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지금 이 시기에 러시아가 전쟁을 벌여?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블라디미르는 그렇게 멍청한 작자가 아니다.
게다가 첩보원들을 보내 성진아의 동향을 확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다.
채널 시야 공유 기능을 끈 뒤.
안젤라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어디랑 시비가 붙은 거야?]
[안젤라: 터키요.]
[이르카: 터키? 거기는 왜?]
[안젤라: 터키의 대통령이 좀비 역병 관리 지역으로 갔다가 살해당했어요. 덕분에 겨우겨우 좀비들을 모아둔 수용소가 터져나갔고요.]
[이르카: 그런데 왜 러시아랑 시비가 붙어?]
[안젤라: 거기서 러시아 헌터 특수부대원의 시체가 발견되었거든요.]
[이르카: 흠, 사진 한번 보내줄래?]
[안젤라: 네, 잠시만요!]
곧이어 끔찍했던 현장이 찍힌 사진이 날아왔다.
좀비 역병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기는 했지만,
좀비 수용소는 여전히 위험한 지역.
치료제를 개발하면 다시 사람으로 돌릴 수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믿음에 세운 수용소였다.
좀비들의 관리와 치료제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던 근무자들을 위문 방문했던 터키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일거에 격살 당한 현장 사진을 쭉 둘러봤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분명 헌터 특수부대원의 기습이라고 했다.
발견된 시체 역시 한 구.
그러나 헌터 한 명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런 인물을 이렇게 버리는 패로 쓸 리가 없다.
블라디미르가 좋아하는 깔끔한 암살과도 거리가 멀었다.
블라디미르의 주특기는 바로 방사능 홍차.
이런 지저분한 흔적이 남는 암살을 할 리가 없다.
안젤라가 보내온 사진을 쭉 훑어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죽은 러시아의 헌터 특수부대원의 몸에 미세하게 퍼져있는 보라색 반점.
‘이건 지배의 물약을 쓸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확실해, 이걸 얼마 전에 봤었으니까.’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강태식의 짓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헤라클레스의 지시를 받은 강태식의 짓이겠지.
내가 무림계에 직접 나온 틈을 노리고 재빠르게 치고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확실해진 건 있는데?
강태식이 찾는 물건은 확실히 러시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성진아가 러시아의 도움까지 얻어버리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겠지.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
“마졸들을 모조리 죽여라!”
“음흉한 정파 놈들을 모조리 주살하라!”
“크아아아!”
“뒤져!”
개판이 된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봉두난발이 된 독고구패와 온몸에 칼침을 맞은 이천웅의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4지구의 상황처럼 개판이 된 모습.
러시아의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답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장원을 둘러보는 철가장주가 눈에 들어왔다.
개판이 된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고 이 상황에 끼어들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고 번개처럼 머릿속에 어떠한 생각이 들었다.
이거 상황을 반전시킬 카드가 아직 남아있잖아?
생각을 정리한 뒤 성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지금, 부동항을 조건으로 계약을 맺으려고 했던 나라가 혼란에 빠졌어요. 즉시 그 옆에서 맨날 치고받고 싸우던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드세요. 살짝 엎어져서 개판이 되었다면 판을 아예 엎어버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지금 빨리요!]
성진아가 내 말뜻을 잘 알아들었겠지?
현재 터키와 러시아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흐르는 상태.
헤라클레스와 강태식이 노린 것은 난장판.
러시아가 손을 쓰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미 난장판이 되었다면 정돈하는 것보다 더욱 난잡하고 무질서한 아사리판으로 바꾸는 게 더 쉽다.
게다가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아사리판에서는 원래 이긴 놈이 다 먹는 법이다.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면 제대로 갚아줘야지.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더 많은 포인트를 벌 기회였지만, 상황이 급변해서 이곳에 있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길을 떠나기 전.
이천웅에게 전해줄 편지를 빠르게 적었다.
이걸 어떻게 전해줄지 고민하고 있을 때.
개판이 된 장원을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철가장주의 옆에 굳은 표정의 소가주가 눈에 들어왔다.
정, 사, 마로 나뉜 무림에서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지역이라 천웅이가 선택한 것이었는데 내가 이런 꼴을 만들어 놓았으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굳은 표정의 소가주에게 조용히 다가가 편지와 함께 말을 건넸다.
“무림인들의 싸움이 너무 거칠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저 역시 무공을 연마하는 몸. 제가 강해진다면, 언젠가는 제가 겪을 일이었습니다. 미리 눈으로 보는 것도 큰 배움이겠지요.”
요놈 봐라?
회색이 설 곳이 없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한다고?
“여기는 위험하니까 더 뒤로 가서 구경하렴.”
“괜찮습니다. 이 모습을 눈에 똑똑히 담아두고 싶습니다. 대협.”
“그러니?”
