의 때 에덴의 십자가의 신이 지구에 내려가 위대한 업적을 쌓은 뒤로 천계의 위치를 빼앗겼을 때.
올림포스 또한 또 한 명의 창조신을 얻기 위해 헤라클레스를 강제로 신의 위치에서 끌어내렸다.
창조신을 얻을 방법은 태초부터 신으로 태어나지 않은 존재만 할 수 있는 관리자 일을 시키는 것뿐이었으니까.
물론, 보상도 넉넉히 해줬다.
그를 신에서 끌어내린 후 관리자 일을 맡긴 뒤로 위대한 12 주신들과 같은 급으로 취급해줬다.
평소 내심 그런 취급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레스는 은근히 헤라클레스를 무시하며 녀석이 이르카에게 골탕먹는 모습을 즐겨왔었다.
어차피 이르카와 헤라클레스의 카르마 격차를 생각하면 다음 창조신이 되는 건 헤라클레스였기에 이르카에게 포인트도 마음 놓고 후원했던 것.
그런 헤라클레스가 감히 올림포스를 배신하다니.
분노에 찬 아레스의 음성이 회의장을 요동칠 때.
옆에 앉아있던 아테나가 비웃음 섞인 말을 내뱉었다.
“헤라클레스랑 붙으면 당장 결딴날 놈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모르겠네?”
“흥! 녀석과 붙으면 결딴나는 건 네년이겠지.”
“웃기고 있네, 선불 맞은 멧돼지 같은 네놈이 무슨 수로 헤라클레스를 이겨? 머리에 뇌도 없는 게. 닥치고 회의나 집중하시지?”
“이년이 진짜 뒈지고 싶……!”
아레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서 있던 자리 바로 옆에 거대한 벼락이 떨어져 내린 것.
짜릿한 번개 떨어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본 아레스가 고개를 돌려 제우스를 바라봤다.
화를 내지는 않고 있지만, 한껏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우스의 얼굴이 아레스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테나와 아레스에게는 제대로 화를 내지 않던 제우스가 처음으로 행동을 제지한 것.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한 아레스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조소를 날리고 있는 아테나에게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씩씩거리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모두 확인한 제우스가 평상시와는 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신들을 바라보며 말을 다시 이었다.
“그래서 환생부에서 일하던 아킬레우스를 회귀부로 불러들였다.”
“아, 아킬레우스 말씀입니까?”
환생부에 아킬레우스를 파견한 이유를 알고 있던 아레스가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래. 에덴에서 파견된 녀석을 방해하기 위해 넣어둔 송곳이 빠져나온 것이지.”
이미 회귀부에 헤라클레스가 있었기에 관리자를 또다시 파견하겠다는 올림포스의 뜻은 다른 신계에 엄청난 반발을 샀다.
그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올림포스가 다른 신계보다 유리했던 점을 거의 포기했으니까.
다른 신계에는 없는 최고의 대장장이 헤파이스토스를 이용한 것.
물론, 올림포스가 치른 대가는 컸다.
주신이 자신의 신력을 쏟아부어 만들 수 있는 신물은 평생 단 한 가지였으니까.
덕분에 그들의 무기는 신물로 취급하기에는 조금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2 주신에게 만들어줬어야 할 진명이 들어간 신물들을 포기하고 다른 신계에 뇌물성 선물을 해줬기에 그들은 마뜩잖아하면서도 어느 정도 눈감아줬다.
눈감아주는 대가로 강력한 신물이 공짜로 들어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어차피 관리자를 파견한다고 해서 그들이 무조건 창조신의 권한을 얻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올림포스가 크나큰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억지로 아킬레우스를 환생부로 보낸 이유는 단 하나.
에덴에서 파견한 관리자를 어떻게든 방해하기 위해서였고 그 작전은 꽤 성공적이었다.
아킬레우스 역시 카르마를 거의 쌓지 못했지만, 에덴에서 파견된 관리자 역시 하위권을 전전하고 있었기 때문.
