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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59화 (159/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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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우우웅...!

    눈동자는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심장 어림을 향해 질주하는 칼날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소주가 놓인 절체절명의 상황에 버럭 소리친 사내가 앞장서 뛰쳐나가려던 그때.

    터어엉!

    자신보다 먼저 움직여 아너스빌의 앞에 선, 유령처럼 나타나 칼을 튕겨낸 여덟 남녀의 등장에 사내가 멈칫했다.

    **

    터어어어엉!

    휘둘렀던 회심의 일격이 갑작스레 나타나 아너스빌을 가로막은 여덟 남녀에게 가로막혔다.

    후우웅!

    터턱.

    이에 튕겨 나온 칠채영도를 한발 물러서며 갈무리한 강태석이 눈앞의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아까 전부터 <나는 조금 남다른 놈들이오> 하고, 차륜전에도 끼어들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뒤에서 지켜보던 여덟.

    다른 녀석들 또한 강했지만, 이놈들은 그중에서도 한층 더 독보적인 기량을 뿜어내고 있었다.

    "..."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무덤덤히 칼날을 걷어내고는 아너스빌을 호위하듯 가로막아 앞에 선 여덟을 주욱 훑어보던 강태석이 뒤쪽 아너스빌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내가 이긴 거 아닐까? 일대일이었다면 말이야."

    "..."

    그 말에 잠시 멍한 상태이던 아너스빌이 핫 하고 정신을 차리며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수치, 대수치.

    자신이 태어나 이런 기억은 통틀어 두 번뿐이었다.

    가문에서 쫓겨나 시골, 남쪽의 도시에 처박히게 되었을 때.

    자비를 베풀러 내려갔다가 별 정체도 모를 녀석에게 당해 얼굴에 크나큰 흉터가 남게 되었을 때.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하지만 오늘의 일은 앞의 둘과는 느낌이 아예 달랐다.

    앞의 둘이 나약하고 무력하던 시절 당했던 거라면, 오늘은 한창 피어나며 자신감이 넘치던 도중에 당한 것이다.

    심지어 상대는 만전의 상태도 아닌, 오히려 그 반대인 만신창이에 가까웠다.

    기강을 세우려 나섰건만 마력이 바닥난 녀석조차 단번에 몰아붙이지 못했다.

    차례대로 몰아가 궁지로 밀어 넣긴 했지만 마지막, 아직도 이해하지 못할 정체불명의 수에 검기가 모조리 파훼 되고 목숨마저 잃을 뻔했다.

    이보다 완벽한 패배가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방금 전 공격이 무슨 작용을 했는지 내부가 진탕 되고 마력 회로가 얽혀 당분간은 내상의 치료에 전념해야 할 정도였다.

    "..."

    주먹을 까득 쥐던 아너스빌이 주변 수하들의 표정을 둘러보려다 말았다.

    보나 마나 실망으로 들어차 있을 테지.

    아직 자신보다 더 나은 대안이 없으니 반란을 일으킨다거나 몰아내진 않겠지만, 앞으로 통제함에 있어 한층 더 귀찮아질 것은 명확한 사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패배로서 발생했다.

    하지만...

    "좋다. 가. 보내줄 테니. 하지만 다시는 이곳으로 발붙일 생각 하지 마. 그랬다가는 그때는 정말 가만 놔둘 수 없으니. 다른 구역으로 가버려. 아니... 아예 그보다 이 콜로니를 벗어나는 게 좋겠네."

    아까 전에도 말했듯 패배는 결국 자신이 끌어안고 가야 할 짐이다.

    마음을 정리한 아너스빌이 한결 덤덤해진 태도로 지쳐 보이는 카트란을 향해 말했다.

    다른 구역으로 가라고는 했지만 생각해보니 그걸로는 모자라다.

    자신은 이 구역을 시작으로 6층, 모든 구역을 흡수하고 더 나아가 다른 층까지 정벌하여 이 콜로니 전체를 자신의 새로운 함선이자 영토로 삼을 셈이었으니.

    말하자면 자신만의 새로운 영지다.

    이 정도면 이곳을 넘어 센트라들이 횡행하는 격전지 속을 나아가는데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궤도 엘리베이터 또한 방위 요새, 센트라와 마찬가지로 연방이 자랑하던 고위 문물 중 하나였으니까.

