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져서일까?
성진아의 행동을 지켜보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가브리엘의 물병은 원래 저렇게 쓰려고 했던 물건이 아니었다.
정면 대결에서 약한 암살자인 성진아의 단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어떻게든 살리려고 아껴뒀던 것.
강태식과의 정면 대결 이전에 게이트를 폭파해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와 강태식이 혼란에 빠진 사이 녀석을 암살하고 게이트를 다시 닫을 때 쓰려고 했던 물건이었으니까.
물론, 이제 그 방법은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채널의 메시지창을 살짝 열어보았다.
[대악마들이 성진아를 도와주러 갈 군단장급 악마들을 뽑기 시작합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물병을 함부로 대한 성진아에게 극도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친히 성진아를 엄벌하겠다고 공표합니다.]
[대군주 사탄이 코를 후비며 가브리엘에게 그까짓 물병 좀 깨진 거로 쪼잔하게 군다며 면박을 줍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사탄을 노려봅니다.]
[대군주 루시퍼가 직접 참전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대결에 보태쓰라고 15만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대천사 미카엘이 위협적으로 붉은 십자가의 성검을 꺼내 들며 이건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 주장합니다.]
[대천사 라파엘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미카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대군주 바알이 귀를 후비며 아니꼬우면 직접 강림하라고 말합니다.]
[4 지구의 관리신 바스테트가 화들짝 놀라서 대군주와 대천사들을 뜯어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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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 저 미친 양반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메시지창을 다시 살펴보자 대군주 사탄의 중재와 대리자 메타트론의 등장으로 험악했던 분위기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대군주와 대천사들이 강림하는 건 무조건 막아야 한다.
대군주나 대천사 혼자서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어린아이 손가락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
만약 그런 놈들끼리 모여서 패싸움을 벌인다면 성진아와 강태식이 싸움을 벌이기도 전에 지구가 사라진다.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사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사탄 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사탄: 오~ 이게 누구야? 성배의 주인 이르카 아냐?]
[이르카: 하…하핫!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사탄: 그게 운이 좋아서 얻을 수 있는 물건이냐? 아! 그리고 무슨 일로 연락했는지는 다 아는데, 걱정하지 마라. 바싸고는 지금 추적 중이니까. 내 그 늙은이를 진짜……!]
아직 바싸고를 못 잡았어?
사탄의 절대 추적 능력을 벗어날 정도의 힘이 있다는 소리인가?
바싸고를 아직 잡지 못했다는 소리에 살짝 불안해진 마음을 추스르며 사탄에게 메시지를 다시 보냈다.
[이르카: 그 문제는 사탄 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연락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사탄: 혹시, 성진아랑 관련된 문제냐?]
[이르카: 넵.]
[사탄: 흠…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만, 이건 성진아가 택한 거다. 네가 끼어들 문제는 아니라는 거지. 자신을 산 제물로 바쳐서 대규모 소환을 한 것이고 우리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어.]
[이르카: 그래도 회귀자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사탄: 야! 성진아 소원은 강태식한테 복수하는 거잖아. 그러면 우리가 소원을 이뤄주는 건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투덜거리냐?]
어? 성진아의 소원은 그게 아닐 텐데?
사탄의 말을 듣고 성진아가 그동안 해왔던 일을 곰곰이 떠올려봤다.
좀비 사태.
소원의 탑.
일본에 가한 핵 폭격 등등.
그녀가 회귀한 뒤 해왔던 거의 모든 일은 강태식을 물 먹이기 위한 일에 집중되어있었다.
오죽하면 나도 그녀의 목적이 강태식에게 복수하는 것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사탄이 저렇게 오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입가에 절로 피어나는 미소를 감추며 사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사탄 님의 말이 맞습니다. 소원을 이루고 지옥에 가는 건 그녀가 선택한 문제네요.]
[사탄: 그렇지! 소원을 이루고 나서 지옥에 온 계약자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 예전에 네가 관리했던 회귀자 그 누구냐? 맨날 두들겨 패던 애 있잖아?]
[이르카: 레이트라요?]
[사탄: 그래! 그놈도 원래 네가 관리하던 회귀자였잖아? 물론, 성진아처럼 살아있을 때 온 건 아니지만.]
