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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215화 (215/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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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벅.

    "!"

    걸어 나온 강태석은 자신을 보며 놀라는 두 자매와 입구 밖, 자동으로 방향을 전환 중인 성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수많은 녀석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꿈인지 뭔지 모르겠을 정도의 깊고 편안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이동 요새가 경고음을 울려 깨어서 나왔다.

    깨달은 건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렇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이 성 녀석을 최대한 아껴줘야겠다는 것.

    두 번째, 그걸 방해하고 빼앗으려는 녀석들은 제때제때 정리해줘야겠다는 것.

    털썩

    "어디 가요?!"

    뒤쪽에서 들리는 다급한 외침을 내버려 둔 채 성의 입구에서 뛰어내린 강태석은 터덜터덜 평야를 지나 자신들을 향해 맹렬히 다가오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안에 계속 타 있으면 성에 기스날지도 모르니까.

    우득.

    팔을 붕붕 휘둘러본 강태석은 사격을 멈춘 허름한 군대와 달려오는 바이크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걷던 와중 강태석이 손을 훅 내밀어 왼쪽으로 휘두른 순간.

    후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크기가 100m가 넘는 거대한 손.

    그 끝에 들린 수백 미터 크기의 창이 통째로 지평선을 휩쓸었다.

    **

    콰콰콰콰콰콰쾅!

    !!!!

    "...???"

    '뭐지.'

    갑작스런 상태 이상으로 귀가 멍해지고 시야가 일렁거리며 사방의 풍경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이상한 감각 속에 군벌장, 제프리는 이윽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언가에 후려치여 통째로 날아가고 있었다.

    후웅..

    후우웅..

    천천히 돌아오는 감각 속, 주변의 사태가 파악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통째로 우수수 튕겨 나간 수하 녀석들과 박살 나 파편처럼 흩어지는 바이크와 무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를 횡으로 지나쳐 지평선을 휩쓸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창, 혹은 폴암이 희미하게 보였다.

    “아니, 저걸 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길이 수백 미터에 두께 십수 미터로 보이는 것이 창이라기보다는 기둥에 가까웠다.

    그것도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거대한 신전을 지탱하는 용도로 쓰이는 기둥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히려 그렇기에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것일까?

    천천히 휘두른 몽둥이에 모기가 맞으면 으깨지지 않고 밀려나는 것과 비슷했다.

    거대하게 휘둘러진 창은 오히려 너무나 컸기에 거기에 얻어맞은 수하들은 죽지 않고 그 충격 때문에 퉁겨나가 훨훨 허공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제프리의 머릿속에 의문이 생겼다.

    <대체 누가?>

    느리게 흘러가는 시야 속, 벽에 다다른 제프리의 초인적인 시선이 창대를 쫓아 그 출발점을 향했다.

    보이는 건 그림자에서 솟구쳐 나온 거대한 팔과 그 옆에 선 평범한 사내였다.

    공교롭게 제프리가 사내를 바라본 순간 사내 역시 자신 쪽을 명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꿈뻑이는 상대의 입술.

    <가.라.>

    '... 가라고?'

    꺼지라는 뜻으로 보였다.

    이에 허공에서 천천히 내리 떨어지던 제프리의 눈썹이 씰룩였다.

    처음에는 왜 자신들이 그나마 살아있는지 몰랐는데 상대의 입술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지금 자신들을 봐준 것이다.

    진짜 날파리 취급하면서 말이다.

    살아생전 받아본 적이 없는 취급이었다.

    심지어 플래그를 이끌던 ‘찬’조차도 자신을 비롯한 군벌장들을 존중했다.

    그뿐 아니라 검공과 각 세력을 이끄는 리더들도 그리했다.

    한데 처음 보는 놈이 저따위로 나와?

    끼릭.

    천천히 떨어지던 제프리는 허리춤에서 작은 버튼을 꺼내 들어 그대로 눌렀다.

    군대의 지휘관들에게만 주어지던, 근방 기갑 병기들의 임시통제권을 사용하는 버튼이었다.

    작동 중지, 일제사격 등의 간단한 명령만 내릴 수 있고, 일제사격의 경우 임의로 목표물을 조준하기에 정밀타격에 적합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아무 상관 없을 것이다.

    지금 쏘아댈 것이라곤 아무리 봐도 눈앞의 거대한 창과 팔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제프리가 버튼을 누른 순간.

