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성진아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안젤라가 탄성을 내질렀다.
“와, 저거 위험하지 않아요?”
“조금 위험하지. 너무 빨라.”
“마음이 급한 걸까요?”
실제 그녀는 뭔가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이 조급하게 행동했다.
이제 맞붙기 시작한 보스와의 전투가 치열해질 때 뒤쪽에서 지원을 해주던 치유계 헌터들을 사냥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글쎄, 뒤쪽에 있는 애들을 먼저 처리하는 건 당연한 선택이긴 하지… 근데 아직 저기서 날뛰고 있는 보스의 힘을 빼기 전이잖아.”
“왜 저렇게 급한 거지? 평상시랑 너무 다른데요.”
“뒤가 없잖아. 아마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강태식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서 그런 거 아닐까?”
“그쵸, 어? 쟤 뭐 하는 거야?”
안젤라의 놀란 듯한 말투에 다시금 거울을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다.
성진아는 아무도 모르게 치유계 헌터들에게 다가가 발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림자 속박을 걸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강태식과 그의 친위대에게 지원을 해주던 치유계열 헌터들은 물론 그 주변을 지키던 전투계열 헌터들도 그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의 발목을 잡은 성진아는 다시 주문을 외우는 듯 푸르게 빛나는 안광을 잠시 발하고 멀리 떨어져 있던 원거리 무기를 든 헌터들에게 다가갔다.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강태식의 일행들과 보스 사이에 조그마한 틈이 발생할 때마다 마력탄과 마력화살을 날리던 그들의 곁에 다가간 성진아는 재장전을 하고 숨을 고르던 그들의 숨을 영원히 끊어주기 시작했다.
“지원사격을 할 수 있는 애들부터 노린 거였구나. 그런데 처음에 왜 치유계열 헌터들한테 간 거예요?”
“음, 그림자 속박 기술이었으니까 들켰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아닐까?”
“어차피 강태식은 지금 정신없잖아요? 그런데 왜….”
“강태식이 성진아가 올 것을 인지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좀 빨리 말해봐요.”
투정을 부리듯 입술을 삐죽이 내민 안젤라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주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치유계열 헌터들이 도망치면서 지원이 끊겨봐? 강태식이 바로 알아차리겠지.”
“그러네요? 그렇다면 설마?”
“응, 호위 병력부터 없애고 뒤늦게 자신들의 발이 묶였다는 걸 깨달은 치유계열 헌터들을 협박할 거야. 계속 지원을 하라고.”
이것도 추론이긴 했지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발이 묶인 치유계열 헌터들은 성진아에게서 도망치지 못한다.
주변의 호위 병력을 먼저 없애는 작업을 할 때, 혹시라도 치유계 헌터들이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아차려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게다가 보스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강태식은 자연스레 지원이 계속 들어온다면 성진아가 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성진아의 협박과 강태식과 그 친위대를 도와야 하는 치유계열 헌터들은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지원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는 서서히 지원을 끊으며 강태식의 힘을 최대한 빼놓을 사악한 계획일 가능성이 컸다.
안젤라는 설명을 다 듣자마자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와, 완전 악마네요.”
“뭐, 사탄 님이 감탄할 정도면 악마보다 더 심하다고 봐야지.”
“이르카 님 같이요?”
“응?”
“회귀자 등쳐 먹는 건 이르카 님이 제일 잘하시는 일이잖아요.”
“에이, 그래도 이렇게까지 세심하게 관리해주는 관리자가 어디 있어? 다른 놈들은 그냥 던져놓고 알아서 해라! 이런 경우가 더 많잖아.”
“흐흫, 그건 그렇죠.”
이상하게 웃는 안젤라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질문을 건넸다.
“아, 아무튼! 이번에 크게 이득을 보겠네요.”
“그래, 아마 최종 보스의 숨통을 직접 끊는다면 성진아는 두 가지 이득을 얻을 거야.”
“두 가지요?”
“응, 첫 번째는 소원권. 최종보상이니까 당연히 성진아가 가져가겠지.”
“그럼 두 번째는요?”
“두 번째는 강태식의 추락.”
“추락이요?”
안젤라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의문을 해결해주기 위해 대답했다.
