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상석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각 부서를 관리하는 3명의 신 중 빙의부와 환생부를 관리하는 최상위 신들 또한 의문을 표했다.
“32강이면 첫 대전 아니오? 그런데 이르카를 지명하다니 베르미우스가 너무 조심스럽게 나가는 것 같은데?”
“음, 아무래도 결승전에 헤라클레스나 비다르를 만날 가능성이 크니 힘을 아끼려는 것이겠지요.”
“머리를 쓴 것인가? 그렇다면 이 경기는 그다지 재미가 없겠군. 이르카라는 아이는 요즘에 뜨긴 했어도 회귀자들을 관리하는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지 전투능력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니 말이오.”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그들의 옆에 있던 카르나티우스 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훗, 이번에는 재밌을 거예요.”
“응? 이르카라는 아이가 뭔가 숨겨둔 것이 있소?”
“그건 지금 지켜보시면 알 거랍니다. 그리고 이번에 내기하신 건 다 기억하고 계시죠?”
“이거 참, 매번 미안해서 좀 그렇소. 매번 20만이라는 포인트를 공짜로 얻어가니 말이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빙의부의 관리 신에게 묘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던 카르나님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카르나티우스: 다 지켜봤지?]
[이르카: 넵.]
[카르나티우스: 믿어도 되겠니?]
[이르카: 걱정하지 마세요.]
[카르나티우스: 그래놓고 쟤한테 지면 넌 나한테 죽는단다? 이번에 힘쓰기로 한 거 제대로 써보렴. 우승자한테 20만 포인트랑 카르마 5%도 주잖니.]
[이르카: …넵!]
경기장에 들어서자 조금 애매한 환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번 대회 첫 라운드 탈락자와 우승자가 붙었으니 싱겁게 끝날 거로 생각한 신들이 많을 것이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가?
물론 거의 1만분의 1 확률이었지만 가끔가다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도 나오지 않겠는가?
그때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화려한 폭죽 터졌다.
펑-!
신호가 울리자마자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미친 황소처럼 달려드는 베르미우스를 바라보며 혼신의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팔목에 달아놓은 천부령을 흔들며 마치 천부령의 힘을 쓰는 척 언령 마법에 룬 마법을 섞어 녀석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내 명하노니! 천부의 힘 앞에 멈춰-라!”
“크읏! 역시 신물을 빌려왔나!”
“오늘은 재밌어진다고 했잖아?”
퍽-!
바람처럼 달려가 움직임이 느려진 베르미우스의 턱을 날렸다.
쿵-!
땅에 녀석이 처박히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지자 신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우와아아! 이르카 꽤 하는걸?
-저건! 마고 신의 천부령! 녀석도 이번에는 신물을 빌려왔군!
그때 땅에 처박혀 있던 베르미우스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 꽤 강한 녀석이기에 거의 속박된 상태에서도 치명적인 급소를 피한 모양.
퉤-!
입에 고인 피를 내뱉은 녀석이 스산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더니 허리에 매달고 있던 칠흑보다 어두운 세 개의 쇠 구슬을 꺼내 들었다.
역시 녀석도 신물을 가져왔군.
쉴 새 없이 떠들며 녀석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변에 트랩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야! 너도 신물 가져왔네, 와 치사하다 진짜.”
“……?”
“뭐? 신물의 힘 없어도 날 이겨? 구라도 적당히… 헉!”
말을 채 마치기 전 속전속결로 승부를 보려는 듯 베르미우스가 쇠구슬 두 개를 부딪치며 외쳤다.
“천둥과 불의 힘이 이곳을 집어삼키리라!”
조금 유치한 시동어였지만 위력은 사뭇 대단했다.
꽈르릉-!
검게 물든 하늘에서 경기장으로 여러 줄기의 벼락이 세차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벼락을 피하며 근처에 마법 트랩을 설치하고 있을 때.
화르륵-!
땅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불기둥이 나를 덮쳤다.
“크으윽!”
마치 지옥의 불길과도 같은 뜨거운 열기에 몸이 익는 것 같은 충격이 덮쳐왔다.
힘겹게 불길과 싸우고 있을 때 그 모습을 본 베르미우스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황소처럼 돌진해왔다.
뜨거운 몸과 정반대로 머릿속은 서늘해졌다. 지금 저 공격을 받으면 무조건 녹다운.
흐려지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힘겹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와 동시에 좁은 공간의 시간을 완벽히 멈춰버리는 시간의 룬 마법 트랩이 발동되었다.
땅에서 보랏빛 트랩이 솟아오르며 녀석의 주변에 흐르던 시간이 천천히 멈췄다.
모두가 이 장면을 지켜볼 테니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전략이지만 이 녀석을 꺾는 데 이 정도 투자는 싸게 먹히는 거다.
이내 완전히 멈춘 시간에 갇힌 녀석이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을 때.
주먹을 꽉 쥐며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와! 통구이 될 뻔했네, 위험했어. 그리고 아까 재밌을 거라고 했지? 이제 다시 시작이야.”
