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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207화 (207/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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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아아앙!

    허공을 건너 뛰어간 강태석은 그대로 발치, 뛰어들려는 핏빛 병사들을 역장째 으깨 밟아버린 채 다시 한번 도약하여 핏빛 대기를 부웅 갈랐다.

    목표는 저 너머 수백 미터 밖에서 자신 쪽을 오연히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다.

    쩌적!

    철퍼덕!

    요정, 수인, 기사.

    대체 언제 상대의 손에 죽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의 수많은 핏빛 괴병들이 대지에서 뛰어들어 강태석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원체 사이즈 차이가 났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시 한 줌의 핏물들로 갈려 나가거나 터져나갔다.

    녀석들의 몸에서 발현된 온갖 권능들이 흑기사의 표면을 후려쳤지만 마찬가지였다.

    키이이이잉...

    콰아아아아앙!

    소리, 불, 얼음, 화살, 독, 광채.

    정말 수많은 종류의 각양각색 스킬들이 핏빛 병사들의 몸에서 발현되어 강태석을 후려쳤지만, 그 거친 굉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띠링!

    <현재 출력 : 15%.>

    <주의를 요합니다.>

    어느덧 거의 다 바닥나버린 출력.

    군락의 병종들과 여왕으로 각성한 소녀를 몰아붙이며 끝없이 소모된 출력은 이제 그 바닥을 서서히 보여가고 있었다.

    출력이 바닥나는 순간 흑기사도 해체되어 그림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이 지옥 속에서 강태석은 홀로 맨몸으로 떨어져 내리게 된다.

    마력이 남아있으니 여전히 싸울 수야 있겠지만 썩 좋은 그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끝장내야 한다.

    그리고...

    '적당히 알아들었겠지.'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허공을 박찬 강태석이 이제는 200m까지 가까워진 상대를 바라보며 뒤쪽을 떠올렸다.

    소녀에게 붙여놓은 이오스와 카르멘에게 비밀스럽게 보낸 수신호.

    <혹여 전투가 끝나고 소녀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목을 칠 것.>

    콰드드드드드득!

    ”구어어어어...!“

    달려드는,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를 자랑하며 정면으로 가로막는 핏빛의 거인족과 두 손을 정면으로 허공에서 맞댄 강태석이 양손에 힘을 주고 출력을 끌어올리며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상정했다.

    비록 여왕으로서의 각성이 모두 끝나지 않았기에 반은 인간이고 반은 괴물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소녀와는 다른 존재다.

    전투가 끝나고 설령 이기더라도 자신들에게 빈틈이 보인다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아직 싸울 여력이 있는 둘을 가장 가까이에 붙여둔 것이다.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는 여왕을 지키며 이 대치 국면을 버텨내야 한다.

    싸움이 끝나고 나서 혹여 여왕이 배신하려 든다면 즉시 그 목을 쳐야 한다.

    키이잉...

    콰드드드드드득!

    !!!!!!!!!

    생각을 마친 강태석이 양손에 힘을 주고 전력을 끌어내기 시작하자 마주 잡고 있던 크기 25m의 거인, 두 손이 팔째 쩌저적 으깨지며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쫘아아아아악!

    양팔째, 상대의 몸통을 두 갈래로 해체해 양쪽으로 갈라버린 강태석이 잠시 멈춰 섰던 발걸음을 돋우며 한 번 더 상대를 향해 뛰어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갈라진 거인의 너머, 선명하게 보이는 풍경에 움찔하게 되었다.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흉악하게 웃으며 가장 커다란 칼을 뽑아 드는 노인의 모습.

    <진짜. 좀 붙을 때까지는 가만히 있어 주면 덧나나.>

    그런 강태석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

    콰르르르릉...

    콰콰콰콰콰콰콰쾅!

    하늘에서 커다란 번개가 내리치며 군락의 천장을 뚫고 피뢰침처럼 팔을 쳐든 노인의 몸에 직격했다.

    **

    콰르르르르르르릉!

    "오오. 좋아좋아. 오랜만이구나. 아직 세상이 나를 아끼고 있어."

    내리친 거대하고 굵은 번개를 정통으로 후려 맞은 노인이 튀어 오르는 스파크 속에서 크게 웃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전신이 타버릴 하늘의 심판이지만 노인에게 있어 이 번개는 세상이 아직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그래,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온 세상이 자신을 사랑했다.

