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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도는 그냥 버티면 된다고?"
슈슈슈슉!
콰콰콰콰콰콰쾅!
현란하게 휘둘러지는 칼, 이에 의해 퍼부어지는 폭격과도 같은 피의 칼날들에 두들겨 맞고 있는 상대를 보며 청년이 으쓱했다.
죽어가는 중에도 떠들어대기는.
그럼 이렇게 시간을 끌면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혹시 네가 사방에 보낸 그 부스러기들을 믿는 건 아니겠지? 안타깝지만 거기에도 다 나 같은 녀석들이 가 있단다. 아 물론 나보다는 좀 천박하긴 하지만 말이야."
콰아아아아아앙!
칼날을 휘몰아치며 청년이 다시 한번 웃었다.
당장 이 근방, 동쪽에도 그 게걸스러운 녀석이 있다.
먹는 꼴이 하도 추잡스러워 친하게 지내고 싶지는 않지만, 강함 자체는 자신과 비슷한 녀석이다.
심지어 스스로 종을 자처하는 그 노친네와 서쪽과 남쪽, 두 방향을 동시에 담당하는 그 꼬맹이는 말할 것도 없다.
말하자면 이 상황에 변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대로 칼날로 짓뭉개 죽여주마.'
쿠쿠쿠쿠쿠쿠쿵!
압사당할 것 같은 위력의 칼날을 뽑아내며 흑색의 기체를 몰아치던 청년이 스산한 미소를 끌어올리던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저 멀리, 동쪽에서 들려온 아련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스스스스.
"무슨!"
갑작스레 색이 훅 옅어지는 핏빛 칼날들에 청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동쪽.
쿠르르르르릉...
거대한 굉음, 그리고 화염과 함께 영양 공급 인프라 시설 전체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녹아내리는 살점들, 흉측하게 타들어 가는 근육들과 그 아래 자리 잡은 채 녹아내리는 금속 시설물.
키이이잉...
푸슈슈슈슉!
군락에 의해 감염된 채 콜로니 깊숙한 곳에서 흡혈귀들을 위해 쉴새 없이 양분을 뽑아 올리던 파이프와 펌프들이 모조리 작동을 멈추고 이에 따라 꿀렁거리며 온 사방으로 혈액과도 같은 액체를 내보내던 두꺼운 혈관들이 꿀렁거림을 멈추며 왈칵와칵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끄으으으윽... 끄르르륵... 꺼거거걱..."
"쿨럭."
두 명의 존재가 마주한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무언가 커다란 것에 베어 물린 채 오른팔이 날아간 그라함과 말 그대로 전신 구석구석이 터져 나가 너덜너덜해진 채 온 내장을 드러내고 있는 중년 사내였다.
그라함의 상태도 좋지는 않았지만, 중년 사내의 꼴은 처절하다고 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마치 피부 아래 폭탄을 집어넣고 동시에 터트려 거죽 위아래를 모조리 날려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전후좌우, 사방.
사내의 몸뚱이와 사내의 입 역할을 동시에 해주던 주변의 구조물들이 모조리 폭발에 휩쓸려 날아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중년 사내는 지금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
"대체... 어떻게... 폭탄은... 다... 먹어치웠... 는데... 네 수하... 놈들... 도."
전신의 기괴한 입이 모두 날아간 중년 사내가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머리통으로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 말대로 폭탄도, 녀석들도, 구조물을 터트리려는 것들은 모조리 먹어 치우고 그 과정에 반항하는 녀석들의 수하도 모조리 집어삼켰다.
벽면, 복도, 천장.
이 모든 공간이 자신의 몸뚱이였으며 온 사방이 자신의 입이었으니까.
벌려 삼키기만 하면 되는데 어려울 리가 없잖은가?
그리고 실제로도 자신은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으며, 이제 남은 것은 눈앞의 한 놈 뿐이었다.
한데 갑자기 일어난 대폭발.
"끄륵..."
피가 철철 흐르는 자신의 몸뚱이와 주변, 박살 난 건물의 살점들을 보며 중년 사내가 가래 끓는 소리를 토했다.
온 사방에서 일어난 폭발이었기에 구조물과 자신이 모조리 날아가 치명상을 입었다.
이제 죽음은 정해진 상황이었고 중년 사내는 궁금할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마법을 부린 건지.