    앞으로 마주칠 일 없으려면 카트란은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그게 서로에게 좋을 터이고.

    배는 자신들이 타고 왔던 오시리스가 있으니 큰 문제 없을 것이다.

    '가라. 카트란.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하고.'

    자신을 찢어 죽여도 모자랄 상대를 아너스빌이 덤덤히 바라보던 그때.

    스윽.

    "... 무슨 짓이지?"

    자신의 앞, 또는 옆을 빈틈없이 지키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여덟 남녀의 행위에 아너스빌의 눈썹이 치꺾였다.

    이제껏 조용하던 녀석들의 기도가 심상치 않았기에.

    군바리안의 자락 아래서도 특별히 강했기에 이제껏 자신을 주인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덤덤히 지켜만 보던 8인.

    설마 자신이 패배했다고 즉각적으로 이렇게 말을 무시하고 나선단 말인가?

    꽈득.

    분노한 아너스빌이 내상으로 내부가 진탕된 와중에도 금빛의 검기를 끌어올리며 자신의 칼끝에 휘감으려고 했다.

    카트란을 공격하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려는 녀석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반발이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않는 것과 대놓고 무시하는 건 엄연한 차이가 있다.

    안 그래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던 녀석들이 이제는 머리 꼭대기에 않겠다는 걸 자신은 결코 봐줄 생각이 없다.

    그리고 이 강렬한 의지를 담은 황금빛 검기가 그대로 여덟을 가로막으려던 그때.

    터억.

    "소주. 오해하지 말아요.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

    "...?!"

    앞으로 걸어 나서다 말고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여인과 눈이 마주친 아너스빌이 순간 멈칫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이 너무나 따스하고 온화로웠기에.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일곱도 마찬가지다.

    흉흉하게 칼날을 뽑아 들어 앞장서려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간헐적으로 흘긋흘긋 바라보는 눈길에는 존중과 온화함, 충성이 흘렀다.

    이전, 자신을 소 닭 보듯 무시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그 눈길에 살짝 당황한 아너스빌을 향해 얇은 한 자루 세도를 뽑아 든 여인이 재차 말했다.

    "소주는 충분히 당신의 자격을 입증했습니다. 우리 생각 이상으로 더욱 훌륭했어요."

    그런 여인의 말에 주변 일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여인을 포함한 자신들 여덟이 아너스빌을 소주로 온전히 인정한 이유.

    사실 처음 아너스빌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은 명확했다.

    위대한 군바리안의 본가에서 밀려 나온 떨거지 애송이.

    운 좋게 촌 동네에서 생존자들을 그러모아 대장 놀이를 하고 있는 철부지.

    스스로의 지위가 있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온전치 않았으며 자신들을 그러모아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긴 했지만, 그저 능력이 부족한 꼬맹이의 욕심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모인 건 예전, 그 군바리안의 위세가 그립기도 했거니와 녀석 곁에 있으면 언젠가 군바리안의, 진짜 <주인> 될 자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다른 녀석들과 다르게 꼬맹이의 소꿉장난을 구경하는 느낌으로 이 자리에 서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혈투로 그들의 생각은 바뀌었다.

    단순히 군바리안에서 밀려난 허접한 방계가 아니었다.

    그들이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찬연하고 두터운 황금빛의 휘광과 재능을 온몸에 휘감고 있었다!

    심지어 그 예전, 자신이 직접 모시던 군바리안 진짜 주인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했다.

    아니, 사실 재능만 보면 그때보다도 더욱 뛰어났다!

    그렇기에 그들은 생각을 바꿔 진심이 된 것이었다.

    꼬맹이가 아닌 소주로 모시고, 소꿉장난이 아닌 전력으로 해내기 위해.

    그리고 그렇기에...

    "처음 모시는 자리에서 첫 명령부터 어겨 죄송해요. 벌로 제 사지를 원하시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훗날 더 강해지신다면 제 목도. 하지만 저자는 보내줄 수 없습니다."

    후웅.

    세도를 뽑아 든 여인이 주변 일곱 너머, 상대를 보며 중얼거렸다.

    주인은 과연 스스로 빛을 내며 그 자격을 입증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조차 뛰어넘었다.

