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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203화 (203/221)

203

바깥에서 거세어지는 공격 속, 흔들리는 통제실 안에 선 그라함이 탈리만의 말에 침묵을 지켰다.

콰르르릉!

콰아아아아아앙!

탈리만이 말하는 최후의 수단이란 자폭일 것이다.

물론 지금 목표물은 코앞에 있다.

전진이 가로막혔기는 하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 이 이동 요새의 엔진을 모두 폭주시킨다면, 확실하게 인프라를 파괴할 수 있다.

그 대가로 자신들은 모두 폭발에 휘말려 죽겠지만 말이다.

“무슨 미친 소리야 탈리만!”

“우아아아아악! 그라함 경! 저 말을 무시하시오! 당신도 죽고 싶진 않을 거 아닌가!”

뒤쪽, 죽음을 직감한 묶인 이들의 버둥거림과 괴성이 진동보다 더욱 거칠게 통제실 안을 메웠다.

그리고 그 속, 그들의 외침을 듣던 그라함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래,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망해가던 뇌지국, 그 빈민가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자신을 구해주고 키워준 주인과 함께 맞이하는 최후 정도면 나쁘지 않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탈리만 공. 지금 즉시 실행하지요."

순간.

"음? 왜 그런 최후의 순간 같은 대사를?"

"네?"

"누가 들으면 죽으러 가는 것 같지 않나?"

"... 자폭을 실행하라는 것 아니셨습니까?"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던 그라함의 반문에 탈리만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세상이 망해가고 있는 판국에 이게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기반을 다지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건 지켜야 하지. 그리고 자폭이라니? 기껏 살아남았는데 무슨 멍청한 생각이냐!"

"아..."

"내가 말한 건 이 <성>의 최종 기술이었단 말이다."

탈리만 공이 퉁명스레 털썩 철제 의자에 몸을 기대 누우며 말했다.

이런 종류의 이동 요새는 반드시 그 거대한 동체와 강대한 출력을 적극 활용하는 필살의 기능이 있다.

애초에 이는 연방 시대 이전, 고왕국 테크놀러지의 집결체였다.

적통인 검공 그 양반이 이런 거대한 걸 자신들 모르게 수도 지하 어딘가에서 만들고 있던 건 몰랐지만 말이다.

"꿍꿍이가 많은 노친네였다니까. 이렇게 허무하게 갈지는 몰랐지만."

"..."

"하여간 그라함 네가 현재 최고 권한자인 이상 반드시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이 이동 요새의 최후 권한을. 빨리 서둘러라."

"엇... 알겠습니다."

탈리만의 말에 정신을 다잡은 그라함이 빠르게 패널들을 조정했다.

암무대로써 온갖 병기들의 조종법을 익힌 그라함에게 있어 구식으로 보일 정도의 표준 지침을 따르는 이동 요새의 패널 조정 따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이윽고.

띠링.

<접속 권한 확인 중... 인증 완료.>

<탄트라-[열락의 불] 기동 모드를 승인하시겠습니까?>

"...!"

패널 위에 떠오른 문구를 본 그라함의 얼굴에 환희와 당황이 동시에 떠올랐다.

탈리만의 말대로 과연 이 거대한 이동 요새에는 최종 기동 모드라는 것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 모드가 어떤 리스크를 짊어지는지, 어떤 형태로 가동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말하자면 양날의 검이다.

최악의 경우 이 모드를 시행하여 모든 출력이 바닥나면 그때는 확실했던 수단인 자폭조차 시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

으레 이런 종류의 것들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에너지를 잡아먹고는 하니까.

그렇지만 고민은 잠시.

'어차피... 딱히 방도가 없지.'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꽈드드드드드드득!

바깥에서 더욱더 강렬한 힘으로 조여오고 후려치는 촉수들의 압박을 깊은 곳에서 전신으로 느끼고 있던 그라함이 거침없이 패널의 버튼을 눌렀다.

선택은 YES.

콰악!

그라함이 강하게 버튼을 내지른 순간.

키이이잉...

<최종 기동 모드.. [열락의 불]. 시행합니다.>

촉수에 쥐어 짜여지던 이동 요새가 굉음을 토해내며 우렁차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

"아하하하! 아하하! 이거 진짜 장난아니네요오오!"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콰앙!