함정에 빠져 얼굴조차 일그러트리지 못하는 녀석에게 다가가 주먹을 강하게 쥔 후.
녀석의 복부와 얼굴을 연타했다.
퍽! 퍼퍽!-!
마치 북을 두들기는 듯한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경기장에는 침 넘어가는 소리와 녀석이 얻어맞는 소리만 들렸다.
그 누구도 베르미우스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건 아무도 예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흘러내린 땀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실 정도로 열심히 녀석을 때린 후.
딱-!
손가락을 튕겨 멈췄던 시간을 풀었다.
계속 벗어나려는 녀석을 더 붙잡아 둘 마력이 부족했다.
“크허어억! 내, 내가 이렇게 쓰러질…!”
“...!”
과연 몸이 튼튼하긴 더럽게 튼튼했다.
바로 쓰러질 줄 알았더니 어떻게든 버텨낸 것.
차오르는 숨을 최대한 갈무리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베르미우스는 훨씬 강했다.
다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핏발선 눈을 부릅뜬 녀석이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세 걸음째 녀석의 움직임이 멈췄다.
“끄르륵…….”
베르미우스는 고목이 넘어가듯 그대로 쓰러져 내렸다.
찰나의 순간 수천 번의 주먹에 얻어맞은 충격이 녀석의 강력한 의지를 겨우 꺾은 모양.
“후… 진짜 세긴 세네.”
녀석이 쓰러지고 나서야 긴장이 확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때 눈깔을 뒤집어 까고 쓰러진 베르미우스에게 다가간 심판부의 천사가 손을 X자로 교차시켜 신호를 보냈다.
완벽한 녹다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언더독의 반란에 경기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때 사회를 맡은 신이 재빨리 외쳤다.
-첫 경기부터 대단한 반전이 일어났군요! 승자는 바로! 회귀부의 이르카!
이내 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은 환호성이 고요했던 경기장에 가득 찼다.
-이르카! 최고다!
-믿고 있었다! 난 네게 배팅했다고!
-이번 우승자는 이르카다!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지만! 한번 일내보자고!
내 이름을 환호하는 많은 신의 환호를 받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퇴장했다.
그 뒤로는 순조로웠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계속해서 보여준 천부령 덕분에 딱히 힘을 숨길 필요가 없었고 대다수 신이 내가 천부령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수군댔다. 정확히 내가 원한 결과.
4강전 역시 가볍게 승리하고 대기실에 들어와 헤라클레스와 비다르 둘 중 누가 올라올지 고민하며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16강 이상부터는 출전 대기자가 다른 참가자의 경기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녀석들이 꺼내올 수 있는 전략에 대해 고민하던 도중.
예상하지 못했던 이변이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오늘 가장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군요!
-4강에서 회귀부 소속의 비다르가 같은 회귀부 소속이자 숙명의 라이벌 헤라클레스를 아주 가볍게 꺾었습니다! 이로써 결승전은 회귀부 내전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진 후 대망의 결승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지?
비다르와 헤라클레스가 붙은 4강전은 누가 이겨도 이상할 게 없는 경기였다.
매번 엎치락뒤치락하는 녀석들이었고 실제로 비다르도 한 번의 우승 경력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으니까.
자신의 적수는 헤라클레스밖에 없다면서 헤라클레스를 만날 수 있는 최대한 빠른 곳에서 경기를 시작해서 그렇지 언제든 우승 후보 1순위에 손꼽히는 건 맞았다.
그런데 헤라클레스를 가볍게 이겨?
누가 이기든 거의 반 빈사 상태로 끝나던 경기 아니었나?
말도 안 되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우리엘 휘하의 심판자 천사가 들어오더니 다음 경기의 진행 여부를 물어왔다.
“이르카 님, 다음 경기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비다르 님께서는 빨리 진행하자고 하셨습니다.”
“치료할 시간도 필요 없대?”
“네, 비다르 님께서는 상처를 입지 않으셨습니다.”
“…진짜 헤라클레스랑 붙은 거 맞지? 어디 다른 행성에 이름 비슷한 애가 아니라.”
“네, 회귀부 소속 헤라클레스 님과 대전하신 게 맞습니다.”
“흠, 알았어. 뭐 빨리 붙자는데 나가 줘야지.”
“그러면 절 따라오시길.”
과연 비다르가 무슨 수를 썼길래 헤라클레스를 가볍게 이겼을까?
베르미우스를 선택해서 헤라클레스와 비다르 중 승자와 붙으려고 했던 계획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러나 승자가 상처 하나 없이 올라왔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기에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경기장에 들어서자 나보다 키는 두 배가량 더 큰 비다르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빠르게 녀석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녀석이 등에 메고 있는 지팡이와 다른 손에 쥐고 있는 창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오딘의 신창(神槍) 궁니르.
그리고 헤르모드의 마법 지팡이 감반테인.
토르의 장비인 묠니르와 힘의 벨트를 제외하고 아버지 오딘의 손을 거쳐 간 무기를 두 개나 더 가지고 나온 것.
그제야 헤라클레스 녀석이 진 게 이해가 되었다.
