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한 것은 사회를 맡은 신이었다.
심판자 천사에게 비다르가 전투 불능에 빠졌다는 보고를 듣고는 얼어붙어 있던 경기장을 녹이기 위해 힘차게 소리쳤다.
-제가 대전의 중개를 맡은 이후 가장 충격적인 결과입니다!
-비다르 녹다운! 승자는 회귀부의 이르카! 믿을 수 없는 경기력을 보여준 두 반신을 위해 아낌없는 박수를 주시길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해 굳어있던 관객석에서 신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이번 대전은 역대 최고였다!
-다음번에도 부탁한다고!
펑-! 퍼벙-!
곧 내 승리를 알리는 폭죽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다급하게 달려와 옆구리에 크게 난 상처를 봉합하는 천사를 바라보며 간발의 차이로 넘긴 위기를 떠올렸다.
비다르의 전략은 훌륭했다.
시끄러운 천둥소리와 눈이 부신 번개를 내뿜는 묠니르를 이용해 궁니르를 미리 날린 것을 숨긴 것.
처음부터 묠니르를 이용해서 압박감을 준 덕분에 궁니르가 사라진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차린 것은 간발의 차이였다.
궁니르는 필중 속성을 가지고 있는 무기.
지정한 목표를 맞추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헤라클레스가 헤르메스의 신발과 아테나의 방패를 빌려왔음에도 피하지도 막지도 못한 무기가 바로 궁니르다.
드래곤의 룬 마법이 아무리 대단해도 오딘의 힘이 담긴 궁니르보다 대단할까?
궁니르가 날 맞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역으로 룬 마법을 이용해 내 몸과 궁니르의 속도를 더욱 증가시켰다.
심장에 조금 무리가 가는 방법이었지만 이 방법밖에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묠니르를 들고 있느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 비다르의 등에 매미처럼 매달리고 난 뒤.
간발의 차로 섬전과 같이 맹렬히 달려든 궁니르가 녀석의 몸을 뚫고 내 옆구리를 맞춤과 동시에 경기가 끝난 것.
야구로 치면 너클볼과 포수의 관계였다.
아무리 뛰어난 포수라고 해도 꾸준히 연습하지 않았다면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너클볼을 잡기란 매우 어렵다.
궁니르 역시 비다르에게는 너클볼과 같은 무기.
제아무리 강력한 무기라고 해도 자신의 무기가 아니다 보니 손에 익숙하지 않은 무기였고 그것이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된 셈.
아찔했던 순간의 복기를 끝내고 나자 한껏 벌어져 있었던 상처의 치료가 끝나있었다.
상처를 봉합하고 신성력을 쏟아부은 라파엘 휘하의 천사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경기장에 털썩 주저앉아 있을 때였다.
치료를 받고 정신을 차린 비다르가 아랫도리를 붙잡고 주춤거리며 다가오더니 주저앉아 있던 내게 손을 내밀었다.
텁-!
녀석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자 더욱 뜨거운 신들의 환호성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때 비다르가 날 바라보며 얼굴로 말을 건네왔다.
“……!!”
“덕분에 재밌게 놀았다고?”
“……!”
“나는 재미 없었어. 진짜 궁니르 날아오는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
“진짜 이번엔 요행이었어. 그런데 너 괜찮냐? 영 좋지 않은 곳에…….”
“……!”
“살짝 빗맞았다고? 그 충격으로 쓰러진 거고?”
“……!!!”
“에이, 거기를 노린 건 아니거든?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기를 노렸겠냐? 네가 너무 커서 방향이 좀 그랬던 거지.”
“……!!”
“아무튼, 이번에 헤라클레스도 꺾고 최고로 재밌었다고?”
“……!!”
“그래, 내가 급한 일 하나만 처리하고 다음번에 술 한잔 살게.”
“다음번. 대회. 빌어먹을 요정 새끼.”
“내가 너랑 한 약속 안 지키는 거 봤냐? 메르나는 꼭 다음번 대회에 참가시킬게.”
비다르와 대화를 마치고 난 뒤.
수상을 하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갔다.
세상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은 카르나 님이 나와 비다르의 어깨를 두들기며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다들 고생했어! 이게 얼마만의 독식이니. 우승, 준우승을 같이 하다니 오호호!”
“카르나 님… 저희 몸에 구멍 난 거 안 보이세요? 무슨 누더기 골렘도 아니고 상처 꿰맨 자국 보세요. 아직도 쓰라려요.”
“……!!”
“비다르 보세요. 잘못했으면 후손을 남기지 못할…….”
“어머, 얘들 봐라? 그건 너희들끼리 싸워서 난 상처잖니.”
“그런데 다른 두 분은 왜 안 내려오세요?”
단상에 내려오지 않은 신은 두 명.
