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차마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뜨거운 용암 물을 튀기며 도망가는 불의 정령들을 가리키며 이스마엘에게 질문했다.
“너 설마? 쟤들한테 전부 다 들이댄 거야?”
“에이, 설마 전부 다 그랬겠습니까? 소환할 수 있는 정령에게만 대시했습니다.”
“너, 정령왕 빼고는 다 소환할 수 있잖아?”
“당연하죠. 저 명색이 대정령사입니다.”
“그래. 그럼 쟤들한테도 다 들이댔다는 거네?”
“하루에… 정령소환을 100번 했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요?”
“그냥 죽자.”
“……!”
풍덩-!
녀석을 용암에 처박은 뒤.
끔찍한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도망가는 정령들을 바라봤다.
얼마나 들이대고 결혼해달라고 졸랐으면 소환거부까지 했을까?
“꼬로록! 사, 살려! 꼬로록!”
“그냥 죽어.”
“사, 사람 사, 살려!”
이스마엘의 숨이 막히기 전 녀석을 꺼내줬다.
용암에 푹 전 녀석을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나왔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눈이 좀 이상한 정령이 있길 바라야지.
“이스마엘아.”
“넵. 이르카 님.”
“지금 여기가 어떠냐?”
“휑하네요.”
“그치? 다 너 보고 도망가서 휑하지?”
황량한 주변을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뜨거운 용암에 몸을 지지던 불의 정령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이스마엘 녀석을 보자마자 도망간 정령이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 녀석이 툴툴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상급부터 하급 정령들은 너무 까탈스러운 것 같습니다. 제 마음도 몰라주고요. 혹시 정령왕님을 만나면…….”
“그래? 정령왕이랑 미팅 주선해줄까?”
“가, 가능합니까!”
“가능은 하지. 근데, 불의 정령왕은 남잔데?”
“그렇다면 물의 정령왕님은요?”
“걔는 여자.”
“이쁩니까?”
“보통 착하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에이, 정령인데 착하겠죠.”
“말 돌리지 말고. 근데 여기서 걔가 너 죽이려고 들면 내가 너 못 지켜준다?”
“정령왕님과 미팅을 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진짜? 그럼 특수 계약서부터 쓰자.”
“네?”
“특수 조항이니까 계약해야지. 그럼 그냥 보내줄 줄 알았어?”
상점창을 열어 2만 포인트짜리 특수 계약서를 구입했다.
특수한 조건이 있을 때 양측 동의하에 수정할 수 있는 더럽게 비싼 특수 계약서.
많은 내용을 수정할 수 없고 정말 특이한 조건이 있을 때만 쓸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사용할 수 있다.
얼마 전 나를 찾아와 회귀를 거부했던 검성 같은 경우에는 특수 계약서를 써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기에 안 써준 것이지만.
지금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정령계를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스마엘은 다르다.
처음 계약조건을 바꾸지 않아도 되기 때문.
포인트가 아까워서 피눈물이 흘러 내리는 듯했지만, 포인트는 주가 아니라 부.
포인트와 카르마를 바꿀 수 있다면 무조건 바꾸는 게 이득이다.
물론, 아깝긴 더럽게 아까웠지만.
신의 붓으로 특수 계약서에 수정 조건을 적어 내려가자 환한 빛과 함께 글씨가 빛났다.
이제 녀석의 동의 서명만 있으면 된다.
특수 계약서를 건네주며 말했다.
“수정한 계약조항이다. 읽어 보고 서명해.”
“넵.”
수정된 계약조항을 물끄러미 읽은 녀석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질문을 건네왔다.
“저, 이르카 님 이거 정상적인 거 맞죠?”
“당연한 거 아냐?”
“뭔가 이상한데요?”
“네 정신상태가 이상하겠지.”
“아닌데… 아, 제 정신상태가 이상한 건 맞지만,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은데.”
“다른 게 뭐가 있는데?”
“여기 적혀있는 거 말입니다. 을은 갑의 소원을 ‘최대한’ 도와주도록 한다. 갑이 정령왕을 만나고 난 뒤에 을과의 계약은 종료된다.”
녀석의 지적에 흠칫 놀랄 뻔했다.
역시 회귀를 여러 번 해서 그런지 꽤 예리한 구석이 있는 모양.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정상적인 계약이잖아?”
“이게요?”
“당연한 거 아냐?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아까 말씀하셨잖습니까? 정령왕한테서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마! 장난이지, 내가 너 하나 못 지켜주겠냐.”
“진짜죠?”
“당연하지.”
“창세신께 맹세코?”
“어허! 이 정도 일에 신을 들먹이다니. 너 그거 잘못하면 신성모독으로 끌려간다."
녀석이 뭐라 말하기 전.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물의 정령왕 보고 싶지 않아? 걔 진짜 이쁜데.”