오딘 신과 동급의 신인 제우스 신의 예절 주입기 <아스트라페>를 빌려오지 않는 이상 궁니르에 맞서긴 힘들었을 테니까.
특히 등에 메고 있는 감반테인이 가장 큰 문제였다.
타인이 쓰는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특수한 능력은 나와 최악의 상성이었으니까.
지금 비다르와 붙으면 무조건 필패다.
천부령의 봉인을 풀고 성진아에게 계시를 내려줄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태산처럼 굳건히 서 있는 비다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 비다르 오랜만이다?”
“……?”
“왜 그동안 연락이 뜸했냐고? 미안 요즘에는 내가 꽤 바빴거든.”
“……!”
“요즘 포인트 많이 버니까 경기 끝나고 술 한잔 사라고? 그 정도야 뭐 어렵지 않지. 그런데 너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궁니르랑 감반테인이라니.”
“……!!”
“저번 대전에 헤라클레스가 먼저 빌려와서 너도 빌려왔다고? 하긴, 아까 보니까 많이도 빌려왔더라.”
“……?”
“나도 천부령 있지 않냐고? 에이, 난 이거 하나잖아.”
“……!”
“부러우면 나도 빌려오라고?”
“……!!”
“그러지 말고 딱 하나만 빼줘라, 아 궁니르는 그냥 써도 괜찮아. 힘들게 빌려왔을 테니까.”
“……??”
“싫다고? 그러면 내가 너한테 재밌는 정보 하나 알려줄게. 메르나랑 관련된…….”
“그 빌어먹을 요정 새끼?”
드디어 벙어리 신으로 불릴 정도로 말수가 극히 적고 오로지 표정으로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던 녀석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입술에 침을 잔뜩 바른 뒤.
메르나에게 당했던 일을 떠올리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비다르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걔, 얼마 전에 관리하던 회귀자한테 처맞고 왔다? 그리고 내 주특기 알지? 메르나를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다음번 대전에 참여하게 할게. 그때 네가 지명하면 되잖아? 한번 손봐줘야지?”
“크하하하!”
귀청이 떨어질 듯한 큰 목소리로 비다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친구.”
“묠니르 좀 빼줄래?”
“흠…….”
“아!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힘의 벨트가 있는데 묠니르가 빠지면 모양새가 이상하네, 게다가 너희 쪽에서 가장 유명한 무기가 궁니르랑 묠니르인데 좀 그렇지?”
“……!!”
“그럼 감반테인은 어때? 사실 헤르모드 형님이 토르 님이나 오딘 님이랑 비교하면 조금 끗발 떨어지잖아?”
“……?”
“뭐? 창세신님께 맹세하라고? 그러지 뭐. 다음번 대전에 창세신님께 맹세하고 메르나가 참여하게 해줄게.”
“……!”
“좋았어! 거래 성립이다.”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은 비다르가 심판자 천사에게 손짓해 부르고는 등에 메고 있던 감반테인을 건네줬다.
미안하다 친구야.
나도 이번에는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있어서 말이야.
그때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를 맡은 신의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대망의 결승전이 펼쳐집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 베르미우스를 꺾고 올라온 돌풍! 이르카와 숙명의 라이벌 헤라클레스를 꺾고 올라온 비다르! 과연 누가 이길지 이제부터 경기 시---작! 합니다!
경기가 시작하고 나자 마치 웅크린 사자처럼 묠니르를 들고 가만히 서 있는 비다르를 지켜봤다.
과연 어떤 식으로 공격을 해올까?
태산처럼 굳건한 태세를 갖춘 비다르는 어떠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긴장감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때.
비다르가 묠니르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묠니르에 담겨있는 천둥의 힘을 불러오려는 모양.
꽈릉-!
하늘에서 거대한 벼락이 떨어지는 걸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저 무식하게 커다란 벼락을 맞으면 바로 전기 통구이행이다.
재빠르게 서 있던 자리에서 피하며 천둥을 불러오느라 정신을 집중 중인 무방비상태의 비다르를 향해 달려갔다.
원거리에서 붙는 건 불가능.
근접전으로 승부를 본다.
묠니르를 치켜든 녀석의 품에 다가가 룬 마법을 적중시키려 할 때였다.
평소에 보여주는 무표정한 표정과는 다르게 환하게 웃은 녀석의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달려가던 속도를 조금 늦췄을 때였다.
슈욱-!
소름 끼치는 파공성을 내지르며 내게 날아오는 검붉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아뿔싸!
궁니르에 달린 추적기능을 이용해 미리 날려놓은 것.
이건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이를 악물며 몸을 살짝 틀었다.
푹! 푸욱-!
피륙이 걸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두 번 울려 퍼지고 난 뒤.
경기장이 한순간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목을 타고 울컥 넘어오는 피를 뱉었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비다르에게 말했다.
“쿠, 쿨럭! 미… 미안하다 친구야.”
“…재미.”
쿵-!
재밌었다는 말을 남긴 비다르가 땅으로 쓰러지고 난 뒤.
경기장에 있던 모두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