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성검을 마검으로 만들겠다는 충격적인 발언에 흥분 혹은 분노의 감정이 감도는 회의장을 천천히 거닐며 주변의 반응을 살펴봤다.
경악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심판관들.
저 미친놈이 무슨 말을 꺼낸 것이냐고 발광을 하는 올림포스 신들의 모습.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대악마들과 티탄족 신들의 흥분된 표정이 상반된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줬다.
애초에 강태식이 엑스칼리버를 쓰지 못하게 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런 것은 찬반투표를 하게 되는 일이고 내가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성검을 마검으로 만든다는 의견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서 왕은 추가 증인으로 소환될 것이다.
그를 추가 증인으로 불러오기 위해 그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을 내세웠으니까.
실제로 그를 소환해서 성검을 마검으로 만들 수 있냐, 없냐에 관해서는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다.
아서 왕은 지금 가장 중요한 인물인 두 번째 추가 증인을 불러오기 위한 포석이었으니까.
그때 충격에서 벗어난 심판관이 정신을 차리더니 시끄러운 좌중을 조용히 시킨 뒤.
준비되어있던 판에 나무망치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서 팬드래곤을 추가 증인으로 소환하는 것을 허락하겠노라!”
심판관의 허락이 떨어지고 난 뒤.
환한 빛과 함께 중후한 갈색 머리를 가진 중년의 기사가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과는 다르게 거친 질감의 회색 갑옷을 입은 모습이 달랐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아서 팬드래곤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
갑작스러운 소환에 놀랄 만도 했지만 아서 왕의 표정은 평온했다.
하긴, 놀라서 허둥대는 것이 더 이상할 테지.
소환되고 난 뒤 회의장을 한번 둘러보고는 살짝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서 왕에게 질문을 건넸다.
“성검 엑스칼리버의 주인 아서 팬드래곤이 맞습니까?”
“그렇소.”
“혹시 지금 4 지구에서 엑스칼리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그건 알고 있소. 호수에 돌려놓은 검이 왜 시베리아에서 발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확실히 엑스칼리버가 맞소.”
나이스!
엑스칼리버가 왜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는지는 아서 왕도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이러면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기 편해지지.
살짝 고조된 마음을 다잡으며 그가 살짝 불쾌할 수 있는 말을 건넸다.
“제가 아서 님을 이곳으로 소환한 이유는 한 가지 질문을 건네기 위해서입니다.”
“질문하시오.”
“일단, 이 영상을 한번 보시죠.”
뒤쪽에 앉아 있던 안젤라에게 눈빛을 보냈다.
곧바로 심판의 동경에 강태식과 성진아의 대화가 녹화된 화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재밌지 않아? 손가락만 튕기면 터져나가 죽어버리는 벌레들이 떠받들어 주는 건… 이번 세상에서도 난 영웅으로 기억될 거야…….]
게이트 폭파에 대한 의혹까지 나오고 난 뒤.
헤라클레스의 이맛살이 마구 찌푸려졌다.
녀석이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무시했다.
아서 왕은 강태식의 발언을 듣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긴, 명예를 중시하며 구국의 영웅으로 불렸던 그의 관점에서 강태식의 발언은 어떻게 보면 혐오감까지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저자가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서 왕이 뭐라 대답하기 전.
나와 아서 왕을 지켜보고 있던 제우스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반신 이르카! 주인이 될 자격을 물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그대가 한 말과 다르다! 그대가 약속을 어긴다면 나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라!”
서슬 퍼런 제우스의 호통에 시끄럽던 회의장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에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는 기괴한 제우스의 모습에 모두가 말을 아끼고 있을 때.
서슬 퍼런 제우스의 모습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크로노스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비꼬기 시작했다.
“벼락 맞은 얼간이 패륜아는 주둥이만 살았느냐? 어이쿠! 회의장에 네놈의 구린내가 진동하는구나. 거기 심판관 환기 좀 시켜주게나. 내 밭에 뿌리는 퇴비 냄새도 이것보다는 향긋한데 녀석의 구린내는 맡기만 해도 토할 것 같구려.”
“이익!”
“에휴~ 예나 지금이나 자기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협박부터 하는 건 여전하군요.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독수리가 제 간 대신 당신의 뇌를 파먹어야 좀 조용해질까요?”
“…….”
연달아 이어진 프로메테우스의 합동 공격에 제우스는 본전도 되찾지 못한 채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확실히 저 둘을 불러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아무리 심판 회의라고 해도 주신 급 창조신의 영향력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를 잠재울 수 있는 대비책으로 크로노스와 프로메테우스를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그만큼 제우스가 저지른 죄가 크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회의장이 잠잠해졌을 때.
내 질문에 침묵하고 있는 아서 팬드래곤에게 또 다른 질문을 건넸다.
이제부터는 기출 변형이니 한번 잘 풀어보시길.
“저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대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네, 정할 수 없죠. 그래서 저는 엑스칼리버를 마검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
놀란 아서 왕이 뭐라 말하기 전.
재빨리 다른 검의 사진을 띄우며 말을 건넸다.
바로 성검(聖劍) 엑스칼리버의 형제 검이자 호수의 기사 랜슬럿의 마검(魔劍) 아론다이트.
태생은 같은 호수의 여인에게서 나온 성검이었지만 태양의 기사 가웨인의 동생들을 베어버리며 마검으로 타락해버린 성검이었다.
아론다이트를 보고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아서 팬드래곤에게 재차 질문을 건넸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엑스칼리버의 형제 검인 아론다이트입니다.”
