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한 손에 꼽는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의견이 분분할 수는 있지만, 첫 번째로 언급될 인물로는 대부분 제우스의 손자 아킬레우스를 꼽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거의 무조건 이 인물을 말할 것이다.
트로이의 기둥이자 그리스의 악몽이라고 불린 총사령관 헥토르.
올림포스 신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그가 왜 저런 모습으로 있는 것일까?
<그르르르……!>
마치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는 헥토르를 멍하니 바라본 레이트라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저거 설마 헥토르야?]
역시, 녀석도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가 영웅 헥토르라는 걸 알아본 모양.
나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패배한 영웅이라고 해도 영웅은 영웅이다.
게다가 헥토르와 대결에서 승리한 자는 제우스의 손자인 아킬레우스가 아니던가?
이가 자연스레 바드득 갈렸다.
올림포스에서는 영웅들에 대한 처우가 고작 저것밖에 안 된단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헤라클레스 녀석이 저걸 보내는 걸 동의했을까?
엄연히 말하자면 살짝 후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나 마찬가지인 자들이다.
헤라클레스 녀석이 혼자서 트로이를 박살 낼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자가 헥토르의 아버지인 프리아모스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제우스가 보낸 선물이라고 했지.
헤라클레스가 아닌 제우스가 보낸 선물이라면 헤라클레스를 거치지 않았다는 소리.
자연스레 모든 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주신이라는 양반이 이딴 짓을 저질러?
그렇다면 나도 치사하게 공략해주마.
곧바로 성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지금 모든 군단장을 출격시키세요, 헌터들은 S급 이상의 인물들만 추려서 같이 보내시고요. S급 이상의 인물들은 저 괴물들에게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성진아: 관리자님, S급 이상 헌터들은 강태식을 막는 데 쓸게요.]
[이르카: 네?]
순간 얼빠진 목소리가 자동적으로 나왔다.
물론 S급 이상이라면 강태식의 공격을 어느 정도 막아낼 수는 있겠지만, 군단장들만 이용해서는 저 영웅들을 막을 수 없을 텐데?
그때 성진아의 대답이 곧바로 날아왔다.
[성진아: 제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두 손으로 열 손 아니 백 손을 모두 막지는 못하겠죠, 이기지 못하더라도 발목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이르카: 그렇다면 희생이 너무 클 텐데…….]
[성진아: 전쟁에서 희생이 없을 수는 없죠.]
희생이 없는 전쟁은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만 이건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생각할 수 있는 자만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얘 진짜로 사이코패스인가?
거짓된 광기가 아닌 진짜 광기인지 헷갈릴 때.
성진아가 재차 메시지를 보내왔다.
[성진아: 저 앞에 있는 괴물이 헥토르라면 활을 든 괴물은 파리스겠군요. 헥토르의 약점인 동생을 먼저 처리하면 헥토르 역시 힘이 빠지겠죠.]
[이르카: 네? 아, 그렇긴 합니다.]
[성진아: 난전으로 끌고 갈게요. 그사이에 파리스를 제가 먼저 처리하죠.]
[이르카: 훌륭합니다. 이거 뭐, 제가 조언을 해드릴 필요도 없었네요.]
[성진아: 아뇨, 저는 관리자님이 필요해요.]
[이르카: ……?]
내가 왜?
제안하려던 방법을 스스로 생각해내서 말할 정도면 내가 꼭 필요하진 않을 텐데?
[이르카: 일단 최대한 지켜보며 다른 공략법이 떠오르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전투에 집중해주시길. 그리고 제가 구한 성물이 몇 가지 있는데 상점에 입고시켜뒀어요. 지금은 포인트를 아낄 때가 아니에요. 그리고 또…….]
[성진아: 필요한 물건들은 이미 사뒀어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린 거고요.]
확실히 준비를 철저하게 한 모양.
그래, 이래야 성진아지.
그때 하늘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은 성진아가 복면을 올려 쓰고는 어둠 속에 잠겨 들기 시작했다.
