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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관리하는 법-34화 (34/121)

34화

과거 미국과 세계 2강으로 불리던 나라.

국가의 상징이 불곰과 상남자로 대표되는 나라는 지구상에 러시아 단 한 곳이다.

그 러시아에서 철혈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블라디미르는 갑자기 나타난 성진아라는 한국 헌터를 바라보며 무슨 배짱으로 이런 말을 하는가 궁금해했다.

미국인 여행객은 몰라도 미군이 영토에 발을 들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수많은 헌터 경호원에 둘러싸인 블라디미르가 앞에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성진아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내 통역기가 고장이 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똑바로 들은 게 맞나?”

“네, 계시를 받았고 강태식이 있을 곳은 러시아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이미 다른 곳은 다 뒤져봤거든요.”

“그런데 말이야. 그런 문제라면 우리가 수색할 수 있을 텐데 왜 미군을 끌어들이려는 것이지? 그 의도가 궁금하군.”

“미군은 제 통제를 따르니까요. 대통령 각하의 KGB나 스페츠나츠와는 다르게요.”

도발적인 그녀의 말에 블라디미르의 이마에 붉은 핏줄이 돋아났다.

이 얼마나 도발적인 여인이란 말인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티타늄합금 컵을 우그러트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 이렇게 도발적인 언사는 난생처음 들어보는군. 내가 그리 우스워 보이는 건가?”

“아뇨, 러시아 최고의 헌터이자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신 블라디미르 대통령 각하를 그 누가 무시하겠어요. 저는 단지…….”

쾅-!

송곳과 같이 날카로운 서늘한 냉기가 흐르는 주먹을 내려쳐 커다란 테이블을 박살 낸 블라디미르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성진아의 말을 끊었다.

“이게 내 대답일세, 러시아의 땅은 미국의 군인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네. 오면 모두 내 손으로 곤죽을 내주지.”

“화끈하시네요.”

“동양의 속담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지 않나? 미국이나 그대의 고향 한국 땅에 내 군대를 풀어놓는다고 생각해보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솔직히 어렵긴 하죠.”

“기왕 이곳까지 힘들게 왔으니 여행을 즐기다 가게나. 러시아에는 볼 것이 많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블라디미르를 물끄러미 바라본 성진아가 아랫입술을 깨물 때.

[이르카: 시간이 없습니다! 잘 들으세요! 러시아는 과거부터 부동항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지금 블라디미르 또한 부동항을 원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지금 비어있는 곳이 있을 겁니다! 그걸 조건으로 거래를 하세요! 제가 조언을 해드릴 수 있는 건 하루에 한 번… 메시지가 종료되었습니다.]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이르카로부터 날아온 메시지를 확인한 성진아가 블라디미르에게 바로 말했다.

“부동항.”

“……?”

“대통령 각하가 그토록 원하시던 부동항을 드리죠.”

“호오? 거기! 새 테이블을 가져와라! 음식도 좀 내오고!”

“알겠습니다. 각하.”

과거부터 조국 러시아가 애타게 원하던 부동항이라는 얘기가 블라디미르의 흥미를 돋운 모양.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성진아는 머릿속으로 최대한 그림을 그려보며 생각했다.

‘크림반도? 아냐, 홋카이도? 아냐…정신 차려! 성진아! 관리자님이 도와주셨는데 이런 것도 생각하지 못하면 안 돼!’

성진아는 음식이 나오는 동안 러시아와 맞닿은 지역의 주변 지도를 떠올렸다.

‘혹시 여기라면?’

오묘한 표정을 지은 성진아가 선홍색 입술을 핥으며 블라디미르에게 건네줄 지역을 결정했다.

* * *

안젤라가 카르나 님과 쇼핑을 나가서 사 온 새로운 시스템을 조작했다.

자기한테 필요한 물건이나 사라고 준 포인트를 알뜰하게 모아서 사 온 시스템을 바라보니 지금 상황과는 별개로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영화에서나 보던 최신 홀로그램 시스템이 장착된 물건이라 그런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관리하는 회귀자의 화면과 정보창이 홀로그램으로 나오는 최신형 시스템을 이용해 러시아와 그 근방에 있는 지도를 띄웠다.

러시아가 맞닿은 바다를 둘러보며 부동항으로 쓸만한 장소를 살펴봤다.

사실상 병합한 것이나 다름없는 크림반도.

흑해로 통하는 부동항이지만 그 입구는 미국의 우방들이 철저하게 막고 있는 장소.

그리고 모스크바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가을과 겨울에 얼어붙는 블라디보스토크는 군항으로서 가치가 없다.

블라디미르가 원하는 부동항은 국가의 힘을 자랑할 수 있는 군선들이 정박할 수 있는 군항이었으니까.

이런 지역을 말한다면 블라디미르는 바로 거래를 거절할 것이다.

