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93화 (193/221)
  • 193

    쿠르르릉!

    "... 대체 뭐야 저게."

    넝마를 뒤집어쓴 채 고철 지대를 헤매던 사내, 파스멜이 수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거대한 살덩이 구조물을 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간신히 암무대의 포위망을 피해 도망쳐 나왔다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 호프만 그 녀석은 이걸 알고 있었던 건가.'

    죽어버린 칼자국 사내이자 자칭 후배의 마지막, 떠나라던 한마디를 떠올린 파스멜은 이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민 지대 구석, 이미 이변은 시작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구어어억...”

    “커억...”

    자신이 팔았던 앰풀을 물에 끓여 넣고 다 같이 들이마시던 난민 녀석들이 벽을 붙잡고 입뿐 아니라 눈, 코, 귀, 항문 등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조리 피와 체액을 토해내고 있었다.

    단순히 피뿐 아니라 녹아내린 내장까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액체들.

    그렇게 마치 구울마냥 온몸의 액체란 액체를 모두 뿜어내고 있는 사람들의 발치, 녀석들이 토해낸 액체가 스물스물 번지고 땅 아래로 파고들며 주변으로 기묘한 향기를 풍겼다.

    냄새는 달콤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역겨운 광경이었다.

    파스멜은 어릴 적부터 가난한 빈민촌에 살며 온갖 꼴을 다 보며 살았다.

    그렇기에 당연히 사람이 죽어가며 풍기는 냄새와 배 안에서 풍겨오는 내장과 내용물의 구역질 나는 향 또한 안다.

    한데 그런 것들이 뒤섞여 나온 곳에서 달콤한 향이 풍긴다?

    그게 정상일 리가 없잖은가?

    그리고 이를 느낀 건 파스멜만이 아니었다.

    “어어 이씨... 뭐야 이거.”

    “허어어억...”

    주변, 돈이 없거나 정보가 늦어 앰풀을 복용하지 못했던 난민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기현상에 주춤거리며 향기가 나는 곳으로부터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지옥의 전조를 알리는 증상으로 느껴졌기에.

    잠시 후.

    타타타타탁...

    “우아아아아악!”

    고철 더미에서 자신들의 짐을 가까스로 챙긴 난민들이 우르르 달콤한 향을 피해, 저 멀리 솟아난 둥근 구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먼 곳으로,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도 청명하게 빛나고 있는 바닷가를 향했다.

    그리고 그 속.

    꾸득.

    "미쳤구나. 세상이 미쳐 돌아가."

    품속의 비수를 한번 다잡은 파스멜이 이내 한탄을 내뱉었다.

    호프만이 죽었고 하나뿐인 누이는 도주를 시도하다 살해당했으며, 조직은 결딴이 났다.

    그 속에서 떠올랐던 건 오직 하나,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것으로 여겨진 사내와 두 소년 소녀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니 그조차도 허망하게 보인다.

    이미 세상이 지옥인데, 누굴 지옥에 처넣겠다는 말인가?

    "그래... 살자. 살아."

    호프만의 말을 떠올린 파스멜이 품에서 손을 빼고 이를 악물었다.

    바닷가로 도망쳐서 배를 찾아보면 어떻게든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타타타타탁.

    넝마를 두른 파스멜이 인파에 뒤섞여, 바다 쪽을 향해 내달렸다.

    **

    강태석의 천막.

    "..."

    "......"

    갑작스런 사태에 혹시나 하여 모여든 이들이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 눈을 꿈벅거렸다.

    나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카르멘이나 그라함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게 대체 뭐죠?"

    저 멀리 솟아난 구체를 바라보던 카르멘이 고개를 돌려 옆,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는 칸헬을 향해 물었다.

    이유는 하나, 표정이 묘하게 복잡해 보이는 게 뭔가 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모른다면 자신들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야 마땅하니 말이다.

    망연자실,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표정 말이다.

    실제로 실무팀을 비롯한 여럿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이 사태에 대해 알기에 바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위급 상황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카르멘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태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군락이다. 흡혈귀들의 둥지 같은 거지."