성진아가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모든 군단장과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강태식과 영웅들을 향해 짓쳐 들기 시작했다.
* * *
콰앙-!
얼음처럼 차갑고 송곳처럼 날카로운 주먹을 날린 블라디미르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낸 강태식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게 누구신가? 러시아의 맹견 블라디미르잖아? 오늘도 약 빨고 온 거냐?”
“크큭, 네 녀석도 죽음이 무서운 모양이구나. 내게 약을 먹는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까 말이야.”
“아? 내 실수. 그건 저번 회차였지?”
“뭐?”
저번 회차라는 강태식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블라디미르가 잠깐 멈칫할 때.
“감히 똥개 새끼가 주인을 물어?”
입가에 비웃음을 가득 담은 강태식이 쏜살같이 날아가 엑스칼리버를 휘둘렀다.
섬뜩한 예기가 느껴지는 공격에 화들짝 놀란 블라디미르가 모든 마력을 두 팔에 집중해 엑스 자로 교차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강태식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절로 피어올랐다.
막을 수 없는 일격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저번 회차에도 이렇게 죽었으니까.
제아무리 용을 써도 성진아와 블라디미르는 영원한 패배자일 뿐이었다.
똑같은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이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희열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콰앙-!
모든 것을 가를 수 있을 것 같았던 강태식의 공격이 막힌 것.
물론, 뒤로 형편없이 밀려나긴 했지만,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내 공격을 막아? S급이 아니다. 설마 SS급이 등장한 건가? 그런데 누구지?’
마른침을 꼴깍 삼킨 강태식이 공격을 막은 자를 지켜보고 있을 때.
붉은 십자가 모양이 그려진 방패를 들고 있던 한진우가 휘파람을 불며 말을 건넸다.
“확실히 강태식 저 배신자는 최강이라고 자부할 만한 실력이긴 한 것 같습니다.”
“고맙군, 덕분에 살았네.”
“녀석의 공격은 제가 막을 테니 안심하고 공격하시죠.”
블라디미르와 대화를 나누는 한진우를 바라본 강태식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모르는 인물이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모르는 인물이 등장한 변수에 이를 바드득 간 강태식이 질문을 건넸다.
“너는… 누구지?”
“느그 애비다.”
“……?”
“어쭈? 어디서 눈깔을 굴려? 눈 안 깔아? 이런 불속성 효자 같은 새끼가? 내가 네 놈의 창자를 뽑아다가 느그 애#@$%[email protected]#&@!”
다짜고짜 극도의 폐륜 드립을 속사포처럼 날린 한진우는 타고난 탱커였다.
모든 헌터들이 질려서 얼굴이 하얗게 탈색될 정도로 욕을 내뱉은 한진우를 멍하니 바라볼 때.
강태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
한눈에 봐도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바라본 한진우가 손가락으로 강태식을 가리키며 또다시 비웃기 시작했다.
“우냐? 울어? 야 너 설마 우는 거야? 와, 동네 사람들 저놈 욕 좀 들었다고 울고 자빠져 있…….”
“다 죽여버리겠다!”
“일단 나부터 죽여봐, 이 버러지 새끼야.”
“크아아아!”
분노에 이성을 잃은 강태식의 찬란히 빛나는 엑스칼리버와 한진우의 은은히 빛나는 십자가의 방패가 굉음을 내며 충돌했다.
* * *
강태식의 맹렬한 공격을 한진우가 힘겹지만 철저하게 막아내고 있을 때.
헥토르의 단단한 방어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레이트라가 거친 숨을 내쉬며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헥토르랑 일대일은 어렵지 않아. 문제는 저 뒤에서 활을 쏘는 활쟁이가 문제인데…….’
소환된 군단장의 숫자는 여섯.
강태식을 도와주러 온 영웅들의 숫자는 이십여.
