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방패 뒤에 숨어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한진우를 거칠게 몰아붙이던 강태식이 주변을 힐끔 바라보고서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거의 둘 이상의 영웅이 발목을 잡고 있어야 할 지옥의 군단장들이 하나둘 풀려나기 시작한 것.
물론, 성진아가 데리고 온 헌터들도 절반 이상 목숨을 잃었지만, 어차피 A급 이하의 하급 헌터들.
아직 상급 헌터들과 군단장들이 건재한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병신같은 놈들 시킨 일도 제대로 처리 못 하고 다 나가 뒈지다니…….’
이를 바드득 간 강태식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소환에는 제한이 있지 않겠는가?
제우스로부터 영웅들을 받을 때 분명 지구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군단장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분명 지옥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이곳에 모인 S급 헌터들이 계속 모여있을 수는 없는 노릇.
각자 맡은 일이 있기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뭉쳐있기에 강한 자들이 홀로 떨어진다면?
어차피 성진아와의 싸움은 둘 중 한 명이 죽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싸움.
한마디로 시간제한이 없는 싸움이었다.
하나로 뭉치지 않은 그들의 힘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빠르게 판단한 강태식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몸에서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성진아가 건네준 방패와 각성할 때 얻은 철벽의 수호 특성 덕분에 겨우겨우 버티던 한진우가 다시 강태식을 도발하려고 할 때.
하늘에 소원의 탑에서도 등장했던 거대한 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당시에는 미완성이었지만 현재는 완벽히 완성된 SS급 스킬이자 최강의 스킬 중 하나인 하늘의 심판을 발동시킨 것.
제대로 적중당한다면 S급 헌터라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는 공격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가공할 위력의 검들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강태식이 몸을 돌려 도망치려 할 때.
[관리자에 의해 계약이 파기되었습니다.]
[계약으로 얻은 힘이 모두 소멸합니다.]
믿을 수 없는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검들이 모두 소멸했다.
* *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강태식이 몸을 돌려 도망가 장기전을 꾀하려 하는 모습을 보고 성진아에게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내려 할 때 갑자기 녀석의 힘이 사라졌다.
거기다가 시스템창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고는 더더욱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관리자 이르카와 헤라클레스 간의 대결은 관리자 이르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헤라클레스가 보유한 강태식의 카르마와 계약을 맺은 카르마가 이르카에게 이전됩니다.]
[4 지구의 회귀자 관리권은 관리자 이르카에게 넘어갑니다.]
강태식은 지금 분명히 살아있다.
물론, 녀석도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지만, 아직 목숨을 잃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때 카르나 님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카르나티우스: 얘, 이르카야?]
[이르카: 넵,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요?]
[카르나티우스: 이게 조금 황당하긴 한데 잘 들으렴. 헤라클레스가 사라졌단다.]
[이르카: 네?]
[카르나티우스: 나도 지금 너무 황당해서 헤라클레스 녀석을 찾으려고 했는데, 강태식하고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는 사라졌단다.]
이런 미친놈.
아무리 지는 게 싫어도 그렇지 패색이 짙어졌다고 계약까지 파기하고 사라져?
아니, 이렇게 책임감 없는 모습은 내가 아는 헤라클레스가 아니다.
[이르카: 녀석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요?]
[카르나티우스: 무슨 일?]
[이르카: 이런 짓을 하고 사라질 녀석이 아니잖아요? 녀석이 어디 갔는지 올림포스 신들한테 물어보셨어요?]
[카르나티우스: 아직 물어보지는 않았단다. 혹시, 짐작 가는 부분이 있니?]
[이르카: 4 지구에서 제한을 다 풀어준다고 저랑 헤라클레스한테만 말씀하셨나요?]
[카르나티우스: 아니, 바스테트한테도 말해줬지. 걔는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이르카: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지금 일 마무리하고 찾아뵐게요.]
[카르나티우스: 그래, 알았단다.]
메시지를 종료하고 난 뒤.
