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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90화 (1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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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철성, 창고 구석.

    "이야. 대박이네. 흘리고 간 게 이정도야? 바깥의 그 무법자 놈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쉿. 조용히 해. 시끄럽게 떠들 내용 아니잖아."

    "뭐 어때. 다 같은 동료인데."

    창고 구석구석을 뒤지던 치안 대원 겸 조사 대원들이 누군가의 말에 히히닥거리며 웃었다.

    그들도 안다.

    이곳이 블랙네트워크 녀석들의 지부라는 것을.

    하지만 뭐 어떻단 말인가?

    양 파벌 놈의 우두머리 유력가라는 것들은 제 배 불리기에만 바빠 월급도, 보급도 짜디짜기가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악의 무리라는 이놈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을 편들어주고 세심하게 신경 써준다.

    지갑 좀 비어 보일까 봐 두둑하게 찔러 넣어주고,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부탁 좀 하면 자신들의 일처럼 처리해주고, 가끔씩은 여자와 술을 대접하며 이 고철의 도시에서 향락을 즐기게 해주는 등 말이다.

    자신들이 누가 더 예뻐 보이고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겠냐... 이 말이다.

    이번 조사도 결국 형식일 뿐이다.

    아니, 조사라기보다는 블랙네트워크를 위협하는 놈들에게 철퇴를 내리고 녀석들을 보호하기 위한 출동에 가깝다.

    물론 그래도 형식적인 일 처리는 필요하니 불법적인 무언가 없나 살피고는 있지만 역시나 철저한 녀석들이다.

    위험한 물건들은 깔끔하게 빼돌렸으며 자신들을 생각한 건지 돈 되는 물건들은 적당하고 두둑하게 남겨두고 갔다.

    분명 이곳 창고 어딘가에 비밀통로가 있겠지.

    하지만 그걸 자신들이 왜 궁금해해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모르는 게 더 속 편하다.

    "자자. 적당히 다들 끝냈으면 가자고. 벌었으면 써야 도시를 사랑하는 참된 시민 아니겠어?"

    "으하하하!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네! 저놈 입에서 맞는 말이 나올 때가 있다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크흐흐. 네 녀석보다 내가 항상 똑똑하고 올바랐다구."

    한 조사 대원의 말을 시작으로 조사하던 이들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손을 떼고 차례대로 창고 입구 쪽으로 모여들었다.

    어차피 챙길 건 대충 챙겼고 조사는 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이렇게 돌아가고 빠르게 퇴근하여 이 돈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그렇게 그들이 물러나려던 그때.

    “아아아아아아악...”

    "...!!"

    창고 한쪽, 대체 어딘지 모를 벽면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물러나던 이들의 표정이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잘못 들었나 해서 무시하고 발을 떼 보려고 고민도 했지만, 또다시 들려오는 비명.

    “꺼억...”

    “우아아아악...”

    "아 염병 진짜. 이 병신같은 새끼들이."

    "하."

    철컥.

    물러나던 이들이 이를 빠득 갈며 손에 들린 레일건을 다잡고 비명이 들려오는 벽면 어딘가로 다가섰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봐줄 수 있는 건 <아무런 증거>가 없을 때이다.

    만약 이렇게까지 들려왔는데 무시하고 떠난다?

    사람의 입은 완전히 막을 수 없다.

    누군가 술이라도 먹다가 자신들이 임무를 소홀히 한 걸 떠들어댄다면 이는 즉시 자신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번져나갈 것이다.

    그렇게 번져나간 소문이 <검공>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자신들은 그 즉시 끝장이다.

    검공을 비롯한 적통 파벌의 높으신 양반들이 직무유기를 저지른 자신들을 감히 내버려 둘리가 없을 테니.

    그게 그들이 쌍욕을 하면서도 벽면, 비밀통로가 숨겨져 있을 장소로 다가서는 이유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도망치려면 제대로 도망쳤어야지."

    "제 놈들끼리 싸움이라도 붙었나보군. 하여간 밑바닥 놈들은. 뭐해! 어서 와서 뜯어!"

    조사 대원들 모두 일반인이 아닌 초인이다.

    빠드드드드득!

    모여 힘을 쓰기 시작하자 허름한 고철 몇 장이 순식간에 뜯겨 나가고 그 뒤로 뻥 뚫린, 지하로 가는 원형의 입구가 드러났다.

