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인간의 출입을 거부하는 혹한의 추위에 뒤덮인 시베리아의 하늘에 형형색색의 오로라가 걷히며 거대한 빛이 땅으로 추락하듯 떨어져 내렸다.
쾅-! 콰과광-!
비산하는 눈과 갈라지는 땅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소원의 탑에 있던 최종 보스 따위는 단 한 방에 날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
뜨거운 빛이 아닌 한없이 서늘한 예기를 품은 빛이 얼어붙은 성진아와 미국의 헌터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콰직-! 콰지직!
푸욱-!
인간이 개미를 짓밟아 죽이면 이렇게 될까?
어디에 내놓아도 강자로 추앙받을 인물들이 마치 코끼리 앞에 놓인 벌레처럼 터져나갔다.
핏-!
그 작은 인간의 몸에 얼마나 많은 피가 저장되어있던 것인지 사방으로 튀어 나간 피 중 일부가 성진아의 볼에 튀었다.
“강태식…….”
이를 바드득 간 성진아가 처참한 주변을 둘러보고는 강태식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때 어두운 하늘에서 한 남자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킥, 어쩌나? 한발 늦었는데?”
강태식은 어디선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지 만신창이가 된 채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몇몇 심각한 상처도 있었지만,
그 상처는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능력.
강태식이 초재생능력을 얻은 것일까 고민을 하던 성진아의 귓가에 그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킥, 영웅 놀이 해보니까 어때? 재밌지? 막 사람들이 영웅님 영웅님하고 구원자님이라면서 떠받들어 주니까 재밌어 죽겠지?”
“영웅 놀이?”
“에헤이, 모르는 척하지 말자고. 너 뭐 한국에서 메시아? 그따위로 불리는 건 다 알고 있거든?”
“그게 뭐 어때서? 상황을 이용하는 건 개인의 역량 아니던가?”
“큭, 재밌지 않아? 손가락만 튕기면 터져나가 죽어버리는 벌레들이 떠받들어 주는 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그리고 신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
-척!
성진아가 신에 관한 얘기를 꺼냈을 때.
강태식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그녀의 목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검을 들이댔다.
길게 갈라진 상처에서 붉은색 피가 흘러내릴 때.
강태식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제 너도 연기하는 거 지치지 않아?”
“연기? 난 원래 이랬어.”
담담하게 말하는 성진아를 기묘한 눈빛으로 바라본 강태식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번 세상에서도 난 영웅으로 기억될 거야. 너는 그 영웅을 흠집 내려고 한 악녀로 기억되겠지.”
“또 게이트를 폭파하려고 하는 거냐?”
“뭐?”
“미친놈이 신념을 가지면 제일 무섭다니 딱 그 꼴이네, 일부러 게이트를 폭주시켜서 수많은 사람을 죽여놓고 네가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강태식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성진아를 죽였을 때 벌였던 일을 그녀의 입으로 듣게 된다니 이보다 역설적인 게 있을까?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강태식의 입가가 싸늘하게 굳었다.
“이거 재밌네? 너 그거 조사하다가 걸렸던 거야? 킥, 난 또 네 애미, 애비하고 얽힌 일을 조사하려던 건 줄 알았네. 뭐, 뭘 조사하고 있었든 뒤지는 건 매한가지였겠지만 말이야.”
“뭐?”
무표정하던 성진아의 표정에 균열이 일어났다.
강태식과 성진아가 처음으로 얽혔던 악연은 바로 교통사고였다.
강태식의 부모는 현장에서 즉사.
성진아의 부모는 사고현장에서 도망을 쳤고 그 대가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바로 강태식의 손에 의해서.
그런데 지금 강태식의 말은 그 사건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맛살을 찡그린 성진아가 강태식을 노려보며 외쳤다.
“너 지금 그게 무슨…….”
성진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곁에 다가온 강태식이 그녀의 귓가에 서늘한 말을 속삭였기 때문.
“이거 참 아쉽네, 아직 네년을 3개월이나 살려둬야 한다니까 말이야.”
복면 안에서 아랫잎을 꽉 깨문 성진아가 강태식의 살기 어린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조롱의 말을 뱉었다.