심지 역시 굳은 아이다.
심기체 삼박자 중에 심과 체는 합격.
기야 좋은 스승 밑에서 배우면 느는 거니까.
이 정도면 꽤 괜찮겠는걸?
강단 있게 말을 내뱉는 소가주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온몸에 칼침 맞은 산적 같은 놈 보이지?”
“광마 이천웅을 말씀하시는군요.”
“응, 아저씨가 쟤한테 전해줘야 할 편지가 있는데 지금 급해서 빨리 가봐야겠구나. 이것 좀 전해줄 수 있겠니?”
“대협의 존함을 알고 싶습니다.”
“응?”
“그래야 어느 분이 전해드렸다고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음, 관리자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야.”
“알겠습니다. 관리자 대협.”
“……?”
내 이름이 관리자는 아닌데?
뭐, 크게 상관없겠지.
어른 흉내를 내는지 포권을 하며 인사를 건네는 당찬 소가주를 뒤로 한 채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 * *
광마 이천웅은 거칠게 올라오는 숨을 가라앉히며 봉두난발이 된 채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는 독고구패를 바라봤다.
벽이 있다면 바로 저런 자를 말하는 것일까?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이긴다는 말이 있다.
이천웅은 그 말을 다른 회귀자가 만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실제로 7번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도전했지만,
아직 이 정도 격차가 났으니.
난장판이 된 주변을 힐끔 바라보며 숨을 고른 이천웅이 마찬가지로 숨을 고르고 있던 독고구패에게 말을 건넸다.
“재미있구나.”
“큭, 다 죽어가는 녀석이 무슨 재미가 있다는 말이더냐.”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적수다.”
“후우-실력이 달리니 주둥이를 나불대는구나.”
“아니, 나는 네놈을 인정한다. 그리고 고맙구나. 내 인생 최대의 적수가 나와 같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크큭, 나도 네놈의 근성을 인정하지. 너 역시 내가 만난 마인들 중 최고다. 아니, 그 어떤 무인도 너와 견줄 수 없었다.”
지쳐있던 광마 이천웅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난 수 번의 죽음의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난 뒤.
희열에 찬 미소를 지은 이천웅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독고구패를 바라봤다.
고고한 소나무와 같았던 자.
언제나 뛰어넘고 싶었던 하늘 같은 자.
독고구패는 광마 이천웅에게 있어 어찌 보면 닿을 수 없는 하늘과 같았다.
항상 꿈꿔왔지만 이룰 수 없었던 꿈.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자신을 언제나 가로막았던 하늘이.
자신을 언제나 좌절시켰던 하늘이.
마침내 자신을 인정했다.
마침내 하늘에 닿았다.
아니, 그 하늘과 동등한 위치에 섰다.
숨을 고른 이천웅은 항상 자신을 두들겨 패던 이르카를 떠올리며 숨을 골랐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회조차 얻지 못했겠지.’
이르카가 전해준 실전된 무공 비급 천무신공(天武神功)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도전조차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자신감이 충만해진 이천웅은 온몸에서 기를 끌어올리며 외쳤다.
“오라! 내 하늘이여! 내 오늘 하늘을 깨부숴주마!”
“큭! 진정한 하늘을 보면 너는 좌절 할 것이다!”
콰과과과-!
광마와 독고구패가 진심전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땅이 잘게 흔들리더니 대기가 사방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인력으로 지진을 일으키고 폭풍을 불러오고 있는 것과 같은 신비한 현상을 목도한 무림 고수들의 전투가 서서히 멎어갔다.
그때 자신을 앞에 두고 멍하니 한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파고수를 향해 정파고수 한 명이 악을 지르듯 외쳤다.
“개, 개자식! 나를 능멸하는 것…….”
“허, 저게 진심 피륙으로 이뤄진 사람의 몸에서 펼쳐지는 무공이란 말인가…….”
“뭐……?”
고개를 돌린 정파 고수가 광마와 독고구패의 주변에 터질 듯이 팽창한 기의 폭풍을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제기랄.”
모두를 좌절시킬 만큼 압도적인 무공이었다.
천지개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
그때 기를 충분히 모은 독고구패가 최후의 초식인 비룡강습(飛龍强襲)을 쓰기 위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파아앗-!
그의 긴 장발은 마치 용의 수염과 같았고,
두 자루의 검은 용의 발톱처럼 날카로웠다.
섬전과 같이 그가 땅으로 떨어져 내릴 때.
광마 이천웅이 씨익 웃으며 땅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려쳤다.
천무신공(天武神功) 오의 지룡출타(地龍出他)!
무림에서 실전되었던 전설적인 무공의 등장!
정, 사, 마 모든 고수들의 표정이 경악을 넘어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얼어붙었다.
놀란 것은 독고구패 또한 마찬가지.