    이를 발견한 순간 조사대원들의 표정 전체가 썩어들어갔다.

    혹시라도 이곳에 아무것도 없길 바랐는데 역시나.

    자신들은 이 비밀통로를 발견하고 <악의 무리> 녀석들의 범죄 현장을 잡은 공로로 소정의 포상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에게 황금알을 숨풍숨풍 낳아주던 거위의 배를 가르는 대가로 말이다.

    "쓰으벌 새끼들... 천천히 간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 그래도."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려는 조사 대원 하나가 작게 중얼거리며 어둠 아래를 바라보았다.

    이게 자신들의 최선이다.

    그나마 천천히, 티 나지 않게 굼뜨게 행동 하는 것이다.

    녀석들의 비명이 제법 멀리서 들려왔으니 녀석들 또한 제법 멀리 도망쳤다는 것이다.

    아마 운이 좋다면 자신들이 도착하기 전 녀석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 물론 정의의 편인 자신들이 아닌 범죄자 녀석들이 운 좋게 말이다.

    터엉.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조사 대원이 한발 아래로 내디딘 순간.

    서걱.

    “...끄아아아아아아악!”

    "!!!!!!!!! 염병. 다들 무기 들어!"

    철컥!

    이제는 바로 아래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내려가려던 조사 대원이 레일건을 겨누며 괴성을 내질렀다.

    **

    타타타탁...

    "어찌 된 일이지? 분명 내부에는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 않았나?"

    "..."

    "혹시 일이 잘못될 경우 엄히 책임을 물을 것이다."

    "... 알겠습니다."

    '이 돼지 새끼가 진짜.'

    치안 대장의 곁에서 함께 달려가던 여인, 지부장 파멜란이 조용히 답하면서도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그동안 받아 처먹은 게 얼마인데 엄히 책임을 물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멜란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똑같이 붙어먹은 죄목으로 걸린다고 해도 내려지는 벌은 차원이 다를 테니까.

    이 난리통에 치안 대장이라는 감투를 뭘로 거머쥐었겠는가?

    뭔가 높으신 분이랑 혈연 지연 등이 있으니 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반면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 나부랭이였다.

    자폭하겠다고 온 정체를 까발리면 몇 명 얽혀있는 높으신 양반에게 흠집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딱 거기 까지다.

    반면 자신은 괘씸죄까지 적용되어 정말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 최대한 안쪽의 상황이 심각한 것이 아니길 기도하며 내달리는 수밖에 없다.

    '하하.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기도해본 적이 없는데. 웃기네.'

    타타타타탁...

    신이 있다면 세상이 이따위 일리가 없다.

    그런 생각으로 한번도 기도한 적이 없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파멜란이 실소를 흘려내던 와중 어느새 그들은 가장 깊숙한 곳, 그리고 파멜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곳에 도착했다.

    가장 귀중한 것들을 모아두던 장소이자 비명이 울려 퍼진 곳, 바로 창고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모여 웅성이는 조사 대원들 사이, 치안 대장과 파멜란을 반겨준 것은...

    촤아악.

    "왔나? 너희들이 지금 이곳의 담당자인 모양이군."

    "!?"

    "... 어떻게 당신이."

    창고 안에 선 이를 본 치안 대장과 파멜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피범벅이 된 채 칼을 들고 선 청년.

    그라함.

    암무대의 대장이자 신흥 파벌의 주인, 탈리만 공의 칼.

    조직 특성상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지만 백으로 들어온 치안 대장이나 블랙네트워크 지부장인 파멜란쯤 되면 그걸 모르는 게 더 이상한 법이었다.

    저벅.

    "호오. 신기하군. 분명 치안 대장은 실력으로 뽑혔다고 들었고, 너는 이곳 군수 대납 업체의 대표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나를 알기 쉽지 않을 텐데."

    "......."

    걸어오는 그라함의 말에 창고 입구에 멈춰선 두 남녀의 표정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파멜란과 달리 치안 대장에게는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무슨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거니와 정당한 신고를 받고 온 것이니.

    생각을 정리한 치안 대장이 자신의 지팡이 검을 매만지며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 소문이라면 진즉에 들었었지. 답지 않게 요즘 워낙 날뛰었다는 소리를 들어서 말이야. 들으니까 그러다 부상까지 입었다는 소문도 들리던데."

    "..."

    상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걸 본 치안 대장이 속으로 웃었다.

