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시끌시끌한 연회장이 설치된 결혼식장에 도착하자마자 날 반긴 것은 요정의 날개가 달린,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번개의 정령왕 뤼슈타였다.
“오! 딱 맞춰서 왔네? 내 스무 번째 남편!”
“징그러워. 그리고 소개할 게 저기 업혀있는 놈은 오늘 주례를 맡을…….”
그때였다.
요한을 업고 있는 화려한 은빛 갑옷을 차려입은 아르한을 가리키려 할 때 뤼슈타가 무방비 상태의 내 볼을 향해 달려든 것은.
쪽-!
그녀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까지 났으니…….
그런데, 볼에 아무런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의 입술을 가로막은 안젤라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안젤라는 손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 마냥 몇 번 툭툭 털더니 뤼슈타를 노려보며 난생처음 듣는 등골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난은 그만하시죠? 뤼슈타 님?”
“퉤퉤! 안젤라 너 손 안 닦았니? 왜 이렇게 짜?”
“원래 몸은 짜야 정상이에요.”
“얘, 몸에서 짠맛 나면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 네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모르나 본데…….”
“짠 게 더 맛있다던데요?”
“……?”
“훗, 모르셨어요? 이르카 님은 짠 거 좋아해요.”
“……?”
“……?”
나 단 거 좋아하는데?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고혹적인 목소리를 내며 뤼슈타의 위아래를 훑는 안젤라를 멍하니 쳐다봤다.
“안젤라? 나…….”
“조용히 하세요!”
“…….”
투지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조용히 입을 오므렸다.
안젤라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 뤼슈타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말을 건넸다.
“남자는 다가오는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 법이야.”
“마다하게 만드는 여자도 있답니다. 뤼슈타 님? 아, 그리고 열.아.홉 번째 결혼 축하드려요.”
“오호호호! 얘는 참! 인상 펴! 장난도 못 하니?”
“훗, 저도 장난이었어요.”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간 뤼슈타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안젤라를 번갈아 봤다.
얼어붙을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안젤라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르한, 미안한데 요한 좀 데리고 저쪽 테이블로 가줄 수 있어?”
“역시, 부부싸움은 끼는 게 아니지요.”
“……?”
“흐흫, 아직 부부는 아니에요. 아르한 님.”
“오! 그러면 제가 임무를 마치기 전에 안젤라 공의 결혼식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두 분 무사히 용무를 보시길.”
“……??”
저런 또라이를 봤나?
당황해서 아무런 말을 못 하고 보낸 걸 후회하고 있을 때 안젤라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르카 님, 정신 차리세요. 여기 이르카 님을 별로 안 좋아하는 신들도 꽤 오실 예정이잖아요.”
“어, 음… 고마워.”
“고마운 거밖에 없어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안젤라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또 남의 결혼식을 보니 부러워진 모양.
나도 모르게 안젤라에게 미안해져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아직은 아냐… 그리고 내가 너한테 한 잘못이 있는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칫, 언제 적 일이에요 그게.”
“그래도 아직 내가 날 용서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잊겠어.”
“전 다 잊었어요.”
“…고마워.”
“뭐가 고마운데요?”
“그냥 다. 고마워.”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카르나 님이랑 쇼핑 좀 다녀오게 포인트나 주세요.”
“잉? 포인트는 나보다 카르나 님이 훨씬 많은데?”
“으휴! 진짜 또 짠돌이처럼 굴 거에요?”
“그럼 5, 5천 포인트면…….”
“화끈하게 2만 정도 쏘시죠? 메르나 님한테 받을 포인트도 있잖아요.”
“그, 그건 비상용!”
“그건 다 제가 알아서 챙기고 있으니까 이럴 때 생색 좀 내보세요.”
“그걸 챙기고 있었어?”
“당연하죠, 까마귀 고기를 구워 드셨나, 성진아 씨랑 계약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을 벌써 까먹으셨어요?”
이럴 때는 조용히 있는 게 상책.
화려한 번개와 불꽃 그리고 바람을 타고 솟아오르는 물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리고 있자 안젤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튼, 저는 요한 님 깨우고 준비를 시켜놓고 올게요.”
“응 알았어. 다녀와.”
안젤라가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뜬 뒤.
뒤를 돌아보자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던 헤라클레스가 으르렁거렸다.
“야. 날 이런 꼴로 만들어 놓으니 기분 좋냐?”
“음, 널 보니 기분이 안 좋아졌어. 복장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이게 뭐 어때서!”
“그냥 반바지 같잖아?”