    특히 죽음과 심판을 상징하는 번개가!

    콰르르르르르륵!

    넘치는 에너지를 받아들인 노인의 육체가 순식간에 세월과 시간마저 거슬러 역행하기 시작했다.

    더 강건하게, 더 탄력 넘치게.

    아무리 강인해도 늙어 말라붙어가던 피부가 다시 매끈해지고 삐쩍 압축되어있던 근육이 불끈불끈 힘이 돌아오며 부풀어 올랐다.

    80에서 50, 50에서 30, 30에서 20.

    이윽고.

    파지지직...

    "좋아. 좋아. 모름지기 몸이라면 이래야지. 그래야 여인도 좀 품고."

    순식간에 20대, 가장 혈기 왕성한 시절의 육체로 돌아온 칸헬이 스파크가 파팍 튀는 자신의 육체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삶이란 자고로 먹어 치우고 범하고 삼키는 데 의미가 있는 법이다.

    늙어빠진 육체에는 늙어빠진 정신이 깃들기 때문에, 생명의 의미에 충실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당장 이전만 해도 느긋하게 상황을 살피며 몇몇 가련한 것들은 봐주는 등의 나약한 행위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넘치는 육체와 활력에 깃든 생각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탐망.

    "그래도 늙은 몸일 때 잘한 게 있군."

    콰아아앙!

    저 멀리, 예전 자신이 죽여 발깔개로 썼던 핏빛 거인을 찢어버리고 허공을 내달려 날아드는 흑기사를 보며 칸헬이 여유로이 웃었다.

    당장 사방에 여인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기도 힘든데 하나 살려두었으니 어찌 아니 반갑겠는가.

    카르멘이라고 했던가?

    전투가 끝나고도 살아있다면 친히 자신이 기특함을 치하하며 품어주리라.

    하지만 일단은 눈앞의 거슬리는 존재를 해치우는 게 우선이다.

    "덩치가 크니... 나도 좀 맞춰줄까."

    후우우우웅!

    어느새 100m 앞까지 접근한 거체를 보던 청년, 칸헬이 천천히 가장 큰 크기의 칼을 치켜들었다.

    이 세상에 와서 만족스러웠던 것, 두 번째가 있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 육신의 주인이었던 늙은 후손이 이때까지 자신의 애병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칠지무적검.

    일곱 종족을 갈아 넣어 그 가장 단단한 부위로 칼날을 벼리고 그 마력으로 용광로를 달구고 그 피로 담금질을 한 일곱 개의 무기다.

    가장 큰 칼은 거인족의 칼.

    대지와 하늘을 떠받치던 이들의 칼을 여유로이 휘두른 순간.

    쿠구구구궁...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군락의 살점 카펫 아래, 대지의 깊숙한 곳에서 크기 100m의 거대한 칼날이 솟구쳐 튀어나와 그대로 흑기사의 거체를 올려 후려쳤다.

    **

    콰아아아아아앙!

    "... 믿기 힘들구나."

    마수 병종과 핏방울을 부려 사방에서 몰려드는 불사의 군대를 상대하던 소녀가 저 너머, 대지에서 솟구친 거대한 칼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분명 자신의 머릿속에는 오래된 흡혈귀왕의 기억이 잠들어있었기에 이를 잘 살펴보면 저런 것들에 대한 전승을 놀랍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저 정도는 약과였다.

    이 오래 살아오며 죽음을 반복한 존재의 기억 속에는 더욱 거대한 세상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것들에 대한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소녀에게 있어 머릿속의 정보와 눈앞의 광경들, 모두 낯설면서도 믿기 힘든 것일 뿐이다.

    현실로 존재한다고 하여 쉬이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인간으로서도, 흡혈귀로서도 살아온 지 얼마 안 된 소녀이자 여왕에게 있어 눈앞, 번개를 몸에 품고 대지를 칼 삼는 존재가 나타났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차라리 나라도 빠져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

    콰아앙!

    콰아아아아앙!

    저 너머에서 격돌을 시작한 흑기사와 거대한 칼을 바라보던 여왕이 자신의 몸 주변에 남은 열두 개의 핏방울 구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탯줄과의 연결도 끊긴 지금, 이제 몸 안에 남은 마력도 얼마 되지 않았다.