“그러게, 나도 저번에 널 죽일 수 있었는데 못 죽인 게 내내 아쉬웠는데 말이야.”
“말조심하지 그래? 나는 지금 네년을 죽여버리고 싶거든? 덕분에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진짜…….”
“자신 있으면 죽여봐.”
“킥, 넌 역시 개 같은 년이야.”
“너보단 아니야.”
짧은 신경전을 마친 뒤.
비릿한 미소를 지은 강태식은 성진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길을 떠났다.
강태식이 사라지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모멸감, 분노 그리고 지금까지 강태식을 무너트리기 위해 해왔던 모든 고생이 한순간에 망가진 기분을 느끼고는 몸을 잘게 떨었다.
정보의 우위에 있는 자를 이기기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했지만, 이렇게 손쉽게 뒤집혀버리는 결과에 좌절감마저 느꼈다.
‘아냐,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어떻게든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해.’
스스로 결의를 다지기 위함일까?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강태식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주먹을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톱이 살갗을 파고든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릴 정도.
그녀의 붉은 피가 방울져 순백의 눈밭에 떨어져 내리기 바로 직전.
뚜욱-!
4지구의 시간이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 * *
먹고 있던 라면이 입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요한의 일을 겨우겨우 처리했더니 더 큰 사건이 터져버린 것.
저게 저기서 왜 나와?
헤라클레스 녀석이 끝까지 숨겨뒀던 비장의 카드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바로 성물(聖物)이 모습을 드러낸 것.
그것도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성물이 강태식의 손에 들려있었다.
물론 힘의 크기로만 보면 신물(神物)에 한참 못 미치는 물건인 건 사실이지만, 그건 진품일 때의 얘기
복제품은 진품의 힘에 5% 정도 효율밖에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유명도에 따라서 힘을 얻는 성물의 특성상 강태식이 얻은 성물은 지구를 한정했을 때 힘의 측정조차 불가능한 성물이었다.
아서 왕의 전설의 성검.
엑스칼리버(Excalibur)와 그 검집.
거의 없다시피 한 오버랭크(Over Rank)의 성물이 강태식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것.
성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아니, 지금 내가 어떤 조언을 한다 해도 엑스칼리버를 얻은 강태식을 앞지를 방법이 있을까?
지금 이건 나와 성진아가 치밀하게 짜놓은 판이 완벽하게 박살이 난 것과 같았다.
헤라클레스 녀석이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비장의 수를 쓴 것이고,
그 치명적인 비장의 수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와 성진아를 동시에 관통하는 것과 같았다.
잠깐?
그런데 저게 왜 러시아에서 나와?
분명, 아서 펜드래곤(Arthur Pendragon)은 고대 영국의 왕이었다.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 물건이 러시아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다급하게 안젤라를 찾았다.
“안젤라! 아서 펜드래곤이랑 엑스칼리버에 대한 정보 좀 찾아줘!”
“말씀하실 줄 알고 이미 찾아놨어요.”
“응?”
“저도 엑스칼리버가 나온 위치가 이상해서 찾아봤거든요? 자료를 살펴보기 전에 말씀드릴게요. 러시아에서 발견된 건 이상한 일이 맞아요.”
“그래? 흠…….”
안젤라 역시 이상을 느낀 것.
나만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전해준 자료를 뒤져봤지만, 러시아와 관련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아서 왕이 죽을 때 영국에 있는 호수의 요정에게 돌려줬다는 얘기만 나왔을 뿐.
게다가 아서 왕 이후로 그 어떤 인물도 엑스칼리버를 찾지 못했다.
즉, 처음 발견한 사람이 강태식이라는 소리.
턱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안젤라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거 걸고 넘어가면 승산 있을까?”
“러시아에서 발견된 거요?”
“응.”
“글쎄요, 솔직히 반반일 거 같아요. 게다가 강태식이 첫 번째 회귀에서 엑스칼리버의 위치를 미리 알아뒀다는 뜻이 되는 건데. 그때도 러시아에 있었다는 소리가 되는 거 아닌가요?”
안젤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강태식이 부정적인 수단을 이용해 엑스칼리버를 숨겨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강태식의 모습을 떠올렸다.
온몸에 심각해 보이는 상처를 입은 상태.
