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번에는 성진아가 어떤 짓을 저지르려 하려는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화산을 이용해 탑에 진입한 헌터들을 매몰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와이의 킬라우에아 화산이 폭파한다 해도 소원의 탑의 내구성을 생각하면 큰 흔들림만 줄 수 있을 뿐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었고 화산폭발에 그 비싼 포인트를 투자할 만한 가치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과연 그녀는 무슨 생각일까?
의문에 가득 차 거울로 그녀를 지켜보니 그녀는 애타게 상점창이 다시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움직임.
“에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지만 어쩌겠는가?
어떤 기발한 묘책이라도 떠올랐으니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것일 터.
골머리를 썩이게 한 적은 있어도 실망하게 한 적은 없기에 그녀의 생각을 믿어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그녀가 알아보기 쉽게 해놔야 하기에 마법 보따리를 열어 물품 정리를 시작했다.
[스킬북][광룡강천][S] - 품절
[소모품][상급 엘릭서][S] - 품절
[스킬북][용암분출][S] - 15,000P
[소모품][지각분열제][A] - 5,000P
[소모품][얼음 속 불][S] - 15,000P
[장신구][헤카데의 신발][A]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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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물품 사이에 화산폭발에 필요한 스킬북과 소모품을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필요한 분신술 스킬을 찾아 맨 위에 올려놓은 뒤 다시 상점창을 열어줬다.
다시금 상점창이 열리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스킬북과 소모품을 마구 구매하기 시작하는 성진아를 지켜보자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마지막으로 최상급 그림자 분신 생성 스킬북을 구매한 그녀가 상점창을 이용해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것을 확인한 뒤.
부엌에서 방금 우린 차향을 맡고 있던 안젤라를 불렀다.
“안젤라.”
“네?”
“만약에 말이야. 소원의 탑 근처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성진아가 얻는 이득이 뭘까?”
“또 뭐 하려고 해요?”
“응, 뭔가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감이 안 잡힌단 말이야.”
“하와이면 지구에 있는 그 섬 말하는 거죠? 결혼하고 여행하러 많이 가는 곳.”
“응. 강태식이 말한 소원의 탑이 나타난 곳이기도 하지.”
“그건 알거든요?”
“……?”
맞는 말을 했음에도 생뚱맞게 날 노려보는 안젤라를 멀뚱히 쳐다봤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눈싸움을 걸어오면 받아주는 게 인지상정.
안젤라의 초롱초롱한 녹색 눈을 사정없이 노려봤다.
이내 부릅뜬 눈이 충혈되기 시작한 안젤라가 참기 힘들었는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를 빽 질렀다.
“에이 씨! 또 졌어.”
“어허! 감히 날 이기려 들다니 무엄하도다. 날 이기려면 백만 년은 이르니 더 연습하고 오거라.”
“뉘에뉘에. 알겠습니다요.”
혀를 길게 내밀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안젤라에게 승리의 미소를 지어주며 다시금 질문을 건넸다.
“이제까지 그녀가 했던 행동들은 상식…을 거부하는 짓이긴 했어도 이해가 가는 행동들이었거든? 근데 이번 일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음… 제 생각에는 지금 이걸 어떻게 이용하려 하냐면…….”
“잠깐!”
안젤라가 대답하기 전 수상쩍은 기운이 느껴지는 지붕을 노려봤다.
녀석이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은밀함.
헤라클레스 녀석 감히 도청을 시도해?
나도 그리 떳떳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도청까지는 안 했다.
이건 상도덕을 심각하게 넘어선 수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올라와 문을 박차고 나갔다.
파밧-! 팟-!
내가 나가자마자 빛과 같은 속도로 도망치는 녀석을 향해 외쳤다.
“내 명하노니! 그 자리에 멈춰-라!”
움찔-!
언령마법과 룬마법을 섞어 속박마법을 발현하자 나타난 붉은색 마법의 사슬은 녀석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렸고, 당황한 녀석이 도망치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먹고 들어간다.
하물며 이곳은 내게 할당된 중간계.
이곳에서 내 힘을 이길 수 있는 반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가 그가 쓰고 있던 검은색 복면을 벗기며 외쳤다.
“넌 뒤졌어! 헤라클레… 너 뭐냐?”
“이, 이르카 잠깐 진정 좀 할래?”
“진정하고 자시고 메르나 넌 왜 여기서 엿듣고 있던 건데?”
복면인의 정체는 다른 관리자인 메르나.
