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8 에르프네임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듣고 오기는 했지만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들을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모든 것이 파괴된 마을.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놀잇감으로 변해 죽은 어미와 그 어미를 꼭 껴안고 죽은 자식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살아있을 때 불에 타 죽은 사람의 사체.
마치 전시라도 해놓은 듯 창대에 꿰어놓은 수많은 사람과 다른 이 종족들의 시체는 흩날리는 바람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처참한 모습을 뒤로한 채 혼자 살아남아 신음을 흘리고 있는 트리오스 녀석을 붙잡아 질문을 건넸다.
“야, 너희들 대장 어디 있냐? 분명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크크큭, 퉤!”
다 죽어가던 녀석이 입에 고인 피와 침을 함께 내뱉었다.
텁-!
손바닥으로 녀석이 뱉은 침을 막아낸 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줬다.
“이런 거 함부로 뱉는 거 아냐. 땅이 더러워지잖니.”
“웁! 우웁!”
“응? 이거 네 입에서 나온 거야. 내 침 아니다?”
“끄허업! 개, 개자식! 그, 그분이 오시면 너를 처단하실 것이다!”
“아니, 내가 찾아간다니까?”
상황파악을 못 했는지 악담을 퍼붓는 녀석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자 녀석은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크큭, 만용이구나! 네놈이 조금 강하긴 해도 그분의 힘 앞에서는 한낱 미물일 뿐! 신조차 그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분은 드래곤의 힘을 가지신… 가지신…….”
메르나 녀석, 여기서 얻어터진 게 소문이 다 퍼진 모양.
이 장면을 녹화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평생의 굴욕으로 남길 수 있는 장면 아니겠는가?
반신이 하계로 강림해서 얻어터지고 왔다는 소문이 돌면 그녀는 아마 쥐구멍이라도 찾으러 돌아다닐 것이다.
나도 모르게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내 손에 맺힌 드래곤의 힘이 담긴 룬 마법을 보고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녀석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아? 이런 거?”
“누, 누구냐…십니까?”
“말했잖아. 철없는 너희 대장 잡으러 왔다고. 그놈이 나랑 비슷한 일족 어린아이의 심장을 빼앗은 것도 있고.”
“드, 드래곤?”
“질문은 여기까지 받을게, 이제 내가 물어보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렴.”
벌벌 떨고 있는 녀석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질문을 건넸다.
“너희 대장 어디 있는지 말하고 편하게 죽을래? 말 안 하고 생살이 벗겨지고 사지가 찢겨 죽을래?”
“…왕께서는 북부에 있는 트리폴리가 요새에… 응? 두, 둘 다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알려줘서 고마워.”
펑-!
공간의 룬 마법을 이용해 약속대로 죽는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머리부터 소멸시켜줬으니까 아프진 않았겠지?”
내가 내려줄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방법을 통해서 죽음을 내려줬으니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녀석들의 왕으로 불리는 회귀자를 찾아 길을 나섰다.
지나가다 만나는 트리오스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트리폴리가 요새에 도착하자 서늘한 바람에 섞인 끔찍한 비명이 귀를 간지럽혔다.
-우와아아아!
-엘프들의 방어선을 뚫어라!
-가증스러운 엘프 녀석들을 모두 없애자!
-더러운 트리오스 녀석들을 막아라!
-절대 뚫리지 마라! 팔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쏴라! 쏴!
양측 지휘관의 처절함과 증오심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와 처절한 전쟁의 참화가 그대로 눈앞에 드러났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며 이곳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카르나 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카르나 님?]
[카르나티우스: 응? 왜 부르니?]
[이르카: 여기 그 회귀자 녀석 처리하면 시간 다시 돌아가는 거 맞죠? 중간에 만나는 녀석들도 그래서 그냥 다 죽였는데.]
[카르나티우스: 그냥 죽인 거 맞지?]
[이르카: 사실 몇 놈은… 7계 신님한테 보내긴 했는데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카르나티우스: 뭐, 네가 그렇게 판단했으면 그럴 만한 놈들이었겠지. 대신 너무 큰 사고는 치지 말렴.]
[이르카: 넵. 그런데 카르나 님. 얘가 회귀 안 하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카르나티우스: 당연히 8 에르프네임의 시간은 지금 상태에서 그대로 흘러가게 되는 거지.]
[이르카: 끙, 골치 아프네요.]
[카르나티우스: 잘 설득하렴. 게다가 메르나랑 한 내기도 걸린 문제잖니?]
[이르카: 네. 알겠습니다.]
카르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나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왔다.
흑화한 회귀자 녀석이 가지고 있는 힘의 본질이 드래곤이라서 죽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만, 녀석이 다시 회귀하지 않겠다고 버티면 골치가 아파진다.
녀석의 소속은 8 에르프네임.
그를 설득해 7 아르카니아로 보내지 못한다면 이곳의 시간은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흘러가게 된다.