강력한 관리자가 신이 되고 난 뒤로 영 힘을 못 쓰는 환생부의 관리 신과 베르미우스가 속한 빙의부의 관리 신이 똥 씹은 표정으로 단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삐졌지 뭐.”
“한 분은 이해하겠는데 다른 한 분은 왜?”
“내가 부러워서 그런 거겠지. 오호홋! 세 명의 우승 후보를 가지고 있는 관리 신이 어디 있겠니!”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카르나 님의 손에 들려있는 10만 포인트짜리 어음 두 장을 보고 나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도 크셔라.
10만 포인트짜리 내기라니.
화려한 수상식이 끝나고 난 뒤.
우승했다는 증표를 들고 날 기다리고 있을 마고 신을 찾아갔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오두막에 도착하자 자리에 앉아 곰방대를 빨며 연기를 내뱉고 있는 마고 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승의 증표와 천부령을 손에 들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고 님, 관리자 이르카 내거신 조건을 완수하고 돌아왔습니다.”
“왔는고? 그대의 모습은 잘 지켜봤는고.”
“제게 주신 천부령 덕분에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봉인된 녀석이 무슨 힘을 줬겠는고? 그저 자네의 어떻게든 이기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 아니겠는고?”
“그래도 이걸 빌려주지 않으셨다면 힘을 쓰기 어려웠겠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가 내건 조건은 완벽히 이행했다.
이제 그녀가 한 약속을 지킬 차례.
가만히 무릎을 꿇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자 이내 환한 미소를 지은 마고 신이 말을 건네왔다.
“천부령의 봉인은 풀었는고.”
“네?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면 알 수 있을고.”
봉인을 푸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처음 받았을 때와 변한 것이 없는 천부령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을 때 마고 신이 인자한 목소리로 어떠한 물건을 건네왔다.
“그리고 이건 성진아라는 아해에게 전해줄 수 있겠는고?”
“허, 이건 천부령의 복제품 아닙니까?”
“그렇지, 신물을 하계에 내려보낼 수 없는 것 아니겠는고?”
“넵,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살 수 있도록 상점에 입고시켜두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치고 난 뒤.
마고 신을 빤히 바라보며 그녀가 약속을 지키길 기다렸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복제품 천부령을 가리킨 마고 신이 말을 건넸다.
“그 물건을 그 아이가 바로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는고?”
“바로 말입니까?”
“그래야 내가 그 아해에게 계시를 내려줄 것 아닌고?”
마고 신이 어떤 방법으로 계시를 내려줄지 궁금하던 것이 모두 풀렸다.
바로 자신의 힘이 담긴 물체를 이용해 영상을 투여할 모양.
마법 보따리를 열어 천부령을 입고시키고 성진아가 확인할 수 있도록 상점창을 열어줬다.
그 모습을 모두 확인한 마고 신이 말을 건넸다.
“직접 말하는 것은 무리인고. 매우 추상적이고 알아듣기 힘들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는고?”
“괜찮습니다. 대신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말인고?”
“최대한 많은 한국 사람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성진아는 한국의 성녀라고 불리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신의 계시가 내려온다면?
계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계시는 알아듣기 힘든 말밖에 할 수 없으니까.
오히려, 계시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신뢰도를 높일 기회였다.
그때 마고 신이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능구렁이 같은 관리자인고.”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화아아악-!
말을 마친 마고 신의 몸에서 그 어느 때보다 성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본 성진아는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 눈이라는 광오한 이름까지 붙인 미국의 전략 위성까지 이용해봤지만, 감쪽같이 사라진 강태식의 흔적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관리자인 이르카에게 말을 건네도 당분간 참고 기다리라는 답변만 들려올 뿐.
상점창의 물건을 움직이는 것도 갑작스레 금지되었다.
‘분명 강태식이 꼭꼭 숨겨왔던 내가 모르는 정보를 이용하려고 하는 걸 테지, 이건 진짜 답답하네.’
기분도 답답한데 몸까지 갑갑한 기나긴 토굴에서 빠져나오자 어느새 동이 터오는 하늘이 그녀를 반겨줬다.
떠오르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본 성진아는 복잡한 기분을 애써 떨쳐냈다.
분명 자신의 관리자인 이르카라면 무슨 수를 낼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항상 어떻게든 답을 찾아냈으니까.
깔끔한 금발에 보석처럼 빛나는 적안을 가진 이르카를 생각하자 살짝 볼에 홍조가 뛰어올랐지만,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직 사소한 목적인 강태식에 대한 복수조차 이루지 못했다.
원래 가졌던 목표는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리 있었다.
‘그 뒤에는 이런 나도 조금은 행복을 꿈꿀 수 있겠지.’
살짝 피어오르는 헛웃음을 지은 그녀는 이내 피가 잔뜩 엉겨 찝찝한 감촉을 주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피를 잔뜩 머금은 검은색 암살자의 옷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추가로 들어온 포인트를 확인했다.
