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머르딘의 영혼을 뜯어낸 뒤.
이곳에 오기 전 준비해왔던 물건을 소환했다.
팟-!
혹시 몰라서 준비해온 물건이지만 이렇게 유용하게 쓸 줄이야.
만약, 아론다이트를 가진 랜슬럿이 반항한다면 일단 집어넣으려고 했던 물건인 붉은 영혼석이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영혼석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확인했는지 공포에 떠는 머르딘의 목소리가 귓가에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저 불길한 물건은 뭐냐고! 자, 잘못했어! 살려줘… 어어억!
어차피 죽은 놈이 살려달라니 웃기는 소리네.
머르딘의 영혼이 완벽히 영혼석에 빨려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난 뒤.
한숨을 내쉬며 핏빛 호수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이제 이곳에 온 가장 큰 이유를 처리해야 할 차례.
우우웅-!
호수에 두둥실 떠 있는 검을 바라봤다.
사이한 마력이 느껴지는 보라색 검신을 자랑하는 마검 아론다이트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잘게 떨고 있었다.
엑스칼리버의 형제 검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아론다이트는 보라색 검신을 가졌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엑스칼리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확실히 엑스칼리버에 맞설 수 있는 무기는 이것뿐이겠지.
사이한 마력이 피어오르는 아론다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치이익-!
반항이라도 하는 것일까?
뜨거운 열기를 내뿜어 날 거칠게 밀어내려는 아론다이트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가루가 되고 싶다면 더 까불어봐.>
협박이 통했을까?
조용해진 아론다이트를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이리저리 휘둘러봤다.
이쑤시개를 손가락에 끼우고 흔드는 것 같은 모양새라 그리 멋있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쓰러진 헤라클레스와 아리마태아의 요셉을 힐끔 바라본 뒤.
마력을 집중해 시공의 룬을 폭주시키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룬이 거칠게 떠는 감각과 함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해보는 거라 진짜 힘들기는 하네.
숨을 가다듬은 뒤 허공에 손을 뻗으며 명했다.
<나 이르카시우스 엔카나시온이 명하노니. 시공간의 틈이여 찢어져라!>
찌이익-!
검은색 시공간의 틈이 찢어지고 난 뒤.
이곳에 온 뒤로 들리지 않던 메시지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안젤라: 이르카님! 지금 성진아 씨가…….]
[안젤라: 강태식의 공격으로 미국이…….]
[안젤라: 왜 답장 안 해요… 거기서도 메시지 받을 수 있잖아요.]
[카르나티우스: 죽었니? 답장 안 해? 죽었으면 나한테 죽는단다?]
[사탄: 야! 빨리 안 돌아와? 지금 성진아가 위험하다고!]
.
.
.
여기, 뭔가 막혀있었구나.
그동안 정신없고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신들의 소통창구인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았었다.
시공간의 큰 구애를 받지 않는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았다는 걸 봤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것을 느껴야 했는데, 이건 내 실수다.
쓴웃음을 지은 뒤.
안젤라가 보낸 메시지를 쭉 읽어봤다.
성진아에게 도움을 준 미국이 거의 반신불수 상태에 빠진 것을 비롯해 그녀가 이끌던 추종자 세력도 많이 줄어든 상황.
그것도 이탈이 아닌 사망이었다.
강태식이가 확실히 힘의 우위를 잡고는 날뛰고 있구나.
그렇다면 이제 균형을 맞춰줘야지.
아론다이트를 시공의 틈에 집어넣고는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내 시간을 돌리지는 못하지만 물건 하나 보내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룬에 부담이 크기에 쉽사리 쓸 수 없는 방법이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성진아의 세계선에서 아론다이트가 처음 봉인된 장소에 안착한 것을 확인한 뒤.
폭주하는 룬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성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성진아 씨. 강태식에게 맞설 수 있는 무기가 아서 왕 전설이 시작되고 끝이 난 곳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가 처음 무기를 받은 장소로 가세요. 찾다 보면, 어떤 목소리가 들릴 겁니다! 지금 빨리!]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시공간의 문을 천천히 닫고 있을 때.
“쿨럭-!”
폭주하던 룬이 심장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누군가 망치로 가슴을 때린 강렬한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내렸다.
