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85화 (185/221)

185

바깥.

부스럭.

"흔적이 여기로 이어져 있다고?"

"그렇다니까요, 선배."

"..."

폐허와 고철 사이를 걷던 파스멜이 앞장선 칼자국 사내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의 선배, 선배.

자신보다 흉악하게 생긴 데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간간히 더 흉악한 놈이 저딴 식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존칭을 써대니 그야말로 안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다.

그걸 넘어 가끔씩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파작.

"야."

"네?"

"넌 대체 속셈이 뭐야. 왜 우리 조직에 들어온 거야."

자신들, 블랙네트워크를 떠올리며 파스멜이 물었다.

솔직히 자신들이 제법 잘 나가긴 한다.

돈 있고 정보 있고 인력과 인맥이 있으니까.

하지만 언제나 이런 것들은 상대적인 법이다.

자신과 누님은 블랙네트워크에서 완전 상층부 인재가 아닌, 지부장 정도에 불과했다.

심지어 블랙네트워크보다 더욱 강력한 세력은 지금 수준에서도 손에 꼽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당장 신흥 파벌 측에만 해도 떠오르는데 네다섯은 있을 정도였으니.

한데 그런 곳에도 충분히 들어갈 실력을 가진 녀석이 굳이 자신과 누님 밑에서 구르고 있다?

그것도 선배 선배 하며 극존칭을 써가며, 자신의 사업 아이템까지 공유하며?

이건 누가 봐도 수상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런 파스멜의 말에.

저벅.

"선배."

"그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각자 다 사연이 있는 법이잖아요?"

"..."

사연, 그놈의 사연.

어느새 흔적을 쫓아 200m 너머, 고철 더미까지 접근한 파스멜이 말을 던지듯 내뱉고 앞장서는 녀석의 등을 노려보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꾸욱.

고철 더미 속, 자신을 후려쳤던 녀석의 익숙한 기운을 느끼던 파스멜이 걸어가며 자신의 품속 무언가를 매만졌다.

그래, 이전에는 뭣도 모르고 당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자신도 바보가 아니니 나름 준비를 철저히 해온 상황이다.

'수틀리면 그냥 싹 다...'

중얼거린 파스멜이 이내 앞장서는 칼자국 사내를 뒤따라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향했다.

**

흠칫.

바깥에서 살짝 뻗어 나온 살기에 강태석의 앞에 서 있던 소녀와 소년이 흠칫했다.

이를 본 강태석이 이채를 띄었다.

그 정도로 훈련이 잘되어있다는 뜻이었다.

소년뿐 아니라 소녀도 어릴 적부터 계속 수련을 받아 육체를 완성시켜왔던 것으로 보였다.

준비된 육체, 거기에 준비된 혈통까지, 여기에 자신이 제대로 된 씨앗만 심어준다면?

"아너스빌만큼 빠르게 자랄 수도 있겠는데."

"아너스... 누구요?"

"있어. 너희가 골치 꽤나 썩을 수도 있는."

소년의 말에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녀석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무럭무럭 잘 자라준다면 아마 서로 머리 꽤나 아플 것이다.

이 녀석도, 아너스빌도 말이다.

하지만 그거야 나중의 이야기.

저벅.

어느새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녀석들의 기척을 느끼던 강태석이 손끝에 번개 줄기를 하나 피워 올렸다.

키이잉...

"누구부터 할래?"

"지금 해도 괜찮은 거에요?"

"한 명 정도는."

어차피 씨앗을 몸에 박아 넣으면 그 뒤로는 알아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신경 쓸 게 없다.

당장 녀석들이 들이닥칠 것이기에 두 명 다는 무리지만 하나 정도는 충분했다.

굳이 시간 끌 이유 없기에 한 명 해두고 바깥 놈들 정리하고 돌아와 다음 한 명 진행하면 깔끔하다.

그리고 그런 강태석의 말에.

"... 제가 먼저 할게요."

"네가?"

"네."

입술을 앙다물며 앞으로 나서는 소년의 모습에 강태석이 숨을 푸 내쉬었다.

사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재능은 뒤의 소녀가 더 높다.

타고난 육체나 품은 혈통, 무엇으로 봐도.

하지만 적극적인 녀석이 먼저 실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무엇보다 소년의 의기를 높이 샀다.

'수상하니까 자기가 먼저 몸으로 받아보겠다 이거지.'

치직...

자신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번개를 노려보며 소녀의 앞을 가로막고 선 소년을 보던 강태석이 웃으며 손가락을 가져갔다.

"잘 받아 내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그러며 강태석이 손끝의 번개의 씨앗을 소년의 몸 안에 가져다 댄 순간.