[NEW! 포인트 입금: 20,000P]
씁쓸한 미소를 지은 성진아가 피가 잔뜩 튄 얼굴에 물을 들이부었다.
깨끗한 물에 쓸려나가는 핏물을 바라본 뒤. 손에 쥐고 있던 격발기의 버튼을 눌렀다.
퍼엉-! 펑!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테러범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 토굴에 붉은 화염이 솟아오르며 무너지는 것까지 확인한 뒤 그 자리를 벗어났다.
미국 정보부가 잘못 알려준 정보로 괜히 얌전히 있던 국제테러단체를 하룻밤 사이에 전멸시킨 것.
물론, 아주 쏠쏠한 포인트의 획득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찝찝함만 남았을 뿐.
‘이거 혹시 나를 이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죽고 싶지 않다면 그러진 않을 거야.’
미국의 협회장인 트리스탄은 그렇게 강심장인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표식을 남겨둔 곳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는 암살자의 길을 그의 목에 남겨두지 않았던가?
물론, 하나밖에 남기지 못하는 표식을 쓴 덕분에 한국까지 이용할 때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서 써야 한다는 단점이 생겨버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만약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일본에 핵미사일을 발사한 대가로 사소한 일을 해주는 것뿐이니 단 한 번은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생각을 마친 그녀가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해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였다.
팟-!
눈앞에 갑작스레 상점창이 열렸다.
이르카가 무슨 선물을 준비했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상점창을 바라본 성진아는 두 눈을 의심했다.
새로 입고된 물품 중에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
10만 포인트라는 무지막지한 가격보다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기에 이 물건을 자신에게 보여주었을 것으로 생각한 성진아가 부랴부랴 천부령을 구매하자마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슈욱-!
그리고 동시에 눈이 시리도록 밝은 하얀 빛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눈을 질끈 감은 성진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놀랍게도 한국의 광화문 광장 한복판이었다.
성진아는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놀라서 주변을 둘러봤다.
좀비 역병이 사라진 한국은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우기 위한 복구작업이 한창이었다.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갑작스레 환한 빛과 나타난 성진아를 보자마자 놀라서 외쳤다.
“서, 성진아 성녀님 아닌가?”
“뭐? 어디 어디!”
“저기 저분 성진아 성녀님이시잖아!”
“헉! 진짜네?”
바쁘게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난 성진아의 이름을 연호할 때였다.
꽈르릉-!
어두워졌던 하늘이 갈라지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신비한 여인 마고 신이 하늘에 모습을 비췄다.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든 신성한 모습에 성진아를 연호하던 사람들도 멍해졌을 때 누군가 중얼거렸다.
“시, 신인가?”
“신이라고? 그런데 누구지?”
“저거 하늘에 홀로그램 쏜 거 아니에요?”
“거기 아저씨 정신 차려요. 지금 여기가 가상현실게임도 아닌데 홀로그램 쏜다고 저런 모습이 나오나요?”
“그러면 진짜 신?”
“여자 신이라면 설마 웅녀?”
“에이, 웅녀보다는 그래! 마고! 마고 신 아닐까요?”
다들 침을 꼴깍 삼키고 있을 때였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목소리가 한국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성진아는 들으라. 얼음의 밭에서 고독한 늑대를 찾을지니. 혼의 계약자와 함께 걸어가면 그대에게 빛의 길이 내리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어두워졌던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모든 사람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숨을 죽인 사람들과 어안이 벙벙해진 성진아 그들 모두 한마디는 똑똑히 들었다.
‘성진아.’
곧 정신을 차린 한 사람이 그 말을 조금 왜곡해서 받아들이고는 주변에 외치기 시작했다.
“신이 직접 인정한 구원자! 아니! 메, 메시아! 성진아! 만세!”
“……?”
사실,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지금 한국 사람들의 생각에는 성진아가 메시아나 다름없는 상황.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성진아를 바라본 사람들이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너도나도 연달아 외치기 시작했다.
“메시아 성진아! 도망자 강태식을 꼭 잡아주세요!”
“이제! 성녀님이 아니다! 신이 인정한 메시아다!”
성진아는 무표정하게 그들의 환호를 듣고 있다가 이르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참고 기다리라더니… 진짜 내 관리자님은 최고야…….’
자신에게 정보를 건네주기 위해 노력했을 이르카를 생각한 성진아는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요즘 잘 웃지 않던 그녀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짓자 광기에 가까운 사람들의 환호가 튀어나왔다.
“시, 심장이!”
“세상에! 메시아님, 나 죽어!”
그제야 주변 상황을 파악한 성진아가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주며 인사를 하고는 생각했다.
‘얼음, 고독한 늑대, 혼의 계약자? 음… 일단 트리스탄을 조져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