그런 중년 사내를 향해 남은 왼팔로 칼을 들고 걸어오던 그라함의 한마디.
"우리 몸과 혈액 자체가 모두 폭탄이니까. 비상시를 위해 준비된."
키이이잉...
그라함이 검은색 검기를 피워내며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자신들은 암무대로 임명받은 순간 각종 다양한 비술과 기예들을 익힘과 동시에 한 가지의 비공을 온몸으로 준비하기 시작한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폭약을 섭취하며 특유의 뇌문을 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완성되는 하나의 강력한 비수.
뇌폭자공.
잡혔을 때조차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 위한 암무대의 한방이었다.
자신들의 혈액은 그야말로 흘러 다니는 폭약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인프라를 파괴하기 위해 설치한 폭탄보다 위력이 훨씬 더 강력했다.
그리고 녀석은 그런 자신들을 자그마치 <80명> 분이나 삼켰다.
그렇게 삼킨 자신들 암무대의 혈액들이 온 사방의 구조물 전체를 구석구석 돌아다닌 것이고, 그렇기에 임무는 성공한 것이다.
쿠구구구궁...
“키이이이익...”
녹아내리고 불타오르며 비명을 토해내는 살점들, 그 아래 망가지는 인프라들을 본 그라함이 비척거리며 쓰러진 중년 사내의 앞에 온전히 선 뒤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이윽고.
쩌저저적...
"이럴... 줄... 알았으면... 아껴 먹지 말고... 네놈도 삼킬... 것을..."
"닥쳐라."
퍼억!
바닥에 굴러다니면서도 주둥이를 멈추지 않는 머리통을 밟아 으깬 그라함이 이내 소매를 조여 왼팔의 상처를 질끈 동여맨 뒤 불타오르는 사방을 바라보았다.
수하들의 무덤이라도 작게 만들어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가 없다.
다른 방향으로 간 이들을 돕건, 혹은 탈리만 공을 찾건.
둘 중 무엇을 선택하건 일단은 움직여야 할 상황이었다.
"..."
불길 속에서 잠시 고민하던 그라함이 이내 심호흡을 하고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녹색 신호탄을 꺼냈다.
탈리만 공과 자신만이 사용하는 신호탄으로, 이는 암무대의 비상 집결 신호였다.
만약 살아 계신다면, 분명 이를 보고 불빛이 터져 나온 곳으로 찾아오실 것이다.
물론 탈리만 공만 찾아올 것은 아니겠지만.
“그르르륵...”
“거어어어어어억...”
불타오르는 인프라 주변, 여전히 건재한 살점의 도시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구울 숙주들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라함이 하늘로 손을 들고 신호탄을 작동시켰다.
이윽고.
피이이잉...
파아아아아아앙!
"... 10분. 10분입니다. 그 안에 찾아오셔야 합니다. 공."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최대한도였다.
잠시 후.
타타타타타탁!
“구어어어어어어억!”
쩌어어어억!
미친 듯이 달려들어 점프하는 구울들, 그중 가장 앞의 녀석을 허공에서 베어버린 일격을 시작으로 그라함의 오른손의 칼이 쉴새 없이 시커먼 검로를 그리며 주변을 사정없이 잘라내기 시작했다.
**
중앙.
콰드드드드드득!
쿠득!
"크흐. 어이가 없구나. 너희 같은 벌레 놈들한테."
거대한 칼날에 몸뚱이가 통째로 으깨진 청년이 마지막 한마디를 비웃듯 중얼거렸다.
영양액의 공급이 끊긴 순간 흐릿해지며 옅어진 피의 칼날과 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수백 개의 거대한 칼날들을 동시에 유리창마냥 박살 내며 날아든 검의 채찍의 일격.
그 한방에 이 꼴이다.
아무리 흡혈귀의 육체가 강력하다 한들 권능 없이 저 무식한 출력의 쇳덩어리를 버텨내 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청년의 앞으로.
키이잉.
철컹.
촤르르르르륵!
늘어났던 칼날을 촤르륵 회수하며 결합시킨 뒤 철컹철컹 걸어온 흑색 거체에서 덤덤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적당히 까불라니까 그러게. 운 좋게 태어났으면 어디 분위기 보며 숨어 지낼 것이지.>
"쿨럭..."