어느새 남쪽 인프라 위에 도착해 서 있던 소녀가 날뛰는 대지와 요동치는 촉수들을 내려다보며 크게 웃었다.

자신의 몸 내부뿐만이 아니다.

군락 전체에서, 대지와 벽 모든 곳에서 생명이 넘쳐흐르고 있다.

단순히 여왕께서 태어나신 것 하나만으로!

우매하던 존재들이 모조리 다시 태어나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로 변모한 느낌이다.

"아하하. 그 늙은이가 왜 그리 여왕 여왕 하는가 했더니... 이유가 없는 게 아니었네요."

콰아아아앙!

더욱 강력해진 군락에 의해 멈춰서고 으깨지고 있는 고철 상자를 보며 소녀가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 하."

웃음을 멈춘 소녀가 한없이 불쾌하다는 눈으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그런 소녀의 눈동자에는 절망과 분노, 광기마저 뒤섞여 있었다.

단 한번의 발현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결코 여왕이란 존재를 뛰어넘을 수 없다.

아무리 커다란 야심이 있고 스스로 자신감이 넘친다 하더라도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존재의 격, 방금 한순간 그녀는 그걸 깨달아 버린 것이다.

"씨발. 씨발. 그냥 발치의 시녀라 이거지요. 아무리 강해지려 노력해도."

콰아아아아앙!

내리 찍혀 천천히 우그러져가던 강철의 성을 바라보던 소녀가 작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아무리 벌레 놈들을 죽이고 먹어 치워도 이 기분은 풀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분을 풀려면 뭐라도 해야 한다.

그렇기에 소녀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물을 훔쳐내고 버둥치는 성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부수기엔 녀석들에게 너무 편안한 죽음이 된다.

강철의 관에 감싸여 포근히 죽는 것 아닌가?

그럴 순 없다.

낱낱이 해체하여 포장을 벗겨낸 뒤 안에 숨어있는 놈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최대한의 고통을 안겨 주리라!

콰드드드득!

소녀가 앙증맞은 손을 움켜쥐자 거대한 군락 전체가 반응하며 부르르 떨어 울렸다.

그 끝에 자라난 촉수들이 더욱 힘을 주어 강철의 요새를 쥐어짰고 병종들이 끝없이 그 틈새로 달려들어 둘러싼 장갑을 해체하려 두들겼다.

그 모습에 소녀가 아주 조금 더 만족스러워진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때.

키이이이이이잉!

갑작스레 우그러지던 거대한 강철 관짝이 기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표면.

"뭔..."

소녀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키이이이이잉...

치이이이이이이이익!

"캬아아아아아아악!"

“쿠아아아아악!”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동 요새의 표면, 그와 더불어 모조리 지져진 촉수의 통증을 생생히 이어받은 소녀가 온몸에 열락처럼 피어오르는 화상과 함께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은 이 군락을 통솔하며 감각을 공유한다.

어찌 보면 권능에 가까운 힘을 얻은 것에 대한 유일한 대가이자 리스크였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거대한 군락에 비교하면 벌레 녀석들의 공격은 모기가 물어뜯는 것 마냥 하찮고 나약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들과 그걸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쥐고 있었던 촉수들.

덕분에 맨손으로 달아오른 석탄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만큼의 격통을 느끼고 말았다.

최악은 신경계가 망가지고 반사 작용이 잘못 작동해 촉수들이 놀라 떨어져 나가긴커녕, 더욱 꽉 강철 덩어리를 움켜쥐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소녀의 자그마한 전신에 피어나는 통증은 더욱더 심해져 갔다.

특히 손에!

타타타탁...

"끄윽... 끄으으윽... 안돼..."

화상을 입다 못해 타올라 흐물흐물해져 가는 양손을 바라보면서도 소녀가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건 그저 <전조>일 뿐이다.

무언가 커다란 해일이 휘몰아치기 전 생겨나는, 그런 종류의 현상 말이다.

'나를 지켜라.'

명령을 내린 순간 인프라를 감싸고 있던 촉수들이 기괴하게 요동치며 소녀마저 휘감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욱 강하게, 더욱 단단하게.

콰드드드득!

콰득!