“아니거든? 이거 헤파이스토스 님이 네메아의 사자 가죽으로 만들어 주신 거다. 너 같은 놈은 꿈도 못 꿀 고급진 팬티야.”
“에이, 네 말대로 지금 입고 있는 건, 너무 고급스러워 보여. 그럼 재미가 없지.”
말을 마친 후 가방을 뒤져 헤라클레스가 입을 팬티를 고르기 시작했다.
저런 고급스러워 보이는 디자인의 팬티는 절대 못 입지.
마침내 마음에 드는 팬티를 찾아서 꺼내 들었다.
뒤로 돌려 녀석이 못 보게 한 뒤 잘 맞을까 치수를 재보기 시작했다.
“나 정도 되는 신이 체통이 있지 네메아 사자 가죽으로 만든 팬… 너 뭐 하냐?”
정신없이 자신이 가져온 팬티를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헤라클레스에게 준비해온 팬티를 꺼내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거 이쁘지?”
“이런 미친 새끼가…….”
“촌스럽게 사각이 뭐냐 사각이 삼각 정도는 입어줘야 이쁘지. 여기 봐봐 너처럼 앙증맞은 코끼리 위치도 이쁘지?”
“너, 너 이 미친 새끼야!”
“화내는 거야? 와! 설마 천하의 헤라클레스가 자기가 약속한 걸 못 지키겠다고 화내고 있는 거야?”
“…후우.”
“너 춤은 다 외워뒀냐?”
“진짜 그 민망한 춤을 춰야 하는 것이냐?”
“그게 왜 민망해? 더 민망한 춤을 시키려다가 다른 신들이 토할까 봐 바꿔준 건데.”
“넌 꼭 후회할 거다. 나중에 두고 보자.”
“응, 난 지금 충분히 봐둘게.”
나중에 두고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은 하나도 없다.
물론, 녀석이 죽자사자 덤비면 조금 힘든 건 사실이지만 물리적으로 해결하려 하는 그렇게 멍청한 녀석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누가 보는 사람이 없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탈의실로 가는 헤라클레스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전체 채널에 메시지를 보냈다.
[관리자 이르카: 잠시 후 정령왕과 인간의 특별한 결혼식을 중계 하겠습니다. 아~주 특별한 이벤트도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르카의 정령계 채널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메시지를 받은 후 입장하는 신들의 숫자를 확인하니 무조건 대박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 들었다.
얼추 입장할 신들은 모두 입장하고 난 뒤.
검은 사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요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골과도 같이 변한 이스마엘과 말괄량이 같은 뤼슈타가 화려하게 입장할 때는 조금 환호가 있었지만 이어지는 기나긴 축사에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결혼식을 지켜보던 신들이 이게 무슨 특별한 결혼식이냐며 궁금해합니다.]
[뻔한 결혼식은 지루하다 토로하는 신들이 특별한 이벤트는 언제 하느냐고 질문합니다.]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 그대로 나왔다.
강한 충격을 선사하려면 이제부터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때까지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사회를 맡고 있던 물의 정령왕에게 신호를 보냈다.
“네, 다음 순서는 특별한 축하 공연이 있겠습니다. 바로 제우스 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대영웅! 헤라클레스 님을 모십니다!”
지켜보던 신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런 일에 나서지 않던 헤라클레스가 올림포스 신들의 결혼식도 아닌 정령왕의 결혼식에 축하 공연을 한다는 건 그만큼 충격적이었을 테니까.
“와! 헤라클레스가 직접 나온다고?”
“이야! 뤼슈타 능력 좋은데? 헤라클레스를 초대하다니 말이야!”
“오! 그 녀석이 축하 공연을…….”
“푸푸흡! 저, 저게 진짜 헤라클레스야? 으하하하!”
“오호호호! 설마요! 헤라클레스 닮은 아이 아닌가요?”
“크하하, 아냐, 아까 온 거 봤는데 쟤 진짜 헤라클레스 맞아. 내 평생 이런 모습을 볼 줄은 몰랐네.”
직접 지켜보고 있는 신들뿐만 아니라 채널의 메시지창은 읽기 힘든 속도로 미친 듯이 올라갔다.
그만큼 충격적인 등장이었겠지.
앙증맞은 코끼리 팬티를 입은 헤라클레스가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든 얼굴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을 때.
안젤라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사방에서 1지구의 한국에서 유행했던 걸그룹의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관리자 이르카: 자!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딱-!
준비했던 환영 분신 마법 시약을 써서 혼자 뻘쭘하게 서 있던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여러 개로 늘렸다.