성진아를 비추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모든 힘을 잃고 얼빠져 있는 강태식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S급 헌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헤라클레스 녀석이 어떤 이유로 강태식을 버린 것일까?
단순히 지는 게 싫어서는 절대 아니다.
예전에 비다르한테 무기발로 졌을 때나 성배를 탐색할 때도 느꼈지만, 녀석은 이해할 수 있는 패배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때 강태식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성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진 거 같은데?]
[씨발.]
[마지막 공격은 왜 멈춘 거지?]
[멍청하네, 내가 멈췄다고 생각하냐?]
[아니, 네가 그럴 녀석은 아니지.]
말을 마친 성진아가 강태식의 목을 베려 할 때.
다급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성진아 씨! 잠깐만요. 녀석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일단, 녀석한테 이렇게 말씀하세요…….]
* * *
이르카로부터 온 긴 메시지를 확인한 성진아는 살짝 놀란 눈빛으로 강태식을 바라보더니 주변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다른 수많은 헌터들과 군단장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강태식을 심문하려고 하는데, 다들 잠시 자리 좀 물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드리죠.”
“아뇨, 이자는 이제 위험하지 않아요.”
“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날뛰던 자가 위험하지 않다뇨?”
의문이 섞인 질문을 건네는 한진우를 바라본 성진아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고는 귓가에 속삭여줬다.
“강태식은 지금 모든 힘을 잃었답니다. 저항할 힘이 없어요.”
“……!”
“그러니까 저를 믿고 잠시 뒤로 물러나 주실 수 있으신가요?”
고개를 끄덕인 한진우가 다른 인물들과 뒤쪽으로 물러나고 난 뒤.
성진아가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강태식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헥토르 같은 영웅들 네 관리자가 보낸 거 아니지?”
“크큭, 지금 와서 그게 중요한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시지?”
“여전히 웃기는 년일세, 대답할 이유는 없다. 그냥 깔끔하게 죽여.”
답변을 거부하는 강태식을 바라본 성진아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으며 말을 건넸다.
“그래? 어쩔 수 없네. 지금 물어보는 질문에 잘 대답해준다면, 내 관리자님이 너를 다른 세계로 회귀시켜줄 수도 있다고 했거든?”
“뭐?”
“궁금하면 죽은 뒤에 가서 물어보든가.”
묘한 미소를 지은 성진아를 바라본 강태식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지옥에 끌려갈 줄 알았더니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속에서 꿈틀댈 때.
이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해서 이런 사태를 초래한 헤라클레스가 떠올라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내뱉었다.
“관리자라는 새끼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내 관리자님 능력 모르니? 넌 지금까지 계속 당해왔잖아? 그거 다 내 관리자님의 능력이었단다?”
“…….”
“너는 쓰레기지만 그래도 천재는 천재잖아? 검에 대한 재능은 진짜 아니었니? 물론 천하에 둘도 없는 개새끼긴 해도 칼질 하나는 잘하는 놈이잖아?”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이상한 말에 강태식이 입술을 씰룩일 때 성진아가 재차 질문을 건넸다.
“너 계약 왜 파기된 거니?”
“멍청한 년, 내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냐?”
“그러면 질문을 바꿀게. 너랑 같이 왔던 헥토르 같은 애들 네 관리자가 보내준 거 아니지?”
“…….”
지금 상황에서 침묵은 부정이 아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강태식을 물끄러미 바라본 성진아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더니 뭔가 이상한 듯 말을 꺼냈다.
“처음에 기억 안 나니? 제우스가 빌려줬다고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네 관리자는 헤라클레스 아니었어?”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제우스가 직접 빌려줬는지 헤라클레스를 통해서 빌렸는지 궁금한 거지.”
“직접 빌려줬다. 물론, 쓸모없는 녀석들이었지만.”
“네가 멍청해서 써먹지 못한 거지 충분히 쓸모 있었단다?”
“…….”
이르카가 물어본 것은 여기까지였다.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뭔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물어봤을 것으로 생각한 성진아가 입술을 꽉 깨물며 강태식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건넸다.