유연하던 근육이 경화하며 갑각처럼 굳어갔고 내부의 조직들이 돌처럼 단단하게 변해갔다.

순식간에 소녀와 인프라를 뒤덮으며 생겨난 건 한 개의 거대하고 두터운 돌벽이었다.

수십 개의 촉수가 뒤엉켜 생겨난 군락 안의 새로운 유기 조직이 인프라의 주요 부분 구석구석과 소녀를 감싸 안으며 보호했다.

그 어둠 속.

"하하. 좋아. 후우. 일단 어떻게 할지 상황을 보고..."

한숨 돌린 소녀가 자신을 감싸는 포근한 칠흑의 장막 속에서 숨을 돌리며 다음 대처를 생각하려고 했다.

이 정도라면 어떤 공격이 퍼부어져도 일단 시간은 벌 수 있다.

그다음에 자신의 턴을 가져오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

쩌걱.

기이한 소리와 함께 하반신에 시원한 감각이 휘몰아쳤다.

그 괴상한 감각과 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본 소녀가 눈을 꿈벅였다.

자신의 하반신 아래와 그 밑, 인프라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감싼 조직과 함께, 거대한 구멍이 뚫린 채로 마치 인지할 수도 없는 속도로 내질러진 거대한 포탄이 관통하고 지나간 것마냥.

까드드드득.

고개를 돌려보니 분명 <저쪽>에 있었어야 할 커다란 강철 덩어리 요새가 전신에서 증기를 뿜어내며 인프라, <반대쪽>의 군락 외벽에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옭아매던 촉수, 인프라, 이를 감싸던 방벽, 그 가운데의 숙주들과 살점.

그사이에 걸린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지워버린 채, 심지어 자신의 하반신마저 사라져 있었다.

"하하. 진짜..."

소녀가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전.

콰콰콰콰콰콰콰쾅!

콰쾅!

관통당한 인프라가 그대로 폭발하며 소녀와 주변 조직을 화염으로 휘감았다.

**

콰르르릉...

"!"

남쪽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 이에 숨을 헐떡이던 카인이 고개를 들어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치솟는 화염과 동시에 살짝 색을 잃어가고 말라붙어가는 군락 전체가 보였다.

이는 분명 좋은 신호다.

동쪽뿐 아니라 남쪽에서도 성공한 것이다.

"허억... 후욱... 나도... 제대로 해야지..."

철퍽이는 피 웅덩이에서 발을 뗀 소년이 이제는 거진 가까워진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중앙, 저택.

자신의 동생이자 이곳의 여왕이 있을 장소.

피어오르는 저 화염이 북쪽, 자신을 피신시켜준 이들이 지금도 싸우고 있을 그 장소에서 터져 나왔었다면 좀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사치일 뿐이었다.

당장 중요한 건 자신의 동생을 멈춰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바람을 들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저 너머 우뚝 솟은 저택의 앞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작은 인형의 보였다.

에멜.

소중한 자신의 혈육.

"에멜!!!"

남은 힘을 쥐어짜 버럭 소리친 소년이 피 웅덩이를 철벅거리며 지나 자신 쪽을 바라보는 소녀에게 달려갔다.

비록 주변 이들은 모두가 바보짓이라고 말렸지만, 자신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에멜이라면, 자신의 동생이라면 자신을 마주치는 순간, 이 참극을 멈춰 세울 것이다.

설령 생각대로 되지 않더라도 망설이는 정도의 반응만 보여줘도 충분하다.

실제로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동생은 살포시 웃고 있었으니.

'잠깐. 웃고 있다고?'

순간 다가가던 카인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동생은 이런 지옥도 속에서 웃고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것도 저렇게 해맑게, 행복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 깨달음이 미쳐 뇌리에서 발길로 전해지기도 전.

쩌어어어억!

자신을 가리킨 소녀의 손가락, 그 끝을 시작으로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광범위하고 빠른 공격.

'아아. 나는 무엇을 기대했는가?'

눈을 부릅뜬 소년이 닥쳐올 운명에 속으로 한탄하던 순간.

쿠웅!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후우. 도착.>

하늘에서 내려앉아 방패처럼 우뚝 서며 공격을 막아선 거대한 강철의 기체, 그 등장에 소년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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