어차피, 이 정도는 각오한 일.
붉은 피가 배어 나오는 이를 꽉 깨물며 모랫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들끓는 마력을 천천히 진정시키기 위해 두 눈을 질끈 감고 평화로운 숲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광경 등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평화로운 생각.
평화로운 생각.
그런데, 성진아가 제대로 알아들었겠지? 혹시라도 강태식이…….
“쿨럭! 쿨럭!”
피를 한 바가지 쏟아내고 난 뒤.
스스로 멍청한 놈이라고 자책하고 난 뒤.
다시 평화로운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속으로 계속 되뇐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안에서 거칠게 폭주하던 룬의 마력이 점차 진정하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돌아갈 차례.
<명하노니 다시 돌아가리라.>
파앗! 슈욱-!
환한 빛과 함께 몸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온몸을 거칠게 뒤덮고 있던 비늘이 부드러운 피부로 돌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날카롭게 솟아올랐던 이빨과 발톱도 점차 줄어들었다.
갈색 머리의 청년 갤러해드로 다시 돌아오고 난 뒤. 호수에 비친 얼굴을 바라봤다.
기력이 쇠했는지 창백하게 탈색된 얼굴과 잘게 떨리는 몸은 말 그대로 손끝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이거 진짜 힘드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겨우 움직여 자리를 옮긴 뒤. 반대편에 힘을 잃고 쓰러진 성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쓰러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성배의 안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영혼의 기운을 느껴보니 툭 건드리면 소멸할 것처럼 미약한 상태였다.
불쾌한 감촉이 느껴지는 성배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건넸다.
“그동안 고생했다. 우리 신들이 어리석어 나쁜 놈들 손에서 지켜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부르르-!
성배 안에서 느껴지는 영혼의 떨림을 느낀 뒤.
복잡미묘한 감정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걸 어떻게 정화하지?”
지금의 성배가 정화된 상태는 아닐 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아리마태아의 요셉을 힐끔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깨어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가장 중요한 아론다이트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난 후유증일까?
이곳에 오고 난 뒤로 처음으로 긴장감이 확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줬다.
나머지는 그녀의 역량에 달린 것이겠지.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성진아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헤라클레스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해가 모습을 감추기 위해 지평선으로 뉘엿뉘엿 기울여져 갔다.
호수에 비치는 붉은 노을이 마치 태양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사그라들 때.
“끄응…….”
헤라클레스와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차례로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골이 흔들리는지 머리를 흔들고 있는 헤라클레스 녀석을 놀리듯 말을 건넸다.
“잠깐 버티라더니 이제 일어났냐?”
“끙! 아이고 골이야. 하여튼! 싸구려 포션 말고 좋은 거 사 오지 그랬냐? 엘릭서 같은 좋은 것 놔두고…….”
“나 먹고 죽을 엘릭서도 없다. 불만이면 포인트 내놓든가, 공짜로 줬는데도 지랄이야 지랄이.”
“쯧, 이기긴 이겼네? 고생 좀 했나 보다? 갑옷도 다 박살 나고 낯빛도 창백한 게 힘들게 이겼나 본데?”
“……?”
“진짜 너는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그러게 나처럼 운동을 열심히 해야지! 맨날 앉아서 회귀자들만 보고 있으니까 근손실이 나는 거야.”
“……??”
“봐봐. 내가 거의 다 조져놨는데도 이렇게 힘들게 이겼잖아? 너도 이번에 성진아랑 강태식 건 끝나면 나 따라와서 운동이나 하자.”
정신을 차리자마자 징그럽게 커다란 근육을 자랑하듯 크게 부풀린 헤라클레스를 멍하니 바라봤다.
갑옷이 박살 난 건 본 모습으로 변신하느라 그런거고 낯빛이 창백한 건 성진아가 있는 세계로 아론다이트를 보내느라 그런 건데…….
뭐, 녀석이 없었으면 이렇게 쉽게 이기지는 못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때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힘없는 발걸음으로 쓰러진 성배에게 다가가더니 씁쓸한 목소리로 성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이런 고통을 겪게 해서.”
왠지 모를 처연한 미소를 지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헤라클레스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에게 다가가 질문을 건넸다.
“정화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게 성배의 본 모습은 아니죠?”
