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4 지구의 시간이 멈춘 지 하루 뒤.
소명해야 할 자료의 정리를 끝냈다.
심판 회의에 초청받은 신과 성자는 무조건 참석해야 하기에 안젤라가 초청장을 보낸 자들은 무조건 올 것이다.
다만, 그들 모두가 내게 호의적이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다.
반대로 헤라클레스 녀석은 올림포스의 신들만 모조리 끌고 와도 최소 50대50의 싸움이 된다.
각자 초청할 수 있는 신의 숫자는 정해져 있으므로 구조적으로 녀석이 심판 회의에서 지는 경우가 발생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참여한 신들 가운데 반수 이상이 동의하여야 심판 회의에서 결정한 효력이 발휘되는 것이니까.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속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제출할 자료를 준비한 안젤라와 함께 향한 심판 회의장에서는 선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와 올림포스의 신들.
흉흉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던 헤라클레스 녀석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다가오더니 말을 건넸다.
“이건 네 실수다. 안 그래도 다들 바쁜 시기에 이렇게 사소한 일로 부르는 건 실례 아니냐?”
“어떻게 이게 사소한 일이지? 영국에서 발견되어야 할 엑스칼리버가 러시아에서 발견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아냐?”
“하! 겨우 그런 거로 심판 회의를 요청한 거냐?”
“응. 뭐 잘못된 거 있어?”
최대한 당당한 태도로 말을 꺼냈다.
그러자 뒤에서 나와 헤라클레스의 대화를 듣던 올림포스의 신들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치켜들고는 헤라클레스의 어깨너머에 있는 올림포스 신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왜? 찬성표가 그쪽에서 나올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사소한 일로 치자는 거야?”
“야. 말조심해라. 다들 지켜보고 계시니까.”
“들으라고 한 말이야.”
“이 새끼가 진짜!”
헤라클레스가 그 어느 때보다 격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
녀석의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하나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
나이에 걸맞지 않은 건장한 몸.
그리고 결정적으로 온몸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신력이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덮쳐왔다.
제우스.
올림포스의 최강자이자 녀석의 아버지.
결정적으로 창조신과 주신의 자리에 있는 위대한 신격이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네 녀석이 이르카더냐?”
“그렇습니다. 위대한 번개의 제우스 님.”
“흠, 재밌는 녀석이로구나. 카르나가 널 비호한다지?”
“그저 회귀부의 관리자 중 하나기에 아껴주시는 것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 승산이 거의 없는 심판 회의를 연 의도는 궁금하나 들어가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구나.”
“그렇습니다. 이제 안에 들어가면 더 재밌어지실 겁니다.”
“호오? 당돌하구나. 어린 반신이여.”
제우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손으로 턱을 긁적였다.
내 의도가 궁금한 모양인 것 같은데.
그건 안에 들어가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
지금 여기서 그를 도발해봤자 이득이 될 것은 없기에 살짝 미소를 지어 대답을 대신에 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헤라클레스.
날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제우스와 기묘한 대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심판 회의에 참석하실 신들께서는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집행위원회 소속 심판관의 외침에 올림포스 신들이 투덜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을 때.
회의장 안쪽으로 걸어가던 제우스가 등을 돌리며 내게 말을 건넸다.
“네게는 자질이 있어 보이는구나. 허나, 천 년만 더 기다리거라. 이번에는 네 순서가 아닌 듯하니 말이다.”
빌어먹을 늙은이.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겨우겨우 붙잡았다.
제우스는 이번에 헤라클레스를 확실하게 밀어주겠다는 뜻을 표했다.
신이 어떻게 편파적일 수 있냐고 물어볼 수 있지만, 신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특히 제우스 같은 범죄형 신은 더더욱.
인간으로 치면 말로 표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적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최상격의 창조신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은가?
실제로 존경받는 위인 중에서도 인격적으로 완벽한 존재는 거의 없었다.
