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아르한을 데리고 중간계로 넘어오자마자 메르나에게 메시지가 날아왔다.
[메르나: 엌! 너, 너 옆에 걔 뭐야! 어, 어떻게 이겼어?]
[이르카: 응? 안 이겼는데? 아, 그러고 보니까 내가 강림해서 열람 제한 걸렸구나?]
뻔히 아는 사실을 놀리듯 말했다.
다른 관리자가 강림한 세계는 카르나 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보지 못한다.
물론, 내가 강림했을 때는 안젤라도 지켜볼 수 있지만.
[메르나: 당연한 걸 왜 그렇게 말하는데! 그것보다 어, 어떻게 이긴 거야? 나는 네가 못… 헙!]
[이르카: 그냥 대화로 풀었어.]
[메르나: 대, 대화로? 걔가 말을 들어?]
[이르카: 응, 그러니까 너도 머리를 좀 써야지. 맨날 쥐어패기만 하면 말을 듣니?]
[메르나: 네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얼이 빠진 것 같은 메르나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그녀에게 계약 내용을 다시 상기시켜줬다.
[이르카: 보자, 카르마 2%랑 포인트 10만 맞지? 그리고 너 나한테 거짓말했더라?]
[메르나: 뭐, 뭐?]
[이르카: 얘 인간 아니잖아. 계약 위반으로 징계위원회에 알리기 전에 5만 포인트만 더 내놔.]
[메르나: 15만!? 사, 살려줘라. 너 요즘 포인트 많이 벌잖아… 나는 그거 주면 파산이야.]
[이르카: 하긴, 운영비는 있어야겠지?]
[메르나: 봐, 봐주는 거야?]
[이르카: 고럼! 당연히 봐줘야지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메르나: 고마워! 나중에 은혜는 꼭 갚을게.]
[이르카: 응? 왜 나중에 갚아? 카르마 1%만 더 내놔. 그건 포인트랑 상관없잖아?]
[메르나: 뭐?! 너 어떻게 같은 관리자한테 카르마를 내놓으란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냐!]
[이르카: 그러면 계약 위반을 징계위원회에 보고하고 관리하던 회귀자한테 처맞았다는 소문 퍼트려도 상관없지? 거짓말도 아니고 사실이니까 상관없잖아?]
[메르나: 제, 제발… 1%의 카르마를 모으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살려줘라. 나 꼭 다음번에 신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있자 그녀는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웃기고 있네, 다음번에 신이 되겠다고?
헤라클레스랑 내가 버티고 있는데 저런 말을 했다는 건 나를 엿 먹이려 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그녀는 나중에 꼭 은혜를 갚겠다는 둥.
헤라클레스를 꾀어서 사기 계약을 끌어내겠다는 둥 다급하게 막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이르카: 응 안돼, 난 이번에 신이 되어야 해.]
[메르나: 이, 이거 다 헤라클레스가 시킨 거야!]
[이르카: 응 안 믿어. 네가 먼저 꼬시지 않은 이상 걔가 이런 짓을 할 성격은 아니거든? 그리고 오늘 뤼슈타 녀석 결혼식인 거 알고 있지?]
[메르나: 추, 축하한다고 전해줘! 그리고 이르카야 내가…….]
[이르카: 오늘 홍보를 크게 할 거야. 헤라클레스가 팬티만 입고 춤추는 걸 언제 또 보겠어. 그때 너 처맞았다고 소문낼까? 아니면 곱게 카르마 바칠래?]
[메르나: 개새끼…….]
[이르카: 내 부모님은 개가 아니니까 신성모독은 그만하고 정령계로 가기 전에 알아서 보내놔라. 안 그러면 다 불어버릴 테니까.]
[메르나: 야 이#[email protected]#… 차단했습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메르나의 메시지를 차단한 뒤 내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듯 날 쳐다보는 아르한에게 말을 건넸다.
“아, 널 데리고 온 사실을 알린 거였어. 관리자가 바뀌기 때문에 아무래도 새로 계약도 해야 하고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거든.”
“계약을 새로 해야 한단 말입니까?”
“응. 너랑 같이 가는 친구가 있는데 걔랑 맞춰서 계약을 새로 해주면 될 거 같아.”
요한과 콤비를 이뤄야 하는 아르한의 계약 조건이 다르다면 말이 되겠는가?
당연히 계약 조건도 같아야 한다.
물론, 먼저 계약한 것은 요한이니 요한의 비율에 맞춰서 줘야 하는 게 정상적인 일 처리였다.
그때 처연한 미소를 지은 아르한이 풍요로운 중간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허심탄회하게 말을 건넸다.
“이르카 님 같은 관리자를 진작 만났다면 저는 지금 제 세계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군요.”
“지난 일은 가슴속에 묻어두고 이번에 가는 세계를 구원해. 그럼 그곳이 네 새로운 고향이 될 테니까.”
“새로운 고향이라. 듣기만 해도 좋구려. 아, 그리고 같이 갈 친구라는 분은 어떤 분입니까?”