    "... 제가 아는 흡혈귀들이랑은 조금 다른 거 같은데요. 목을 깨물면 감염되고... 뭐 그런 것 아니었어요?"

    그 말에 강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도시 전설이고. 도시에서 공포가 될 수준의 전설. 진짜는 조금 수준이 다르지."

    환상과 멸망의 세계.

    그 속에서 강대함을 뽐내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물량, 강대함, 특수함.

    하나씩 물어 변이되는 흡혈귀 따위는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모름지기 군단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특성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눈앞의 것이 이를 달성해낸 녀석들의 결과물이다.

    군락.

    자신들의 성수로 감염시킨 일반 숙주들을 재료 삼아, 주변의 대지와 영양액을 감염시킨 뒤 이를 기반으로 세워낸 거대한 피의 둥지.

    대지에 뿌리와 혈관을 내린 저 아늑하고도 강력한 구조물은 끊임없이 영양액을 빨아들이고 특수한 효소를 생산하며 내부에서 대량의 군대를 만들어내고 특별한 흡혈귀 귀족들을 태어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을 감염시키고 내부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역할은 덤이다.

    즉 저거 하나만 있으면 말 그대로 흡혈귀와 휘하 일반 숙주들을 말 그대로 수만, 수십만 단위로 <찍어낼 수> 있다.

    끝도 없이, 해일처럼 몰아칠 수 있게 말이다.

    시체와 전염병을 부리는 진목시왕의 영역 확장과는 또 다른 방식이다.

    물론 진목시왕도 일정 이상 세력이 구체화되면 거대한 공동묘지 형식의 구조물, 카타툼을 세워 고급 병종들을 미친 듯이 찍어 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상황이 더욱 안 좋다.

    저건 흡혈귀판 마이너팩토리와 같다.

    이제 내버려 두면 끊임없이 안에서 무언가를 <생성>해내며 주변을 집어삼킬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태석을 향해 걸어오며 호언장담하는 누군가가 보였다.

    "그래 봤자 살점 따위로 이루어진 것 아닌가! 그냥 바깥에서 모조리 찢어 분쇄해버리면 되지!"

    "누구지?"

    "으하하! 적통이란 자가 아직 소식에 무디군. 3군단을 지휘하고 있는 베르트라고 한다."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며 걸어오는 곰상의 사내, 베르트가 가슴을 텅텅 치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그는 지금 매우 기분이 좋은 상황이었다.

    '이게 웬 떡이야? 단번에 실권자가 될 수도 있겠는 걸.'

    베르트가 저 멀리, 수도를 집어 삼켜버린 붉은 살점 덩어리 구체를 마치 기특한 애완동물마냥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왜 아니겠는가?

    적통 쪽의 1군단, 신흥 쪽의 2군단과 다르게 3군단은 자신과 같은 중립 유력가들이 다수 포진하여 이루어진 군단이었다.

    하지만 군대의 규모도, 지원 세력도, 명분도 밀리는 탓에 언제나 1, 2군단에 밀려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다만 중립이라는 특성상 경쟁하는 둘 사이를 저울질할 수 있었기에 발언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지.

    한데 방금 전의 사태로 상황이 달라졌다.

    검공이고 적통이고 신흥이고 모조리 저 거대한 구체에 집어 삼켜져 버린 상황이다.

    1, 2군단은 현재 지휘체계가 무너져 혼선이 왔으며, 온전히 통제 하에 놓인 건 오로지 자신의 3군단뿐이다.

    이때 자신이 비상사태라는 명목으로 모조리 지휘권을 흡수하고 저 거대한 구체를 통째로 지워버린다면?

    권한도, 명분도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

    거기에 겸사겸사 적에게 사로잡혔을 구적폐 세력 녀석들도 모조리 지워버리고.

    그렇다면 이 거대한 군대라는 힘이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애송이야 뭐... 군대만 쥔다면 아무것도 못 하지.'

