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스르르릉.
땅에 내려앉아 흑색 갑옷, 전마강갑과 영롱한 칼, 칠채영도로 무장하고 선 상대를 보며 칸헬이 웃었다.
갑옷도, 칼도, 상대도.
모두 제법 귀하고 대단한 건 알겠다.
하지만 아까 강철의 화신을 두르고 자신과 맞서 싸울 때와는 손색이 있다.
눈앞의 상대는 아직까진 인간인 반면, 그 강철기계는 자신처럼 화신화가 진행되고 있는 무쌍의 병기였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그 병기가 조금만 더 많이 먹어 치우고 잘 자랐더라면 자신이 패배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비록 이제는 승부의 끝이 보이고 있지만.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문득 칸헬이 아쉽다는 듯 북쪽. 내달리고 있을 거대한 강철성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칸헬이 입맛을 다시는 존재는 여왕이었다.
충분히 자신의 존재를 채워주고도 남을 진기하면서도 풍부한 먹잇감.
승부가 났지만 아마 눈앞의 녀석이 진득하게 달라붙으면 제법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할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여왕이 몸을 숨기면 낭패였다.
지금이야 그 냄새를 쫓아갈 수 있지만, 제법 멀어진 뒤 흩어져 숨으면 찾기가 여간 곤란해진다.
여기까지 판단한 칸헬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다섯 번째 칼을 스르릉 칼집에 넣고 멈칫하는 상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끝내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군."
"?"
"배신당한 네 녀석을 보고 있자니 영 마음이 불편하단 말이다. 나름 왕좌에 오래 있었던지라."
과거를 떠올리듯 흥얼거린 칸헬이 재차 상대를 향해 말했다.
"왕좌에 있으며 제법 많은 놈들을 봐왔지. 부탁하는 놈. 아양 떠는 놈. 도전하는 놈. 다들 제법 귀여웠지만, 용서가 안 되는 놈들이 있더군. 바로 배신하는 녀석들 말이야. 적이건 아군이건."
그리고 그런 칸헬의 말은 진실이었다.
자신의 아래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가 배신한 놈들은 두말할 것도 없다.
놈들의 구족과 수하, 영지민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불태워 용광로 재료로 사용했다.
적이라도 충심을 보이고 마지막까지 분투한 녀석들은 잘 거둬들여 사용했지만, 그런 녀석들의 뒤에서 계책을 꾸리고 배신하며 자신에게 아양 떨려는 녀석들은 전쟁이 끝나면 모조리 뿌리 뽑아 죽였다.
어쩌면 자신의 아래 있다 배신한 놈들보다 더욱 잔인하게 죽였다.
그리고 그 모든 놈들은 자신의 핏빛 영지 안의 병사가 되어 영원토록 자신을 위해 싸우고 고통받게 되었다.
아마 이건 후사로도 전해져 내려올 터.
터엉.
완전히 칼집에 집어넣은 칼을 보이며 전투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인 칸헬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게 제안을 하지. 어떤가? 배신한 녀석들을 쫓아가 잡아 죽일 기회 말이야."
"..."
"믿어도 좋아. 나는 여기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으마. 쫓아가 도망간 녀석들을 단죄해라. 네 실력이라면 가능할 테니."
그러며 칸헬이 멀찍이 물러서고는 상대를 위한,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화륵...
칼은 부러졌지만, 여전히 남은 화염의 권능들이 칸헬의 의지에 따라 가로수길마냥 갈라지며 일직선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이를 칸헬이 여유로이 바라보았다.
거짓말은 안 했다.
이 녀석이 배신을 <단죄>하기 전에는 쫓아갈 생각이 없으니.
그렇게 녀석들이 치고받아 맛난 디저트가 완성되었을 때쯤 쫓아가 모조리 집어삼키면 그만이었다.
여왕도, 이 녀석도.
그리고 새로운 왕좌로서 제법 어울릴 성과 공포에 질려있을 백성들도.
잠깐의 유흥으로 얻기에는 썩 나쁘지 않은 결과다.
하지만 그런 칸헬의 말에 피식거리는 대답이 들려왔다.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네. 지금이 내가 바라던 최고의 상황인데."
"...?"
"이제 방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 너와 나, 단 둘뿐이야."
