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누가 보더라도 반할 것 같은 싱긋한 미소를 지은 성진아는 품에서 반짝이는 소원권을 꺼내 들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소원권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 트리스탄은 터져 나오려는 숨을 겨우겨우 들이켜곤 성진아와 소원권을 번갈아 바라봤다.
감정스킬로 확인해 본 결과 자신의 눈이 정확하다면 그녀가 들고 있는 소원권은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단번에 좀비 역병을 없애고 미국과 자신을 다시 한번 위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소원권이 눈앞에서 영롱한 자태를 드러낸 것.
긴장감에 숨을 크게 들이쉰 트리스탄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성진아에게 질문을 건넸다.
“성진아 헌터님이 원하시는 게 뭡니까? 미국으로 귀화? 어떠한 특혜를 바라고 그런 제안을 건네신 걸 텐데요.”
“간단해요, 저는 이 소원권을 주는 대신 제 지시만 따르는 헌터들을 보내주세요.”
“설마, 미국의 헌터들을 빼가겠다는 의미입니까?”
“완전히 가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쉽게 말해서 대여?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태연하게 말하는 성진아를 훑어본 트리스탄은 의외로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진아 헌터님.”
“네.”
“굳이 한국을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요? 미국의 품으로 오시죠. 당신같이 위대한 헌터에게는 위대한 나라가 어울리는 법 아니겠습니까? 미국처럼 헌터들 대우가 좋은 나라는 없어요.”
“틀린 말은 아니죠.”
“강태식 헌터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는 안전하게 당신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요.”
“좋은 제안이네요.”
성진아의 긍정적인 대답에 트리스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석이조(一石二鳥)라 했던가?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소원권을 얻을 정도로 비상한 능력이 있는 성진아.
그리고 지금 미국에 가장 필요한 소원권.
하나의 제안으로 두 가지 모두를 얻을 기회가 찾아온 것.
희열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트리스탄을 가만히 쳐다본 성진아는 소원권을 다시 품에 넣으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좋은 제안이지만, 거절할게요.”
“역시 저희 미국과… 네?”
“거절하겠습니다.”
“하, 하하.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죠?”
“네, 똑바로 들으셨어요.”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트리스탄은 표정을 단박에 굳히며 질문을 건넸다.
“왜죠? 미국의 힘을 못 믿겠다는 건가요?”
“아뇨, 미국의 힘을 믿으니 이런 제안을 하는 거죠. 그리고 제 협상 대상은 미국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성진아는 미국이 아닌 다른 곳과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웅크린 암호랑이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것과 같은 기운을 내뿜은 성진아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본 트리스탄이 다른 협상 대상에 대해 질문을 했다.
“중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중국뿐이겠어요? 인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등 그 어떤 나라와도 계약할 수 있죠.”
“그들에게는 성진아 헌터님을 지켜드릴 힘이 없습니다.”
“제가 말한 나라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트리스탄은 그녀가 열거한 나라들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했다.
좀비 역병? 수많은 고급 헌터들? 혹은 한국 근처에 있는 나라들?
계속해서 고민을 거듭한 트리스탄은 마침내 그녀가 말한 나라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허, S급 헌터 정도 되면 날아오는 핵무기를 피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 않나요?”
“세상 모든 인물이 헌터가 아닌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아시겠죠.”
“당신을 위해 한 나라가 핵무기를 발사할 것 같습니까?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미 세상은 혼돈에 잡아 먹혀있어요. 이 상황에서 누군가 그 혼돈에 조그마한 돌을 더 얹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죠.”
“그, 그건…….”
“긴장 푸세요. 제가 설마 멍청하게 강태식에게 핵을 쏴달라고 하겠어요?”
트리스탄은 자신이 점점 말려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무지 주도권을 잡아 올 수 없게 자신의 정신을 이리저리 휘두르는 성진아를 잠시 바라본 뒤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벽에 걸려있던 거울을 바라보며 호통쳤다.
