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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구역, 스피어내 주거지역.
"요즘 지진이 심해지네?"
"콜로니 전체가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다잖아. 어쩔 수 없지."
평범한 도시의 번화가 같은 골목 사이, 커피 앞에 앉아 호로록 찻잔을 들이키며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주변을 평온하게 바라보았다.
투명한 피라미드 유리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푸른 하늘과 밝은 햇살.
그 바깥으로 펼쳐진, 황금빛 호밀의 대지와 호수들.
주거지역 안쪽으로는 안락하게 살아가며 문화생활을 즐기는 수많은 이들의 웃음까지.
예전 6층 지역은 연구와 관광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했던가?
궤도 엘리베이터에 이런 구역이 남아있는 게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인데 어느 곳에서 이런 광경과 이런 평온을 즐길 수 있겠는가?
어느 정도냐 하면, 사람들 입에서는 공공연히 이런 소리마저 나올 정도였다.
"... 괜히 북쪽으로 가서 일 커지는 거 아냐? 지금 이 상황도 충분히 살만한 거 같은데."
"그렇긴 하지. 괜히 전쟁지역으로 들어가서 휩쓸리면 큰일인데."
테이블에 앉아 여유로이 커피를 마시던 사내 하나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자신들은 이곳의 상황, 현재의 삶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굳이 희망이니 뭐니를 찾아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고 싶을 정도로.
한데 이 콜로니 전체가 북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하니 불안할 수밖에.
"어떤 새끼들이 쓸데없이 콜로니 장치를 건드린 거야? 그냥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야 그건 말이 좀... 쿠훕."
"뭐야 너. 사레들렸어?"
커피를 마시다 갑작스레 입을 부여잡고 쿨럭이는 상대의 모습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리 뜨거운 커피도 아니었는데 뭐 그리 급하게 먹다가 사례에 걸린단 말인가?
하지만 사내는 이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가로막은 손 사이로 새어 나오는 건 갈색의 커피가 아닌, 짙고 붉은 피.
아니, 피조차 아니어 보였다.
단순한 토혈이라면 저렇게 검은 무언가가 뒤섞여 있지는 않을 테니까.
"뭐야 너. 너 괜찮은 거야?"
덜컹!
다급히 일어난 사내가 다가가 친구를 살펴보려던 그때.
그르르르륵...
피를 토하던 친구의 입에서 갑자기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그르렁거림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띠이이익...
띠익...
80%를 알리는 선명한 경고창.
이어 그 아래 새겨진 문구.
이 모든 것을 보며 강태석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페이즈5.
기승전결의 마지막 단계.
이제 멸망은 적군처럼 바깥에서, 전선에서만 찾아오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자신들의 곁에서.
꽃이 피어나듯 어디에서나 피어나는 단계.
이를 인도할 파멸의 사자들이 사방에서 이벤트 보스에 걸맞게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알파, 베타, 델타, 감마들 또한 이에 속한다.
지금 온 수림 전체, 아니 플로어 전체를 시체와 전염병으로 물들여 가고 있을 녀석들 또한 그중 하나.
베타.
진목시왕.
시체와 병자들의 왕.
"저길 뚫고 가겠다고? 굳이 동굴까지?"
크르릉...
쿠아아아아아아악!
군파츠가 진지 아래, 너르게 펼쳐진 수림을 가리키며 걱정스레 물었다.
이제까지는 위험한 숲 정도였던 곳이 이제는 진짜 지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제 몸 사리기 바쁘던 짐승 녀석들이, 이제는 가리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물어뜯고 있었다.
거기에 스피어의 인원들을 무너트린, 정체불명의 병종들까지.
이런 상황에서 본진으로 보이는 동굴로 쳐들어간다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하지만 그런 군파츠의 말에 강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뚫는 게 좋지. 앞장서서 가겠다는 사람 있을 때."