지금 헤라클레스와 내가 4지구에서 벌이는 경쟁과는 전혀 상관없는 존재였다.
아, 물론 내가 진다면 그녀가 2등으로 올라가니 아예 상관없다고는 못하지만.
턱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대답 안 할 거야? 내 얘기를 엿들어서 헤라클레스한테 말하려고 했다고 카르나 님한테 보고할까? 징계 좀 먹어볼래?”
“안 엿들었어!”
“얼레?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와! 어이가 없네, 지금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거냐?”
“아, 아니라고!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왔던 거라고!”
“무슨 부탁?”
“악성 계약 하나만 처리…….”
“장난하냐? 내가 한가해 보여?”
“포, 포인트 줄게!”
“나도 포인트 많거든? 이번 달 수입도 너보다 짭짤했는데 무슨 헛소리? 그리고 너랑 나는 엄연히 경쟁 관계야 내가 도와줄 이유가 있을 리 없잖아?”
실제로 헤라클레스나 메르나나 모든 관리자는 나와 경쟁 관계에 있다.
반신인 관리자가 진정한 신으로 선발되는 것은 천 년에 단 한 명뿐.
그 천금과 같은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아무리 친해도 악성 계약을 처리해달라는 걸 도와줄 필요는 없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메르나가 뭔가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카, 카르마도 넘겨줄게!”
“네 똥은 네가 알아서 치워라. 나도 바쁘다.”
“추가로 0.5%!”
“뭐?”
“이것만 처리해주면 0.5% 더 얹어줄 게 어때?”
0.5%의 추가 카르마라면 조금 고민이 되는 수치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그녀를 보니 뭔가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진 모양.
하지만 내가 손해를 보는 일은 못 하지.
“0.5%가 뭐냐? 쩨쩨하게. 깔끔하게 1%로 자르지 그래?”
“1, 1%라고!?”
“싫으면 말든가. 아, 물론 내 얘기를 엿들으려 한 죄로 카르나 님한테 보고할 거야.”
1% 정도면 움직여줄 만하다.
메르나가 계약한 놈이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최소한 내가 계약한 놈들만큼 또라이는 아닐 테니.
“할 거야? 안 할 거야?”
“…너, 너 이 씨!”
“욕하면 바로 보고한다?”
“…해줘.”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해주세요…….”
메르나는 울먹이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급하긴 급한 내용인 것 같아서 환한 영업용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말했다.
“메르나,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지?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면서 우리 계약에 관해 얘기해볼까?”
“너 진짜…어휴 말을 말자.”
투덜대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 앞에는 혹시 싸움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안젤라가 내게 붙잡혀 오는 메르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 외쳤다.
“엥? 메르나 님?”
“안젤라 안녕.”
“저희 얘기를 엿듣던 게 메르나 님이셨어요? 왜 그러신 거예요?”
“안 엿들었어!”
“어허, 소리는 치지 말고.”
입을 꾹 다문 메르나는 소파에 앉아서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불안에 떠는 그녀를 위해 안젤라가 차를 가져오고 난 뒤 골치 아픈 악성 계약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떤 놈이랑 한 계약이야? 아니 어디 행성이야?”
“8에르프네임, 300년 전에 한 계약이야.”
“300년? 그럼 그동안 회귀를 몇 번이나 한 건데?”
“한 번도 하지 않았어…….”
“설마 엘프냐?”
얘기를 들으니 조금 의문이 생겼다.
메르나가 한 악성 계약은 인간은 확실히 아니었다.
수명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고 300년이나 사는 인간은 없으니까.
과연 어떤 놈이랑 계약했는지 궁금해졌을 때 메르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니, 인간이야.”
“뭐?”
“사실 어떻게 된 거냐면…….”
메르나가 구구절절 그 인간과 계약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영웅이었던 그가 회귀하고 나서 대악당이 되었다는 얘기부터 자신의 신체에 괴물들의 변이 인자를 집어넣어 반 괴물이 된 사연까지.
“그런데 이건 직접 강림하면 되는 문제 아냐? 두들겨 패면 되는 거잖아.”
“…강림했지.”
“설마 처맞았냐?”
“에이 씨. 강림했을 때 제약이 있는데 심장을 드래곤 하트로 바꾼 놈을 어떻게 이겨.”
“뭐?”
“그 미친놈이 제 심장에 드래곤 하트를 처박았다고.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고.”
“카르나 님한테 보고는 당연히 하지 않았을 거고.”
“너라면 하겠냐?”