조언을 해주되 직접 특정 지역을 언급하면 안 된다는 조항 덕분에 그녀가 제시해야 할 지역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그때 안젤라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네주며 질문을 건넸다.

“이르카 님은 어디를 생각하셨는데요?”

“여기.”

성진아가 제시해야 할 지역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하자 안젤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응? 여긴… 좀 그렇지 않아요?”

“아니, 이곳이 최고의 제안이야.”

“네?”

“설명해줄게. 예전에 성진아가 암살한 사람들 리스트 한번 가져와 볼래?”

“네. 잠시만요.”

삑-!

안젤라가 버튼을 누르자마자 성진아가 그동안 암살한 인물들이 주르륵 튀어 올랐다.

많기도 많다.

한참 동안 스크롤을 올려 사망자의 목록을 살펴보던 중 가장 초반에 암살한 인물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 인물을 본 안젤라가 노인네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허, 설마?”

“아니, 큰 그림은 아니었을 거야. 내전에 이어 좀비 역병에 쑥대밭이 된 지역을 지금까지 내버려 뒀다는 건 원래는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여길 제시하면 사람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마고 신의 계시를 받은 효과로 어느 정도 억누를 수 있어. 대신 더 좋은 호응을 끌어내려면 추가로 가져와야 하는 게 있겠지.”

“음, 일단 이르카 님이 지금 해주실 수 있는 건 다 해주셨으니까 한번 지켜봐요. 그래도 성진아 씨가 조금은 똑똑한 편이니까요.”

“……?”

저게 조금 똑똑한 거라고?

하나를 말하면 둘을 알아듣고 둘을 말하면 다섯을 알아듣는 그녀다.

조금 정도는 아니지 않나?

부동항.

비어있는 땅.

두 가지를 말했으니 그다음 내용까지 떠올리길 간절히 바랄 때였다.

미소를 지은 성진아의 입에서 내가 가장 원했던 지역의 지명이 튀어나왔다.

[청진항을 드리죠.]

[호, 북한의 청진항 말인가? 좋은 장소긴 하지만 무슨 그곳이 그대의 것인 것마냥 말하는군.]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북한은 이미 망한 것과 다름없죠, 마음만 먹는다면 3일 안에 통일할 수 있답니다?]

[거래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은 것을 말하는 것일세. 이건 좀 허황한 얘기 같군.]

[과연 그럴까요?]

성진아는 이내 가방에서 세계지도를 꺼내더니 지도에 붉은색 선을 쭉쭉 긋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블라디미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이게 자네가 생각하는 새로운 세계지도인가?]

[이 정도면 딱 좋지 않겠어요?]

[재밌어, 아주 재밌어. 청진항을 내주는 대신에 만주를 가지겠다니 말이야.]

딱 청진항까지 러시아의 영토에 편입시킨 후 만주를 가지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그녀의 행동에 블라디미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 거래는 할 수 없겠군.]

[네?]

[그대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폭군으로 불리는 건 알고 있겠지? 그 점은 나도 인정하지 나 스스로 성군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사람을 너무 믿거나 머리가 나쁘면 이 짓거리도 못 한다네, 난 허황한 말을 꺼내는 사람을 믿지 않아.]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성질을 못 이긴 척 탁자를 부술 때와 전혀 180도 달라진 눈빛과 태도였다.

그때 블라디미르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본 성진아가 다시 말을 꺼냈다.

[어머, 저는 대통령 각하가 가지신 꿈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요?]

[훗, 꿈이야 크지, 그런데 전쟁을 하기에는 시기가 안 좋아. 좀비 역병이 퍼졌는데 선공을 가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과연 다른 나라가 가만있을까?]

[전쟁을 왜 일으키나요?]

[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만주와 북한을 얻을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제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만주와 북한을 얻으면 거래에 응해주실 건가요?]

[훗, 그렇다면 얼마든지 응해주지.]

[그러면 하나의 조건을 더 달죠. 강태식의 수색을 러시아군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미군같이 허약한 녀석들은 조금 미덥지 않아서 말이에요.]

미군이 허약해?

황당했지만,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우회적으로 러시아의 군대가 더 강하다고 돌려서 칭찬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이건 블라디미르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꺼내기에는 최고의 말이었다.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은 블라디미르가 질문을 건넸다.

[주는 건 하난데 원하는 건 두 개다?]

[설마요, 제가 하나만 드릴까요?]

[재미있군. 그래 그대가 내게 건네줄 수 있는 것이 또 뭔가?]

당돌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모습이 당당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호감을 느낀 블라디미르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을 때.

남자를 여럿 잡을 만한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성진아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 대고는 말했다.

[제가 강태식을 찾아내고 난 뒤에 선물을 하나 드리죠. 정보원들을 통해 만주와 북한 지역을 잘 살펴보시면 제가 드릴 선물이 뭔지 아실 거예요.]

