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반사적으로 들고 있는 검을 들어 올렸다.
챙-!
한차례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난 후.
잘게 떨리는 검 너머에 비친 검을 휘두른 자를 바라보고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가웨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조금 전까지 웃으며 얘기를 하던 가웨인이 휘두른 검이 날아온 방향을 보니 목을 한 번에 치려고 한 것이 분명했다.
역시, 이름을 물어보면서 내가 방심하길 노렸던 것일까?
그때 태양 빛을 받은 가웨인 아니, 가웨인의 모습을 한 괴물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곧 입고 있던 하얀 갑옷이 터져나가면서 몸이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핏빛처럼 붉게 변한 눈.
입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침.
강철보다 단단한 근육질의 몸.
이거 무슨 헐크야?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은 뒤.
심장 부근에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지잉-!
맹렬히 돌아가는 시공의 룬이 터질 듯이 팽창하고 난 뒤.
내 종족의 색을 뜻하는 붉은 문양이 허공에 떠올랐다.
왼손에 룬.
오른손에 속박의 사슬.
콰앙-!
두 마법을 합친 뒤.
가웨인에게 쏘아내며 외쳤다.
“내가 명하노니! 멈춰라!”
신력 없이 돌리는 룬 마법이라 조금 위력이 떨어지겠지만, 인간을 구속할 힘으로는 충분할 터.
곧장 날아가 가웨인의 몸을 휘감는 붉은 사슬을 바라보며 녀석을 심문하기 위해 천천히 다가갔다.
약물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패밀리어일까?
무슨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녀석을 살펴보려 할 때.
“크아아악!”
“……!?”
핏-!
구속이 풀린 녀석의 손톱이 얼굴을 길게 찢었다.
가까스로 피하지 않았다면 목에 기다란 상처가 났을 터.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멈춰야 했을 텐데?
진명의 힘을 담지 않아서 그런가?
“나 이르카시우스 엔카나시온이 명하노니! 이런 씨발!”
후웅-!
머리를 향해 크게 휘둘러 오는 검을 가까스로 피했다.
주문쟁이는 일단 목부터 벤다 이건가?
이거 좀 까다롭네?
숨을 가다듬으며 광폭한 녀석의 검로를 바라봤다.
정돈된 기사의 검로가 아니다.
막대한 힘을 얻은 어린아이와 같은 검로.
이건 검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손에 들고 있던 발린의 검을 크게 휘둘러 녀석의 검을 쳐내기 시작했다.
챙-! 챙챙-!
쇳가루가 튀기고.
화려한 불꽃이 사방에 피어오른다.
화려한 검무가 아닌 정적인 동작의 연속.
막고. 찌르고. 휘두르고. 다시 막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수십 번의 공방의 교환.
차분히 숨을 고르면서 가웨인의 모습을 지켜봤다.
전반적인 움직임이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역시, 아무리 갤러해드에게 빙의해서 신력이 사라지고 마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해도 어지간한 생명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룬의 속박까지 벗어나는 것을 봤을 때 저 가웨인은 가웨인이 아니다.
물론, 지금 있는 곳 자체가 실제 있는 공간이 아닌 가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수 있기도 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 인형에 가까운 움직임.
주변을 둘러보자 조금 전까지 환호하던 사람들도 가웨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크르르!
끄아아악!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기성을 듣자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가웨인에게 덤비라는 의미를 담아 손가락을 까닥였다.
“크아아악!”
도발에 넘어갔는지 검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녀석의 움직임을 그대로 받아쳤다.
챙-! 빠르게. 가볍게.
검을 흘려보내자 가웨인의 신형이 흐트러졌다.
몸을 빙글 돌려 강하게 검의 옆면을 후려쳤다.
채앵! 챙! 조금 느리게. 무겁게.
검에 담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이는 가웨인의 신형을 검으로 누른 뒤.
챙-! 챙챙! 더욱 빠르게-!!
한 번. 두 번. 세 번의 부딪침.
가웨인의 두 팔이 하늘 위로 치켜 올라갔다.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덤빈 거였어?
비어있는 녀석의 목에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촤악-!
머리를 잃은 몸통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검에 묻은 검은 피를 한 바퀴 휘둘러 털어낸 뒤.