“이제부터는 개인적인 질문이야. 우리 부모님은 왜 죽인 거지?”
“키킥, 그게 그렇게 궁금해? 그런데 어쩌나? 원래 인간은 궁금한 걸 알지 못할 때 제일 고통스럽거든?”
“재밌네, 그러면 나도 재밌게 해줄게.”
“……?”
강태식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뭐가 재밌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성진아를 지켜볼 때.
뒤쪽에 있던 지옥의 군단장들이 성진아의 연락을 받고는 다가왔다.
악마들답게 쳐다보기만 해도 섬뜩한 눈빛으로 강태식을 바라보던 레이트라를 비롯한 군단장들이 강태식의 손과 발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크하하하! 이거 웃기네, 이긴 놈이나 진 놈이나 똑같이 지옥으로 간다는 게 말이야!”
강태식이 승자도 패자도 모두 지옥으로 끌려가는 기묘한 상황에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을 때.
레이트라가 우악스러운 손으로 강태식의 입을 손에 쥐었다.
“우웁-!”
“어허, 가만히 있어. 반항하면 혀 잘린다?”
“……!”
“자, 쭉쭉 들이마시고.”
레이트라는 이내 강태식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는 수상한 액체를 입에 들이부었다.
‘설마 지배의 물약? 웃기는군, 그런 거에 당할 내가 아니다.’
지배의 물약을 통해 정보를 캐내려 한다고 생각한 강태식이 성진아의 얕은 생각을 비웃으려 할 때.
과일을 깎을 때나 쓸 법한 작은 단도를 든 성진아가 거침없이 강태식의 허벅지를 찔렀다.
푹-!
섬뜩한 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난 뒤.
강태식은 의아한 기분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분명 어느 정도 고통이 느껴져야 했음에도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은 것.
강태식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무표정하게 서 있는 성진아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이궤 므순 지히……!”
“걱정하지 마. 죽지는 않을 테니까.”
말을 마친 성진아는 처음 단도로 찔렀던 다리 한쪽을 정성스럽게 해체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살점을 얇게 잘라내기 시작한 것을 시작해서 힘줄과 신경까지 모두 잘라내기 시작하는 모습을 바라본 레이트라가 혀를 내두르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왜 마취를 하고 이렇게 해체하는 거야? 고문하려면 고통을 줘야 하잖아?”
레이트라의 의문은 타당했다.
게다가 강태식이 죽기라도 할까 봐 비싼 포션을 친히 먹여주고 있는 모습에 황당함마저 감출 수 없었다.
그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은 성진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 보시면 아실 거예요.”
“응?”
“지옥에서는 이런 거 안 배우셨어요?”
“그냥 불에 던져넣거나 기름에 튀기거나 그런 것 정도만 배웠지…그리고 고문은 고문관들의 주특기거든?”
“그래요? 생각보다 얌전하네요.”
“뭐?”
지옥의 고문이 얌전하다는 황당한 소리를 내뱉은 성진아를 레이트라가 멍하니 바라볼 때.
품에서 이상한 약병을 하나 꺼내든 성진아가 강태식의 입에 수상한 액체를 쏟아부으며 말했다.
“이거 마취 깨는 약이에요.”
“……?”
그때 마취가 풀리면서 개미가 온몸에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을 느낀 강태식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악-!”
과거에 팔이 잘렸을 때도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때도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느껴지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었다.
그때 빙긋 웃은 성진아가 강태식을 바라보며 레이트라에게 말을 건넸다.
“나중에 한번 써보세요.”
“어? 으응…….”
속으로 악마 같은 여자라고 생각한 레이트라와 군단장이 혀를 내두를 때 성진아가 강태식을 바라보며 재차 질문을 건넸다.
“이제 말할래? 아니면 한쪽 더?”
“끄흐으으-! 이, 이런 미친년…….”
“좋았어. 한쪽 더 가자.”
“……!”
성진아가 싸이코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이르카는 카르나티우스를 찾아가 실종된 헤라클레스에 관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