“일단 가시죠 이르카 님. 계약서는 그 후에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쉬움에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녀석을 물의 정령계로 끌고 갔다.
* * *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의 왕궁.
보기만 해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 이르카 님 차 한 잔 더 내올까효? 왕께서 업무가 끝나면 바로 나오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조, 조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효.”
“아, 운디네. 괜찮아. 그냥 여기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 같아서 구경만 해도 속이 시원해져.”
물의 궁전은 확실히 다른 궁전보다 하나의 예술품과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거친 불의 궁전과 바람 그리고 투박한 땅의 궁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
그때 내게 인사를 건네온 운디네가 내 시선을 따라서 폭포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히힛, 저도 왕의 궁전을 가장 좋아해효.”
“그래 가서 일…….”
“호, 혹시! 그쪽 운디네 양! 생각해두신 정인 있으시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
막상 데려오기는 했지만, 이 또라이가 기어코 또 사고를 치고 만 것.
내가 녀석을 두들겨 패기 전.
서늘한 눈으로 이스마엘을 바라본 운디네가 나에게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투로 쌀쌀맞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이스마엘 님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아, 알겠소. 혹시라도 파혼 생각이 있으시다면 나 이스마엘을…….”
“그만해 이 미친 새끼야.”
“넵.”
또다시 여자 정령들만 보면 껄떡대는 이스마엘을 구박한 뒤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다른 물의 정령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방금 왔던 아이는 이스마엘을 보고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
“이르카 님 정령왕님께서 들어오시래효. 그리고 이스마엘… 님도 들어오시랍니다.”
내게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던 그녀가 곧이어 내 옆에 있는 이스마엘을 보고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이스마엘 뒤에 님이 아니라 욕을 박으려고 했던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물의 정령왕을 찾아갔다.
끼익-
물로 만들어진 책상에 앉아 계약서를 둘러보고 있는 물의 정령왕은 한숨을 고개를 들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르카, 오랜만이야.”
“어, 한 오백 년 된 건가?”
“대충 그 정도? 전대 정령왕님이 계실 때 만났으니 그 정도 시간쯤 되었겠네.”
“오늘 내가 온 이유는 알지?”
옆에서 입을 헤벌리고 있는 이스마엘 녀석을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응, 네가 말했잖아. 이스마엘 녀석 데리고 올 거라고.”
“내가 알아보라고 했던 거는?”
“알아보기는 했는데. 끙… 저 아이가 버틸지 모르겠네.”
“있긴 있어?”
“응. 있기야 있지.”
나이스!
오는 길에 그나마 친분이 있는 그녀에게 이스마엘의 짝이 되어줄 정령을 알아봐달라고 말했었다.
결과는 성공.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과연 이스마엘과 결혼을 하겠다는 정령이 어떤 아이일까 궁금해져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누구야? 운디네 애들? 아니면…….”
“저기 오네.”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갑자기 커다란 기운이 허공에서 느껴졌다.
파지지직-!
에이 아니겠지.
설마 그 또라이겠어?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곧이어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존재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너였냐?”
“응! 이르카, 오랜만이야!”
“너한테는 연락 안 했는데…….”
“어머, 내가 신랑감 찾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잖아?”
“그렇긴 하지만…….”
정령계의 소문난 또라이 번개의 정령왕.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한 그녀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스마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어지간해서는 그녀에게 이스마엘을 소개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속을 썩였더라도 녀석은 나와 계약을 한 계약자.
이스마엘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을 건넸다.
“쟤 신체 능력은 별 볼 일 없어. 또 지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지?”
“어머, 내가 언제 지졌다고 그러니?”
“예전에 기억 안 나? 이름이 뭐였더라? 아라딜이었나? 아무튼, 그 엘프 녀석…….”
“야, 그거 벌써 400년 전이야. 나도 이제는 남편들 안 괴롭혀.”
“그, 그래?”
번개의 정령왕은 독특한 취미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속성 정령들에게도 살짝 외면받는 존재.
과연 그동안 그녀의 기행이 고쳐졌을까?
고개를 돌려 물의 정령왕을 바라봤다.
도리도리-
전혀 안 고쳐졌다는 뜻.
미안하다. 이스마엘아 네 운명이란다.
이스마엘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번개의 정령왕에게 말을 건넸다.
“만약 클레임 걸려오면 나 또 내려올 수 있다? 진짜 안 괴롭힐 거지?”
“진짜라니까?”
“창세신께 맹세코?”
“…살짝?”
그럼 그렇지.
결국, 변한 것은 별로 없다는 뜻.
“아무튼, 이번에 결혼식 비용은 내가 낼 테니까 잘해줘. 불쌍한 녀석이야.”