강태석이 난장판이 된 숲 아래, 무장을 챙기며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있는 사내와 서른의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선검기와 면검기를 넘어 구검기를 구사하는, 최소 레벨 20.
대원들도 최소 면검기 구사자들.
레벨 15에서 20 사이였다.
저 정도 정예는 지금 이 근처 어디에서도 구하지 못한다.
화력은 엑소슈트나 파르스가 갖춰진 지금 자신들도 제법 충분하지만, 동굴같이 좁은 곳에서는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황.
바꿔 말하면 지금은 운이 좋은 것이다.
저런 정예들이 자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마음 급한 상황이 갖춰진 것이니까.
이때 동굴 쪽을 정리해야 한다.
안 그러면 끊임없이 솟아나는 시체들의 해일에 간신히 세워둔 본진마저 무너지고 말 테니.
"잘 막고 있어. 다녀올 테니까. 일단 북쪽으로 길만 뚫어주면 그 뒤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북쪽.
동굴을 향하는 방향.
그리고 가장 거세게 공격이 몰아쳐 오고 있는 방향.
그런 강태석의 말에.
"... 좋아. 신고식 한번 거창하게 하겠네."
굳은 표정을 지은 군파츠가 고개를 끄덕인 뒤, 2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내달렸다.
**
진지, 최전방.
크르르르륵...
투콰콰콰콰콰콰!
콰드드드득!
"으아아아아악! 제기랄! 어쩐지 인생 좀 쉽게 풀린다 했다!"
정신없이 몰아닥치기 시작하는 시체의 짐승들과 엑소슈트들의 화망 속, 칼을 휘두르던 범죄자 출신 사내 하나가 버럭 비명을 내질렀다.
당분간 등 따습고 배부르니 머무르며 자신들 힘이 좀 강해지면 이내 이쁘장한 생존자들 좀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행복한 상상을 하던 게 엊그제.
하지만 역시 세상이 공짜는 없는 법이라고.
당장 사고가 터지니 가장 앞의 전선에서 자신들이 고기방패마냥 싸워야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바로 지금처럼!
후우우우웅!
콰드드드드드득!
사내의 손끝에서 피어난 녹색의 검기 채찍이 단번에 사방 10m, 달려드는 크기 7m의 시체 곰들의 목을 베어내며 질주했다.
이어 줄줄이 떨어져 나가는 커다란 머리통들.
하지만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기도 전.
후우우웅!
콰득!
"와아아아아악!"
목이 날아갔음에도 거침없이 달려들어 앞발을 휘두르는 곰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낸 사내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이 날아가도 움직인다고?
심지어...
콰드드드득!
투콰콰콱!
캬아아악...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서도 기어이 다가가 엑소슈트 안, 탑승자를 물어뜯으며 찢어발겨 버리는 짐승들을 본 사내가 기가 차서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상리에 벗어나도 유분수지.
총칼을 맞아도 무시하며 달려드는 녀석을 어찌 이기라는 건지?
거기다...
그르르륵...
방금 전 당한 자신의 수하 하나가 그대로 심장이 멈춘 채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며 칼을 겨눈다.
약한 놈이긴 했지만 나름 자신의 수발을 잘 들어 귀엽게 봐주던 녀석.
돌아보니 어느새 자신만 살아 남아있고 죽은 녀석들은 모조리 저 모양 저 꼴이 되어 서서히 주변에서 자신을 조여오고 있었다.
엑소슈트들도 털려 나가며 전선에서 후퇴하고 있었고, 정신 차려보니 수림 속에 남은 건 자신 홀로.
그르르륵...
"이럴 거였으면 그냥 에테르장 안에서 자고 있는 게 나았겠네. 무슨 꼴인지."
1주도 안 되는 짧은 자유, 짧은 꿈이었다.
어느새 바닥난 마력에 껌뻑이는 녹색 검기를 보던 사내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려던 그때.
쿵...
쿵쿵쿵쿵...
콰아아아아아아앙!