강태석이 상대를 향해 칠채영도를 불태우듯 빛내며 걸어가며 웃었다.
여왕인 소녀는 <먹기>에는 너무 덜 익어 먹을 것도 없다.
반면 눈앞에 최고의 먹을거리가 있다.
수백 년 전 전장을 누비며 먹어 치우고 먹어 치운 탓에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는 최고의 만찬이.
먹어 치우는 순간 레벨 30은 물론이오, 화신체를 그득 채워 자신을 완연히 다른 존재로 만들어줄.
한데 그런 피라미를 탐내 쫓아간다고?
자신은 예전부터 그랬다.
큰 것이 아니면 흥미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가장 흥미로운 게 나타났다.
"여왕은 조금 덜 익어서 아쉬웠는데…. 네가 나타나서 다행이야."
시리게 웃은 강태석이 온몸에는 어둠을, 손에는 영롱한 빛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상대에게 걸어갔다.
쿠르르릉.
"이제 보니 미친 녀석이었구나."
그런 강태석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칸헬이 허리춤에 집어넣었던 다섯 번째 칼을 새로이 뽑아 들었다.
“캬아아아악...!”
귀기 서린 칼을 뽑아 들고 걸어오는 상대를 보며 강태석이 손 안, 칠채영도에 힘을 주었다.
사실 말이야 자신 있게 했지만, 마냥 쉽지만은 않다.
먹을 게 많다는 건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전력은 자신보다 현저히 우위에 있었으니.
수백 년을 이 세계에서 굴러먹던 영혼은 일 년도 채 안 된 자신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 세계에 사랑을 받고 있었다.
'이길 수 있으려나.'
검은 갑옷을 휘감은 채 옆머리를 긁적거린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상대도 진이 많이 빠졌으니 일단 해보면 알 것이다.
원래 중요한 문제들은 항상 이렇게 가늠이 안 되는 법이다.
잠시 후.
“캬아아아아아아악!”
“키아아아아!”
쩌어어어어어엉!
원혼을 토해내는 검붉은 칼과 영롱한 영혼의 칼날이 거침없이 불길 한가운데서 충돌하며 소름 끼치는 요성들을 사방으로 토해냈다.
**
군락, 근처.
콰아앙...
콰아아아아앙!
"하여간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야."
검은 인영이 망가진 외벽 너머로 들려오는 요란한 소음 속에서 투덜거리며 부지런히 손에 들린 장비들을 땅에 설치했다.
이 작업을 시작한 지 다섯 시간.
둥그런 수도, 로블롭을 통해 탄생한 군락 주변으로 총 열일곱 개의 장치를 설치했고 이제 자신의 손에 들린 것이 마지막이다.
총 열여덟 개를 설치하면 자신의 임무는 완료된다.
하지만 자신의 임무가 진행될수록 안쪽에서의 격전도 갈수록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 두터워 보이던 군락의 군체 외벽이 무너지고, 점막이 말라붙고, 대지가 쪼갈라졌다.
덕분에 공포의 상징으로 보이던 군락은 이제 초라해 보일 정도로 찢겨나가고 구멍이 뚫린 상태.
물론 그 말은 안쪽에서의 싸움이 그만큼 장난 아니라는 뜻이지만 말이다.
"하여간 소주님의 판단이 옳다니까. 저런 것들은 다 뿌리를 뽑아버려야지 원."
떨쳐 나오는 귀곡성만으로도 피부가 으스스하다.
퍼어어어억!
눈치도 없이 근처를 방황하던 숙주를 걷어차 머리를 터트려버린 사내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고는 행여나 들킬세라 몰래 장치가 제대로 설치되었는지 작동시켜보려던 그때.
처억.
"넌 누구지."
"... 뭐야. 다시 돌아온 놈이 있었어?"
뒤돌아본 사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건 젊은 청년이었다.
머릿속에서 주요 인물 목록을 돌려보던 사내가 이내 청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음. 그래. 너 기억난다. 이오스라고 했던가? 그런데 아까 전에 떠났으면 그대로 가던 길 갈 것이지 왜 돌아왔어?"
"..."
"설마 뭐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내의 말에 이오스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지치고 내상마저 입은 상태였기에.
사실 달리던 이동 요새에서 뛰어내려 이곳까지 돌아오는 것도 버거운 상태였다.