괴성을 지르고 있는 인형들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데굴데굴.
발치로 굴러온 가웨인의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고통에 찬 얼굴. 잔뜩 찡그린 얼굴. 결정적으로 몸통에서 떨어져 나갔음에도 날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의 동공이 살짝 수축하는 모습이 비쳤다.
목이 잘려도 살아있는 생명체라… 확실히 재밌어지네.
머리통을 손에 쥐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슬슬 열릴 때가 되었는데…….
빙의부나 회귀부나 똑같이 쓰이는 게 뭐겠는가?
바로 상태창과 상점창 아니겠는가?
엄연히 빙의한 상태기 때문에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이곳에 오기 전 설정해놓은 예약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띠링-!
알림음과 함께 기다리던 마법보따리가 열렸다.
[마법 보따리.]
[장비][천부령][SSS]: 100,000P
[소모품][최상급 마력재생 포션][A]: 5,000P
.
.
마법 보따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공짜로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진품을 이용해 만든 복제품인데 이 정도 꼼수는 부릴 수 있는 일 아닌가.
피 같은 포인트를 투자해 혹시 몰라 준비해둔 소모품까지 모두 구매한 뒤.
천부령을 손목에 차고 마력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곧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는 천부령의 6개 부위 중 노란색 번개의 돌에 마력의 주입이 끝난 뒤.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소리쳤다.
“번개여, 내리쳐라!”
꽈르르릉-!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치며 괴물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폭력에 가웨인의 눈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바라본 뒤.
“마구 내리쳐라!”
꽈르릉-!
다시금 땅에 벼락의 비가 내리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백에 가까운 인형들이 모두 재로 변한 것을 확인하고는 가웨인의 머리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왁!”
“으억!”
목이 잘렸는데도 목소리가 나오네?
녀석의 눈을 마주한 뒤 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진짜 가웨인은 어디 있지?”
“키킥! 키키키킥!!”
“응? 웃기만 할 거야?”
“키키키킥! 이번에 온 반신은 꽤 재밌네? 너는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어떻게 알았어? 응? 응? 어떻게 알았냐고! 이번에는 너무 맛있어 보이는 놈이 왔잖아!”
뭐? 내가 반신인 걸 알고 있다고?
너무 놀라서 녀석의 머리를 떨어트릴 뻔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한 장소였구나.
“키키키킥! 재밌으어어어어어!”
시끄럽게 정말.
옆에서 시끄럽게 웃고 있는 녀석의 귀싸대기를 날리며 소리쳤다.
찰싹-!
“시끄러워! 귀청 떨어질 뻔했잖아.”
“……?”
그제야 조용해진 녀석을 들어 올리며 질문을 건넸다.
“넌 누구지?”
“궁금해? 궁금하냐고!! 아? 궁금하겠지? 미치겠지? 키키킥! 궁금해? 꼴에 신이랍시고 주접떨고 다니던 놈들이 내 발밑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면서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이 얼마나 재밌는데! 진짜 재밌겠지? 그치?”
확실히 미친놈인데?
정신이 나간 자처럼 이어지지 않는 말을 내뱉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묘하게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쉴 새 없이 떠드는 이상한 존재.
어딘가 오염된 녀석인가?
녀석은 마력에 취해서 마법 폭주를 한 미친 자들이 보이는 반응과도 비슷했다.
무림계로 따지면 주화입마에 빠진 다음 치매에 걸린 녀석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들의 특징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못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왜 이런 존재가 있는 것일까?
프로메테우스의 말을 곰곰이 떠올렸다.
첫 번째. 대부분이 거짓이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 아닌 인형들과 괴물들의 재를 보고 느낌이 오는 것은 하나.
두 번째. 이곳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
거짓과 오염.
이곳에서 사망한 반신들.
가장 강력한 신물 중 하나인 사라진 성배.
신들의 격을 높일 수 있는 창조의 설화.
설마! 이곳은 성배를 미끼로 한 누군가가 만든 함정이었던 것인가?
그제야 어딘가 어긋난 톱니바퀴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한 가지 의문점은 남아있다.
최상위 신들도 눈치채지 못할 만한 공간을 만들어낼 능력을 갖춘 존재가 과연 누굴까?
이곳과 관련이 있는 존재.
