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바싸고가 파놓은 함정은 아주 재밌었다.
그리고 그가 했던 말 중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이었다.
바로 과거, 현재, 미래를 본다는 말.
그중 하나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과거, 현재를 보고 미래를 유추하는 것일 뿐.
만약 미래를 봤다면 이자를 이용하는 것까지 봐야 정상이지 않을까?
오히려 미래를 본 자는 따로 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조언을 해준 프로메테우스.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는 그의 능력에 경외감을 느끼며 가웨인의 모습을 한 머리통을 바라봤다.
이자가 정말 바싸고의 제자가 맞을까?
바싸고의 제자가 이렇게 멍청할 리가 없는데…….
혼동을 주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서 정신이 오염된 것일까?
이건 꼭 확인해봐야 한다.
일단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해 볼까?
거짓말에 달인급으로 능숙하지 못한 놈들은 거짓말을 하면 다 티가 난다.
이건, 내가 거짓말을 많이 해서 아는 게 아니다.
미묘한 표정이나 행동의 변화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컨트롤하지 못하는 자가 많아 티가 나는 거지.
녀석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사실, 여기 반신이 나 말고도 한 명 더 들어왔거든?”
“뭣! 반신이 두 마리나 들어왔다고!”
“에헤이! 사형! 나는 같은 편인데 나까지 마리라고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어? 미, 미안…….”
“괜찮아. 사실 나도 다른 반신 놈들은 정말 지긋지긋하거든. 게다가 녀석 때문에 스승님이 주신 임무를 수행하기 힘들기도 하고.”
녀석의 머리통을 집어 가까이 가져다가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차 속삭여줬다.
“후- 여기 같이 온 놈이 허접한 놈이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단 말이지… 사형은 혹시 헤라클레스라는 놈을 알아?”
“뭐, 뭣! 헤, 헤라클레스!”
역시 이름값은 확실하네.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듣고 한껏 놀란 표정을 지은 녀석에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넸다.
“아나 보네? 아무튼, 걔는 천계 쪽 반신이잖아. 나를 견제하려고 온 거 같은데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이야.”
“뭔가 이상한데? 사제가 빙의한 게 갤러해드잖아. 그럼 걔는 누구한테 빙의해 있는데?”
“엑스칼리버가 타락하는 걸 막으려고 왔으니까 아서로 빙의해 있겠지?”
“흠, 그건 불가능해. 빙의할 수 없는 애들도 있거든? 아서 그 빌어먹을 놈은 혼이 이어져 있어서 죽지도 않는다고! 그런 빌어먹을 몇몇 놈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거고. 생각하니까 더 화나네!”
오호라.
한마디로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는 오염되지 않은 존재라는 소리잖아?
이 말은 가웨인 역시 모습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고 진짜는 따로 있다는 소리.
바싸고의 아들인 랜슬럿은 과연 어떨까?
“그래? 그러면 랜슬럿한테 아론다이트를 뺏을 수 있겠네?”
“아론다이트? 그건 지금 랜슬럿한테 없는데?”
순간 눈에 이채가 흘렀다.
이 녀석 아론다이트의 위치를 아는구나?
“어? 아나, 이거 골치 아프네, 아론다이트를 뺏어서 엑스칼리버를 상대하려고 한 계획이 다 꼬여버렸어.”
“응? 나 그거 어디 있는지 아는데?”
“진짜?”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여기 있던 세월이 얼만데!”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빡빡이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줬다.
일단, 내비게이션은 획득했고.
그런데 이 녀석의 이름이 뭐지?
“역시! 대단하네. 그런데 사형은 이름이 뭐야? 나는 레이트라라고 해.”
“나? 머르딘.”
“……?”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비게이션의 이름이 머르딘이라고?
머르딘(Myrddin)
흔히 멀린이라고 불리며 아서 왕 전설을 얘기할 때 단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인물이자 전설의 대마법사.
그의 정체가 바싸고의 첫 번째 제자였다고?
하긴, 처음 그를 봤을 때 마력에 미쳐서 폭주한 마법사로 보였으니 어쩌면 틀린 얘기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랜슬럿은 바싸고의 아들.
아무리 대단한 신이라고 해도 창세신 앞에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으니 그 얘기까지는 모두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아서왕 전설에 핵심적인 인물 두 명이 바싸고와 관련이 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치밀한 함정이네?
주인 잃은 신물을 찾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온 반신들을 잡아먹기에는 최고의 함정.
일단 이놈을 최대한 이용해 봐야지.
놀란 듯 휘파람을 불며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휘유~ 스승님이 말씀을 해주지 않으신 이유가 있었네, 위대한 대마법사 머르딘이 내 사형이라니 이거 자랑스러운데?”
“흐흐흐흐흐, 이제 이 사형의 위대함을 알아보는 거야?”
“당연하지! 솔직히 사형이 나보다 이름이 더 알려져 있을걸?”