    슈우우우욱...

    콰콰콰콰콰콰콰콰쾅!

    돌아온 시간의 흐름 속,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갑 병기들이 일제히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울러급은 아니지만, 이동이 가능한 것들 중엔 최상의 화력을 보유한 메탈스파이더부터 시작하여 라이노급 중갑화력 투사 지원 병기까지.

    쿠쿠쿠쿵...

    콰콰콰쾅!

    탄이 아까워 쏘지도 않고 대기하던 병기들이 제약에서 풀렸다는 듯 미친 듯이 포격을 쏘아댔다.

    가장 위협적이라고 여겨지는 팔 끝, 그 너머의 적을 향해 스스로 자동조준을 마친 뒤 끊임없이 화력을 퍼부었다.

    "!!"

    그리고 땅에 데구르르 구른 제프리가 황급히 뒤로 뛰어가며 부하들을 주워 미친 듯이 권역에서 이탈했다.

    초인이고 만렙이고 나발이고.

    저기에 휘말리면 자신도 걸레짝이 된다.

    그 정도로 전장을 찢어발기는 저 천둥과 지진은 무서운 광경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린 게 대략 1분.

    슈우우우욱...

    "후욱... 허억... 내려 이 새끼들아."

    "켁."

    털썩!

    대충 주워 들고 온 일곱 명의 수하 녀석들을 바닥에 툭 내던진 제프리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포격이 그친 자리, 오직 연기만이 솟구치는 고철의 대지를 바라보았다.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챙겨오긴 했는데 당연히 다 챙겨오진 못했다.

    재수 없는 놈들은 죽을 테지만, 재수 좋은 놈들은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목표 타겟의 확인이다.

    제프리가 눈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을 준 채 연기의 구름 너머를 바라보았다.

    쿠우우웅...

    포격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멀쩡한 이동 요새가 연기 위로 여전히 몸을 쿠르릉 돌리고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서서히 걷히는 연기 아래로 보이는 건...

    "... 염병 진짜."

    “으아...”

    “으악...”

    서서히 걷히는 광경 아래를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는 제프리의 옆, 추임새를 넣듯 살아남은 수하들 역시 비명에 가까운 한탄을 토했다.

    으깨어져 있어야 하는 증기 아래 폐허 속으로 보이는 건 또 다른 거대한 팔이었다.

    그리고 그 팔이 들고 있는 건, 마치 신전의 지붕을 뜯어 만든 것처럼 웅장하고 유려한 방패였다.

    슈우우욱...

    "그래. 팔이 원래... 두 짝이긴 하지."

    모든 포격을 두들겨 맞았음에도 흠집 하나 안 난 방패와 대지를 휩쓸어버린 창, 그리고 이 둘을 든 채 사내의 옆에 위엄 넘치게 선 두 개의 커다란 팔을 본 제프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끔씩 저런 게 튀어나오긴 하는 것 같다.

    인간이 만들어낸 전장 속, 그 속을 누비는 초인과 군병기들을 뛰어넘는, 말 그대로 신화와 전설 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은 초월적인 무언가가.

    자신도 예전에 한번 보지 않았던가?

    그들의 리더, 그녀가 보여주던 위용을.

    "... 항복하자. 아무래도 저거... <찬>과 같은 부류인가 보다."

    "... 살려줄까요?"

    "모르지. 그래도 지금이라도 대가리 박는 게 쳐드는 거보다 일단 날아갈 확률 적어 보이지 않니?"

    제프리의 힘 빠진 말에 수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정말 그녀, 찬과 같은 부류라면 대항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종류의 것들 뿐이니까.

    잠시 후.

    "항복! 항보오오오오오오오옥!"

    콰아아앙!

    만렙의 마력과 체력을 모두 끌어모은, 제프리의 입에서 터져 나온 우렁찬 사자후가 온 전장 사방을 휩쓸었다.

    **

    쿠르르르르릉...

    쿠르르릉...!

    사건이 끝나고 다시금 적막에 빠진 뇌종의 고철 대지.

    그 위를 다시 헤쳐가기 시작한 이동 요새, 마몽드의 안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놈들 다 봐준다고? 안 죽이고?"

    쿠르르르릉...

    통제실의 안, 강철 의자에 누워 잠든 것인지 아닌 건지도 모르겠는 카트란을 향해 옆에 선 사뮤엘이 버럭 소리쳤다.