    ... 라는 눈으로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베르트의 말에 강태석이 혀를 찼다.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으리.

    강태석 본인도 인명 피해니 뭐니 하는 것 보다 최선의 결과를 중시한다.

    당장 저 군락을 파괴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저 안에 있는 이들은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면 군락의 형성이 거슬릴 리가 없다.

    "한번 확인해봐라. 지금 무기들이 제대로 작동하는 상황인지."

    "뭐?"

    강태석의 말에 베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뭔가를 아는 것마냥 자신의 좋은 기분을 초치는 상대의 말이 심히 거슬렸기에.

    하지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지. 이미 내 휘하 지휘관들이 준비 중이었거든."

    쿠르르르르릉!

    저 멀리 위용을 뽐내며 떠 있는 금속섬들을 바라보며 베르트가 다시 한번 크게 미소 지었다.

    시간은 금.

    자신만이 멀쩡하게 지휘 가능한 이 시점, 최대한 신속히 군대를 준비해 공격을 퍼부어야 한다.

    말 그대로 비상사태이니까.

    설령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곤란하며, 어차피 자신이 공격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상황은 더욱 긴급해지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영향력과 세력은 커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소도 잠시.

    "장군님. 잠시..."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온 지휘관 중 하나가 베르트의 귓가로 다가와 빠르게 속삭였다.

    들리지 않게, 아주 작은 소리로.

    하지만 표정만큼은 심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전해 들은 베르트가 순간 얼굴을 꿈틀거렸다가 이내 표정을 다잡았다.

    "크흠. 3시간 이내 출격할 것이니 다들 맞춰서 준비하도록. 특전대와 암무대도..."

    "작동 안 한데지?"

    "..."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가려던 베르트가 강태석의 말에 멈칫했다.

    그런 베르트를 향해 옆에 선 그라함이 조용히 물었다.

    "베르트 공. 정확히 말해주십시오. 전시 상황에서 일부러 정보를 잘못 전달하는 건 즉결 처형감입니다."

    "... 말이 너무 심하군."

    "저희 일이 그것이니까요."

    그라함이 자신의 허리춤의 칼을 매만지며 스산하게 웃었다.

    장군이라고 하지만 탈리만 공 직속으로 활동하는 자신의 지위는 베르트에게 밀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

    베르트같은 자가 허튼수작을 부리면 목을 쳐버리는 게 자신의 일인 것이다.

    기강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 이오스와 카르멘의 특전대와 다르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라함의 말에.

    "크후. 잘못 전달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빠르게 재정비를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니까."

    "어떻길래 그러죠?"

    "... 기판과 내부 구조물들이 모조리 눌어붙고 녹아내렸다고 하더군. 병사와 지휘관들 수천 명이 실종되었고."

    이에 주변 이들의 표정이 실로 참담해졌다.

    조종이 불가능하면 아무리 많은 전차와 포탄이 있어도 의미가 없다.

    수리가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지금 저 거대한 군대 전체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 속, 강태석이 혹시나 하던 가능성 하나를 조용히 접어 내렸다.

    일단 성수의 감염이 시작되면 근방, 이를 들이킨 모든 생명체들이 오직 군락의 방어와 건축을 위한 재료와 도구가 된다.

    그리고 위협적인 적은 마비시키는 작업을 병행한다.

    앰풀을 들이킨 일반 숙주들이 모조리 인간부식폭탄 역할을 하며 적재적소에 들이받아 군대를 마비시킨 것이다.

    잘 찾아보면 메탈스파이더나 엑소슈트같은 것들은 작동되는 것들이 남아있겠지만, 마울러나 초대형병기 같은, 군락을 위협할 수 있는 핵심 병력들은 모조리 망가져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방법은 둘 중 하나뿐이다.

    도망치거나 맨몸으로 쳐들어가거나.

    그리고 솔직히 추천은...

    '여기서 그냥 다 끌고 도망가자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려나?'

    심각한 표정으로 갑론을박을 진행 중인 이들 앞, 강태석이 저 너머의 군락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