<하여간 잘 가라.>
그게 마지막.
패자의 거창한 저주도, 승자의 기세 찬 비웃음도 없다.
쿠우우웅!
콰득!2.
발을 들어 단번에 청년을 밟아버린 흑기사, 그 안의 강태석이 이내 숨을 고르며 출력을 확인했다.
남은 출력 65%.
아무리 초창기, 군락이 왕성하고 흡혈귀들의 권능이 왕성할 때의 전투였다고 하여도 생각보다 많은 출력을 낭비하였다.
마력은 여유가 있다지만 흑기사의 소환이 풀리면 전투력이 급감할 것을 가정할 때, 출력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좀 더 힘을 내주면 좋겠는데.>
“쿠어어어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던 격전이 끝나자 다시금 몰려들기 시작하는 사방의 온갖 거대한 중대형 마수들을 보며 강태석이 다시 칼을 치켜들었다.
동쪽은 잘해주었다.
이제 남은 곳은 세 곳.
서, 남, 북 방향.
실제로 아까 전에 비해 몰려들던 병력의 질과 양이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감소했다.
한 군데만 더 끊어 주기만 해도 제법 출력의 여유를 남긴 채, 그러니까 마지막 전투를 위한 힘을 비축한 채 산실까지 도달할 수는 있는 상황이 되었다.
바꿔 말해 나머지 세 군데가 지금처럼 군락에 꾸준히 영양소를 공급한다면 산실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것이다.
하여간 지금은 오직 싸우는 데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곳에서 자신이 병력들의 시선을 끌어모으지 않는다면, 다른 세 곳의 성공은 더욱 힘들어진다.
잠시 후.
콰아아아아아아앙!
“그어어어어억!”
달려드는 크기 17m 거인의 발목을 날려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몰려드는 거체들의 속에 포위된 강태석의 격전이 시작되었다.
**
북쪽.
쿠구구구...
"동쪽은 성공했나 보군."
서쪽 결사대를 이끌던 사내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쪽 방향을 반색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자신들이 있는 곳은 지옥 한복판 그 자체였다.
“그어어어억...”
“우아아악! 죽어!”
투타타타타!
엑소슈트와 보병용 중장갑으로 무장한 이들이 쉴새 없이 건물과 살점 사이에서 기어 나오는, 통째로 숙주가 된 로블롭의 시민들을 상대하며 괴성을 내지르고 분투하고 있다.
이미 사람들은 본인, 적들, 혹은 바닥의 살점 덩어리들로 인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내며 착실히 서쪽의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쪽 팀의 임무 성공은, 자신들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더불어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현재 착실하게 자신들 분대에 합류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위님. 현재 600명가량의 생존자들이 합류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마 2,000명 이상의 생존자들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훌륭해. 그들에게 무기와 비상 물자를 보급하고 전투에 합류시키도록. 혹시나 감염된 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철저히 검사하고!"
"네. 알겠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와중에도 사내, 대위를 향해 존경 어린 굳건한 눈을 거두지 않은 수하가 경례를 끝내고 보고를 마친 뒤, 대위의 명을 수행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투타타타타타타!
점점 더 늘어나는 생존자들과 무장병력들을 보며 대위, 라스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스로 가장 위험한 북쪽으로 간 카르멘과 특전대들이라면 몰라도 남쪽으로 간 유력가의 일원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이 급박한 상황에도 최대한 입구와 가깝고 덜 위험한 곳으로 가겠다고 남쪽을 우겨댄 녀석들이니.
즉 자신들, 군부대가 잘 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다.
어느새 목적지인 서쪽 인프라가 코앞이었으며 합류한 생존자들 역시 큰 힘이 되어주는 상황이다.
기본적으로 무기만 없었을 뿐, 이제까지 살아남은 뇌종의 국민들은 모두 강인했으니 말이다.
"베르트... 더러운 겁쟁이 같으니. 잊지 않으리."
적통 파벌로써 국가에 충실할 의무를 잊지 않고 안으로 수하들과 들어온 라스탕 대위가 떠나간 중립 세력의 비겁자를 떠올리며 중얼거리던 그때.
스윽.
"안녕하세요오오오오."
"...?"
철컥.
자신의 앞에 나타나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어대는 소녀의 등장에 라스탕이 바짝 긴장을 끌어올리며 손의 레일건을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