트리오스와 나머지 종족들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녀석만 딸랑 없앤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녀석이 없어진다고 해도 이 행성에 트리오스가 없어지든가 나머지 종족이 없어지든가 둘 중의 하나의 결말로 치달을 것은 뻔하다.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는 게 정상.
게다가 나중에 메르나 녀석에게 관리부실을 핑계로 이 행성을 빼앗아오려면 깔끔한 뒷마무리가 필요했다.
이래저래 녀석을 설득할 방법을 찾아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트리오스의 왕! 아르한이다! 누가 나를 대적하겠는가! 비열한 엘프들이여!”
“하! 더러운 잡종 새끼들도 왕이 있던가?”
“크큭! 남의 뒤통수 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더러운 나무의 사생아가 말이 많구나!”
“사생아? 감히! 네 놈이 뚫린 입이라고……!”
“비겁하게 신이 만든 장벽 뒤에 숨어있으면 안전할 것 같았더냐? 나는! 네놈들의 신마저 이긴 사내다!”
-와아아아!
-아르한! 아르한!
-더러운 엘프의 신 따위는 아르한님이 처단하셨다!
-개처럼 처맞고 도망간 신이 신이더냐!
아르한의 외침에 장벽 위에서 호통을 치던 엘프들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그러졌다.
동시에 울려 퍼지는 트리오스들의 광기 어린 환호성은 메르나 녀석이 얼마나 많은 녀석 앞에서 호기롭게 나섰다가 두들겨 맞았는지 잘 알려주는 증거였다.
실제로 메르나는 반신반요 즉, 엘프와 신의 혼혈이었으니까 트리오스 녀석들이 엘프의 신으로 생각할 만했다.
그때 눈알이 핏빛으로 물든 아르한이 이를 바드득 갈며 장벽 뒤에서 자신을 오시하고 있는 엘프들을 향해 외쳤다.
“크크큭, 네놈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 돌아왔다. 생살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빌어먹을 네놈들을 말이다! 내가 얻은 용의 힘 앞에 사라져라!”
말을 마친 아르한은 몸에서 검은색 마력을 줄기줄기 뽑아내기 시작했다.
이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진동하며 검은색 마력이 모두의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을 느낀 엘프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을 때 녀석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거기, 이름이 아르한이라고 했나? 나랑 얘기 좀 할까?”
“넌 뭐냐!”
“네가 두들겨 팬 놈하고 비슷한 놈?”
“크흣, 너도 관리자냐?”
“응, 뭐 그렇지.”
“여기는 내 세계! 너희들이 끼어들 곳이 아니다! 용의 힘 앞에 사라져라!”
“에이, 쓸데없이 힘 빼지 말지.”
나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을 때.
아르한이 날린 검은색 태양과도 같은 거대한 불덩이가 덮쳐왔다.
콰아아앙-!
검은 태양의 폭발 충격파에 진격을 위해 서 있던 강인한 육체를 가진 트리오스들이 모두 휘청일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땅을 휩쓸고 지나갔다.
검은 화염과 매캐한 연기가 치솟는 땅을 가리킨 아르한이 비릿한 미소를 지은 뒤 고개를 돌려 외쳤다.
“봤느냐! 이것이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을 없앨 내 힘이다! 더러운 엘프들을 없앨 내 힘이로다!”
“와, 왕이시여.”
“표정들이 왜 그러하냐! 어서 저 간악한 엘프 놈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공격을…….”
“뒤, 뒤…….”
파리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듯 입을 헤 벌린 채 뒤쪽을 가리키는 부하들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아르한이 그들보다 더 경악하며 외쳤다.
“어, 어떻게……!”
“응? 말했잖아. 쓸데없이 힘 빼지 말라고.”
“네, 네놈! 관리자가 아니구나!”
“응? 관리자 맞는데? 그리고 용의 힘? 네가 가진 그거 반쪽짜리잖아.”
“감히! 반쪽짜리라니!”
“잘 봐. 진짜는 이런 거야.”
팟-!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의 룬을 발동시켰다.
기하학적인 파란 문양이 허공에 떠오르고 우윳빛 파문이 퍼져나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돔이 생겨났다.
당황한 녀석이 불투명한 겉보기에는 유리 벽과 같은 공간 장벽을 미친 듯이 두들길 때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어때? 진짜 드래곤들이 쓰는 룬 마법을 본 소감이?”
“크흐, 진짜 드래곤이라… 날 죽이러 왔나?”
“그래.”
“후우, 역시 신들의 힘을 빌려서 과거로 돌아오니 다른 신들이 개입하는군… 죽여라. 복수를 마치지 못하고 죽는 게 원통하지만 내 힘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뭘 시작부터 죽여. 일단 대화를 나누자고. 대영웅이었던 네가 왜 이렇게 다른 종족들을 증오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거든?”
“그 엘프 반신에게 듣지 못한 모양이지?”
“응. 너한테 처맞은 것도 부끄러운데 그걸 얘기하겠니?”