거기에 자신을 말리려던 카르멘까지 기절시켜 제압하고 와야 했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결국 그냥 떠날 수 없었기에 이곳에 돌아왔다.
어찌 보면 자신과 함께 왔던 자를 자신이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데 돌아와 보니 생명체라곤 남아있지 않아야 할 대지에서 웬 수상쩍은 놈이 대놓고 수상쩍은 짓을 하고 있다.
거기에 왠지 모르게 익숙하게 생긴 놈이었다.
잠시 기억을 더듬던 이오스는 이내 녀석의 얼굴을 어디에서 봤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바다 건너, G구역에서 왔다던 배를 끌고 생존자들을 데리고 떠나버린 수수께끼 집단의 수십 명의 남녀 중 한 명이었다.
"함께 떠난 줄 알았더니…. 쥐새끼처럼 남아서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었구나."
"어쩌겠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말단이."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군바리안은 철저한 힘의 조직이다.
자신은 그중에서도 제일 약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남아 이곳에서 뒤치다꺼리를 담당해야 했다.
뭐 장치를 제대로 만질 수 있던 게 그 무식한 놈들 사이에서 그나마 자신이기도 했고.
물론 어디까지나 처음의 이야기다.
처음에만 마음에 안 들었고 이걸 자신이 왜 해야 하는지 몰랐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 깊이 공감한다.
왜 자신이 남아 이 일을 해야 했는지.
왜 소주가 굳이 이런 일을 시켰는지.
"생각해봐라. 이건 너희들한테도 필요한 일이라니까? 너희들 대신 우리가 해주는 거야. 고맙지 않아?"
키이잉...
작동하며 수상한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하는 장치에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든 이오스가 사내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분명 저 장치는 보통의 것이 아니다.
작동하면 무언가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한데 그게 자신들을 위한 일이라니?
그런 이오스를 보며 일단 말빨이 먹혀들었다고 생각한 사내가 재차 유들유들하게 떠들었다.
"봐라 저것들을. 저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을. 소주에게 들어보니 <저건> 강해지기 시작한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았다지. 거기에 반대쪽 놈은 그냥 땅에서 불쑥 솟아오르듯 나타났고. 저것들이 살아남으면 빈사 상태라고 안전할 거 같아?"
"..."
"금방 뭐라도 주워 처먹고 다시 강해질걸. 뭘 먹을지야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렇게 되면 너희를 가만 놔둘 거 같아? 그렇게 꽁지가 빠지게 도망간 녀석들을? 나 같으면 쫓아가서 다 죽인다. 본보기를 보여야지. 거기에 너희 편이 살아남으면 모를까 그 반대쪽이 살아남으면 더 큰 일이라고."
키이이잉...
하지만 서서히 연동되어 네트워크를 형성해가는 장치 뒤의 사내가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상대는 복수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소주에게 들은 것과 이곳에서의 행동을 종합해보니 나름 정확할 것이다.
감정이 없는 건 아닌데 쓸데없이 자신의 힘과 시간을 빼기 싫어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그와 별개로 유의미한 변수는 기회가 될 때 죽여 없애둬야 한다.
카트란이라는 녀석보다 더 흉악해 보이는, 여왕 이상의 이레귤러로 보이는 녀석이 이길 것 같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게 지금 자신이 장치를 가동시키는 이유였다.
"그러니까 너도 저 멀리 가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너흰 손도 안 대고 좋잖아. 안 그래?"
그러며 손을 휘휘 젓는 사내의 말에 침묵을 지키던 이오스가 칼을 들었다.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응?"
"첫 번째로 칸헬 그자는 그렇게 복수심에 불탈만한 성격이 아니란 거지."
치잉.
이오스가 칼날에 마저 남은 검기를 덧씌워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자가 정말 그런 성격이었다면 왕으로 추대하지도,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자는 그런 성격이기에 배신도 당하지만, 결국 그런 성격이기에 누군가가 이런 순간에 손을 뻗는 것이다.
자신처럼.
"그리고 두 번째. 나는 칸헬이 이길 거로 생각하거든. 그러니 네 개수작을 여기서 막아야지."
"고지식한 녀석 같으니...!"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콰아아아아아아앙!
쩌어어어억!
구검기를 뛰어넘어 한점에 끌어모아진 점검기가 허공을 격해 사내를 거침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