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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77화 (177/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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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막 나가는 듯한 행위에 그라함이 되레 당황했다.

    금속섬의 상황은 아무리 본인이 날고 긴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흑기사인지 뭔지 하는, 항구도시에서 선보였다는 정체불명의 기체가 있다고 해도 그렇다.

    아무리 뛰어나고 멋져도 결국 소형 기체.

    마울러는커녕, 금속섬을 우르르 둘러싼 터렛 타워들의 포격조차 견디지 못하고 박살이 나서 터져나갈 것이다.

    필연 저 섬을 제압하려면 자신 측의 화력과 정예부대들의 지원이 필수.

    자신들은 약간의 힘을 투입해 저 반란분자 같은 놈들을 싹 다 지워버리고 수도를 안정시켰다는 명분과 적통이라는 카드를 동시에 쥔다.

    그리고 테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반인들의 인명피해 등은 모조리 적통의 후계에게 떠넘겨버리면 되는 것이다.

    한데 그냥 혼자 가겠다고?

    지금 자신들을 협박이라도 하는 것인가?

    자신이 죽는 걸 원하지 않으면 순순히 병력을 지원하라고?

    하지만 천막 밖을 유유히 걸어 나가고 있는 상대의 움직임은 진짜였다.

    전혀 자신을 잡아주라는 듯 머뭇거리지 않는다.

    정말 이대로, 일직선으로 섬으로 향하겠다는 듯!

    '말려야 하나?'

    여기서 개죽음당하게 둘 정도의 패는 아니다.

    저 카드를 쥔다면 지금 불리한 적통 파벌과의 대치를 단번에 뒤집어 몰아붙일 수 있다.

    이 예측 못 한 상황에 그라함이 혼란스러워하며 당황하던 그때 그라함보다 먼저 나서 가로막은 이가 있었다.

    카르멘.

    처억.

    "미치셨습니까. 지금 어딜 혼자 가신다고!"

    "어디긴. 들었잖아. 저 섬이지."

    "죽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굳이 저 말도 안 되는 제안 따위 받아들일 필요 없습니다."

    카르멘이 그라함을 노려보다 칸헬을 보며 내뱉었다.

    저들의 제안은 강자만이 건넬 수 있는, 실로 이기적인 것.

    대놓고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카르멘의 말에 강태석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너희도 처음에는 비슷하지 않았어? 아마 지금도 대부분은 그런 생각일 거고?"

    "..."

    "괜찮아 괜찮아. 뭐라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가는 거 아냐. 그냥 혼자가 편해서 그래."

    후웅...

    후우웅...

    강태석이 손에 들린, 아까 전 대충 만들어놓았던 고철의 칼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해안가로 걸었다.

    정치 게임은 피곤하다.

    있으면 좋지만 있다고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쥐고 가지려고 하면 더욱 피곤해진다.

    하지만 이게 계속 쓸모가 있느냐?

    전혀.

    멀쩡한 세상이라면 모를까?

    멸망해가는 이 세계 속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서서히 한 가지 의문이 들고 있었다.

    <만약 세상의 끝에 가서 방주에 도달한다면, 그곳에 모두 탈 수 있는 것인가?>

    세상의 끝에 준비되어 있다는 방주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게임을 하다 현실처럼 변해버린 이 세계를 주파하고 있는 자신에게만 주어질 특권인가.

    전자라면 그나마 낫지만, 후자라면 정말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더 나아가 되려 가슴만 아파진다.

    기껏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살려 놨더니 그 모두를 버리고 혼자 탈출해야 한다면 그보다 더한 무게는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강태석은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냥 마음 끌리는 대로 하기로.

    구하고 싶으면 구하고 무심하고 싶으면 무심하고, 지금 나서기로 한 건 정말 별 이유가 아니다.

    자신이 있는 곳의 앞마당에 웬 녀석들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심히 거슬렸으니까.

    거기에 녀석들의 정체는 보나 마나...

    "내가 아는 녀석들일걸. 그냥 쉬고 있어. 얘기나 좀 하고 오지 뭐."

    "......."

    그러며 거침없이 나가는 강태석의 행보에 카르멘과 그라함이 할 말을 잃었다.