물론, 헤라클레스가 창조신의 권한을 얻은 뒤.
에덴과 동등한 위치에서면 다시 찾을 영광을 위해 모두가 동의한 일이었다.
잠잠해진 주신들을 슬쩍 바라본 제우스가 헤라클레스와 맺었던 관리자 계약서를 허공에 띄우며 말을 마저 이었다.
“게다가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계약까지 공개했다. 헤라클레스가 관리자 계약을 맺을 때 그 당시 관리신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치면서 얻은 계약이지.”
“…….”
“이제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감이 오는가?”
갑자기 반존대로 말을 바꾼 제우스를 슬쩍 바라본 다른 주신들이 말을 아끼고 있을 때.
평상시 말수가 없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헤스티아가 조심히 말을 꺼내 들었다.
“헤라클레스의 배신은… 어떻게 보면 오라버니의 실수 아닌가요? 녀석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잖아요.”
평상시 제우스에게 대든 적도 없고 항상 묵묵히 다른 주신들의 의견에 따르기만 하던 고분고분한 성격의 헤스티아가 반발하고 나서자 모든 주신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평상시 그녀의 행실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
제우스 역시 헤스티아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자존심을 건드려? 그게 무슨 소리냐?”
“이번에 이르카라는 아이와 있었던 일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라버니는 그 계약서를 이용해 헤라클레스의 권한을 빼앗아 오신 거잖아요? 당연히 자존심이 상할 일이죠. 그리고…….”
“그래서?”
“네?”
“그래서 뭐 어쩌라는 말이냐? 이미 우리를 배신하고 떠난 놈을 설득이라도 하라는 것이냐?”
“우리라뇨? 저는 빼주시죠? 오히려 오라버니께서는 한낱 과거의 영광에 빠져서 미래를 잃고 있는 거 아니에요?”
“……!”
평상시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제우스를 타박하듯 말하는 헤스티아를 바라본 모든 주신이 진짜 헤스티아가 맞는지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
“헤스티아. 너는 이곳에 낄 자격이 없는 것 같구나.”
“저도 원하지 않았어요.”
“너의 주신 자격을 박탈한다.”
“그래요? 오히려 홀가분하네요.”
주신의 자격을 박탈당했음에도 홀가분하다는 말을 남긴 헤스티아가 홀연히 자리를 떠난 뒤.
침묵이 감도는 주신전을 바라본 제우스가 미묘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재차 말을 꺼냈다.
“또 반대하는 자가 있느냐?”
“…….”
“그래, 없는 것 같구나.”
말을 마친 제우스가 자리에 묵묵히 앉아있던 아폴론을 바라보며 명령을 내렸다.
“아폴론.”
“네, 아버지.”
“7 아르카니아에 너를 모시는 인간들이 있다고 들었다 맞느냐?”
“네, 예전에 제가 신격을 박탈…당했을 때 쓰던 이름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폴론이 신격을 박탈당했다는 말에 단 한 번도 그런 처사를 받은 적이 없던 적출 아레스와 아테나가 서출 아폴론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그들의 비웃음을 보고 표정을 굳힌 아폴론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이제부터 우리는 이르카라는 그 비천한 잡종 녀석을 방해한다. 일단은 7 아르카니아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녀석이 관리하는 회귀자 중 요한이라는 녀석을 죽여라.”
“네?”
“네놈의 신도들에게 이교도를 척살하라는 신탁을 내려주거라. 또한, 녀석이 모시는 신은 이교도가 맞지 않더냐?”
“……!”
에덴을 향한 공개적인 전쟁 선포와 다름없는 말에 경악한 아폴론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회귀자를 죽이라니… 게다가 에덴의 신을 모시는 녀석이면 문제가 조금 커지는 거 아냐?’
그러나 제우스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
예전에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신격을 박탈당하고 다른 차원으로 유배를 떠났던 일을 떠올린 아폴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가 바스러져라 갈았다.