이대로라면 비룡강습을 쓰기도 전에 땅에서 올라오는 지룡의 이빨에 갈기갈기 찢긴다.
초식을 회수하기 위해 독고구패가 선택한 것은 바로 천근중추공(千斤重錘功)!
쿵-!
땅에서 솟아오른 지룡이 몸을 찢어발기기 전 땅으로 내려온 독고구패는 방향을 꺾어 다시 날아오는 지룡의 입을 발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입술을 꽉 깨문 그는 치욕을 당하더라도 일단은 피하고 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치를 당하는 것을 감내하고 선택한 것은.
바로, 무적의 회피기 나려타곤(懶驢打滾).
재빠르게 독고구패가 땅을 굴러 덮쳐오는 강기다발을 피할 때였다.
푹-!
“……?”
배에서 화끈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본 독고구패는 생각했다.
‘구른다고 다 피해지는 건 아니었거늘.’
어처구니없게 자신의 몸에 박힌 어린아이의 머리통만 한 굵기의 광마의 주먹을 바라보며 입가에서 피를 뿜었다.
“…쿨럭! 조, 좋은 승부…….”
“잘 가시오. 나의 하늘이여.”
이내 고개를 떨군 독고구패가 절명한 뒤.
사위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드디어 광마가 무림의 하늘을 깨부쉈다.
하늘이 변했다.
숨을 들이켠 광마는 이르카가 광무일출(狂武一出)을 바로 이어서 쓰라고 한 이유를 깨닫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신은 신이었다.
그가 피할 방향과 어떻게 피할지 미리 계산해 놓은 것.
어느새 싸움을 멈춘 무림인들을 쭉 바라본 광마가 사자후를 내뱉었다.
“오늘부로! 본좌가 천하제일인이다! 인정하지 못하는 자는 당장! 이 앞으로 나와라!”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강하다고 칭송받던 검황도 천마도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 침묵하고 있을 때.
한 어린 소년이 광마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두가 떨리는 눈빛으로 그 소년을 바라볼 때.
이천웅에게 포권지례를 올린 소년이 품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 들며 말했다.
“저는 철가장의 소가주 한정룡이라고 합니다. 광마 이천웅 대협. 관리자라는 분이 대협께 전해달라고 하신 서신을 가져왔습니다.”
“관리자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대협.”
“흐음, 이리 줘 보아라.”
그제야 이르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천웅이 그가 남긴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천웅아.
네가 이기는 것까지 보고 가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다.
지금 기분이 조금 얼떨떨하지?
사실, 독고구패 그놈의 버릇을 일주일 동안 찾아보니까 버릇이 하나 있더라고.
너도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알아차렸겠지만,
혹시나 해서 말해준 거란다.
어때?
항상 원하던 소원을 이룬 소감이?
막 기쁠 것 같았는데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지?
가슴 한구석이 공허할 거야.
이제 넌 목표가 없어졌거든.
그 기분이 어떤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단다.
.
.
“빌어먹을 양반…….”
가슴을 콕콕 찌르는 이르카의 편지를 보던 이천웅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실제로 그의 기분은 이르카가 편지에 적어놓은 것 그대로였으니까.
편지에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린 이천웅이 재차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
.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 편지를 가져다준 꼬마가 있을 거야.
그 녀석을 한번 가르쳐 보지 않을래?
자질이 엄청 좋은 것도 있고, 난데없이 벌어진 큰 싸움으로 철가장주한테 손해를 끼친 것도 있잖아?
똘똘해 보이는 녀석이니까 잘 키우면 네놈의 제자가 천하제일인이 되는 걸 볼 수도 있을걸?
물론, 네가 잘 가르친다면 말이지.
그리고, 천웅아.
네가 날 찾아와서 말하던 과거로 돌아가서라도 이루고 싶다던 목표를 이룬 것을 축하한다.
이제는 복수가 아닌 네 삶을 살렴.
나는 네가 소소하게 제자도 키우면서 네 삶을 재밌게 살게 된다면 더 좋겠단다.
우리, 이제 다시 보지 말자.
네가 다시 원한을 가진 상태로 죽어서 날 보러 오는 걸 보고 싶지 않단다.
언제나 행복하게 살렴.
-네놈의 관리자 이르카가.
추신: 특별 계약서 보내줄 테니까 원한다면 적어서 마법 보따리에 넣어 놓으렴.
편지를 다 읽은 이천웅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향해 포권지례를 하며 외쳤다.
“나! 이천웅은 그대의 호의를 각골난망할 것이오! 이 보은은 살아서 갚지 못한다면! 죽어서라도 갚겠소!”
“저, 대협? 저는 그만 가봐도 되겠습니까?”
“대협이 아니다.”
“네?”
“이제부터는 사부님이라고 부르거라.”
“……!”
잇몸이 드러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은 이천웅이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