“그렇다네, 나보다 위명이 높은 반신 헤라클레스여.”
“커흠! 뭐, 저는 신에서 반신으로 떨어진 거니 부담스러워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어쨌든, 이거 정화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헤라클레스의 질문에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곤란한 듯 턱을 수차례 긁더니 나와 헤라클레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사실, 머르딘의 영혼이 떨어져 나간 뒤로 거의 정화가 된 상태라네. 왜 아직 변하지 않는지 대충 예상은 가네만…….”
뜸을 들이던 요셉이 우리의 눈치를 보고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훔치며 말을 꺼냈다.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네.”
“흠, 주인을 어떻게 가립니까?”
“그대들의 신력을 이 안에 넣어야 한다네.”
“네?”
“아! 완전히 넣는 것은 아니고, 그대들이 가진 신력의 삼 분의 일 정도만 넣으면 주인으로 인정한 자의 신력을 가져갈 것일세.”
“……!”
“……!”
요셉의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신력의 삼 분의 일이면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반신이 될 때 받은 신력이 100이라 친다면 지금은 120 정도.
이건 헤라클레스도 나와 비슷할 것이다.
애초에 신력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때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조심스레 말을 다시 꺼냈다.
“물론, 성배가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력은 다시 돌아온다네, 나는 이미 성배에게 신뢰를 잃은 몸. 내 신력은 쓸모가 없어졌지. 그래서 신력이 돌아온 것이고.”
한번 주인으로 인정했다가 탈락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헤라클레스가 재빨리 성배에 다가가더니 내게 말을 건넸다.
“내가 먼저 해도 불만 없지?”
“뭐? 야! 내가 막타…….”
“네가 어떤 수를 썼는지 몰라도, 아론다이트를 성진아한테 보냈잖아. 어차피, 그거를 문제 삼을 생각도 없지만, 너만 다 가지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이런 이기적인 새끼.”
“…….”
“그러니까 처음은 나한테 양보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네 말도 맞네, 이번에는 양보할 테니까 먼저 해봐.”
“너 뭐 꾸미는 거 아니지?”
“아! 거참! 그러면 양보해주지 말까? 앙?”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라클레스가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와 성배를 번갈아 보더니 신력을 성배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녀석의 이마에서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지만, 성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예상이 맞은 모양.
슬쩍 올라간 입꼬리를 재빠르게 감추고 아리마태아의 요셉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끄덕-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이는 요셉.
집중해서 신력을 이곳저곳 넣으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헤라클레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쉬고 있어 봐.”
“아,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가 실패하면 다시 해보면 되잖아? 여기서 평생 죽치고 있을래?”
“끄응…….”
앓는 소리를 낸 헤라클레스가 뒤로 살짝 물러나고 난 뒤.
성배를 바라보며 그 안에 있는 영혼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내 신력이 이제부터 들어갈 거야. 너를 원상태로 돌리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네? 나를 믿어 줄 수 있니?”
아무런 대답이 없는 성배를 어루만지고 난 뒤.
신력을 불어넣으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널 이렇게 만든 놈을 알고 있어. 내가 꼭 복수해줄게.”
부르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성배의 안에 있는 영혼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스는 이곳을 이렇게 만든 게 바싸고인 걸 모르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없겠지.
성배는 물건이 아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의지도 있다.
그렇다면 복수심이 없을까?
신성한 신물이기에 복수심이 없을 거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엘을 보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천사도 복수심이 있다는 것.
실제로 성배가 타락했을 때 신과 인간에 대한 증오심에 가득 찬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완벽한 정화가 되지 않은 지금 복수심이라는 감정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컸다.
게다가 그 대상이 바싸고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성배는 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 어린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고마워.>
놀라기도 전에 성배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온 세상을 모두 비추는 밝은 빛이 새어 나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성배가 있던 자리에는 달걀과 같은 물건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게 정화된 성배?
아무리 봐도 그냥 달걀처럼 생겼는데?
황당한 마음을 감추며 성배를 손에 쥐자 주변의 풍경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사라지며 그리운 중간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 *
[히든메시지: 반신 이르카가 ‘생명의 설화: 다시 태어나는 성배’를 획득했습니다.]
[이르카의 창조 신화: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