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지옥의 군단장과 수많은 헌터들.
그리고 강태식이 불러온 괴상하게 생긴 하얀 존재들이 섣불리 선제공격하지 못하고 기묘한 대치를 이어가던 시각.
천계와 중간계의 사이에 있는 드높은 올림포스산.
주신의 전장 열두 개의 황금 옥좌 중 가장 가운데 위치한 옥좌에 앉아있던 제우스가 언짢은 표정으로 자신에 앞에 당당히 서 있는 근육질의 거한을 바라봤다.
강태식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에 있어야 할 헤라클레스가 올림포스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일까?
옥좌에 앉아있는 제우스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쉰 헤라클레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어째서 4 지구의 일에 끼어드신 겁니까?
“내 깜짝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냐?”
“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은 헤라클레스의 대답에 제우스가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역으로 질문을 건넸다.
“네놈은 자존심도 없는 것이냐? 또 패배하고 이르카라는 그 잡종에게 4 지구를 넘겨주고 싶은 것이더냐?”
“저와 제 회귀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약 패한다면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겠죠.”
“미련한 놈 같으니, 정신머리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지옥의 군단장들이 올라왔다! 내 도움이 아니었다면 네놈이 관리하는 회귀자가 이길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얘기란 말이다!”
꽈르릉-!
자신의 권위가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격노한 제우스의 외침과 동시에 검게 변한 올림포스의 산에 하늘에서 커다란 벼락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하늘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고,
거대한 올림포스산이 제우스의 힘에 두려움을 느낀 듯 잘게 떨어대기 시작했다.
제우스의 분노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올림포스 위에 존재한 천계를 노려본 제우스가 재차 역정을 내기 시작한 것.
“이번 기회가 어떤 기회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더냐! 바로 네놈의 고향인 지구의 주도권을 가져올 기회란 말이다! 네놈이 이르카라는 잡종에게 연달아 패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화를 삭이듯 씩씩거리고 있는 제우스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 헤라클레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는 기간토마키아가 온다고 해서 저를 만드셨죠. 그 끔찍했던 전쟁이 끝나고 신의 자리에 올라섰다가 천계의 반대로 최종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떨어진 것은 제 잘못이 맞습니다.”
수많은 전설을 남기고 기간테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헤라클레스가 신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2 창조신의 권한을 헤라클레스에게 달라 요구한 제우스의 요청으로 최종시험에 올랐다가 떨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대영웅 헤라클레스가 관리자 일을 하기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바로 제우스의 무리한 욕심 때문이었다는 소리.
물론, 올림포스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헤라클레스 역시 가지고 있기에 자신보다 낮은 업적을 가진 신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반신의 위치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르카와의 대결 또한 천계와 지옥의 영향력이 가장 큰 지구에서 그 둘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빼앗아 올 수 있었기에 흔쾌히 찬성한 것이었다.
물론, 예상치 못한 이르카와 성진아의 선전으로 모든 게 어긋난 상황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두꺼운 근육을 뒤덮은 상처 중 가장 커다란 상처를 손으로 짚은 헤라클레스가 제우스에게 말을 건넸다.
“위대하신 아버지시여. 기간테스와 전쟁에서 가장 앞장서서 피 흘리고 싸운 건 저였습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네 힘이 있기에 승리한 것도 사실이었고.”
“저는 올림포스가 다시 위대해지길 원합니다. 하지만! 쓸모가 없어졌다면서 폐기처분을 한 영웅들을 하계로 보낸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저런 모습으로 보내다뇨? 이건 저희의 명예를…….”
“시끄럽다!”
“아뇨!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해왔던 모든 대결 중에…….”
말을 잠시 멈춘 헤라클레스가 이가 바스러질 듯 악물고는 말을 마저 이었다.
“이토록 수치스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헤라클레스에게 제우스가 한 행동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자신과 강태식의 노력이 아닌 온전히 제우스의 독단으로 지원군을 보낸 것.
그때 껄껄 웃음소리를 내며 웃은 제우스가 기묘한 눈빛으로 헤라클레스를 바라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건넸다.