콰르르르르르르릉!

!!!!!!!!!!!!!!!!!!

"!!!!!!!!!!!"

작은 고철 더미 공간 속에 작은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지며 소년의 눈이 부릅떠졌다.

**

쿠릉!

"?"

고철 더미로 다가가던 둘이 저 안쪽에서 울려 퍼지는 작은 굉음에 발걸음을 멈춰 섰다.

아무리 봐도 이런 곳에서는 울려 퍼질 이유가 없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에 마주 보던 둘이 이내 좀 더 발걸음을 빨리하여 확인해보려던 그때.

저벅.

"..."

"누추한 분들이 어찌 이런 귀한 곳까지."

안에서 몸을 숙이고 스윽 걸어 나오는 상대의 말에 다가가던 파스멜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제대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순식간에 기절 시켜 버렸던 그때 그놈이다.

그런 파스멜을 향해 앞에 걷던 칼자국 사내가 물었다.

"저놈 맞아요 선배? 그 적통 쪽 꼬맹이들을 데려갔다는 게?"

"그래."

"으음. 그러면 방금 전 굉음도 그 비전인지 뭔지랑 관련 있는 것이려나."

사내의 말에 파스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저놈도 그런 기예를 노리고 온 것이라면?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추격 소식을 들은 다른 세력 놈이 계획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라면?

"이런 개 쌍노무 새끼."

"..."

"너 뭐야. 어디 소속이야. 언제부터 접근했어?"

빠득빠득 이를 갈고 접근하는 상대를 보며 이제는 되려 강태석이 턱을 매만졌다.

뭔지는 몰라도 아주 그냥 제대로 오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물론 상관없다.

"내가 한 명은 초면이니까 아주 좋은 말로 할게."

"...?"

"가라. 귀찮게 하지 말고."

"......."

"선배. 진짜 특이한 놈이네요."

앞장선 칼자국 사내, 호프만이 재미있다는 듯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었다.

그냥 이 근방에 최대규모 난민 지역이 있기에 유통 겸 겸사겸사 온 거였는데 졸지에 재미있는 놈을 만났다.

거기에 그 유명했던 뇌제, 칸헬의 후손까지.

사실 칸헬에 대한 소문은 자신의 시절에 아마 더 유명했을 것이다.

피와 번개의 군주.

'하여간 재미있는 동네라니까.'

촤르르르륵...

칼을 뽑아 들자 호프만의 검날이 가닥가닥 분해되며 순식간에 가운데, 철봉 같은 길쭉한 꼬챙이만 남기고 열두 조각으로 분해되어 허공으로 부웅 떴다.

주변으로 빙글빙글 도는 날카로운 검날들.

이를 호프만이 만족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곳, 블랙네트워크에 들렀다가 얻게 된 기계검.

자신의 적엽검예를 사용해보기에 그만이다.

"제가 먼저 할게요 선배?"

"어어?"

"뒤에서 잠시 쉬고 계시라구요."

동시에.

부우우우웅...

마치 벌처럼 시뻘건 빛에 쌓여 파르르 진동하며 떠오른 기검들이 마치 드론마냥 호프만의 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호위하듯 감쌌다.

**

근처, 난민 지대.

보글보글.

모닥불 위, 끓는 물의 주변으로 허름한 차림의 남녀 십여 명이 모여들어 빙그레 둘러싸 있었다.

얼핏 보면 추위를 몰아내거나 끓는 음식을 먹으려 모여든 것 같았지만 달랐다.

모여든 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건 허기나 추위, 결핍이 아닌 갈망이었다.

"빨리. 빨리 좀. 그거 가져왔다며. 다시."

"아 좀 재촉하지 마."

퀭한 눈을 한 여인을 향해 지저분하다는 듯 팔을 휙 털어낸, 블랙네트워크 소속의 사내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품에 있는 앰풀을 꺼냈다.

시험관 형태의 앰풀.

사내가 끝부분을 끼릭 돌리자 그 끝이 뾰족하게 솟으며 스포이트 형태로 변했고, 이를 본 사내가 그 끝을 끓는 솥으로 향하지 않고 사람들을 보며 웃었다.

"그런데 알지? 저번에는 맛보기여서 좀 싸게 해준 거고 원래 가격은 더 비싼 거."

"..."

"우리 선불이야. 알잖아. 준비 뭐 해놨어?"

사내가 즐겁다는 주변, 안절부절못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때가 가장 즐겁다.

한번 맛을 보고 도저히 끊지 못하는 이들이 값을 치르기 위해 가진 모든 을 토해내는 과정, 이걸 보려고 손수 이 거지 같은 구역을 담당하겠다 자처한 것 아니겠는가?

