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순간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 심장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둘러싸고 있는 룬의 특성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조정하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대에 시공의 드래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공의 드래곤이라는 칭호는 오직, 나만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칭호였다.
시공의 룬이 너무 위험해서 계승을 막기 위해 내가 죽은 뒤 파괴했다고 카르나 님이 공표했으니까.
너무 놀라서일까?
심장 주변을 끊임없이 돌고 있는 시공간의 룬이 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일과 직접 연관이 있는 카르나티우스, 메타트론, 우리엘 그리고 안젤라를 제외하고 연관이 없는 인물 중에서는 광철 할배만이 알고 있는 진실.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저를 알고 계신 겁니까?”
“끌끌! 재밌군, 그냥 떠본 건데 말이야.”
떠봤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바싸고를 빤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중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알아내신 것인지 대답을 해주셨으면 좋겠군요. 바싸고 님.”
“호오, 열 내지 말게나. 세상의 멸망자여.”
“…….”
개새끼.
차오르는 분노를 꾹 참으며 그를 노려봤다.
싸울까? 말까?
아마, 싸우면 지겠지?
방금 봤던 집 앞에 결계를 치던 실력만 봐도 나보다 훨씬 윗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을까?
천부령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니, 대전에서 내가 힘을 쓰는 것을 보고 알아차린 것일까?
천부령의 힘이 아니라 내 실력이라는 것을 본 것일까?
온갖 생각이 가득해서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
바싸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건넸다.
“궁금한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죠.”
“끌끌, 과거. 현재, 미래 이것 중 내가 어느 것을 볼 수 있을까?”
이런, 과거를 보는 노인네였구나.
바싹 타들어 가는 입술을 혀로 핥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과거를 보시는군요.”
“틀렸다네.”
“……?”
과거가 아니라고?
거짓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릴 때.
그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속삭였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본다네.”
“……!”
미친, 이 말이 진짜라면 사기잖아?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보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지 고민할 때 바싸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직은 이 늙은이를 이길 수 없다네, 젊은 드래곤이여.”
“설마요. 현재를 보신다면 아실 텐데요? 제가 그런 생각을 실행으로 옮겼겠습니까?”
“끌끌끌, 괜찮네. 나라고 해도 자네의 입장이었다면, 그자의 입막음이라도 해서 그 사건을 지우고 싶을 테니까 말이야.”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이 음흉한 노인네가 과연 뭘 보고 말하는 것일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아시겠군요?”
“끌끌, 지금 나를 시험하는 겐가?”
“설마요.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겁니다.”
“나의 벗 배반의 성자를 만나러 온 것 아닌가?”
“……!”
미친, 말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
혹시, 생각을 읽는 것일까?
최대한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그를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안 알려줄 것도 없지.”
“그러면 그 장소…….”
“그를 왜 만나고 싶은 겐가?”
“아, 그게…….”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대답을 멈추고 바싸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전히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바싸고는 확실히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에 자신의 입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내가 그를 왜 만나려고 하는지 몰라?
천계에서 있었던 일은 못 읽는 것인가?
아니, 중간계에 있었던 일도 못 읽는 것일지 모른다.
이러면 말이 다르지.
“제 채널을 자주 보시죠?”
“끌끌, 아주 재밌게 보고 있다네.”
“그렇다면, 만약에 제 채널이 폐쇄된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끌끌…….”
역시, 확실해졌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바싸고를 힐끔 바라본 뒤.
애써 다른 생각을 떨쳐내며 마저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채널이 없어질 위기죠. 그렇기에 저는 꼭! 배반의 성자를 만나야 합니다.”
“재밌는 얘기로구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더 해보라는 듯 말하는 바싸고를 똑바로 바라보며 회심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제가 관리하는 회귀자들의 모습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크하하하하핫! 역시! 자네는 지켜보는 맛이 있구먼.”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커다랗게 웃은 바싸고는 이내 또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어떤 판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가지고 연옥으로 가게나.”
“이건?”
“아! 그곳의 출입증과 같은 것이야.”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갚지 않아도 된다네, 가면 깨달을 테니.”
또다시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는 바싸고는 이내 손을 휘휘 저으며 그만 떠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뜻.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끌끌, 잘 가시게나.”
“그럼 이만.”
팟-!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환한 빛과 함께 음산한 기운이 흐르는 저택의 앞으로 이동했다.
음흉한 늙은이.
그가 진짜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을 보는지 못 보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과거, 현재는 몰라도 미래는 그도 정확하게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미래를 정확하게 알아낸다면 내가 왜 배반의 성자를 만나려 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게다가 현재도 지금 내가 생각하는 기억을 읽어서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컸다.
최대한 뇌를 안 거치고 바로바로 말하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때 그는 계속 가만히 듣고만 있었으니까.
물론, 이 모든 게 그가 날 놀리기 위해 꾸민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내, 피식 웃으며 판자에 적힌 장소인 연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특별한 회귀자를 관리하는 건 정말 더럽게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 * *
판자에 적힌 장소에 가자마자 왜 바싸고가 이게 출입증이라고 했는지 알아차렸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불어닥치는 모래폭풍과 함께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반신 이르카여! 돌아가거라! 이곳은 그대가 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니!”
“크르릉! 컹컹!(물기 전에 돌아가라!)”
개 두 마리.
아니, 정확하게는 신이 된 반신반견 하나와 머리 셋 달린 개 한 마리가 날 노려보며 말했다.