    오랜 세월 어둠 속에서 살며 역사 속 수 많은 강대한 것들을 보아온 자신들조차 보지 못했을 정도의 빛나는 재능.

    아니, 저걸 재능이라고 치부하고 끝낼 수 있을까?

    마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홀로 군바리안의 자락들인 자신들과 마주하고 그걸 넘어 소주까지 꺾었다.

    그야말로 역사 속에 빛이 날 인재.

    100년 내 이런 녀석이 있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대초인들.'

    꾸득.

    그들을 떠올린 여인이 절로 손에 땀을 흘리며 칼을 움켜쥐었다.

    연방의 주인들.

    대륙을 통일한 존재.

    그 강하다는 귀족들조차 한낱 자신들의 발치 아래 들러리로 만들어버린 위대한 자들.

    그토록 두렵고 경외했던 군바리안의 혈통조차 그들의 발아래 머물렀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비록 아주 미약하긴 하지만 그 씨앗이 될 것 같은 자를 마주하고 있다.

    저런 녀석을 원한까지 진 상태로 살려 보내야 한다고?

    그것도 콜로니 밖, 자신들의 영향력이 아주 미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멀리?

    안타깝지만 그럴 순 없다.

    어디 가서 개죽음이라도 당했으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도 않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평생을 두려움에 살아야 하리라.

    언젠가 저 녀석이 나타나 평온한 번영을 완성한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집 앞, 가족들 앞.

    모든 것을 이루고 안분지족을 하며 새로운 지위와 명성을 누릴 자신들의 앞으로 나타나 차례대로.

    그때쯤 저 녀석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을지는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렇기에 내린 결정.

    스팟.

    텅...

    "아윽..."

    갑작스레 이루어진 기습에 목 뒤와 전신 몇 군데를 타격당한 아너스빌이 힘없이 단말마를 내뱉으며 허물어졌다.

    그 기습을 가한 장본인인 여인이 부드럽게 아너스빌을 떠안으며 차가운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소주는 감히 불경한 자신들에게 당해 정신을 잃으셨으니 이 사태, 즉 약조를 어긴 것에 대한 일말의 가책과 책임도 지실 필요가 없다.

    그저 눈뜨신 뒤 그때쯤이면 제멋대로 상황을 정리했을 자신들에게 적합한 벌을 내리시면 그만이다.

    "빠르게 정리하고 흔적을 지운 다음 돌아가자."

    여인의 말에 주변 일곱, 더 나아가 주변을 포위하듯 감싼 수십 명의 남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일은 이곳에서 완전히 정리하고 어둠 속에 묻는다.

    그리고 자신들은 돌아가 소주를 보필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스르르릉...

    "아아. 진짜 피곤한 놈들이다."

    맹종과 충성이 이렇게 피곤한 일일 줄이야.

    자신을 향해 칼날을 뽑아 들고 다가오는 수십 명을 본 강태석이 눈을 감았다 뜨며 칠채영도를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렸다.

    놀랍게도 최악으로 보이는 아까 전보다 상황이 더욱 안 좋아졌다.

    자신을 여전히 굳건히 둘러싼 수십 명의 포위망.

    그런 이들의 안쪽에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눈에 봐도 다른 놈들과는 격이 다른 여덟 남녀.

    마력은 여전히 바닥이고 그나마 여유 있던 육체도 오랜 싸움에 지쳤으며 이제는 전신 신경계까지 금안의 발동으로 지쳐버린 상황이다.

    금안은 짧은 시간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주었지만, 정말 전신에 큰 부담을 주었다.

    사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간신히 손으로 칼을 잡고 간신히 눈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날을 바라보는 것뿐.

    '그래 뭐. 다 같이 한번 죽어보자.'

    스르르륵...

    투명한 아지랑이가 재차 칼끝을 감싼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칼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거의 무념무상으로 뛰어들어 마주 칠채영도를 휘둘러 가려던 순간.

    후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아아앙!

    "!!!!!!!!!!"

    "방해꾼들이다! 경계해라!"

    갑자기 하늘에서 뛰어내려 앉아 콰앙콰앙 강태석과 주변 포위망의 이들 사이로 내려앉은 십여 명의 등장에 앞장서던 여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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