성좌위에 오른 인물 중 그 유명한 간디조차 인격만 따졌을 때는 결격사유가 엄청나게 많던 인물 아니던가?
제우스는 자기 할 말을 마친 뒤 다시 등을 돌려 회의장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안젤라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넸다.
“지금쯤 난장판이 되어있겠죠?”
“아마도?”
안젤라의 질문에 회의장을 잠시 바라보고는 턱을 긁으며 대답했다.
지금쯤 회의장에 들어간 올림포스 신들은 깜짝 놀라고 있을 것이다.
내가 당연히 부를 것으로 생각했던 신들이 아닌 다른 신들이 가득 들어와 있을 테니 놀라는 건 당연할 터.
아니, 놀라는 게 아니라 싸우고 있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안젤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재차 말을 건넸다.
“부르신 분들이 도와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 같은데…….”
“글쎄, 내가 하기에 따라 달린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가능해. 아니, 가능하게 만들 거야. 인제 그만 들어갈까?”
“에휴~알았어요.”
계속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못하는 안젤라를 이끌고 회의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회의실 내부는 내가 예상한 것처럼 완벽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마주쳐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 얼굴을 마주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제우스와 그의 앞에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신을 번갈아 바라봤다.
“다, 당신이 어떻게…….”
“아비에게 당신이라니 여전히 버릇이 없구나. 아들아.”
“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어찌 이자가 이곳에 온단 말이오!”
“왜? 내가 네 주신의 자리를 다시 뺏어갈까 봐 겁이 나는 것이냐? 아들아?”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아들인 제우스를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신.
바로, 제우스에게 유폐를 당하고 아내를 빼앗긴 농경과 대지의 신 크로노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크로노스 님 처음 뵙겠습니다. 회귀부의 관리자 이르카라고 합니다.”
“호오, 네 녀석이 내게 초청장을 보낸 녀석이로구나.”
“이르카! 네놈이 감히!”
겨우겨우 화를 참아내는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제우스를 살짝 바라본 뒤.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와 제우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크로노스에게 재차 인사를 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초청을 드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리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보게 된 점 미리 사죄드립니다.”
“후훗, 재미있구나. 오랜만에 제 어미를 아내로 삼은 불효자 놈의 면상을 보니 반갑기도 하고 말이다.”
그 말은 자기 아버지의 거시기를 자른 댁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크로노스 역시 1대 주신이었던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거시기를 자르고 2대 주신의 위치에 올라간 일화가 있다.
제우스의 가문은 대대로 유구한 전통이 있는 콩가루 집안.
뭐, 헤라 아줌마도 사실 따지고 보면 제우스의 누나니까 올림포스와 비견될 정도로 막장인 집안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지금 그 말을 꺼내 봤자 득이 될 것은 없기에 넘어오려는 말을 꾹꾹 참은 채 분노한 얼굴로 크로노스의 옆에 다가온 신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예지의 프로메테우스 님. 과거에 당신께 도움을 주었던 헤라클레스와 얽힌 일인데 이렇게 초청을 드려 송구합니다.”
“그대가 이르카인가?”
“그렇습니다.”
“걱정할 것은 없다. 내가 헤라클레스와 연이 있기는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른 프로메테우스가 당황하고 있는 제우스를 한껏 노려보더니 이를 갈며 말을 마저 이었다.
“나를 그 끔찍한 고통에 3천 년이라는 세월을 가둔 자와 얽힌 일이기도 하지 않느냐?”
“네, 네놈이! 감히!”
“그래, 아직도 아랫도리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난봉꾼의 신 제우스여. 올림포스의 4대 주신이 누군지 아직도 궁금하시오?”
그 순간 제우스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프로메테우스는 예지의 신.
그것도 가장 완벽한 예지를 할 수 있는 유이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더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
프로메테우스가 코카서스의 바위산에 묶이는 형벌을 받을 때 제우스에게 우라노스, 크로노스와 똑같이 몰락할 것이라고 헤파이스토스에게 말했으니까.