[이르카: 그렇죠, 아무쪼록 그녀가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 그래도 어디 가서 처맞고 다니지 않을 놈들로 가려서 뽑으라고 했으니까 군단장 중에서 최고의 정예가 갈 거다.]
최고의 정예라.
거의 올스타급 군단장들이 온다는 뜻인데?
강태식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을 때였다.
[사탄: 너도 지옥 놀러 와봤으니까 알 거 아니냐? 영혼석이 생긴 다음에는 득시글거리던 죄수들도 없어져서 오히려 지루한 천계보다는 지옥이 더 재밌고 쾌적하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르카: 넵, 알겠습니다.]
메시지를 종료한 뒤 재빨리 시스템을 조작해 성진아의 계약조건 진행 상황을 띄워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
[성진아가 살해한 전 세계의 헌터: 9.8%]
소름 끼치는 정확함에 온몸에 솜털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녀가 보여준 광기는 가짜였다.
오히려 광기가 아닌 철저하게 계산한 계획에 가깝지 않을까?
강태식에 대한 복수심을 먼저 드러내기보다 모든 괴물과 헌터들을 살해하고 싶다고 했었다.
복수의 목표를 강태식이 아닌 다른 헌터들로 설정해서 지금과 같은 사태까지 대비해둔 그녀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지옥의 대군주와 대악마들을 자신의 주요 고객이자 열성 팬으로 만들 계획을 짜놓고 그것을 착실하게 이행했다.
모두를 철저하게 속이면서….
그녀가 사실은 다회차 회귀자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 * *
4 지구 미국.
트리스탄과 미국 헌터 협회의 은신처.
사망한 S급 헌터들의 육체를 매개체로 지구에 강림한 지옥의 군단장들이 깨진 가브리엘의 물병과 그녀의 손에 들린 아론다이트를 바라보며 앞다퉈 질문을 건넸다.
“크흣, 천계의 성물을 이렇게 만들다니 배짱 한번 대단하군.”
“그게 이르카 님이 가져오신 아론다이트인가? 확실히 대단해 보이는 마검이로군. 아름다워. 아, 물론 그대가 훨씬 아름답소. 성진아 양.”
“키히히힛! 우리를 소환할 생각을 했다니 정말 탁월한 선택이야! 게다가 힘의 손실이 거의 없이 강림한 게 얼마 만인지! 있지? 있지? 나 여기서 인간 몇 마리 잡아가도 돼?”
“정신 나갔냐? 인간을 잡아가? 그랬다가 징계받으면 네놈의 사지를 찢어 죽여주마.”
나사가 하나 아니, 두 개쯤 빠진 것 같은 군단장들의 이상행동을 지켜본 성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흉흉한 눈빛을 지닌 거한이 커다란 자신의 도끼를 성진아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네 팬이다. 이곳에 싸인해라.”
“네?”
“밑에다가는 사랑하는 벡스터 님께, 라고 적으면 된다.”
“……?”
한눈에 봐도 흉흉해 보이는 자신의 도끼를 들이밀어 어이없는 싸인을 요구하는 군단장 벡스터를 바라본 푸른 머리를 가진 미청년이 피식 웃더니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꺼냈다.
“어이, 벡스터. 싸인은 원래 일 끝내고 받는 거라고, 설마 멍청하게 인간이 휘두르는 엑스칼리버에 얻어맞고 강제송환될까 봐 겁나서 미리 받아두려는 거야?”
“흥! 내가 너 같은 약골로 알고 있나 본데 지금 여기서 네 뚝배기의 강도를 시험해줄까?”
“워, 워. 진정하라고, 나는 내 후배한테 인사를 건네고 싶을 뿐이야.”
“응?”
“나도 인간 회귀자 출신인 거 몰라? 그리고 앞으로 지옥에서 맨날 얼굴 보고 살 사이인데 왜 이렇게들 흥분해 있어?”
과도한 흥분상태에 빠져있던 다른 다섯 명의 군단장들을 쭉 훑어보며 말한 푸른 머리의 미청년이 성진아에게 다가가 한 손을 건네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네가 성진아지? 나는 대악마 아스타로트 휘하의 군단장 레이트라라고 한다.”
“반갑습니다. 레이트라 님.”
“에이, 이제 같이 지옥에서 지낼 선후배 사이에 딱딱하게 그러지 말자고.”
레이트라의 환영 인사에 오묘한 미소를 지은 성진아가 말을 꺼내기 전.