하긴, 카르나 님한테 이런 걸 보고했다가는 거의 몇백 년 동안 시달릴 테니 그녀가 지레 겁먹고 하지 않은 게 이해는 갔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녀에게 새로운 계약을 제시했다.
“이거 계약을 새로 해야겠는데?”
“해줄 거야?”
“응. 대신 카르마 2% 내놔. 포인트도 좀 두둑하게 챙겨주고.”
“도둑놈 같으니, 헤라클레스한테 간다?”
“걔가 해줄 거 같아? 당연히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나한테 온 거 아냐?”
“2%의 카르마라면 걔도 해줄 거거든!”
“에이, 명색이 반신인데 구라는 치지 말자. 걔 성격 뻔히 알면서? 그럼 헤라클레스한테 가든가.”
“…….”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메르나를 쳐다봤다.
역시, 헤라클레스한테 가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는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그녀에게 계약서를 내밀며 말을 건넸다.
“자 그럼 계약부터 하자고. 아, 그전에 너 창세신께 맹세코 내 얘기 엿듣지 않았어?”
“어? 어… 사실 무슨 얘기를 하나 궁금해서 들으려고 했는데 하나도 안 들리던데?”
메르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대화를 엿듣는 것 따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
계약을 마치고 메르나를 돌려보낸 뒤 카르나티우스 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카르나 님. 제 사무실 주변에 결계 쳐놓으신 건가요?]
[카르나티우스: 응, 헤라클레스랑 공정한 대결을 하기로 했잖니. 당연히 엿듣는 사람은 없어야지.]
[이르카: 카르나 님은 지금 일 다 들으셨겠네요?]
[카르나티우스: 어머, 그게 그렇게 되니? 듣기는 들었단다. 뭐, 나는 신경 쓰지 마렴.]
[이르카: 그러면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지금 메르나랑 한 계약 문제없는 거 맞죠?]
[카르나티우스: 문젯거리가 될 건 없단다. 어차피 관리자 간의 계약을 건드릴 이유도 없고, 근데 내 만두는 언제 가져올 거니?]
[이르카: 어? 만두… 안 가져갔나요?]
[카르나티우스: 응, 뭐 편할 때 가지고 오렴, 만두는 그냥 심부름시킨 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4지구 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뿔싸.
메르나와 계약을 하고 신경을 못 쓰는 사이에 성진아가 무슨 일을 벌인 모양.
카르나 님에게 나중에 찾아간다고 전하고는 빠르게 4지구를 비추는 거울을 켰다.
콰앙-! 쾅!
자연 광경이 너무나 아름답던 하와이가 붉게 물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 듯이 폭발하고 용암을 내뿜고 있는 킬라우에아 화산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신혼부부의 성지라고 불리던 하와이섬 전체를 뒤덮은 용암과 화산재를 보고 마음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 헬기를 탄 리포터가 쉴 새 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지금 보시는 모습은 킬라우에아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킨 하와이의 모습입니다. 익명의 제보로 화산이 대폭발한다는 것을 알려와서 민간인들은…….]
리포터의 멘트 중 민간인 사상자 제로라는 문구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줬다.
익명의 제보자는 분명 성진아일 것이다.
과연 그녀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져 소원의 탑 내부를 들여다봤다.
절규하는 강태식과 그가 이끄는 헌터들이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비쳤다.
[이, 이게 왜 여기서 나와!]
[타, 탑이 흔들려서 그런 것 같습니다!]
[미친! 왜 8층에 있어야 할 놈들이 여기까지 기어 내려온 거냐고!]
[저게 8층에서 나오는 녀석들이었습니까? 야, 민석아! 피해!]
[…강화계 헌터들은 어떻게든 막아! 치유계 헌터들은 계속 앞에서 막는 애들 치유해주고!]
[대장!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 것 같습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비켜! 내가 간다!]
쿠어어억-!
꺼져!
끄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알!
이런 씨팔! 민석아!
콰직-!
내가 간다! 물러서지 마라!
들끓는 열기와 흔들림에 다급하게 몰려 내려온 괴물들 덕분에 소원의 탑 내부는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단단한 진형을 짜서 천천히 전진하려던 강태식의 계획이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이 몰려온 덕분에 모조리 물거품 된 것.
게다가 상위층에서 등장해야 할 괴물들의 난입은 강태식에게 크나큰 골칫거리를 선사했다.
마치 게임으로 치면 주인공이 초반부터 최종 보스와 마주한 상황과 비슷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숨어서 그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는 성진아를 바라보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