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누군가 잔소리 중에 가장 듣기 힘든 것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들었던 얘기를 계속 반복해서 듣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뇌에 각인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했던 얘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카르나 님의 끝없이 이어지던 잔소리를 모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르카야? 너 설마 자니?”
“아닙니다. 그냥 걱정돼서요.”
“응? 뭐가 그렇게 걱정이니?”
“뭐, 카르나 님이 저 같은 관리자보다 뛰어나다고 그렇게 입이 닳도록 칭찬하신 성진아 씨죠. 제가 시간의 흐름을 비틀어서 보내준 아론다이트를 제대로 얻었는지 궁금하고 또…….”
“강태식하고 싸움도 걱정이고?”
“네.”
대답을 마치고 강태식과 싸움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카르나 님이 날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너 많이 변했구나?”
“변하다뇨?”
“변했지. 예전에는 계약자들한테 빨리 소원이나 이루라고 닦달만 했잖니? 빨리 카르마 모으는 데만 급급해가지고 맨날 강림해서 말 안 듣는 계약자들 두들겨 패기만 했잖아? 그래도 지금은 진심으로 계약자들을 걱정하는 게 티가 난단다.”
“낯뜨겁게 무슨… 지금도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요. 얼마 전에 소원을 이루고 계약을 끝낸 이천웅이나 이스마엘도 매로 다스렸는데요.”
“얘, 지금 네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변한 거란다. 그래도 확실히 변해서 보기 좋네. 이제 몇 시간 안 남았지?”
“그렇죠. 준비할 시간도 부족한데 카르나 님한테 잔소리를 듣느라…….”
“응? 더 듣고 싶니?”
“아뇨. 살려주세요.”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네자 피식 웃은 카르나 님이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는 다리를 꼬았다.
나이스!
드디어 잔소리가 끝났다는 신호에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있자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은 카르나 님이 질문을 건넸다.
“자신 있는 거지?”
“백 퍼센트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제가 말한 것만 잘 지켰다면 승산은 있어요.”
“그래 알았단다. 이만 가보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하는 카르나 님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뒤 돌아서 문을 향해 걸어갈 때였다.
“지면 오렴. 좋은 술 한 잔 줄 테니까.”
“에이, 이기고 축하주나 얻어 마시러 올게요.”
“훗, 그러렴.”
카르나 님의 집무실에서 벗어나 재빨리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진아는 아론다이트를 제대로 얻었을까?
카르나 님이 마지막에 화끈하게 붙으라고 풀어준 제약은 나한테 이득일까? 헤라클레스 녀석한테 이득일까?
머릿속에 떠도는 수많은 고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어느새 집무실에 도착했다.
안젤라도 잔소리를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없는 동안 카르나 님한테 잔소리 잘하는 법이나 배워왔으면 안 되는데…….
크게 숨을 고른 뒤 문을 열고는 좌우로 눈치를 살피며 고양이가 걸어가듯 살금살금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오셨어요?”
“어? 안젤라 있었어? 하하!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온…….”
“일단 궁금하실 거 같은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
어딘가 모르게 쌀쌀맞은 그녀의 태도에 입을 오므리고 있자 차가운 눈빛으로 날 빤히 바라보던 안젤라가 들고 있던 서류를 들추며 말을 건넸다.
“성진아 씨는 아론다이트를 찾았어요.”
“오! 그거 내가 기다리던…….”
“일단 계속 들으세요. 계약 종료된 회귀자가 두 명이에요. 이건 그냥 평범한 계약 종료였어요. 획득한 카르마는 0.6%에요. 안 계신 동안 얻은 총수입은 12만 7천 포인트고 계약 비율로 나눈 뒤 정산한 포인트는 8만 5천이에요… 그리고 또…….”
서류에 얼굴을 감춘 채 계속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읊고 있는 안젤라를 바라봤다.
잘게 떨리는 손과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라도 내가 잘 못 될까 봐 그동안 걱정했던 것이 분명하다.
확실히 피부도 매우 푸석해져 있었고 잠을 제대로 못 이룬 듯 다크서클도 진하게 내려와 있었지.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안젤라에게 다가갔다.
“많이 걱정했지? 미안해.”