“그런데 이르카 그 양반 아직도 사기 치고 다니냐?”
“네? 사기라뇨? 관리자님은 저를 위해…….”
“너 계약비율 몇 대 몇이니?”
“……?”
“아직도 칠 대 삼이 아니라 삼 대 칠이 기본 계약이라고 구라 치고 다니냐고.”
“……!”
이르카의 거짓말을 듣고 살짝 놀란 성진아의 표정을 유심히 살핀 레이트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럴 줄 알았다. 그 양반은 왜 이렇게 사기를 치고 다니는지 원, 너도 소원을 이루지 못했으면 나처럼 맨날 얻어맞았을 거야. 그리고…….”
“저는 칠 대 삼 계약을 맺었습니다.”
“뭐? 그 쓰레기가 정상적인 계약을 해줬다고?”
황당한 표정을 지은 레이트라를 힐끔 노려본 성진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만, 제 관리자님을 욕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레이트라 군단장님. 제게는 소중한 분이니까요.”
“어? 어, 그래 알았어. 내가 사과하마. 이거 참, 소싯적 그 양반한테 맨날 얻어맞아서 오해했나 보네.”
본전도 되찾지 못한 채 뒤돌아선 레이트라가 머리를 벅벅 긁을 때.
[회귀자 강태식과 성진아의 공격 제한 시간이 해제되었습니다.]
성진아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다급하게 이르카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이르카: 성진아 씨? 레이트라 저 썩을 놈의 말은…….]
[성진아: 상관없어요. 관리자님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다만.]
[이르카: 다만?]
[성진아: 나중에 제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세요.]
[이르카: …설마, 신을 죽여달라 이런 건 아니죠?]
[성진아: 훗, 그런 거 아니에요. 들어주기 쉬운 소원이니까 꼭 들어주셔야 해요.]
[이르카: 제 신념을 위배하지 않는 거라면 꼭 그럴게요.]
이르카의 약속을 받아들고 환한 미소를 지은 성진아가 재차 메시지를 보냈다.
[성진아: 그런데 이렇게 메시지 많이 보내셔도 괜찮나요?]
[이르카: 아! 관리신께서 제한을 풀어주셨어요. 이제 성진아 씨도 정상적인 회귀자들처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거죠.]
[성진아: 그것참 다행이네요, 강태식은…….]
[이르카: 제한이 풀린 건 저뿐만이 아닙니다. 강태식의 관리자 헤라클레스가 손 놓고 있을 리가 없어요.]
강태식도 제한이 풀렸다는 말에 살짝 아랫입술을 깨문 성진아가 재차 메시지를 보내려 할 때.
위쪽을 물끄러미 쳐다본 레이트라가 경고의 외침을 내뱉었다.
“뭔가 온다!”
레이트라의 경고를 들은 군단장들이 손에 쥔 무기를 꼬나쥐고 경계태세를 취할 때.
쾅-!
천장이 거미줄처럼 쩍 갈라지더니 엑스칼리버를 손에 쥔 강태식과 기괴한 가면에 얼굴을 숨긴 이십여의 거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봉제 인형처럼 바느질된 몸과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가면 아래로 질질 흘러나오는 침과 꿰매진 몸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는 기괴한 모습들을 바라본 군단장들이 눈살을 찌푸릴 때.
강태식이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휘파람을 불며 말을 내뱉었다.
“어때? 제우스 님이 빌려준 비밀무기들을 본 소감이?”
“자신이 없어졌네.”
“키킥! 그러게 왜 까불…….”
“네놈한테 질 자신이 없어졌다고 병신아.”
“뭐?”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모를 오묘한 표정을 지은 성진아를 바라본 강태식이 의문을 표할 때.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떨어져 내리며 수많은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흐흐흐, 살아생전 우리 러시아군이 미국 땅을 밟을 줄은 상상도 못 했군.”
“그건 한국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라디미르 대통령 각하.”
블라디미르와 한진우가 여유롭게 얘기를 나눌 때. 유럽 연합군의 총사령관 피에르 원수가 강태식과 기괴한 모습의 거한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한진우 대장의 말처럼 강태식이 악마에 영혼을 판 게 사실인 모양이구려, 저런 끔찍한 괴물들을 데리고 성진아 성녀를 압박하고 있다니 말이오.”
물론, 제대로 잘못 짚은 거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