    무한에 가깝게 힘을 부리던 몇십 분 전을 생각하면 솔직히 숨이 허덕일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병종들까지 희생해가며 이곳에서 싸우는 게 좋은 선택일까?

    차라리 핵심 마수들과 남은 힘을 온전히 보존한 채 이곳에서 빠져나가 새로운 곳에 군락을 새우는 게 더 나은 선택 아닐까?

    아무리 각성 과정이 중간에 멈췄다고 한들 자신은 여왕이었다.

    시간을 준다면 또 다른 인간들의 세계에서 다시금 새로운 군락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멈췄던 각성 과정을 다시 진행하여 온전하게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매력적인데? 저 둘만 어떻게 치워버린다면...'

    콰드드드득!

    콰득!

    자신을 옆에서 지킨다는 명목으로 아까부터 사방에서 칼을 휘두르는 두 남녀의 등을 소녀가 샐쭉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만찮기는 하지만 이런 격전 중에 빈틈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지금부터 조금씩 힘을 아끼고 녀석들이 지칠 때를 기다린다면...

    후우웅!

    이에 몸 주변을 돌던 열두 개의 구슬들이 절로 포격을 멈추고 느려졌다.

    촤아아아악!

    그 빈틈을 노려 달려드는 핏빛 기사 하나를 귀찮다는 듯 바라보던 소녀가 그대로 손을 흔들어 녀석의 골통을 쪼개놓으려고 했다.

    힘을 아낀다고 해도,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육체만으로도 자신은 강대하니까.

    하지만 그보다 먼저 움직인 존재가 있었다.

    콰드드드드득!

    "허억... 괜찮아? 에멜?"

    "..."

    온몸에 뇌기를 두르고 피칠갑을 한 채 핏빛 기사의 가슴팍에 칼을 꽂아 넣고 숨을 헐떡이는 소년을 소녀가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육신의 주인, 그 오라비라고 했던가?

    살아생전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다.

    광세니, 초인이니 하는 흡혈귀왕의 기억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믿기 힘든 현실 속, 소년을 보고 있자니 기억과 현실이 일치되며 비로소 혼란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치 이곳이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고 몸이 주장하듯.

    '그럴리가.'

    퍼억!

    "비키세요. 약해빠진 주제에."

    “쿠아아아악!”

    콰드드드드드득!

    소년을 뻥 걷어찬 소녀가 그대로 소년을 덮치려던 핏빛 병사들을 맨손으로 쫙쫙 찢어 갈겨버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신은 여왕이다.

    저런 허접한 꼬맹이의 동생 자리가 원래 자신이 있을 곳이라고?

    <다. 다다다. 다 쓸어버려라. 나의 종들아. 저 건방진 장난감들을 모조리.>

    그런 여왕의 염파가 퍼져나가자마자.

    “쿠아아아아아앙!”

    “크어어어억!”

    사방에서 싸우던 온갖 마수의 군대들이 더욱 거칠고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

    “콰아아아아아앙!”

    “구어어어어억!”

    "쯧."

    거대한 칼을 부려 흑기사를 상대하던 칸헬이 옆구리, 핏빛 병사들의 호위를 뚫고 치고 들어온 커다란 짐승 놈을 보며 혀를 차고는 두 번째로 작은 칼을 뽑아 들었다.

    요정족의 살점과 눈물을 벼려 만든 투명한 칼날.

    칸헬이 이를 가볍게 휘두른 순간.

    쩌저저저적...

    콰아아아아아아앙!

    돌풍이 터져 나오며 크기만 해도 30m에 달하던, 1차 변이를 마친 군락의 거대한 마수가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산산조각 터져나가며 그대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단 한 방울의 체액조차 튀기지 못하고 말이다.

    스윽.

    "집요한 녀석들 같으니."

    칸헬이 느긋하게 전장을 바라보며 다시 대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제법 반항하고는 있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은 세상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무한하나 녀석들의 발버둥은 한계가 있으니.

    후웅!

    칸헬이 다시 대검을 부려 바닥에서 칼을 뽑아내 공격하려던 그 순간.

    쩌저저저저적...

    쩌어엉!

    "!"

    갑작스레 금이 가며 부러진, 자신의 가장 큰 칼에 칸헬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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