“응, 강태식은 힘들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최종 보스를 이길 거야.”
“그럼 첫 번째가 성립 안 되잖아요?”
“서로의 힘은 용호상박 아니, 사실 호랑이 따위는 한주먹거리도 안 되니까 그냥 비슷하다고 보면 서로 막타만 남겨놓고 엄청나게 지친 상태겠지.”
“그때 뺏는다?”
“그렇지, 그러면 첫 번째는 자연스럽게 해결이지?”
“그러면 두 번째는요? 아직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강태식은 소원의 탑을 클리어하겠다고 많은 헌터들을 꼬셔서 데리고 갔어. 그런데 병력도 잃고 소원의 탑 클리어에도 실패했다? 이러면 어떻게 될까?”
“반발이 엄청나겠네요, 아직 한국은 좀비 역병이 한창이라 병력이 안 그래도 달리니까요.”
“그래, 이건 내 추측인데 강태식이 실패하고 난 뒤에 성진아가 좀비 역병 치료제를 내놓는다? 그러면 게임 끝이지. 강태식이 다른 나라로 귀화하지 않는 이상 말이야.”
“성진아 씨는 소원권을 얻은 다음에 무슨 소원을 빌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소원 같은 건 불가능한데…….”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지.”
“에이, 뭔가 짚이는 거 있으시죠?”
“이번엔 나도 진짜 모르겠는걸?”
배시시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싶은 방법은 있었지만, 성진아가 그런 방법까지 떠올릴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
일단 지금 가장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마법 보따리를 열어 성진아가 최종 보스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데 필요한 물건이 없나 찾기 시작했다.
최종 보스는 화암(火暗) 복합속성.
불행하게도 성진아는 녀석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단이 거의 없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스킬들의 속성이 어둠인 암(暗) 속성에 가깝기 때문.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도 숨을 끊어놓지 못한다면 역으로 강태식을 도와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한참을 뒤져보고 있을 때 가장 그녀와 가장 안 어울리면서도 잘 어울릴 것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상점창에 그것을 띄워놓고 안젤라에게 질문을 건넸다.
“안젤라, 이거 성진아 씨가 사용하면 어떨 거 같아?”
“왠지 그분 성격상 성진아 씨가 이거 쓰면 천벌 받을 거 같은데요?”
“안 받을걸? 그분이 후원도 해주셨으니까.”
“진짜요? 그럼 한번 여쭤보는 게 어때요?”
“그럴까?”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메시지를 보내야 하기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숨을 차분히 가라앉히고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여쭤볼 게 있어서 연락 드렸는데요, 지금 바쁘신가요?]
[가브리엘: 바쁘지 않단다. 내게 어떤 일로 연락했니?]
[이르카: 다름이 아니라… 가브리엘 님의 물병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요.]
[가브리엘: 그걸 왜 허락 맡니? 필요하면 그냥 사렴. 아니지? 너 얼마 전에 사 가지 않았니?]
[이르카: 그, 그랬죠. 그걸 저랑 계약한 사람이 쓰려고 하는데요.]
[가브리엘: 누구?]
[이르카: 4지구의 성진아 씨요.]
[가브리엘: 아~ 지금 소원의 탑에서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있는 그 성진아 말이니?]
큰일 났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뭔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
대천사나 대악마의 물건은 그들의 허락이 없이는 회귀자가 쓸 수 없는 물건 중 하나였다.
짧은 시간 동안 수광(水光) 속성을 부여해주는 가브리엘의 물병은 최종 보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가브리엘이 사용을 허락을 해주지 않는다면 무용지물.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르카: 하하하! 제 채널을 보고 계셨군요! 계속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브리엘: 요즘 가장 즐겨 보는 곳이잖니,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고통받고 죽어 나가는데 내가 안 지켜볼 이유가 있니?]
말투를 보아하니 확실히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아니, 화가 단단히 난 게 확실하다.
이걸 어떻게 타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메시지가 재차 날아들었다.
[가브리엘: 뭐, 이유가 있는 행동이니까 이번에는 용서해줄게. 사실 그녀가 악한 행동만 하는 건 아니니까.]
[이르카: 가, 감사합니다!]