일단 자신을 모시는 신도들에게 신탁을 내려줘서 요한과 아르한이 어느 정도 힘을 가졌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 아폴론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이것이 이단 심문관 프란시스와 우로스가 신탁을 받고 할파스 백작령에 머물고 있던 요한과 아르한을 찾아가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 * *
헤라클레스와 계약을 마무리한 뒤.
카르나 님을 찾아가 그간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녀석이 과거로 돌아가 라그나로크를 막아내고 다른 힘을 얻어오기로 한 약속까지 모두 말하고 난 뒤.
카르나 님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이제 올림포스에서 너를 제대로 견제할 텐데 그건 어떻게 할 거니?”
“예전에 말씀하신 일 있잖습니까? 4 지구 출신 보류자.”
“걔 맡아보려고?”
“네. 게다가 7 아르카니아에 라헬이라는 태양신이 아폴론이라면서요? 무조건 요한을 방해하려고 들어올 텐데 신경을 분산시켜야죠.”
제우스의 쪼잔한 성격이라면 무조건 아폴론을 시켜서 요한을 방해하려고 할 터.
이미 요한에게 대비하고 있으라고 메시지를 보내놨지만, 올림포스에서 작정하고 덤벼들면 힘들 수도 있다.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아직 지지기반이 빈약한 요한과 아르한이 7 아르카니아의 국교로 자리를 잡은 태양교를 이겨내길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거기에 아폴론과 올림포스 신들의 지원을 받았다면? 더더욱 힘들 터.
올림포스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면 색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그때 내가 내민 모든 회귀자의 계약서를 들여다보던 카르나 님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너 지금까지 포인트를 악착같이 모은 게 지금 같은 일을 대비하려고 한 거니?”
“뭐, 지금까지는 악착같이 모으려고 해도 모이지 않았죠. 성진아 씨랑 요한이랑 계약하고 난 뒤로는 술술 풀린 거 지만요.”
“총포인트 170만이라…….”
“흐흫, 이제 카르나 님보다 제가 부자 아닌가요?”
“어머? 그 정도는 아니란다? 그리고 이거 다 사라질 포인트 아니니?”
“넵… 그렇죠.”
내가(?) 피땀 흘려 모은 포인트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느낌에 가슴이 쓰라리듯 아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포인트야 카르마를 모으기 위한 수단.
계약한 회귀자들 중 포인트를 많이 모아 해결할 수 있는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이뤄줘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보자… 모든 회귀자와 계약을 끝내면 네가 다시 1등으로 올라가네?”
“네, 그런데 올림포스에서 아킬레우스한테 후원 폭탄 보내지 못하는 거 맞죠? 녀석도 똑같은 방법을 쓰면 골치 아프잖아요.”
“응, 올림포스 신들은 아킬레우스나 올림포스랑 계약한 메르나한테 후원 못 보내. 이번에 헤라클레스한테 했던 개 같은 계약이 드러나서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단다.”
불행 중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나한테 오던 올림포스의 후원금도 뚝 끊기겠지만, 꼼수를 부려 방해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었다.
카르나 님이 요한과 아르한을 제외한 다른 회귀자들의 계약서를 확인하고 난 뒤.
올림포스의 시선을 분산시킬 새로운 계약자를 기다리는 동안 안젤라에게 다급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안젤라: 이, 이르카 님! 지금 요한 님한테 문제가 생겼어요!]
[이르카: 그래? 혹시 이단 심문관이라도 왔니?]
[안젤라: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이르카: 그냥 감? 그런 문제는 아르한한테 말해놨으니까 일단 지켜보다가 다른 일이 벌어지면 바로 메시지를 보내줄래? 계약 하나만 새로 하고 금방 갈게.]
[안젤라: 네? 새로운 계약자요? 흐음, 알았어요. 빨리 오세요]
[이르카: 응, 알았어.]
드디어 올림포스의 직접적인 견제가 시작되었다.
먼저 때린 건 너희들이니 제대로 카운터를 날려줘야겠지?
그때 기다리던 새로운 계약자가 잇몸이 만개한 미소를 지으며 카르나 님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저놈 복장이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