“크큭, 너는 재밌는 관리자로군. 좋아 다 얘기하지.”
아르한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허심탄회하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한참 동안 설명했다.
녀석의 얘기를 듣자 왜 그렇게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하려 드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멸망의 위기에서 불구가 되는 장애까지 입어가면서 목숨 바쳐 세상을 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그와 그의 종족들이 세상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누명과 처절한 학살.
끔찍한 멸망의 위기에서 아내의 죽음을 대가로 겨우겨우 살려낸 아들의 목을 아르한의 눈앞에서 참수하고 비웃은 자들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이해가 되었다.
“…아무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목숨 바쳐 멸망의 위기를 막아내자 제1 종족으로 군림하던 엘프가 그 자리를 뺏길까 봐 두려워서 그랬다고 하더군. 정작 그 위기 때 저 장벽 뒤에 숨어서 구경만 하던 자들이.”
“그래서 저들에게 복수하려고 회귀를 했다?”
“그렇다.”
“그런데 회귀한 게 300년 전이라면서? 너 죽을 때는 300살은 아니었을 거 아냐? 멸망의 위기는?”
“허허, 신에 가까운 반신이라고 해도 모르는 문제가 있나 보군? 그대로 내버려 뒀더니 알아서 지나가더군. 물론 모든 종족이 절반 이상 죽었고 나 역시 큰 상처를 입어 치료하는 데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르한의 말을 듣자 더욱더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운명이란 그렇게 쉽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개입한 존재가 있다는 뜻.
누군가 이 행성을 지키려고 힘을 썼거나.
단순히 유희로 멸망의 위기를 던져주고는 이들이 해결하지 못하자 거둬갔을 가능성이 컸다.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어 계속해서 드는 의문을 떨쳐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든 아르한을 설득해 이곳을 떠나 요한과 함께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생을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인 아르한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나는 네 심정을 이해해.”
“웃기는군, 그대 같은 존재가 날 어떻게 이해한다는 거지?”
“사실, 난 지금 벌을 받고 있거든.”
“벌? 무슨 벌 말인가?”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난 한 세계의 황제 같은 존재였어. 지금처럼 관리자가 되기 이전에 말이야.”
“황제? 드래곤이라고 하지 않았나?”
“응, 맞아. 그래서 황제 같은 존재라고 했잖아. 뒤지기 싫으면 말 끊지 말아줄래?”
“…알았다.”
“아무튼, 세상에 닥쳐온 모든 시련을 내가 막아냈지. 그래서 세상을 구한 대영웅이 되었어. 너랑 똑같지?”
“방금 지어낸 것 같은데…….”
“아니거든? 아무튼, 잘 들어봐. 이제부터 재밌어지거든? 그 세계를 너무 사랑했던 나는 처절하게 배신당해. 가장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고 분노에 이성을 잃었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뭐, 정신을 차리니 내가 사랑하던 세계는 없어졌더라. 그때 남은 감정이 뭔지 알아?”
“당연히! 복수를 마쳤으니 후련했겠지!”
“틀렸어. 나는 살아있을 때 시공간을 다스리는 힘이 있었거든? 시간을 과거로 돌려보려고 했어. 그런데 내 힘으로는 안 되더라. 그래서 빨리 돌렸어.”
“빨리?”
“응. 드래곤은 혼자서 못 죽거든? 아무튼, 난 어렴풋이 회귀자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어. 그래서 어떻게든 돌아가고 싶었어. 그렇게 시간을 돌려 만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고 난 죽었지. 그 기간 내가 느낀 감정은 미칠 듯한 허무함, 공허함, 슬픔이었어.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을 봐. 내가 회귀를 했을 거 같니?”
“오히려 반신이 되었군…….”
“그래, 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어. 그러니까 너는 후회할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원래 공감대는 이렇게 형성하는 법.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 녀석이 있다면 이렇게 어르고 달래야 말을 듣는 녀석이 있다.
동질감을 느꼈을까?
아르한은 내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숙여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감정이 복받쳐 서럽게 울고 있는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서 내가 널 다른 세계로 보내려고 해. 이 세계는 너무 많이 파괴되었어. 다시 시간을 돌려놓으려면 네가 많은 선행을 해서 그 빚을 갚아야 해. 지금의 나처럼.”
“흐흑, 크응! 절 죽이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 나는 너한테 속죄할 기회를 주러 온 거야. 너도 이 세상을 사랑했잖아.”
근데 이 녀석 갑자기 존댓말을 하네?
설득이 통했는지 태도를 바꾼 녀석에게 마지막 말을 꺼냈다.
“난 이곳이 마음에 든다. 파괴되기 전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궁금해. 네가 한 성직자를 도와 다른 세상을 구원한다면 나 역시 약속할게. 이 세상을 과거로 돌려놓겠다고.”
“하겠습니다! 제 죄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큰 결심을 한 듯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요한 전용 수혈팩 아니, 아르한의 등을 토닥여주며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