    말은 무슨 대화나 하고 오겠다고 하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기가 심상치 않다.

    아예 대놓고 들이받겠다는 분위기였다.

    순간.

    끄덕.

    끄덕.

    눈을 마주친 카르멘과 그라함이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은 달랐지만, 현재 그들의 생각은 동일했다.

    절대로 지금 칸헬을 금속섬까지 홀로 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설령 이 자리에서 공격을 퍼부어 제압하는 한이 있더라도!

    합의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행동이 벌어진 건 순식간.

    촤아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아악!

    양쪽, 서 있던 카르멘과 그라함의 허리춤에서 폭발하듯 솟구쳐 오른 두 자루의 검이 단번에 허공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칸헬의 등 뒤를 노렸다.

    번개를 휘감은 카르멘의 칼은 정확히 척추를.

    검은 뇌광을 은은하게 두른 그라함의 세검은 양다리를.

    되려 카르멘의 공격에 그라함이 당황할 정도였다.

    모시는 분이 아니었나?

    그런데 자신처럼 부상을 입을만한 부위도 아닌, 척추를 노려?

    하지만 그와 달리 카르멘의 칼날은 전혀 주춤하지도, 느려지지도 않은 채 맹렬한 기세를 내뿜으며 칸헬을 노렸다.

    그라함과 달리 카르멘은 마주한 처음부터 끝까지 칸헬을 보아왔고 덕분에 그 실력을 명확히 알기 때문!

    맨몸에선 자신보다 약하긴 했지만, 온갖 기이한 수를 부려 자신의 이상의 실력을 뿜어낸다.

    어설프게 했다가 단번에 제압은커녕 경계심만 심어줄 것이다!

    '이해하기를.'

    쩌어어억...

    내달린 칼이 닿기 직전 칼날의 방향을 슬쩍 비튼 카르멘이 검면으로 강하게 상대의 뒤통수를 후려쳐버리려던 그 순간.

    후우우웅...

    후웅...

    쩌적...

    "...!"

    "!!!!!!!!"

    "이거 설마 반역인가... 뭐 그런 거야?"

    어느 순간 뒤로 돌아선 상대.

    그와 동시에 거짓말처럼 두 동강 나 잘려 나간 자신들의 칼을 보며 그라함과 카르멘이 당황했다.

    **

    '말도 안 돼. 지금 뭐 어떻게 된 거지?'

    두 동강 난 자신의 칼과 상대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라함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분명 자신의 칼은 상대의 두 다리, 종아리 근육을 살짝 갈라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만 당분간 걷기는 힘들게.

    자신들이 만들어준 왕좌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에 딱 좋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상대의 칼이 거짓말처럼 자신의 몸조차 관통한 뒤 한 바퀴 돌아 자신과 카르멘의 칼날을 베어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상대가 돌아선 건 그 이후의 모습.

    말이 되는가?

    칼날이 스스로의 몸통마저 가르고 지나 자신들의 공격을 벤다는 게?

    하지만 엄연히 벌어진 일.

    타탁.

    거의 본능적으로 카르멘을 두고 두 발짝 물러선 그라함은 그녀를 앞에 세운 채 두 번째 공격을 준비했다.

    어차피 시작한 것, 끝장을 봐야한다.

    기절이라도 시켜야 충성이지 여기서 그치면 말그대로 그냥 암습이다!

    물러선 그라함이 다시 자세를 다잡고 재차 뛰쳐나가며 칼을 휘두르려던 순간.

    휘청.

    '...!!!!!!!!!!!!!!!!!!!!!'

    "말도 안 돼!"

    휘청인 그라함의 입에서 이번에는 육성으로 불신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이유는 어느새 베여 있는 자신의 종아리 때문.

    양쪽 모두, 자신이 베어내려던 부위의 베어내려던 깊이만큼 정확히.

    불구가 될 정도는 아니겠지만, 당분간은 허튼 짓거리는 못 할 정도로 깊이.

    그라함이 고함을 친 건 언제 자신의 칼을 베어낸 것도 모자라 자신의 종아리까지 베었는지가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앞>쪽에서 공격을 했을 터인데 어떻게 앞쪽 종아리는 멀쩡한 채 자신의 <뒤> 근육만을 베어냈냐는 것!