“…….”
“내가 너한테 가장 끔찍한 고통을 준 뒤로, 너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뒤로.”
“…….”
“나는 너를 위해 살겠다고 마음먹었어. 이제는 내 소원이 된 네 소원인 멸망한 우리의 세상을 다시 만들고 싶다는 걸 이루기 전까지 나는 절대 죽지 않아.”
“…….”
안젤라가 얼굴을 가리던 서류를 손으로 내린 뒤.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울지 마. 못생겨져.”
“꼭, 잘 나가다가…….”
피식 웃으며 눈물을 닦는 안젤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어!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하지 마세요. 그런 구식 유머에 누가 웃어요?”
“응…….”
뼈를 때리는 타박을 듣고 머리를 벅벅 긁고 있을 때. 흐르던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은 안젤라가 손에 쥐고 있는 성배를 가리키며 질문을 건넸다.
“이게 뭐예요? 웬 달걀?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하시지, 주세요 지금 해드릴게요.”
“이거 성배야.”
“네?”
“이게 성배라고.”
“……?”
의아한 표정으로 성배와 나를 번갈아 보고 있는 안젤라의 표정을 보니 아직 이해하지 못한 모양.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해주기 전. 재빨리 성진아와 강태식의 공격 제한이 풀리기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 05:42:27]
아직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시간 괴리로 인해 메시지를 보낼 수 없으니 안젤라의 의문을 풀어주는 게 우선.
안젤라에게 성배를 찾으러 갔을 때 벌어졌던 일들과 어떻게 아론다이트와 성배를 얻었는지 설명해줬다.
얘기를 모두 들은 안젤라가 뭔가를 떠올리듯 머리를 부여잡고 곰곰이 고민하더니 성배를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그러면 지금은 봉인된 상태라는 거예요?”
“응. 그렇다네?”
“성배라고 하길래 잔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희한하네요. 이거 무슨 신수 같은 건가? 알로 변한 거 보면 용은… 아닐 거고, 설마 주작!? 우리도 이제 애완동물 생기는 거예요?”
용을 말할 때 내 눈치를 힐끔 살핀 뒤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어 대는 안젤라를 바라보며 뒤통수를 긁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평범한 신수를 성배라고 부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
게다가 최상위 신물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주작이나 백호 같은 평범한 애완동물들을 가리키는 단어는 아닐 것이다.
“음, 글쎄? 나도 아리마태아의 요셉한테 물어봤거든? 성배를 최초로 옮긴 게 그분이잖아.”
“그렇죠.”
“이상하게 정체는 제대로 말해주지 않더라고. 놀라지 말라는 말만 하고 말이야. 뭐, 지금 당장 성배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지켜봐야지.”
“흐음~ 알았어요. 아! 그러면 성배는 제가 옮겨둘게요.”
“오, 그래 줄래?”
안젤라에게 싱긋 웃어 준 뒤.
성진아가 나오는 채널을 틀려고 할 때였다.
“이거… 안 움직이는데요?”
울상을 지은 안젤라가 낑낑거리며 성배를 움직이려 했지만, 테이블에 내려놓은 성배는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이거 나만 옮길 수 있는 모양인가 보네.
하긴, 내 신력의 삼 분의 일을 가져간 녀석인데 다른 자가 옮길 수 있다면 그것도 좀 웃기는 일이겠지.
“아무래도 나만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인데? 내가 나중에 옮겨 놓을게. 신경 쓰지 말고 조금 쉬고 있어. 너무 피곤해 보인다.”
“누구 때문에 걱정하느라 그랬죠, 지금 얼마나 남았어요?”
“다섯 시간 정도?”
“그러면 그때 깨워주세요. 알았죠?”
“응. 걱정하지 말고 쉬고 있어.”
피곤한지 입을 손으로 가리며 하품을 하는 안젤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시스템을 조작해 성진아의 화면을 띄웠다.
성진아가 어떻게 하고 있나 확인해 볼까?
목숨 걸고 구해온 아론다이트를 부디 잘 써먹고 있어야 할 텐데.
그동안 꽤 고생했는지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트리스탄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성진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태식의 목숨을 오늘 끊을 생각이에요. 이 지독한 악연도 오늘로 끝이죠.]