“카메라! 녹음기! 다 끄고 다 나가 있어!”
-협, 협회장님 그건….
“당장 나가라는 소리 안 들려!?”
그녀와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을 모두 내보낸 트리스탄이 한숨을 내뱉은 뒤 말을 건넸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하시죠. 듣는 놈들은 없으니.”
“천장에 붙어있는 사람도 좀 떼주시겠어요?”
“……!”
“보디가드인 것 같은데 이 얘기는 협회장님과만 나누고 싶답니다.”
“아, 알겠습니다.”
트리스탄은 식은땀을 흘리며 위에서 밀착 경호를 하던 S급 헌터에게 나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긴장감 때문일까? 트리스탄은 오늘따라 유난히 꽉 조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넥타이를 풀고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성진아에게 말을 건넸다.
“후, 예리하시군요. 최상급 암살자의 기척까지 알아차리시다니.”
“저보단 약하니까요.”
“……!”
트리스탄은 경호원을 괜히 돌려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전투능력을 잃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랬다면 소원권을 얻어오지 못했겠죠.”
“허허, 이거 정보부 녀석들을 혼쭐내야겠군요. 아무튼, 사설은 그만하고 본론을 말씀해주시죠.”
“첫 번째 조건은 같아요. 미국 헌터들의 한국 지원.”
“그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규모는 어느 정도 생각하십니까?”
“대대급 규모면 좋겠군요.”
보유 중인 헌터들의 숫자가 1개 사단에 가까운 미국의 사정상 일개 대대급 규모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두 번째 조건은 조금 힘들겠지만 가장 중요해요. 강태식이 도망친 나라에 핵을 떨어트려 주세요.”
“……!”
그녀의 미친 요구에 트리스탄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 * *
팝콘을 씹으며 성진아의 말발을 구경 중이던 안젤라가 힘없이 콜라를 바닥에 떨어트리고는 트리스탄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 이르카 님? 쟤 미친 거 맞죠?”
“자, 잠깐만… 나도 지금 생각 중이거든?”
물론 나 역시 안젤라와 같은 표정이 되어있었다.
저런 요구는 상상도 못 했는데?
그녀의 대화를 지켜보던 신들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펴봤다.
[대천사들이 격노하며 당장 천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합의 대천사 가브리엘이 친히 강림하겠다며 고래고래 소리 지릅니다.]
[지옥의 군주 사탄이 가브리엘을 노려보며 자신도 강림하겠다고 엄포합니다. 성진아를 응원하며 5만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가브리엘이 사탄을 노려봅니다.]
[전쟁의 신 아레스와 티르가 흥분된 표정으로 3차 세계대전을 기대합니다.]
[명계의 주인 하데스와 헬라가 끊임없이 몰려올 망자들의 처리는 어떻게 하냐며 한숨을 내쉽니다.]
[대악마들이 재밌는 구경을 하겠다며 5만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조용히 채널에 보이는 메시지창을 닫았다.
지금 무슨 변명을 하든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
개판 오 분 전이 된 상황을 보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튀어나왔다.
내가 생각한 그녀의 행동 중 최상은 미국과 협상을 해서 헌터 병력을 빼 오는 것이었고 실제로 협상을 그렇게 진행했다.
한국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치료제로 좀비 역병을 없앤 뒤 강태식을 압박하면 자연스레 주도권을 자신이 쥐게 되니까.
또한, 이번에 많은 헌터가 사망했기에 방어의 공백을 막기 위해 힘을 빌려올 나라로 미국을 택한 것은 최상의 선택이었다.
가까운 나라보다 먼 나라의 힘을 빌리는 건 어떻게 보면 기본 중 기본이었으니까.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강태식이 도망친 나라에 핵을 떨구는 것.
아직 인류가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에 수많은 민간인이 죽을 것이고 당연히 신들은 분노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녀의 이미지가 한쪽으로 굳어 버리는 것.