상처를 입고 찾았다는 것은 꽤 힘든 곳을 클리어하고 찾아냈다는 증거가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건 내게 불리한 정황증거가 될 가능성이 크다.
“흠… 만약, 엑스칼리버를 찾은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네?”
“만약에 말이야. 엑스칼리버가 러시아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고 쳐보자고.”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
엑스칼리버가 발견된 위치에 대해 의문을 표해 의회를 소집한 뒤.
그것을 물고 늘어졌을 때 승산을 가늠해보면 어떻게 될까? 반반? 아니, 반반도 안 될 것이 자명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을 문제 삼아야 내게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는 소리.
어떤 방법을 써야 하나 골똘히 고민하고 있을 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강태식의 발언.
그는 신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너무 오만했다.
하긴, 직접 제약을 가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저렇게 오만방자한 것이겠지.
아서 왕의 성격이 적힌 문서를 재차 확인했다.
적힌 것 그대로라면 그는 정의롭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훌륭히 싸운 왕이었다.
물론, 조력자들도 있고 배신을 당해서 거의 이성을 잃었을 때도 있었지만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기에 인기가 더 많았던 것.
게다가 이미 신의 위치에 올라선 인물이기에 자신의 성명이 담긴 성물이 악인의 손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그리 원치 않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강력한 성물이 악인의 손에 들어갔다고 해도 신들은 그 성물에 제약을 가하지 않는다.
당연히, 강태식이 얻은 엑스칼리버의 위력은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안젤라에게 초청할 신들의 리스트를 보여주며 업무지시를 내렸다.
“안젤라. 여기 적혀있는 신들한테 심판 회의에 초청한다고 연락 좀 돌려줄래? 난 카르나 님한테 보고할게.”
“생각하신 게 심판 회의였어요?”
“응.”
“그거 이길 가능성… 저, 이르카 님?”
“응?”
“혹시, 미치셨어요?”
명단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안젤라가 황당한 듯 날 바라봤다.
물론, 조금 미친 짓으로 보이긴 하겠지만,
이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어색한 미소로 답변을 대신한 뒤.
심판 회의를 요청하기 전 제출할 자료를 정리했다.
강태식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헤라클레스의 지령을 완벽히 수행했다.
엑스칼리버를 찾은 뒤.
그는 이제 다 이겼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저런 말을 내뱉었겠지.
그가 한 실수는 하나.
나를 헤라클레스와 같은 방치형 관리자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관하지 않는 관리자가 얼마나 까다롭고 귀찮은 존재인지 보여주도록 하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할 때.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성진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멸감일까?
아니면 분노를 느꼈을까?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꾹 참았다.
이 사태를 어떻게든 유리한 방향으로 돌린 뒤.
그녀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선이다.
한 줄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은 뒤 카르나 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카르나 님! 긴급 심판 회의를 요청합니다! 4 지구의 시간을 멈춰주시길 바랍니다!]
[카르나티우스: 응? 심판 회의? 그거 네가 승소할 확률 거의 없는 건 알고 하는 말이니?]
[이르카: 네, 알고 있습니다.]
[카르나티우스: 흠, 뭔가 찾았니?]
[이르카: 아뇨.]
[카르나티우스: 얘, 이르카야 나한테까지 사기 치지 말고 불어보렴.]
[이르카: 에이, 어차피 참여하실 거잖아요.]
[카르나티우스: 응, 그런데 나는 거기서 아예 중립인 거 알고 있지?]
[이르카: 넵. 알고 있습니다.]
[카르나티우스: 흐음, 그래 알아서 하렴. 일단 바스테트한테 말해서 4 지구의 시간은 멈춰뒀단다.]
[이르카: 벌써요? 엄청 빠르시네요.]
[카르나티우스: 일단 소집 명단은… 네가 짜보렴. 헤라클레스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이르카: 저는 이미 짜놨습니다.]
[카르나티우스: 벌써?]
[이르카: 네, 지금 명단을 보내드릴게요.]
시스템을 조작해 소집할 신들의 명단을 카르나 님에게 전송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내가 준비한 카운터펀치가 뭔지 깨달았는지 황당해하는 그녀의 허탈한 답변을 담은 메시지가 날아왔다.
[카르나티우스: 이런,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