    이동 요새의 옆, 끊임없이 그들을 따라붙는 군벌의 기갑 병기들을 비추는 외부 관찰 홀로그램을 보면서.

    수백 대의 병기들과 그 이상의 바이크와 수송차량, 그리고 그 안에 빼곡히 찬 군벌세력 놈들이 침묵을 지키며 끊임없이 이동 요새 마몽드의 옆에서 내달리고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지금 눈앞의 여유로운 작자가 저것들을 모조리 봐준 것도 모자라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 같이 가시지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군벌의 수장이라는 제프리라는 녀석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냅다 자존심 다 내버리고 따라붙었다.

    덕분에 평화로이, 마치 커다란 물소마냥 이동하던 이동 요새 옆에 저 쓸데없는 꼬리들이 주렁주렁 들러붙었다.

    마치 거대한 소를 쫓는 쇠파리들마냥 말이다.

    "안 불안해? 저것들은 언제 뒤통수칠지 모른다니까?"

    "..."

    옆에서 떠드는 사뮤엘의 말에 슬쩍 얼굴을 덮었던 모자를 치울까 고민하던 강태석은 그냥 모자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자는 척을 했다.

    귀찮았다.

    할 말은 많긴 했지만 말이다.

    첫 번째, 불안한 건 사뮤엘이나 옆에서 침묵을 지키는 기리스지 자신이 아니다.

    자신은 저들이 언제든지 다시 덤벼도 엄지 하나로 짓눌러버릴 수 있으니까.

    화신이란 그런 존재다.

    인외의 상리를 벗어난 화신을 상대할 수 있는 건 화신뿐이다.

    저들도 그걸 알기에 항복을 한 것이었다.

    두 번째, 옆에 있으면 자신은 앞으로 상당히 편해진다.

    자신을 공격하고 귀찮게 한 게 거슬리긴 했지만, 바꿔말하면 멀뚱하니 호위 병력도 없이 이동 요새만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런 꼴을 당한 것이다.

    반면 조금 낡긴 했어도 저런 군벌들이 성 주변을 주렁주렁 따라다니고 있다면?

    어지간히 정신 나간 녀석이 아니고서야 손댈 생각조차 못 할 것이다.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놈들이기도 했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만해. 사뮤엘."

    "아니 그래도..."

    "우리가 딱히 할 말은 없잖아. 가자."

    "..."

    기리스의 말이 떨어진 순간 사뮤엘이 입을 딱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 군벌 녀석들이 배신이니 뭐니 하지만 자신들도 뭐라 할 말은 없다.

    당장 일 터지자마자 도망가려고 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생각해보니 그런 자신들을 여전히 이 성안에 내버려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 사뮤엘을 보며 한숨을 쉰 기리스가 조용히 강태석을 향해 다가와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저희는 알아서 해볼게요. 쉬세요."

    이윽고 둘이 물러나자 통제실 안은 다시 기계음으로 그득 들어찼다.

    그 적막 아닌 적막 속, 얼굴을 덮은 모자를 스윽 치운 강태석이 조용히 강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목적지, 운석육신까지의 남은 여정 거리는 이틀 정도.

    상황은 평화롭게 진행 중이다.

    사실상 앞으로의 길에 저런 군대와 11권세의 세력 정도만 남아있다면 벽을 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미 예전과 달리 그 정도에선 넘어서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전력이 정면충돌한다면야 화신이라도 물량과 화력 공세에 밀려 지쳐 쓰러질 수도 있지만, 조금만 머리를 써도 그런 사태까지 벌어질 일은 없다.

    다만 거슬리는 것이 있다면, 세상 사이사이에 숨어있었을 다른 화신들의 존재였다.

    이제까지야 세상이라는 껍질 사이, 혹은 장막 아래 숨어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나마 멸망 속에서도 유지되던 것들마저 모조리 무너지고 숨어있을 곳들이 말라가고 있다.

    이제 그들조차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뭐. 부딪히지만 않으면 되니까."

    괜한 걱정이라 생각한 강태석은 다시 모자를 덮은 뒤 잠을 청했다.

    **

    북쪽.

    "오랜만이구나. 다들 귀여워 아주. 내가 찾아올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딱 모여있었데."

    콰르르르릉...!

    기계들의 장벽.

    그 앞으로 옹기종기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세력들의 군세를 바라보며 도착한 찬이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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