    심지어 앞의 카르멘은 이미 당해버린 상황.

    스르륵...

    털썩.

    "끄윽..."

    앞, 대체 뭐에 당한 것인지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린 카르멘을 보며 그 자리에서 무릎 꿇은 그라함을 향해 강태석이 걸어와 웃었다.

    눈에 스산한 금빛의 눈동자를 두른 채로.

    키이잉...

    서서히 원래의 눈동자 색으로 되돌린 강태석이 발치의 그라함을 향해 덤덤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암습같은게 아닌 건 알고 있었으니."

    "..."

    "사실 다리는 안 건드려도 될 것 같았는데, 그 정도는 해도 될 것 같아서 손봐놨다. 이래야 안 귀찮게 할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허튼짓 하지 말고 여기서 자리나 지켜."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라함을 무시하고 빙글 몸을 돌린 강태석이 특전대들 사이를 지나 섬 쪽으로 향했다.

    이미 자신들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그라함과 카르멘마저 영문도 모르게 당해버린 상황.

    특전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춤하던 사이.

    스르륵.

    그들을 완전히 지난 강태석이 유유자적히 금속섬이 보이는 해변가로 향했다.

    **

    "나쁘지 않네. 금안과의 조합이."

    쿠르르릉...

    굉음을 토해내는 금속섬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던 강태석이 자신의 손에 들린 칼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둠에 휘감긴 채 반투명해졌다, 선명해졌다가를 반복하는 검날을.

    그림자칼-인.

    이 기술을 휘두르고 상대를 공격하면 무작위로 상대의 공격과 물체를 관통하며 공격을 먹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녀석의 치명적인 단점이 말 그대로 랜덤.

    어떨 때는 상대의 회심의 방어를 피해 일격을 먹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자신이 막으려는 순간 이게 터지면 그냥 방어가 뚫리는 거다.

    그렇지만 그 모든 단점을 커버해줄 수 있는 게 금안.

    기술이 기예를 넘어 현실을 뒤바꿀 정도로 한 단계 높아지는 기술.

    금안을 약식으로 키고 이를 발동하면 그 기간 한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물질화와 관통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을 관통해 녀석들의 칼을 잘라낸 것도, 그 기세를 넘어 단번에 범위 안의 카르멘을 기절시키고 그라함이라는 녀석의 뒤 종아리를 베어낸 것도 금안과 그림자칼의 조합 덕분이다.

    하여간 방금 전의 해프닝은 이 정도로 접어두고 이제 진짜 문제는 저 눈앞의 금속섬이다.

    점점 더 기분 나쁜 소음을 토해내며 사방을 긴장으로 물들이고 있는 금속의 거북이 같은 녀석.

    키이이잉...

    주변을 기이한 반투명 장막으로 두르고 있는 금속섬을 보며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자기공명식 쉴드.

    예전 광자포의 그것과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쉴드로 저게 작동하고 있으면 공기를 넘어서는 크기의 물체는 그 무엇도 안팎으로 통과할 수 없다.

    저 녀석들이 접근했던 것처럼 바다 밑으로 슬금슬금 헤엄쳐가 안쪽에서 해결하는 식의 방법도 안 먹힌다는 것.

    사실 저건 유지하는 것 자체로 에너지가 많이 들기에 모든 동력원을 헝클어트리는 뇌종의 구역 근처에서 저렇게 마구잡이로 켜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그 가장 큰 원인을 자신이 직접 해결해버린 상황이라는 것.

    쉴드를 무한정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한동안 작동이 멈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 시간이라면 저 안에 있는 녀석들이 뭐라도 일을 벌이긴 벌여버린 상황일 것이다.

    그게 뭘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결국 박살 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되려나?"

    '큰소리 떵떵 치고 왔는데. 함포 사격이라도 좀 해달라고할까?'

    강태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바라보려던 그때.

    키이이잉..

    키잉...

    "오 설마 네가 무슨 방법이 있나?"

    자신의 옆, 어느새 소화를 끝마친 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옆에서 키잉거리는 정팔면체의 금속 생명을 보며 강태석이 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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