[당돌하군, 건방지지만 어떻게 보면 자네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어. 나 블라디미르의 앞에서 그리 자신만만한 걸 보니 기대가 된다네. 그러니 부탁하지,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

[후훗, 기대하셔도 된답니다.]

거래를 마치고 자리를 뜨는 성진아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안젤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건넸다.

“음…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데 이해가 안 가요.”

“응? 뭐가?”

“왜 안 죽였을까요?”

“……?”

“저기 저 러시아 대통령 말이에요. 그냥 목을 쓱! 하고 그으면 끝나는 문제 아니에요? 왜 골치 아프게… 왜… 왜요!”

나도 모르게 어이없는 표정으로 안젤라를 바라봤다.

내 표정을 보고는 당황한 안젤라가 홍당무처럼 붉게 변한 얼굴로 되물을 때 이유를 설명해줬다.

“러시아는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된 나라잖아? 수장의 목을 베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혼란……?”

“그래, 그리고 후계자를 자처하는 인물들이 나타나서 심할 경우 내전까지 벌어질 수도 있지. 통제력을 상실한 지휘부 덕분에 좀비 역병에 쓸려나간 북한의 경우처럼 말이야.”

“그러면 강태식을 수색하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요?”

“아니, 러시아는 북한과 전혀 달라. 쟤들은 진짜 크게 전쟁을 벌일 거야. 게다가 땅이 좁기라도 해? 그런 상황에서 미군을 투입할 수 있다고 봐?”

“음, 오히려 이런 경우엔 살려두는 게 훨씬 이득이다?”

“그렇지, 그리고… 아냐.”

안젤라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확실해졌다.

일단 죽이고 생각하자는 성진아식 마인드가 안젤라에게도 장착된 것.

모골이 송연해졌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사고방식이 성진아에게 물들어 버렸다.

헛기침하고는 다시 새로운 시스템을 만지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갸웃한 안젤라가 총총걸음으로 달려가 문을 열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초췌한 몰골의 메르나였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핼쑥해진 녀석의 몰골을 보니 뭔가 일이 생긴 모양.

그때 내게 쪼르르 다가온 메르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 이르카야… 왜 계속 메시지 수신을 차단하는 건데.”

“응? 아! 미안 실수였어.”

“실수? 아하하… 그럴 수 있지.”

이해하는 척 얘기를 하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니 뭔가 부탁을 하려는 모양.

“안젤라, 미안한데 차 한 잔만 부탁할 수 있을까?”

“네~ 잠시만요.”

안젤라가 차를 타러 주방으로 들어간 뒤.

두 손을 꼭 쥐고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메르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뭐 부탁하러 온 거 같은데?”

“아, 아직 포인트랑 카르마 보내주지 않았는데… 왜 징계위원회에 알리지 않았어? 부, 불안하게.”

“그러면 징계받게?”

“아니! 그건 진짜 싫어!”

그녀의 격렬한 반응을 보니 진짜 징계위원회에 넘겨지기는 싫은 모양.

하긴, 징계위원회에 끌려가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너 다음 심사까지 무조건 탈락’이라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그럴 만했다.

안젤라가 가져온 차를 메르나에게 권하며 말했다.

“이거 마시고 속 좀 풀어.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 하겠어?”

“지, 진짜? 봐주는 거야? 정말 고마…….”

“당연히 봐줘야지. 원래 계약했던 카르마랑 포인트만 줘.”

“와! 진짜 고맙다. 사실 너무 불안해서 잠도 못 잤거든 요즘 내가 불면증 약 먹고 있다니까?”

얼씨구?

어디서 구라를 치려고 들어?

얼마 전까지 빨빨거리고 돌아다닌다는 걸 다 들었는데 이런 유치한 거짓말을 하려 드는 그녀를 가소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대신 우리 계약 하나만 할까?”

“응? 무, 무슨 계약! 너랑은 다시는 하지 않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나랑 하는 거 아니거든?”

“응?”

의문에 찬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메르나를 뒤로한 채 하늘을 바라봤다.

그녀가 내 집무실에 오자마자 메시지를 보냈으니 지금쯤 올 때가 되었는데?

내게 한번 사기를 치려고 했으면 열 배로 갚아줘야 인지상정.

그녀를 용서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때였다.

-히히히힝!

어두운 허공에서 거칠게 울려 퍼지는 말의 울음소리에 메르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말의 다리가 여덟 개였으니 당연히 놀랄 만하지.

바로 로키의 배에서 나온 오딘 신의 애마 슬레이프니르였으니까.

환한 미소를 짓고는 하늘에 떠 있는 슬레이프니르를 가리키며 메르나에게 계약자를 소개했다.

“인사해. 너랑 계약을 맺을 녀석이야.”

“……!”

핏기가 싹 가신 메르나가 하늘을 바라보고는 도망치려 할 때.

쿵-!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새로운 계약자가 메르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빌어먹을. 요정. 새끼.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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