    부자연스러운 두 종아리, 설마 했는데 소문이 진짜였을 줄이야.

    그라함정도 되는 자가 어디 가서 부상을 입다니.

    하지만 그와 별개로 치안 대장은 더이상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실력도, 백도, 지위도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자였으니, 이제 자신은 조용히 물러나기만 하면 된다.

    <명분>을 가지고 말이다.

    "하여간 무슨 일로 그리 바쁜지 모르겠지만 각자 일에 집중하자고. 나는 내 일을 마쳤으니 그만 돌아가 볼 테니 말이야."

    "내 일?"

    "그래. 여기서 난동을 피운 범죄자 놈의 압송이지. 아 마침 저기 오는군."

    포위당한 채 순순히 통로 너머로 걸어오는 상대를 본 치안 대장이 웃었다.

    그래, 자신은 저놈을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닌가?

    자신은 그냥 저놈을 데리고 가서 심문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반항하면 특전대를 불러 도와달라고 하면 그만이고.

    그리고 그렇게 통로를 지난 상대가 창고 입구까지 달한 순간.

    "어. 오랜만이네."

    "... 적통? 여기는 무슨 일로?"

    "... ??? ????????"

    여유로이 인사를 건네는 무법자와 깍듯이 대하는 그라함.

    둘의 그 기이한 만남을 본 순간 여유롭던 치안 대장의 표정이 기이하게 멈춰 섰다.

    암무대주가 존대를 한다고?

    그리고 적통?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과부하가 걸린 치안 대장이 삐그덕 거리던 그때.

    "아아.... 아아아... 진짜 염병."

    한 발 더 빠르게 이 사태를 이해한 파멜란의 입에서 더 이상 길어질 수가 없을 정도의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

    창고 밖, 천막.

    "그러니까 너희 암무대가 출동했다고? 이 앰풀 때문에?"

    "네. 탈리만 공께서는 더는 이 사태를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천막 안, 간이로 마련된 의자에 앉은 칸헬을 향해 그라함이 고개 숙이고 공손히 말했다.

    현재 수도 전체를 대상으로 소탕 작전이 진행 중이었다.

    탈리만 공이 제안했고 검공이 받아들였으며 현재 암무대와 특전대를 비롯한 정예 세력들 전원이 나서 수도 내외를 탈탈 털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목표는 홍옥이라 이름 붙여진 액체의 전원 회수 및 유통망의 전원 포획, 이후 근원의 추적 및 발본색원.

    "보니까 그냥 적당히 내버려 두고 있는 거 같더니만."

    "... 처음에는 그랬지요."

    칸헬의 말에 그라함이 할 말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칸헬의 말대로다.

    탈리만 공도 처음에는 이 미약을 내버려 두려고 했다.

    유력가 놈들이야 미약 같은 거 쓰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하나 추가된다고 문제 될 것도 없고 말이다.

    이 약 덕분에 난민들의 흥분과 광기가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수 있다면 그들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다.

    상층부에서도 경쟁이 붙을 정도의 수요 경쟁, 난민들 사이에서도 이걸 손에 넣기 위해 서로 치고받으며 싸우기 시작할 지경이다.

    한 방울로도 효과가 너무 좋고 이를 먹은 이들은 육체가 강해지며 경지가 오르는 모습까지 보였다.

    거기에 이걸 구매하느라 양지에서 음지로 빨려 나가는 온갖 물자들까지 생각하면, 이걸 가만히 내버려 두면 간신히 안정된 뇌종 자체가 흔들리게 생겼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검공과 탈리만, 적통 파벌과 신흥 파벌 모두 이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단번에 일어나 정리를 시작했다.

    그게 이 결과였다.

    "아마 바깥의 녀석들은 엄벌에 처해질 겁니다. 평상시라면 유야무야 넘어갔겠지만... 이번엔 사안이 사안이니 어림도 없죠."

    "그래그래."

    치안 대장과 지부장을 조심스레 언급하는 그라함을 향해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은 강태석이 턱을 매만졌다.

    그래, 이제 유통망이 모조리 뽑힌 건 알겠다.

    한데 그 뿌리는?

    '찝찝하구먼.'

    강태석이 하품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

    "오빠."

    "일어났어?"

    "응. 기분이 좋네."

    적통 파벌 측 의료용 천막 안에서 살짝 붉어진 눈동자로 깨어난 소녀, 에멜이 오빠 카인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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