“키키킥, 그렇지?”
이제 슬슬 정보를 캐내 볼까?
계속 웃고 있는 녀석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런데 사형.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뭔데? 응? 뭐가 궁금한 거야?”
“사형은 왜 신이 못 된 거야? 아서 그자는 신이 되었는데…….”
“키키킷! 사제가 뭔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난 신이 못 된 게 아니야, 안 된 거지.”
신이 안 된 거라고?
악신도 신이니 틀린 말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의문이 커졌다.
이곳에는 신격을 얻어 반신이 되는 기회를 버릴 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
뭘 꾸미고 있길래 신이 되는 것까지 미뤄뒀을까?
머르딘이 바싸고의 명령만 따르는 인형과 같은 자는 아닐 텐데.
“키키킷! 내가 여기서 얻은 힘을 보여줄까?”
“여기서 얻은 힘? 그거 진짜 궁금한데?”
“흐흐, 잘 봐둬 이 사형의 위대함을 보여줄 테니까.”
말을 마친 머르딘이 눈을 질끈 감더니 복잡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곧 자색과 녹색의 문양이 머르딘의 머리 주변에 떠오르고 난 뒤.
“일어나라!”
자색의 문양이 허공에 퍼지고 난 뒤.
벼락을 맞아 재가 되어 바스러졌던 인형들이 스멀스멀 일어나기 시작했다.
끄어어어어-!
기괴하게 비틀려있는 목을 손으로 잡고서는 다시 비트는 괴물 같은 모습과 찢어진 몸통이 마력에 의해 이어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생을 되찾으리라!”
녹색의 문양이 다시금 하늘에 퍼지고 난 뒤.
창백한 시체 같은 인형들의 창백했던 낯빛에 점차 생기가 돌아왔다.
“오! 누가 검을 뽑은 것인가? 아서 왕과 같이 위대한 기사가 탄생한 것이로군!”
“저 저주받은 검을 뽑다니, 내 생에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이건 기적이야!”
생기를 되찾은 인형들은 진짜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말을 하며 곧 자신들이 있던 장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인형들을 바라보며 침음성을 삼켰다.
자색의 문양은 죽음 마법.
녹색의 문양은 자연 마법.
최악의 상성을 가진 마법을 동시에 쓴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반신들을 사냥해서 힘을 얻은 건 바싸고뿐만 아니라는 소리인가?
악마의 힘과 드루이드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는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가 있을 때.
머르딘이 말을 건네왔다.
“사제, 내 머리 좀 내려줄래? 몸통에 붙여야 하거든?”
“응? 아! 계속 들고 있었네! 미안해.”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자 떨어져 나간 몸통이 바짝 다가와 머르딘의 머리통을 들어서 몸에 붙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까닥이며 제대로 붙은 것을 확인한 머르딘이 주문을 외우자 몸 전체가 슬라임처럼 꾸물꾸물 변하더니 다른 모습이 드러났다.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고집 센 노인의 모습으로 변한 머르딘이 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때? 키키킷! 이게 내 진짜 모습이야!”
“훨씬 보기 좋네, 이제 진짜 대마법사 같아 보여.”
칭찬을 건네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두 팔을 벌린 머르딘이 사방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키키킷! 난 여기서 죽지 않아! 꼴에 신이라고 오는 놈들이 비굴하게 살려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재밌는데? 우리 사형제 간에 우애를 다질 겸 헤라클레스를 잡으러 갈까? 앙?”
“사형, 내가 뭐부터 해야 한다고 했어?”
“응? 아! 아론다이트를 찾아야 한다고 했던가?”
“맞아. 일단 아론다이트부터 찾고 시작하자고.”
말을 마친 후 히죽히죽 웃어대고 있는 머르딘을 바라봤다.
어쩌면, 광기에 빠진 척을 하면서 빈틈을 노리는 전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대마법사에 이른 인물이 이렇게 미쳐서 멍청해질 수 있을까?
물론, 이스마엘처럼 성욕에 미치는 예도 있었으니 확신은 어렵지만,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일단, 속아 넘어가 주는 척을 하지.
아론다이트를 찾은 다음은 너야.
어쩌면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는 머르딘에게 걸음을 재촉했다.
“사형이 길 안내를 해줄 수 있어? 내가 지구 출신이 아니다 보니까 길을 잘 몰라.”
“키키킷! 당연하지 나만 따라오라고!”
* * *
살갗이 타버릴 것처럼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들판에 다다랐을 때 머르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난 뒤.
머르딘의 손가락이 멀리 있는 성을 가리켰다.
저곳에 아론다이트가 있다는 것일까?
그때 머르딘의 마른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키킷! 사제,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사제는 엑스칼리버에 대해 너무 모르는 거 같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키키킷! 사제도 스승님이나 나처럼 마법사지? 아까 보니까 나랑 비슷한 자연계열 마법을 쓰던 거 같던데?”