어색하게 웃으며 날 노려보고 있는 아누비스에게 말을 건넸다.
“만나러 올 분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가장 깊은 감옥! 스스로 세상과 연을 끊겠다고 맹세한 인물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바싸고 님이 출입증을…….”
조심스레 품에서 자그마한 판자를 꺼내 들며 아누비스에게 건네주려 할 때.
펑-!
아누비스가 검은색 불꽃을 일으켜 판자를 부숴버렸다.
이거 출입증 아니었어?
당황해서 그와 부서진 판자를 번갈아 바라볼 때 아누비스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것은 출입증이 아니다! 너는 스스로 세상과 연을 끊겠다고 맹세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이곳의 계약서! 그 간악한 늙은이가 네게 이런 물건을 줬구나!”
“크르릉! 컹컹! 으르르!(그냥 계약하고 이곳에 들어와라. 대신 빠져나오려고 하면 널 물어 찢어버릴 것이다.)”
바싸고 이 미친 늙은이.
이곳에 날 가두려는 속셈이었나?
어떻게 방법이 없나 고민하고 있을 때.
가장 깊은 감옥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누비스 님. 잠시 저 반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
“크릉?(지금 쟤 말한 거 맞지?)”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들은 아누비스와 케르베로스가 크게 당황했는지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봤다.
“2, 2천 년 만에 내게 처음 꺼낸 말이 저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허, 너는 맹세를 한 몸. 이곳에서 나갈 수는 없다. 그건 알고 있겠지?”
“잘 알고 있습니다.”
“후-알았다. 신기하구나. 이제까지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던 네 녀석이 말을 꺼내는 것을 보게 된다니 말이다.”
“훗,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요.”
“알았다. 그러면 얘기를 나누거라. 나는 이 녀석과 잠시 돌아가 있을 테니…….”
말을 마친 아누비스와 케르베로스가 모래폭풍에 휩싸여 신기루처럼 사라져갔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목으로 삼켰다.
2천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곳을 지키는 아누비스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마치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
자그마한 소동이 벌어지자 바로 말을 건넸다.
그것도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서 말이다.
알 수 없는 의문에 그에게 슬며시 다가갔을 때 어둠 속에 잠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가 말을 건넸다.
“반갑습니다. 이르카시우스여.”
“저를 아십니까?”
“바싸고한테 들었지요, 그리고 그대가 나를 찾아올 거라는 사실도요.”
“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바싸고는 날 철저하게 가지고 논 것일까?
모르는 척하며 내가 어떻게 나올지 반응을 살펴보려고 한 것일까?
음흉함을 넘어선 그 소름 끼치는 심계에 온몸의 솜털이 돋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배반의 성자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대가 회귀자를 관리하는 관리자라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제가 관리하는 한 회귀자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실 그가…….”
요한에 관해 설명하려 할 때 그가 말을 끊으며 들어왔다.
“당신은 누구보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죠?”
“…이미 흘러간 시간입니다.”
“당신이 하는 관리자라는 일은 남들의 생에 후회를 남기지 않게 도와준다고 들었습니다. 모순된 일이로군요. 자신은 후회로 가득한 삶을 살아왔으면서요.”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제 문제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제가 왜 당신과 얘기를 나누고 싶은지 아시나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저는 예전부터 당신을 만나고 싶었답니다. 나와 같이 모순된 존재여.”
나를 예전부터 만나고 싶어해?
배반의 성자는 요한의 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찾아오지 않았을 인물.
바싸고에게 뭔가 들은 것일까?
그때 배반의 성자가 조용히 말을 마저 이었다.
“저 역시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았어요. 그리고 누구보다 그분을 사랑했지만, 배반했죠.”
유명한 일화였다.
그가 배반의 성자라고 불리는 이유기도 했고.
그때 숨을 가다듬은 그가 말을 다시 이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말이죠, 그 시간을 후회하면서 돌리기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그 시간을 돌릴 수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당신과 살짝 비슷하죠?”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물론, 목숨을 바친 부분은 다르다.
그는 자살을 선택했지만, 나는 그 치열했던 전투에서 죽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전투가 끝나고 현세에 강림한 카르나 님에게 이끌려 반신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니 그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확실히, 어떻게 보면 비슷해 보이는군요. 하지만, 당신과 저는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이 다르죠?”
“저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과거에 있었던 일을 후회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없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고 그것을 실현하는 중이었으니까.
그와 나는 확실히 다르다.
그때 내 말을 곰곰이 들은 배반의 성자가 조그맣게 웃더니 말을 꺼냈다.
“역시, 훌륭합니다. 제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도 바로 그거였습니다.”
“혹시, 바싸고 님이 모든 것을 말씀해주신 겁니까?”
“아뇨, 그대가 나를 찾아올 거라는 것만 말해 주더군요,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렇습니까? 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인 의문입니다. 왜 바싸고 님만 만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가장 큰 의문이었다.
후회하면서 살아간다면 왜 다른 인물들은 만나지 않고 바싸고만 만날까?
게다가 바싸고는 아누비스와 케르베로스의 경계를 어떻게 뚫고 배반의 성자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을까?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은 의문에 휩싸여있을 때.
어둠 속에서 나를 빤히 바라본 배반의 성자가 조그맣게 말을 건넸다.
“예전에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시조인 제가 그분의 제자가 되는 방법을 알려줬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