지금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 해왔기에 많은 포인트를 벌어들일 수 있었지만 이제 선 성향의 신들에게서는 포인트를 얻지 못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답답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안젤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괜찮을까요?”
“아니.”
“역시 신들의 분노가…….”
“응? 그게 왜?”
“네?”
“저렇게 되면 이미지가 너무 한쪽으로 굳어 버리잖아. 사실, 대천사나 선 성향의 신들이 후원해주는 포인트도 많았는데…….”
그때, 마치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 같은 서늘한 기운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말끝을 흐렸다.
역시나, 고개를 돌리자 안젤라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날 노려보며 베일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르.카.님.”
“으, 응?”
“포인트가 그렇게 중요해요?”
“내 말을 잘 들어봐. 성진아 씨가 포인트를 많이 벌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좋은 스킬도 사고 좋은 장비도 사고 그래야 강태식을 이기지.”
“왠지 변명 같은데요?”
“아닌데?”
“맞는데?”
“…말이 좀 많이 짧은 거 같은데?”
“흥! 아무튼! 쟤 내버려 둘 거예요? 이르카 님 이미지도 안 좋아진다고요!”
“내가 안 좋아질 이미지가 있었…….”
“있으니까! 당장 어떻게 해봐요!”
안젤라는 화가 단단히 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과연 그녀가 원하는 것을 크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선 성향의 대천사와 신들.
악 성향의 대악마와 신들.
이 둘을 모두 만족하게 하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때 번개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묘안이 떠올랐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에 주먹을 내려치며 혼잣말을 내뱉고는 트리스탄을 설득 중인 성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대피사이렌. 제발.]
제발 이 말 하나로 그녀가 이 상황을 이해하길 바라며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성진아가 아리송한 눈빛으로 메시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 트리스탄이라는 미국의 협회장이 조심스럽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아무래도 핵을 직접 떨구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이건 세계의 질타를 받는 것은 물론 3차 세계대전까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음… 그럼 이렇게 하죠.]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핵을 투하할 지역에 미리 경고하는 겁니다. 제 목적은 민간인의 학살이 아닙니다.]
[미리 대피를 시키자? 이 말씀입니까?]
[네, 강태식에게 제 경고이자 제게 힘을 빌려주신 위대한 미국의 경고라는 걸 알리는 거죠.]
[헛, 흠.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군요.]
[네, 강태식을 받아들이면 미국은 언제든지 그 나라를 공격하겠다. 선언하는 거죠.]
[그런 조건이라면 괜찮겠군요.]
[역시, 이해해 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기나긴 협상을 마친 성진아가 환하게 웃으며 트리스탄에게 손을 건넸다.
트리스탄 역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성진아의 손을 잡으려 일어났을 때였다.
슈욱-!
그림자로 변한 성진아가 트리스탄의 뒤에 다가가 칼을 목에 들이대고는 조용히 속삭였다.
[제 표식을 남겨뒀어요. 이건 S급 헌터들도 제거할 수 없죠.]
[이, 이게 무슨 짓이요!]
[일종의 보험이에요. 그리고 이 표식이 있는 한 저는 언제든지 협회장님을 죽일 수 있답니다?]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요!]
[쉿,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다른 나라와도 이런 협상을 할 수 있어요. 급한 건 제가 아니니까요.]
[이러면, 내가 협상 내용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도 있소! 그대가 가진 사악한 계획들을 공개한다는 말이오!]
[말하셔도 상관없어요.]
[뭐, 뭐라고?]
[사실, 구두계약만으로 소원권을 넘기는 건 좀 아니잖아요? 제가 손해 보는 장사인걸요? 이건 제 조건을 다 들어주시면 없애 드릴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이런 걸. 목에 달고! 거, 걱정을 안 하게 생겼소!]
[저. 사람 죽이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
미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애가 회귀한 첫날부터 한 국가의 수뇌부를 박살 내버리고 다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한 트리스탄과 매력적인 눈웃음을 치며 그를 바라보는 성진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진짜 악마들이 보고 배울 점이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