다른 군단장들 대부분 이 대 일의 대결을 펼치고 있기에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이 대 일의 싸움을 할 수 있는 것도 수많은 헌터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다른 영웅들의 발목을 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거 좀 힘들겠는데… S급 애들이 좀 죽으면 다시 소환해야 하나?’
레이트라는 입술을 잘게 깨물며 시선을 돌려 강태식과 싸우고 있는 S급 헌터들을 바라봤다.
군단장 이상의 악마가 온전한 힘을 갖추고 하계에 강림하려면 최소 S급 이상 헌터의 육체가 필요하다.
물론, 가브리엘의 물병은 이미 써버렸기에 온전한 힘을 가지고 소환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나아질 것이기에 계속 그쪽만 힐끔거리고 있을 때.
슈욱-!
활쟁이가 쏘아낸 화살이 빛과 같은 속도로 짓쳐 들었다.
레이트라가 황급히 몸을 틀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때.
레이트라가 피하는 방향으로 헥토르가 창을 내질렀다.
푸욱-!
“이런 씨벌. 감히! 나 레이트라 님에게 이딴……!”
분노에 휩싸인 레이트라가 몸에 꽂힌 창을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더니 강하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창대를 손에 쥐고 있던 헥토르의 몸이 순식간에 딸려옴과 동시에 레이트라가 강하게 마기를 머금은 주먹을 내질렀다.
쾅-!
정타를 날린 것 같은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레이트라의 표정은 잔뜩 찡그린 상태에서 전혀 펴지지 않았다.
바로, 아무런 손맛이 느껴지지 않은 것.
한결 가벼워진 창을 몸에서 뽑아내며 창을 버리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드는 헥토르를 노려봤다.
“하, 진짜 거지 같네.”
비록, 이지를 잃었다지만 위대한 영웅의 전투기술은 어디 가지 않았다.
끌어당긴 창에 몸이 끌려가자마자 레이트라의 주먹을 향해 방패를 후려쳐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피한 것.
<키킷, 그르르륵……!>
마치 레이트라를 비웃듯 기성을 내지르는 헥토르와 활쟁이를 바라보던 레이트라가 이를 바드득 갈며 구멍 뚫린 몸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검은 피를 근육을 조여 틀어막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광경이지만,
현재 이곳은 거의 신화의 전장에 가까운 곳.
믿을 수 없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쓰걱-!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섬뜩한 피륙이 갈라지는 소리가 헥토르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끼이익-?>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린 헥토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몸에서 분리된 파리스의 머리와 보라색 마기가 넘실거리는 아론다이트를 손에 쥔 성진아의 모습이었다.
<끄에에에엑-!>
이지를 잃었어도 동생을 끔찍이 아끼던 헥토르의 심성이 드러난 것일까?
만사 제쳐두고 파리스의 몸을 향해 기성을 내지르며 헥토르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헥토르가 정신없이 뛰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던 성진아가 다시금 어둠에 몸을 숨기며 비웃음이 섞인 말을 건넸다.
“잘 있어.”
<끄아아아-!>
놓칠 수 없다는 듯 성진아의 그림자를 향해 헥토르가 뛰어가려고 할 때 상처를 지혈한 레이트라가 헥토르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으며 조소를 날렸다.
“어딜 도망가는 거냐? 아직 나랑 승부를 안 봤잖아?”
<끼에에엑-!>
“어디서 개처럼 짖고 있어!”
주먹에 검은 마기를 잔뜩 휘감은 레이트라가 무방비 상태인 헥토르의 얼굴을 향해 검은 마기를 잔뜩 머금은 주먹을 내질렀다.
쾅-! 쾅! 쾅-!
무자비하게 내려친 주먹에 격렬하게 저항하던 헥토르의 손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쓰러진 헥토르의 머리를 밟아 터트린 레이트라가 한숨을 내쉬며 전장을 둘러볼 때.
치열한 전장에서 가해지는 치명적인 암습에 제우스가 보낸 이지를 잃은 영웅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