돈 많은 놈들은 그저 무심하게 턱턱 자신들이 봐도 기가 질릴 물건을 지불하고 거지 대하듯 꺼지라 하니 버는 건 많아도 오히려 기분이 더럽다.

자신들이 파는 건 분명 마약에 가까운 무언가임에도 오히려 너무나 익숙하다는 듯 별문제 없이 써버린다.

반면 이놈들은 다르다.

자신들이 공급하는 물건이 문제가 많다는 걸 알고 처음엔 거부하며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결국은 천천히 길들여져 노예처럼 변해간다.

그 과정에서 안 그래도 없는 살림들을 모조리 털어 값을 치르려고 발버둥 친다.

돈, 정보, 식량과 물자, 심지어 종국에는 자신의 몸뚱아리와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들까지.

'운 좋으면 재미 좀 보겠는데.'

꼬질꼬질함에도 미모를 감추지 못하는, 자매로 보이는 여자 둘을 흘긋 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은 사내가 주변, 안절부절못하는 이들을 보고 웃으며 앰풀을 찰랑거렸다.

"뭐해. 최소 거래 단위가 한 방울이라니까. 한 방울이라도 사려면 성의를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아니면 그냥 갈까? 필요 없어?"

"아... 으... 그게 저..."

어버버 거리는 이들의 모습에 사내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그래, 자신도 안다.

이런 거지 소굴에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미 쓸만한 건 저번 자신들과의 거래에 모조리 내놓았다.

한데 이제 와서 어찌 더 비싼 값을 치르겠는가.

그렇기에 결국 이들에게 남은 길은 하나다.

"큼흠. 뭐. 너희가 굳이 원한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사내가 두 자매를 보고 헛기침을 하며 본론을 꺼내려던 순간.

퍼어어억!

"꺼억..."

'...?!'

갑자기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강렬한 충격에 아찔해진 사내가 저도 모르게 헛숨을 토하며 뒤통수를 매만졌다.

묻어나오는 건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양의 피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만져지는 건 찢겨나간 머리 가죽, 거기에 으깨진 것으로 생각되는 자신의 두개골이 만져졌다.

"...!"

비틀거리며 뒤를 돌아본 사내가 시뻘게진 눈으로 커다란 돌덩이를 들고 씩씩거리고 있는 중년 남성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도 밑바닥 인생 놈들이 궁지에 몰리면 놀라울 정도로 잔혹해진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놈들 한복판에서 이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놈들은 일개 무지랭이다.

반면 자신은 검기 사용 직전까지 간, 무력 충만의 초인이다.

한데 자신의 기감을 뚫은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충격을 줄 정도로 돌덩이를 휘둘렀다고?

믿기 힘든 순발력과 괴력이다.

'대체 무슨 수로...'

하지만 거기까지가 사내의 의식의 마지막이었다.

후우우우우웅!

강렬한 속도로 재차 날아들며 시야를 가득 가리는 돌덩이, 이어지는 파열음.

퍼어어억!

퍼억!

퍼어어어어억!

중년 사내를 비롯해 주변에 있는 이들이 정신 나간 것처럼 손에 들린 돌로, 쇳덩이로, 혹은 날카로운 고철로 사정없이 쓰러진 사내를 내리찍고 으깨댔다.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던 사내가 꿈틀거리며 시체가 되어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리찍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으며, 그런 와중에도 눈이 시뻘게진 이들은 행여 바닥에 떨어진 앰풀이 부서질까 그쪽에서 몸을 피했다.

잠시 후.

"허억... 허억... 후아아아."

개운하다는 듯 얼굴을 피범벅을 하고 일어난 중년 남성이 바닥의 앰풀을 주운 후 뚜껑을 훅 돌려버리고 그대로 안에 있는 앰풀을 모조리 부어버렸다.

한 방울이 아닌, 통 전부를.

끓는 솥 안에 전부다.

잠시 후.

“후우우욱.”

"하아."

"흐아아아아아아..."

뭉게뭉게 피어나는 붉은 연기를 중심으로 모여든 이들이 몸에 묻은 피를 씻을 생각조차 안 한 채 그곳에 얼굴을 들이밀며 지극히 황홀한 듯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

고철 지대 근방.

"... 혹시 지금 장난하니?"

"응 뭐?"

"손에 들린 그건 뭔데."

빙글빙글 검기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칼자국 사내의 말에 강태석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고철 더미에서 나오며 주운 젓가락 한 쌍.

아무 문제 없다.

딱딱.

"이게 뭐."

"... 이 개자식이."

젓가락을 딱딱거리는 상대의 모습에 사내, 호프만의 눈썹이 치 꺾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