[가브리엘: 다만, 앞으로 많은 사람을 학살한다면 그 물건은 영원히 사용 금지야.]
[이르카: 성진아 씨만 말이죠?]
[가브리엘: 그래.]
[이르카: 감사합니다!]
[가브리엘: 이번에는 특별히 선물도 넣어줄 테니까 잘 사용해봐.]
[이르카: 아이고, 무슨 선물까지 주셨습니까? 감사하게 쓰겠습니다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치유계열 헌터들을 협박하고 있던 성진아에게 상점창을 열어줬다.
아마 이 물건이 맨 위에 올라간 걸 보면 그녀도 뭔가 알아차릴 것이다.
* * *
강태식의 공격대 소속 치유 헌터 차태준은 지금, 이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았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각양각색의 자세로 쓰러져있는 전투계열 헌터들과 자신의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댄 검은색 일색의 암살자가 있었기 때문.
“뭐, 뭘 원하시는 거요?”
“목이 잘려도 살아남는지 시험해보고 싶지 않다면 저들을 지원해라.”
남자인지 여자일지 모를 기괴한 목소리.
마치 전자 기계로 변조한 것 같은 이질적인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공포에 떨던 차태준은 용기를 내 말을 건넸다.
“이, 일이 끝나면! 나, 나도 죽이려고 하는 것 아니오!”
“죽고 싶으면 얼마든지 죽여주지, 널 대신할 놈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니 죽고 싶다는 게 아니라…….”
괜한 질문을 했음을 깨달은 차태준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자신이 담당하던 친위대가 걸린 속박을 해제했다.
그때, 암살자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더니 차태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지원을 끊어. 지원하는 순간 넌 죽는다?”
“…지, 지원을 끊으면 저분이 죽…….”
“그럼, 대신 죽을래?”
마치 동네 슈퍼에 담배 심부름이라도 시키는 것처럼 태연하게 대답하는 그의 말에 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원하던 손길을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찢어지는 것 같은 친위대의 비명이 거대한 탑 내부에 울려 퍼졌고 차태준은 차마 그 장면을 보지 못하겠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퍽-!
목덜미를 가격해 차태준을 기절시킨 성진아는 다음 치유계 헌터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난 약속대로 죽이진 않았어. 보이지? 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그렇소.”
“자, 이번엔 네 차례야.”
그렇게 하나둘 강태식의 친위대가 쓰러져 내리고 난 뒤.
강태식은 치유 헌터들에게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그년인가?’
성진아가 와서 일을 그르친 것이 분명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강태식은 계속해서 덤벼드는 최종 보스를 바라보며 마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미완성인 데다가 너무 큰 위력의 기술이기에 다른 헌터들이 휩쓸릴까 봐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기술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
‘어차피 생존자는 없다. 그년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엘릭서 하나 빨고 말지.’
그 기술을 쓰게 된다면 강태식 또한 빈사 상태가 된다.
하지만 성진아 역시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믿은 강태식은 미완성의 SS급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 이 힘은!
“다 뒈져 버려!”
놀란 최종 보스가 방어를 마치기 전.
하늘에서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검들은 아름다움 속에 가려진 치명적인 일격을 그에게 가하기 시작했다.
콰앙-! 콰과광-!
탑을 부숴버릴 듯 떨어져 내리는 검과 눈이 부신 하얀 빛이 맹렬히 폭발하는 것을 바라본 강태식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성진아가 무슨 수를 써도 못 막는 일격이었고 그녀가 끼어들 틈 따위는 주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최종 보스를 처리하면 바로 손에 나타나야 할 소원권이 나타나지 않았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다 죽어가는 성진아의 목소리가 강태식의 귓가에 천둥처럼 울렸다.
“고, 고맙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너, 너! 커헉!”
충격이 너무 컸을까? 몸을 부들부들 떨던 강태식은 피를 한 움큼 토하고는 이내 까무러쳤다.
성진아는 최종 보스의 머리통과 찬란하게 빛나는 소원권을 손에 쥔 채 입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치며 기절한 강태식을 향해 비웃듯 말했다.
“이건… 끄흡! 잘 쓸게 병신아. 아, 기절해서 못 듣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