프로메테우스의 도발적인 언사를 들은 제우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다.
회의장 앞에서 한껏 근엄한 표정으로 내게 훈계 아닌 훈계를 하던 신과 같은 존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변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탕탕-!
심판관들이 나무망치를 두드리며 외쳤다.
“모두 정숙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에 서로 얼굴을 붉히던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그리고 크로노스 등이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한쪽에는 올림포스의 신들.
다른 한쪽에는 그들에게 적의를 보이는 크로노스와 같은 티탄족의 신들과 최대한 내게 우호 표를 보내줄 수 있는 사탄 등의 대악마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모습을 한번 살펴본 심판관 중 가운데 있던 심판관이 헤라클레스에게 질문을 건넸다.
“올림포스의 반신 헤라클레스.”
“네. 심판관님.”
“같은 회귀부 소속의 반신 이르카가 표한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겠는가?”
“아뇨, 저는 이의 제기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당당하게 대답한 헤라클레스는 이내 자신이 준비해온 자료를 심판관들에게 건넸다.
그 자료를 한번 훑어본 심판관들이 헤라클레스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그래 이의 제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그 이유를 소명하길 바라네.”
“네, 알겠습니다.”
곧 헤라클레스는 4 지구의 지도를 펼치더니 엑스칼리버가 발견된 러시아를 가리키며 말을 꺼냈다.
“지금 반신 이르카가 이의 제기를 한 것은 영국의 대영웅이자 신의 위치에 오른 아서 팬드래곤의 성검(聖劍) 엑스칼리버가 왜 영국이 아닌 러시아에서 발견되었느냐에 관한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스의 말을 들은 심판관들이 내가 건넨 자료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겠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헤라클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잘 아시다시피 4 지구는 게이트를 통해 7계 신이 보내는 괴물과 그 괴물들을 사냥하는 헌터라는 특수한 힘을 각성한 인간들이 주축을 이루는 행성으로 게이트의 발생으로 인한 지각변동과 성물들의 위치가 다소 변경이 된 점…….”
헤라클레스의 설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건넨 서류와 헤라클레스를 번갈아 바라보던 심판관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것.
“잠깐 기다리겠는가?”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을 멈춘 헤라클레스를 뒤로한 채 내가 제출한 서류를 흥미롭게 바라본 심판관이 말을 꺼냈다.
“반신 이르카. 그대는 엑스칼리버가 강태식의 손에 들어간 것에는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엑스칼리버는 회귀자 강태식이 정당하게 얻은 물건. 저는 그 성검을 획득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 제기를 표하지 않습니다.”
“……!”
말을 마치고 난 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헤라클레스를 쳐다봤다.
열심히 준비해온 자료가 모두 헛고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입이 떡 벌어진 채 날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첫 번째 흔들기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두 번째 흔들기에 들어가야지.
“회귀자 강태식이 엑스칼리버를 얻은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에게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흠, 정당한 노력으로 얻은 성물을 쓰는 것은 설사 그자가 악인이라고 해도 제지할 수 없는 문제.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당연히 나올 반응이었고 답변이었다.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네, 그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그것을 실행해도 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추가 증인을 요청합니다.”
“요청에 반대합니다! 사전에 승인되지 않은 증인입니다! 게다가 이미 신이 된 인물이 생전에 쓰던 성물의 주인을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내가 누구를 부르려는지 깨달은 헤라클레스가 재빠르게 반대의견을 표했다.
정확하게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여기까지는 내 생각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내가 그를 부르려는 이유가 설마 자격이 있는지 알아봐달라는 거겠어?
서로 의견을 나누던 심판관들에게 소리쳤다.
“헤라클레스가 뭔가 오해를 했나 본데, 제가 성검의 주인에게 회귀자 강태식이 엑스칼리버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어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문제로 그를 부르려는 것인가?”
“성검을 마검으로 만들어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뭐, 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