“수치스러운 승리는 승리가 아니더냐? 역사는 승리자의 말만 믿고 승리자의 말만 기록한다.”
“그것은……!”
“그래, 그것은 우리의 신화 역시 마찬가지 아니더냐?”
“……!”
의미심장한 제우스의 말에 헤라클레스는 마치 붕어처럼 입만 뻥끗 댔다.
* * *
강태식의 주변에 나타난 하얀 괴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크기와 생김새 등이 제각각인 건 차치하고 나서라도 풍기는 분위기가 기묘했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크게 손해를 볼 가능성이 커 보였기에 성진아에게 일단 공격하지 말고 기다려보라고 지시를 내린 상태.
그때 안젤라가 화면을 살피더니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이르카 님 저거 규정 위반 아니에요?”
“카르나 님이 제한을 풀어준다고 하셨으니까 규정 위반까지는 아냐.”
“아뇨, 성진아 씨 말고 강태식이요.”
“응?”
“강태식 주변에 있는 저거 소환한 거 아니잖아요?”
안젤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소환 같은 경우에는 흔적과 기운이 드러난다.
가령 타 차원에서 정령을 소환한다면 정령계의 흔적과 자연력이 느껴져야 했다.
하지만, 강태식의 옆에 있는 기괴한 존재들은 소환의 흔적도 어떤 특이한 기운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위협적이었다.
헤라클레스 녀석은 강태식에게 군단장들의 상대법을 알려줬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강태식 주변에 자리 잡은 하얀 괴물들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모르기에 쉽사리 공격하기 어려웠다.
“글쎄, 헤라클레스 녀석도 뭔가 비장의 수로 숨겨둔 걸 수도 있지.”
“그래도 군단장들인데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흠, 일단 저게 뭔지 알아봐야겠지?”
“네? 어떻게요?”
“저기 맷집 좋은 놈 하나 있잖아.”
“아…….”
마치 탄식과도 같은 안젤라의 말을 들은 뒤.
강태식을 노려보고 있던 성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성진아 씨. 아까 성진아 씨한테 말 걸었던 레이트라라는 놈한테 저기 저 괴물 중에 한 놈 잡아서 공격해보라고 말해보세요.]
[성진아: 혼자서요?]
[이르카: 네, 뭐 확인해볼 게 있어서요.]
[성진아: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르카: 그렇게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성진아: 역 소환되면 아깝잖아요. 아직 제대로 굴리지도 못했는데요.]
[이르카: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쟤 맷집은 군단장 중에 최강일 겁니다. 제가 예전에 아~주 잘 단련시켜 놨어요.]
[성진아: 풋, 알았어요.]
원래 매도 맞아본 놈이 잘 맞는다.
거의 수백 년간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은 경험이 있는 레이트라라면 강태식의 옆에 나타난 존재들의 정체를 파악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터.
감히 계약비율을 까발려?
물론, 계약비율을 후려친 것이 잘한 짓은 아니긴 해도 악심을 품고 저렇게 초 칠 일은 아니지 않은가?
회귀를 끝마치고 나니 다른 관리자들한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녀석들까지 계약해준 게 누군지 까먹은 모양.
거절당할 때 계약비율까지 물어보고 온 녀석들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을 꾹 참으며 칠 대 삼 계약비율로 계약해주기는 했지만 내 계약비율이 더 좋을수록 잘 챙겨준 걸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이었다.
적당하게 딱 역소환되기 직전에만 구해주면 상관없겠지.
[뭐? 나 혼자 저놈들을 공격하라고? 그건 좀 무리 같은데… 혹시, 이르카 그 양반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던?]
[아뇨, 그런 지시를 내리신 적은 없어요. 다만, 제가 다른 걸 물어봤는데 그 대답을 레이트라 님이라고 해주셨죠.]
[뭘 물어봤는데?]
레이트라의 질문을 들은 성진아가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누가 최강의 군단장이냐고 물어보니까 레이트라 님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응? 그 양반이 그런 말을 했다고?]
[네. 레이트라 님이 최강이라고 하셨답니다?]
최강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술을 씰룩거린 레이트라가 다른 군단장들을 슬쩍 내려다보듯 바라보고는 말을 꺼냈다.