그리고 최상위 신들과 비슷한 힘을 가진… 설마?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내려놓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거 불편하네.”
“키키킥, 그러게 왜 빙의를 한 거야? 병신이야? 응? 으응? 하긴! 욕심에 눈이 멀어서 병신 같은 선택을 하니까 신이지!!!!!!”
“욕심에 눈이 멀어?”
“키키키킥! 성배를 찾으러 온 거지? 성배를 찾으러 온 거잖아? 네놈들이 어떻게 찾아! 못 찾아 절대 못 찾아!!”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나는 엑스칼리버를 찾으러 온 건데?”
“……?”
시끄럽게 떠들던 녀석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당연히 나와야 할 반응이 나오지 않으니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엑스칼리버를 타락시키라는 밀명을 받고 왔는데, 처음부터 이딴 정신 나간 놈들이나 만나고 있네, 아이고! 내 팔자야.”
“뭐!? 쉬, 쉿! 진짜야? 그런 얘기는 조용히 해야지!”
“응? 네가 뭔데 그게 궁금한 거지?”
“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그런데, 너, 너 진짜 엑스칼리버를 타락시키러 온 거야?”
“그럼 내가 머리통밖에 없는 이상한 놈한테 거짓말하겠냐?”
“그래? 그럼 네가 모시는 분의 이름을 말해봐. 엑스칼리버를 타락시키라고 밀명을 내린 분의 이름을 말해보라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도박이다.
성공하면 앞으로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이고,
틀리면 뭐, 그냥 여기서 이 녀석을 조지고 가야지.
“네가 뭔데, 그분의 위대한 존함을 물어보는 것이지?”
“너 솔직히 말해. 너 스승님의 제자 아니지? 엑스칼리버를 타락시키러 온 거 아니지?”
스승님?
이 함정을 꾸민 녀석이 녀석의 스승이란 얘기로구나?
이맛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 바보냐? 상식적으로 밀명을 내린 분의 이름을 말하는 바보가 어디 있냐?”
“…….”
“그리고, 네가 뭔데 내 스승님한테 스승님이라 하고 난리야? 그분의 제자는 나밖에 없거든?”
“뭐라고!?”
“진짜 제자는 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거든?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그분의 제자가 된 게 천 년 전인데 어디서 거짓말을 하려고 해?”
아서 왕 전설이 나타난 게 천오백 년 전.
녀석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제자라면 천오백 년 이상 지났을 것이다.
이곳에 처박아 두고 다른 제자를 받아들였다고 오해할 수 있을 만한 얘기를 꺼냈으니 슬슬 녀석의 뚜껑이 열려야 할 텐데?
“그, 그분이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다! 그래! 나를 숨기려고 하신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아무도 모르니까!”
“무슨 헛소리야? 네가 뭐라고 스승님을 들먹…….”
“이익! 이 미친 새끼야! 위대하신 바싸고 님의 첫 번째 제자는 바로 나라고!”
“……!”
이 모든 것을 꾸민 게 그 늙은이였던 건가?
한순간 온몸에 솜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거, 생각보다 더 소름 끼치는 늙은이였네?
그리고 이게 바싸고가 가진 불가사의한 힘의 정체였어?
바싸고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대군주에 버금가는 그의 힘이었다.
지옥 3대 군주의 힘은 어마어마하게 강력하다.
힘으로만 따지면, 천계 7대 천사들보다 우위.
메타트론을 제외한다면 대군주를 일대일로 상대할 수 있는 대천사는 없다.
물론, 대천사 두 명이 대군주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으니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고 대악마들의 힘은 대천사들에게 미치지 못했으니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 이유를 입증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중간계에 문제가 생겨서 우리엘이 내려올 때 지옥에서는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최소 2명 이상의 대악마가 올라온다는 것이 힘의 우열을 명백히 밝히는 것.
한마디로 대군주와 비교했을 때 대악마는 훨씬 약해야 정상이었다.
그가 집에 설치해둔 트랩 때문에 훨씬 강한 마력이 느껴졌던 것일까 하고 착각했지만,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똑-!
차가운 식은땀이 볼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다.
스멀스멀 번지는 땀방울을 바라보고 난 뒤.
나도 모르게 입가에 히죽 미소가 배어 나왔다.
이거 너무 재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