“진짜로? 짠돌이인 네가 그 비용을 대겠다고? 너 요즘 돈 잘 번다는 소문 있던데 진짠가보다?”
“뭐, 그렇지. 재밌는 회귀자 하나가 있어서 말이야.”
“아! 걔! 요즘 유명하던데, 재밌냐?”
“뭐, 궁금하면 직접 보든가. 와서 후원도 해주면 고맙고.”
“아무튼, 쟤는 내가 데리고 가면 되는 거지?”
“일단 계약부터 하고. 저 녀석 동의도 있어야 할 거 아니냐.”
입을 헤 벌린 채 물의 정령왕과 번개의 정령왕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스마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이스마엘아.”
“허허, 꽃밭이로다.”
“이스마엘아?”
“네, 넵! 이르카 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아름다우신 정령님들을 제게 소개해주셔서 비천한 이스마엘…….”
“번개의 정령왕이 너한테 관심이 있단다.”
“네? 진짜요?”
“응, 그런데 밤에 조금…….”
“당장 계약하겠습니다!”
“뭐?”
“이 이스마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미안, 너 진짜 죽을지도 모른단다.
잔뜩 흥분한 이스마엘에게 계약서를 건네줬다.
녀석이 빛의 속도로 계약서에 서명하자마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결혼식 지참비용’ 1만5천 포인트가 결제되었습니다.]
[회귀자 ‘이스마엘’ 계약 완료 0.4%의 카르마가 적립됩니다.]
이로써 계약 한 건 완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번개의 정령왕에게 말을 건넸다.
“결혼식은 중계해도 되는 거지?”
“응? 중계하게?”
“마지막까지 포인트를 좀 뽑아먹어야지. 내가 그냥 공짜로 퍼주는 줄 알았어?”
“히힛, 알았어! 그럼 쟤는 이제 내가 데리고 간다?”
행복한 미소를 지은 이스마엘과 그를 껴안고 날아가는 번개의 정령왕을 향해 소리쳤다.
“이번에는! 매일 밤 번개로 지지지 마라! 또 심장마비 온다!”
그때 하늘 높게 떠오른 두 녀석의 외침이 동시에 들려왔다.
“응! 걱정 마! 심폐소생술 익혀뒀어!”
“네?! 아, 아니! 이, 이르카 니이이임!”
메아리쳐 사라지는 이스마엘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물의 정령왕에게 인사를 건넨 후 다시 중간계로 걸음을 옮겼다.
* * *
“나왔어.”
“고생하셨어요! 이르카 님.”
반갑게 맞이하는 안젤라의 환대를 받은 뒤.
식탁에 놓여있는 산처럼 쌓인 황금사과를 가리키며 물어봤다.
“카르나 님?”
“네! 얼마 전에 저 부르셨을 때 주셨어요!”
카르나티우스 님이 안젤라를 불렀다는 건 내게 뭔가 얘기할 게 있었다는 뜻과 같았다.
과연 무슨 일로 불러서 어떤 얘기를 나눴을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이르카 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냐, 성진아 씨는 뭐 하고 있어?”
“안 그래도 보고서 작성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실래요?”
“응.”
성진아가 활동하고 있는 4지구의 채널을 틀자 머리를 짧게 자른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 머리를 저렇게 잘랐지?”
“아, 그거 보고서에 적어놨어요. 덕분에 후원도 많이 들어왔고요.”
“그래? 안 그래도 신선계, 정령계 죄다 성진아 얘기만 하더라. 인기가 확실히 좋은가 봐.”
말을 마치고 성진아가 뭘 하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성진아는 강태식과 함께 사람들 앞에서 토론하고 있었다.
“쟤네 둘 지금 만나도 되는 거 맞지?”
“그쵸, 지금은 싸울 수 없으니까요.”
둘이 무슨 말을 하나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저 강태식!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 하와이에 나타난 소원의 탑을 공략하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왜 탑을 공략하신다는 거죠?]
[소원의 탑을 공략하는 이유가 별거 있겠습니까? 당연히 국민 여러분께 끔찍한 고통을 준 좀비 역병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조금 웃기는군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성진아 헌.터.님?]
[바깥은 지금도 하루하루 좀비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는 힘없는 국민이 넘쳐흐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비우면 도피밖에 더 되겠습니까?]
[말에 어폐가 있으시군요. 근본적인 발병원인을 없애지 못한 채 하루하루 좀비들을 상대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입니다.]
[얼마 전에 인천에서 병력관리를 제대로 못 해 전 병력의 25%를 좀비로 만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신 것 같군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성진아의 도발에 잔뜩 흥분한 강태식.
그리고 그 강태식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성진아를 바라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차근차근 빌드업을 한 건가?
그때 성진아가 폭탄 발언을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