“흠…….”
“저 검이 왜 성검에서 마검이 되었는지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랜슬럿은 나중에 내게 사죄를 했소, 그리고 아론다이트 역시 봉인을 했다고 말했소.”
어쭈? 내가 그걸 조사하지 않았을까 봐?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뒤 그의 말을 반박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엑스칼리버와 아론다이트의 본질은 같은 성검이었죠?”
“그렇소.”
“그러면 타락시키는 방법 역시 똑같거나 비슷하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저는 강태식이 성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엑스칼리버를 마검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 그런…….”
아서 왕의 동공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고 해도 자신의 이름을 알린 아니, 자신의 상징이 되어버린 성물이 타락하는 걸 지켜볼 수는 없겠지.
고뇌하고 있는 아서 왕과 회의장에 있는 신들을 쓱 훑어봤다.
솔직히 이런 협박이 진짜 통할 줄은 몰랐다.
엑스칼리버를 진짜 마검으로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내가 알게 뭔가?
마검을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아무도 모를 텐데.
심지어 본인도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며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모두 아서 팬드래곤의 신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랜슬럿이라는 인물과 그의 무기인 아론다이트와 엑스칼리버의 상관관계를 보고 지어낸 따끈따끈한 얘기였으니까.
뒤쪽 방청석을 살펴보자 안젤라와 참관인으로 온 카르나님이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똑같은 포즈로 머리를 짚고 있었다.
내가 누구를 소환하려는 지는 어렴풋이 깨달았겠지만, 이런 얘기를 꺼내려는 것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진짜로 내가 엑스칼리버를 마검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적도, 아군도 모두의 머릿속에 내 말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바로 ‘엑스칼리버를 마검으로 만들 것이다!’라는 확신이 선 상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서 왕에게 천천히 다가가 다시 약을 팔기 시작했다.
“사실, 내키지 않습니다.”
“무엇이 말이오?”
“엑스칼리버라는 아서 팬드래곤의 알파이자 오메가와 같은 성검을 처참하게 타락시키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습니다.”
“…….”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아서 왕.
그리고 한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진 회의장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제가 이기려면 엑스칼리버를 그냥 마검으로 타락시키면 됩니다.”
“마검으로 타락시키면 이긴다는 이유가 무엇이오?”
심판관의 질문에 씁쓸한 표정으로 답변했다.
“엑스칼리버가 마검이 된다면 속성이 성(聖)속성에서 마(魔)속성으로 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그대가 이기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오?”
“제가 관리하는 회귀자 성진아는 마, 혹은 암 속성에 대한 내성이 높습니다.”
“……!”
“한마디로, 엑스칼리버를 타락시키면 그녀가 다시 유리해진다는 것이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헤라클레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녀석도 엑스칼리버가 마검화 된다면 기껏 잡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니까 고민하는 것이겠지.
그때 아서 왕을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저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죠.”
“그 방법이 무엇이오?”
“성검 엑스칼리버를 마검으로 타락시켜서 아서 팬드래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보다 엑스칼리버에 맞설 수 있는 아론다이트를 회귀자 성진아가 얻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 정도면 심판 회의를 요청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까? 아론다이트는 엑스칼리버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자 이미 마검 화 된 무기입니다. 엑스칼리버를 마검으로 만들지 않고 정.당.한 경쟁을 이어나가게 만들 수 있는 무기를 그녀가 얻을 수 있다면 저는 엑스칼리버를 타락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신이 되고자 하는 자입니다. 신이 내려준 성검 엑스칼리버를 오염시키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는군요.”
“……!”
“하지만, 제가 경쟁에서 이기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기에 침통한 심정으로 이런 제안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저 역시 엑스칼리버를 타락시키고 싶지 않은 점을 부디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나자 회의장이 눈에 띄게 소란스러워졌다.
의견이 분분했다.
엑스칼리버에 맞설 수 있는 무기를 달라는 게 어떻게 정당한 경쟁이냐?
아니다. 엑스칼리버를 마검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문제를 이렇게 해결할 방법을 꺼낸 것은 이르카가 많은 양보를 한 것이다.
팽팽하게 맞선 의견이 쉴 새 없이 교환되고 있을 때. 헤라클레스와 다른 올림포스 신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봤다.
대부분 의견이 통일되어가고 있었다.
이르카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모르지만, 엑스칼리버가 마검이 된다면 승산이 오히려 더욱 낮아진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론다이트를 얻게 해주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내 원래 목표는 성진아가 엑스칼리버에 맞설 수 있는 무기를 얻게 해주는 것이었으니까.
이제 아서 팬드래곤의 결정만이 남았을 뿐.
고뇌하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그가 어두운 낯빛으로 읊조리듯 말을 꺼냈다.
“이건… 랜슬럿을 불러와야겠소이다.”
나이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심판관에게 추가 소환을 요청했다.
“추가 증인으로 호수의 기사 랜슬럿의 소환을 요청합니다!”
“헤라클레스, 그대도 이르카가 요구하는 추가 소환을 수락하겠는가?”
“후우- 수락하겠습니다.”
마지못해 수락하는 헤라클레스의 표정은 마치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찌푸려져 있었다.
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겠지.
잔뜩 일그러진 올림포스 신들을 둘러보고 있을 때 환한 빛과 함께 기다리고 기다리던 랜슬럿이… 어?
“끌끌, 요즘 자주 보는구려? 아!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가?”
미친, 네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