[뭐, 그 양반도 보는 눈이 많이 늘었네. 알았다. 대신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파악하면 바로 도우러 와야 한다?]
[당연하죠. 레이트라 님만 믿겠습니다.]
상큼한 미소를 지은 성진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레이트라가 주먹에 차고 있는 건틀렛을 강하게 맞부딪치며 강태식과 괴물들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달려오길 기다렸을까?
강태식과 함께 온 괴물 중 두 놈이 앞으로 나섰다.
기다란 창과 방패를 든 괴물과 커다란 활을 든 괴물만 앞으로 나서자 자존심이 상했을까?
레이트라가 커다란 괴성을 지르더니 창과 방패를 든 괴물에게 두 주먹을 내지르며 짓쳐 들었다.
콰앙-!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강렬한 충격파에 주변의 흙이 산산이 비산했다.
흙먼지 덕분에 뿌옇게 변한 화면에서 먼지가 가라앉고 난 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레이트라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힘을 완벽히 이겨내진 못해 꽤 많이 뒤로 밀리긴 했어도 방패를 든 괴물이 수월하게 공격을 막아낸 것.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
레이트라 녀석은 힘의 손실이 거의 없이 소환되었을 텐데 저렇게 쉽게 막아내?
침을 질질 흘리던 괴물이 뒤로 훌쩍 물러서며 그때 당황한 레이트라를 비웃듯 기성을 내질렀다.
<키에에엑!>
슈욱-!
그와 동시에 뒤쪽에 있던 괴물이 쏜 녹색 화살이 레이트라의 발목을 향해 날아갔다.
수상쩍은 힘이 담긴 화살을 바라본 레이트라가 몸을 옆으로 피할 때.
몸을 숨기고 있던 짧은 검을 든 괴물이 등장했다.
레이트라의 회피 방향을 완벽히 틀어막은 괴물이 검을 휘두르고, 앞에서는 처음 녀석의 공격을 막은 괴물이 창을 찔러올 때.
[이런 괴물들이 감히!]
레이트라가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무림계에서 흔히 말하는 허공답보(虛空踏步)를 쓴 모습과 비슷한 모습.
두 마리의 괴물이 닭을 쫓던 개처럼 녀석을 바라보고 있을 때 녀석이 떠 있는 하늘로 수많은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괴물들의 공격은 한두 번 맞춰본 솜씨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들보다 강한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전문적으로 익힌 티가 나는 공격이었다.
회피하는 방향을 향한 공격까지 완벽했으니까.
이지를 상실한 괴물 같아 보이는데 저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다급하게 방어막을 펼쳐 화살을 막아낸 레이트라가 이를 바드득 갈아대며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괴물 새끼들이! 이것도 막아봐라!]
확실히 레이트라 녀석을 먼저 보내길 잘했다.
전개 시간이 다소 긴 방어막을 화살이 떨어져 내리기 전 바로 펼치는 것을 보니 처맞기 전에 미리 준비해놨다는 뜻.
그때 진득한 붉은 마기가 담긴 레이트라의 주먹이 하늘에서 괴물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마치 유성이 떨어져 내리듯 강렬하게 떨어져 내린 공격에 처음 앞에 나섰던 창과 방패를 든 괴물이 앞으로 나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땅으로 떨어져 내린 레이트라와 괴물의 방패가 충돌했다.
콰앙-! 쾅-!
시끄러운 굉음이 울려 퍼지고 난 뒤.
허탈하게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트라와 반쯤 부서진 방패를 쥔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건 진짜 녀석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이었을 텐데 저걸 막아내?
황당한 기분에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툭-
방패를 든 괴물이 쓰고 있던 기괴한 가면이 땅에 떨어져 내렸다.
이제 누군지 한번 확인… 어?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헤라클레스 이 미친놈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그때 나와 똑같이 황당해하는 안젤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저… 저분 트로이의 영웅 아니에요?”
“어,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네…….”
놀랍게도 모습을 드러낸 괴물은 과거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다.
그것도 세상에는 장렬하게 사망했다고 알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