[지금 내게 찾아온 건 도와달라는 뜻이오?]
[네.]
[허튼소리 하지 마시오! 나도 그 악마 같은 놈한테 겨우겨우 도망쳤소. 그놈에게 수많은 S급 헌터들이 살해당했소. 더는 도와줄 여력이 없다는 말이오!]
[제가 언제 힘을 빌려달라고 했나요?]
[……?]
뭘 꾸미는 거지?
놀란 눈빛으로 성진아를 바라보는 트리스탄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강태식에게 살해당한 헌터들을 빌려주시죠. 물론 시체가 제대로 돌아온다고는 장담하지 못하지만요. 어차피 이제는 상관없겠죠.]
[뭐요?]
[머리가 안 돌아가시나 본데, 제가 질문을 하죠. 좀비 사태가 왜 발생했을까요? 그리고 소원권을 미국에 줬는데 한국의 좀비 사태가 어떻게 진정이 되었을까요?]
[……!]
[저는 영웅이 아니에요. 오히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악당에 가깝죠.]
나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신들의 후원을 받기 위해?
고작 그런 이유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이유는 없다.
물론, 그녀가 하는 말 중에 틀린 말도 없고 실제 대악마들의 후원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너무 강태식만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관리자와 회귀자 사이의 계약은 회귀자가 가진 목적을 달성했을 때 종료가 된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했다고 해서 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천웅이 녀석도 목적을 이루고 난 뒤 삶의 방향성을 잃을까 봐 제자라도 키우면서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해주지 않았던가?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그녀를 이해하려고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걸까?
자신이 악당이라는 것을 밝힌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좀비 사태를 통해 한국에서 구원자로 불리며 커다란 인기를 얻지 않았던가?
이건 치명적인 약점을 스스로 밝히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에 가까웠다.
아무리 반신불수가 되었다고 해도 미국은 미국.
저력이 있기에 시간만 주어진다면 예전의 위용을 되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하겠다는 뜻인가?
그건 좀 곤란한데…….
그때 트리스탄이 굳은 표정으로 성진아를 한차례 노려보더니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좀비 사태를 그대가 만든 것이오?]
[그렇다면요?]
[날 살려둘 생각은 없군.]
[아뇨,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은 없답니다?]
[훗, 거짓말하지 마시오. 내가 우습게 보여도 그런 말을 믿을 만큼 멍청하진 않소. 이거 참, 고래 싸움에 끼인 꼴이었군.]
말을 마친 트리스탄은 품에서 수제 시가를 꺼내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를 입에 머금었다가 내뿜은 트리스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성진아.
둘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하릴없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트리스탄이었다.
[뭐, 죽은 헌터들을 좀비로 만들려는 모양인데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막을 수 없던 일인데 이렇게 얘기라도 해줘서 고맙구려. 다만, 죽일 거면 나만 죽이시오. 어차피 당신과의 얘기는 나만 알고 있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은 트리스탄의 말을 들은 성진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안내를 받아 S급 헌터들의 시체가 보관된 장소에 발걸음을 옮겼다.
고작 생각한 게 좀비라는 말인가?
아무리 S급 헌터의 육체라고 해도 성검을 가진 강태식한테 대항하기엔 너무 미미한 전력이다.
답답한 심정에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봤다.
트리스탄이 바깥으로 나간 사이.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본 성진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절대 쓸 수 없던 방법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어?
이거, 혼잣말이 아니라 나한테 하는 말인데?
말을 마친 성진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브리엘의 물병을 아론다이트로 내리쳤다.
쨍-!
성스러운 환한 빛과 사이하고도 괴상한 보랏빛 기운이 충돌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깨진 물병에서 흘러나오는 검게 오염된 성수를 시체에 뿌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미 싸늘하게 식은 사체가 혈색을 되찾아갈 때.
성진아가 자신의 손을 그어 피를 이용해 시체에 소환진을 그리더니 커다랗게 외쳤다.
[당신들을 따라 지옥에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그대들이 들어갈 육체를 준비했으니! 이 자리에 강림하소서!]
우리 회귀자가 또 언제 저런 미친 짓을 배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