“음, 신앙심이 아주 투철한 예비 성직자? 나이도 너랑 끽해봐야 50살도 차이 안 나니까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면 될 거야.”
“성직자 친구라… 얼른 만나보고 싶군요.”
환한 아침 햇살을 받은 아르한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마치 성자가 된 것 같은 아르한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결심한 것은 하나.
일단 보내고 난 뒤에 그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상 그 누구도 수혈팩 같은 역할로 보내지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
서둘러 안젤라와 요한이 기다리고 있을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집무실에 도착하자 말끔한 검은 옷을 입은 요한과 녀석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주고 있던 안젤라가 날 반갑게 맞이해줬다.
“어? 이르카 님! 타이밍 좋게 오셨네요! 이 옷 봐봐요. 엄청 이쁘죠?”
“오! 이르카 님 얘기는 들었습니다! 또 다른 어린 영혼을 구원해 주고 오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동시에 인사를 건넨 그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준 뒤 요한이 걸치고 있는 옷을 바라봤다.
깔끔하게 은빛 색실로 자수를 놓은 검은 사제복은 누가 봐도 안젤라의 빼어난 솜씨임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물론 그 자수로 적힌 말이 달빛 엘프족의 언어로 ‘메이드 바이 안젤리카’라는 건 요한에게 알리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요한이 입고 있는 멋들어진 사제복을 몇 번 만져보자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짐을 챙기고 있던 안젤라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안젤라 설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저 옷에다가 상점에서 자동 세탁 기능 사서 넣었어?”
“네. 왜요?”
“아니, 고행을 떠나러 가는 성직자라면 빨래는 직접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이르카 님. 그럼 매번 피를 토하실 텐데 그때마다 빨아요? 진짜 자꾸 짠돌이처럼 구실래요?”
“…그래 선물로 저 정도를 못 해주겠어? 잘했어! 안젤라.”
피 같은 포인트가 줄줄 새는 아픔에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내겐 아직 입금되지 않은 10만의 포인트가 있다.
그때 멀뚱히 서 있는 아르한을 힐끗 바라본 안젤라가 그를 가리키며 말을 건넸다.
“저 덩치가 요한 님 그거죠?”
“응. 요한 전용 수혈팩.”
“확실히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튼튼하게 생겼네요. 그런데 저분 옷도 맞춰줘야 하나? 성직자와 호위기사 이런 느낌으로?”
“그냥 대충 아무 갑옷에다가 성기사 마크 달아놓고 주면 안 되나?”
“에이, 선심 좀 쓰시죠? 어차피 저분도 1:9 계약하실 거잖아요. 그리고 저분한테 한 얘기 다 들었거든요? 뭐? 시간을 빠르게 돌려? 참 나 입만 열면 거짓말은 진짜.”
흠칫 놀라 안젤라를 바라봤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컸지?
괜스레 헛기침한 후 안젤라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쉿! 그, 그래도 완전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조, 조금의 감동을 더 주기 위해서 첨가한 조미료 같은 거 아니겠어?”
“그 조미료 완전 팍팍 치신 김에 저분한테도 포인트 좀 쓰시죠?”
“흠… 아니, 사실 저 둘은 원 플러스 원이라… 포인트는 비슷하게 벌리지 않겠어?”
“아닐걸요? 이단으로 몰려 고행을 겪는 수행 사제와 그를 지키는 호위기사. 셀 수 없이 덮쳐오는 악인을 처단하는 강력한 수호자. 이런 이미지 좋아하는 분들 엄청 많잖아요.”
“그거 신들한테 고구마라고 욕먹는 거 아냐?”
“그건 수행 사제가 약할 때 얘기죠, 요한 님이 약해요?”
“아?”
“아? 가 아니라. 벌 수 있을 때 더 당겨야죠. 그러니까 최소한의 투자라고 생각해요.”
“역시, 내가 안젤라 때문에 먹고산다니까?”
“흐흫, 그걸 지금 아셨어요?”
또 이상하게 웃는다.
어쩔 수 없이 안젤라의 취향에 맞는 화려한 은빛 갑옷과 두꺼운 해머를 구매하고 난 뒤 멀뚱히 서서 기다리던 아르한에게 건네줬다.
그가 원래 쓰던 것보다 엄청나게 화려한 고급 장비를 받고는 기뻐할 때 조심스레 계약 조건을 꺼내 들었다.
“아르한? 이번 회귀 계약 조건은 요한 때문에 조금 복잡해.”
“복잡해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좋은 장비를 선물로 주시는 분인데 설마 이상한 계약을 하자고 하시겠습니까?”
“계약 비율이 1:9야.”
“…제가 9?”
“아니, 내가 9.”
“…….”
“…….”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옆에 조용히 앉아있던 요한이었다.
“제가 제안한 겁니다. 아르한 님.”
“1:9의 계약을 말입니까?”
“네, 저희는 세상에 씻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그 죄를 갚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고난에 빠트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니요! 우리가 갈 세상은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이 넘쳐 흐릅니다! 얼마 전에 보니 해골밖에 남지 않은 사내가 있더군요! 우리가 이제까지 배가 찢어질 것 같은 굶주림과 가난을 겪으며 평생을 살아왔던가요?”