아, 천부령의 힘을 보고 말하는 거였구나.
발동 원리는 룬 마법과 비슷하지만, 효과는 자연 마법에 가까우니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을 만하다.
“그렇지, 솔직히 검을 조금 배우긴 했는데 마법만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녀석들을 상대하려고 배운 거라 기본은 마법이지.”
“키킥, 역시, 사제는 나 없었으면 아무것도 못 했겠네! 이대로라면 사제는 엑스칼리버를 뺏어서 타락시킬 수 없어! 왜일까? 응? 모르겠지? 모를 거야! 키킷!”
“이해가 안 가는데? 엑스칼리버가 마법을 튕겨내는 건 아니잖아.”
“킥킥! 땡! 검집은 튕겨내지! 아서 그 빌어먹을 놈한테 검집을 버리라고 말했는데, 끝까지 안 버리더라.”
이것도 기록과 다른 말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흠, 그러면 상대하기 확실히 어렵긴 하겠네, 그런데 위대한 사형의 마법이면 어떻게 가능하지 않겠어?”
“흐흐, 물론! 일대일로는 가능하지… 항상 비겁하게 다른 놈들이 같이 덤비니까 그렇지!”
“하긴, 원래 영웅이라는 놈들은 떼거리로 덤비는 게 주특기니까. 혼자서 정정당당하게 덤비는 우리 같은 선량한 자들을 다구리 놓고 정의는 승리한다! 이런 식으로 외치는 비열한 놈들이잖아.”
“흐흐흐, 역시 사제가 뭔가 아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저기 십자가의 방패라고 엑스칼리버의 검집보다 더 좋은 물건이 있거든?”
“진짜? 그런 물건이 있었어?”
여기서 갤러해드가 가졌던 최고의 성물 중 하나인 십자가의 방패에 관한 행방을 알게 된다니, 이건 뜻밖의 이득인데?
짐짓 놀란 척하며 머르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사제, 이곳에 관해 공부를 하나도 안 하고 들어왔구나?”
“공부하긴 했는데, 엑스칼리버의 약점이라던가 그런 거만 공부했지.”
“잘 들어. 십자가의 방패를 들고 사제가 다른 놈들을 막는 거야. 그런 다음에 내가 아서 그놈에게서 엑스칼리버를 빼앗는 거지, 어때?”
“오, 그거 좋은데? 그런데 사형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내가 여기서 다시 돌아갈 때 여기서 얻은 물건들을 가져갈 수 있어?”
이곳에서 성배만 가져갈 수 있는지 다른 성물들까지 가져갈 수 있는지 물어보자 머르딘이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 사제가 그걸 왜 궁금해하는 건데? 그냥 엑스칼리버 타락시키고 빠져나가면 되는 거 아냐?”
“궁금해서, 아서 같은 경우 현실에서 신이 되었는데 이곳에 있잖아. 여기는 완벽한 과거가 아니라 과거와 이어진 가상의 공간 같은 느낌이 들거든? 그렇다면 내가 성물을 원래 있던 세계로 가져갔을 때 사라지는지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는지 궁금해서 그래.”
“호오, 그런 것까지 다 알아차리다니 사제 꽤 똘똘하네? 키킥, 잘 들어. 가져갈 수도 있고 가져가지 못할 수도 있어. 이곳에 있는 것 중 엑스칼리버와 아론다이트를 제외하면 모두 사라진 성물들, 그것들은 성배를 찾았을 때만 원래 세계에 가지고 갈 수 있어.”
“그래? 성배를 찾으러 온 게 아니니 아쉽네.”
“키킥, 그래! 어쨌든 저건 필요한 물건이니까 가지러 가자고.”
머르딘의 상세한 설명을 들은 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설명충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모든 성물을 쓸어가 주지.
관리하는 회귀자들에게 도움이 될 물건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십자가의 방패는 아르한에게 주면 좋겠는걸?
확실히 십자가의 방패급 성물이면 다른 세계라고 해도 엄청난 위력을 선보일 테니 아르한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머르딘의 안내를 받아 고성의 입구에 들어서고 난 뒤.
고성에서 들려오는 고성에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나한테는 자격이 없다는 거냐! 아니, 겁니까?”
“가지고 가고 싶다면 나를 이겨라 퍼시벌 경!”
“이거 돌아버리겠네. 이상한 시체 같은 놈들이 덤비지 않나. 저기요. 저 이거 꼭 필요하다니까요?”
“이 물건은 저주받은 물건! 나를 넘어선 자에게만 자격이 있다!”
“아니, 막기만 하는 양반을 어떻게 이기라고…….”
뒤쪽에서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머르딘을 슬쩍 바라보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이 헤라클레스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해야 할 텐데.
아니, 보어스 경을 찾으러 길을 나섰어야 할 녀석이 왜 여기서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건데?
헤라클레스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흰 갑옷의 기사를 향해 외쳤다.
“제가 그대에게 도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