녀석의 모습을 복제하는 분신들이 생겨나자 주변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과연, 내가 준비했던 의상과 노래의 힘은 위대했다.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이 붉어진 얼굴로 어색하게 춤을 추는 헤라클레스와 그 모습을 보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신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대박이라는 감이 들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모든 신이 웃고 떠들고 즐기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자 뤼슈타가 나에게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보냈다.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어 날아오는 하트를 다른 곳에 날려 보낸 뒤.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던 채널의 메시지창에 다시금 메시지를 날렸다.
[관리자 이르카: 재밌게 즐기셨나요? 관리자 이르카 여러분께 다시 인사를 올립니다. 이 영상은 따로 만들어서 배포할 예정이며 대여는 300포인트, 구매는 1,500포인트에 판매할 예정입니다.]
[대다수 신이 빨리 판매하라며 아우성을 칩니다.]
[관리자 이르카: 영상은 최대한 빨리 제작해서 배포하겠습니다. 이제 또 다른 이벤트가 있으니 마지막까지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요한의 화려한 등장을 알릴 차례.
요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요한 님, 안젤라에게 설명은 들으셨죠?]
[요한: 음… 꼭 해야 하는 일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혈 마법을…….]
[이르카: 많은 신이 보고 있습니다. 제가 요한 님을 소개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주시길.]
[요한: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만… 알겠습니다. 하, 이런 시련을 주시다니. 제 잘못입니다.]
[이르카: 요한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위대한 빛의 신의 축복이 요한에게 내리길.]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요한은 긴장된 표정으로 마지막 주례사를 읊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결혼식을 마치며 신랑과 신부에게 신의 축복이… 쿨럭!”
“……?”
“……?”
곧이어 피를 토하는 요한과 그 황당한 모습을 지켜보는 신들의 멍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재빨리 요한의 옆에 서 있던 아르한에게 눈치를 줬다.
곧 성큼성큼 요한에게 걸어간 아르한이 굵은 힘줄이 돋아난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드시오.”
“…왜 목을?”
“그거야 당연히 목에서 나오는 피를 마셔야 하는 것 아니오?”
“…징그러우니 팔목을 주시죠.”
“아?”
당당히 까 내렸던 목을 서둘러 덮은 아르한과 씁쓸한 웃음을 지은 요한의 행동을 멀뚱히 바라보던 신들이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저 성직자는 왜 피를 토한 거지?”
“그, 글쎄요? 병드는 성직자도 있었나?”
“그런데 저 옆에 있는 오크가 왜 목을 깠다가 다시 팔목을 까고 있는 건지 누구 예상가는 신 있소?”
“알면 이러고 있지 않겠죠?”
그때 요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르한의 팔목을 물어뜯었다.
“배, 뱀파이어! 저런 존재가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란 말인가!”
“아니, 방금 그것보다 저 어둠의 존재가 신의 축복을 말하지 않았어요?”
“말세로다! 말세야!”
그들의 반응은 예상했던바.
이제 진짜 요한의 능력을 보여줄 차례가 왔다.
하늘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은 요한이 두 손을 꼭 모으고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당신에게 비오니, 미천한 종이자 어린 양 요한이 바랍니다. 지금 이곳에 온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
“피의 비가 내리리라!”
“……!”
요한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가 방울져 모든 신에게 떨어져 내렸다.
정말 피의 비라고 칭해도 될 정도의 양의 피가 쏟아져 내리고 나자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황당해하던 신들이 이상을 느낀 것은.
“어? 어? 이 저주받은 피에서 왜 이런 막대한 신성력이 느껴지는 거지?”
“이건 대천사들에게서나 나오는 신성력인데……?”
요한에게서 뿜어져 나온 막대한 신성력을 느낀 신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재빨리 요한이 서 있던 자리로 뛰어가 말했다.
“오늘부터 7 아르카니아에 사제행을 떠날 요한과 그를 지키는 수혈… 수호기사 아르한입니다. 방금 보셨다시피 요한은 태생적 한계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뱀파이어 사제입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요한과 아르한의 아르카니아 구원행 채널을 구독하셔서 그들을 응원해주시길 바랍니다!”
인사를 마치고 나자 신성력이 섞인 요한의 피를 뒤집어쓰고 얼빠져 있던 신들에게서 폭발적인 반응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허! 뱀파이어 사제라니!”
“세상에! 이게 가능한 일이에요?”
"시, 신성력이 섞인 피의 비라니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이란 말인가!"
그 누가 뱀파이어 사제를 봤겠는가?
아마 요한의 채널은 계속 미어터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인트를 벌어들이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
갑작스레 신들의 환호를 받자 어리둥절하고 있던 요한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