“그, 그건 아니긴 한데.”
“우리는 죄를 씻기 위해 가는 겁니다. 그깟 포인트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힘든 자들에게 신의 축복을… 쿨럭! 쿨럭!”
“아니! 요한 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피를…….”
좋은 타이밍에 요한이 피를 토했다!
피를 토하고 있던 요한이 아르한에게 괜찮다는 말을 꺼내기 전.
재빠르게 요한의 입에 손수건을 쑤셔 박으며 불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깜짝 놀라 당황하고 있던 아르한에게 말을 건넸다.
“요한은 뱀파이어야. 알지? 사람의 피를 마시고 사는 불쌍한 아이들.”
“네?! 배, 뱀파이어가 성직자를 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 원래는 못 하는 게 정상인데 요한은 달라. 세상을 구원하고 자신의 죄를 씻겠다는 일념 하나로 침투하는 신성력에 몸이 망가져 가면서까지 이 일을 하려고 하는 거야.”
“허, 자신의 몸이 망가져 가는데도 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네 임무는 두 개야. 그중 첫 번째는 병들어가는 요한을 보호하는 것인데 봤다시피 가끔가다가 피를 나눠줘야 할 때도 있을 거야.”
“피를 말입니까?”
“그래, 요한은 피를 마시지 못하면 죽어. 너는 그런 요한을 살리는 거고. 어떻게 보면 진짜 피를 나눈 형제 같은 사이가 되는 거 아니겠어?”
“피를 나눈 형제라…….”
입술에 침이라도 바를걸.
살짝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을 때였다.
“읍! 우읍!”
눈을 부릅뜬 요한이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품에서 미친 듯이 버둥대기 시작했다.
저항하는 요한에게 몰래 마법을 걸어 잠재운 뒤 씁쓸한 표정으로 죽은 듯이 잠든 요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봐,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다가 지쳐 잠든 모습이 너무 불쌍하지 않아? 이런 데도 자신에겐 한 줌의 포인트만 있으면 된다면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내게 먼저 계약을 제시했단 말이야. 참으로 불쌍한 녀석이지.”
“까짓거 계약하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숭고한 의지를 가진 분을 지키는 일은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하겠습니다.”
“그래 이해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얘가 피가 모자랄 때 피도 좀 나눠줄 수 있지?”
“저희 종족은 건강한 거 빼면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그깟 피? 뽑으면 바로 샘솟습니다. 이런 분을 위해서라면 한 방울이라도 더 드리고 싶군요.”
쓰러진 요한을 바라보며 굳은 결의를 다지는 아르한에게 슬그머니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원래 거짓이란 남이 그 말을 믿어 진실처럼 보게 만들어야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어려울 것 같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진실에 상대가 납득할 수 있을 거짓을 추가하면 끝.
그렇게 되면 상대는 꼼짝없이 넘어오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상남자처럼 계약 조건에 대해 채 읽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서명한 아르한의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고맙다. 요한도 정말 행복해할 거야.”
“뭐 이런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이르카 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평생 후회할 짓을 하고 있었을 텐데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럼 우리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러 가볼까?”
“첫 번째 임무 말씀입니까?”
“응,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면 변방에 있었잖아? 이제 메인 무대에 설 차례지.”
말을 마치고 잔뜩 삐져있을 헤라클레스 녀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지금 정령계로 출발한다? 너 오지 않으면 알지?]
[헤라클레스: 후우… 알았다. 약속은 약속이니…….]
[이르카: 복장은 내가 준비해둘 테니까 몸만 오라고 몸만. 아! 내가 알려준 춤은 외웠지?]
[헤라클레스: 진짜 그 민망한 짓을 해야 하는 거냐?]
[이르카: 약속은 약속이잖아.]
[헤라클레스: 후우… 그러면 하나만 물어보자. 너 어떻게 제약 걸린 상태에서 드래곤 하트를 가진 애를 이긴 거냐?]
[이르카: 메르나 두들겨 팬 애? 그냥 대화로 풀었어. 지금 같이 정령계로 갈 건데 와서 물어보든가.]
[헤라클레스: 알았다… 준비하고 출발하마. 그리고 너 이거 헤베한테 말하면 진짜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이르카: 말 안 해.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헤라클레스의 아내인 헤베에게 말하지 않을 거다. 물론 말만 하지 않을 거지만.
온 우주에 퍼져 나갈 홍보 영상을 내가 무슨 수로 막겠는가?
헤베가 아무리 그런 영상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는 가져가서 보여주겠지.
헤라클레스 녀석이 아내에게 곤욕을 당할 것을 상상하니 광대가 승천하듯 올라갔다.
메시지로 빨리 오라고 재촉을 한 번 더 한 뒤.
내 웃는 모습을 보더니 쓰러진 요한을 어깨에 들쳐메고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아르한과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안젤라를 데리고 정령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수혈… 수호기사 아르한! 데뷔는 원래 화려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