<뭐해! 너 거기 안 꺼져! 밟을 뻔했잖아!>
"!!!!!!!!!!!!!!"
갑자기 지축을 울리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거대한 무언가.
이에 깔려 나가며 형체도 찾지 못하고 산산이 부스러져 나간 시체들의 파편을 후두둑 얻어맞은 사내가 정신이 번쩍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보이는 건 어느새 도착해 자신을 내려다보며 귀찮다는 듯 발을 휘휘 내젓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이족보행 전투병기.
두 개의 육중한 다리, 갑옷을 입은 것 같은 육중한 신체.
거기에 에너지소드가 달린 두 개의 팔.
콰르르르릉...
얼핏 보면 형태는 생존자들이 들고 다니던 에너지소드와 비슷했지만, 그에 서린 에너지와 파괴력은 도무지 비할 바가 아니었다.
평범한 화기와 엑소슈트의 디스트로이어, 그보다도 훨씬 더 큰 차이.
거기다...
쿵쿵...
쿵쿵쿵쿵...
"으하하하! 그래. 죽으란 법이 없구나. 살았다. 살았어!"
저 뒤쪽에서 거침없이 시체와 수림들을 박살 내며 내달려오는 수십 대의 이족보행 전투병기들을 본 사내가 광소를 터트리며 부리나케 살길을 찾아 진지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
쿵쿵쿵쿵...
콰아아아앙!
이족보행 병기, 파르스들이 내달릴 때마다 지축이 떨어 울리고 적들의 전선이 무너져 내렸다.
이번에 동원된 파르스의 숫자는 스물네 기.
그중 사방의 전선으로 파견된 숫자를 제외하고 북쪽, 길을 뚫기 위해 파견된 숫자는 열둘.
많지 않은 숫자.
하지만 그 거체의 병기들이 망설임 없이 수림 사이를 내달릴 때마다 인간을 위협하던 거구의 시체들이 사방팔방 형편없이 뜯겨 나가며 대지를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콰드드드드득!
꺼르르르륵...
우득!
달려드는 크기 20m의 호랑이를 맨몸으로 막아선 파르스가 강렬한 진동음을 토해내며 차츰차츰 녀석의 상체 좌우를 뜯어버리던 사이, 아래로 내달리던 강태석이 뒤를 향해 말했다.
"어서 갑시다. 길 뚫는 동안."
"...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군. 어디서 이런 기체를 확보한 거지?"
파르스 사이, 앞장서던 강태석의 뒤를 따라오던 사내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들을 지켜보았다.
뭔가 숨겨둔 한 수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은 했다.
안 그러면 범죄자 녀석들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숨겨둔 그 한 수가 자신들의 생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설마 중장갑 전쟁병기들이라니!
심지어 형체와 운용능력을 보니 이는 갓 마련해낸 신형.
그리고 이건 오히려 자신들에게 있어 더욱 위협이 되는 중대 사항이었다.
신형 기체를 굴릴 수 있다는 건... 그걸 생산해낼 능력이 있다는 거니까.
이는 자신들을 포함한, 11 군세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역량!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호랑이와 힘겨루기를 하다 기우뚱거리며 옆으로 넘어지면서도 기어이 에너지소드를 휘둘러 상대의 사지를 토막 내고있는 파르스를 보며 내달리던 사내의 표정이 점점 더 굳었다.
자신들조차 이 궤도 엘리베이터에 선적되어있던 중장갑 병기들을 플래그 시절 노획해 써먹고 있을 뿐이었다.
중장갑 병기의 생산이 가능한 팩토리 시설은 방위도시, 센트라에나 자리 잡고 있기에 병기의 생산은 자신들조차 꿈도 못 꾸는 일.
비록 노획한 물량이 상당히 풍부했기에 당장 한기 한기 아껴 써야 하거나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이 차이는 실로 중대했다.
자신들이 지금은 양과 질로 압도하고 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난다면 이 차이가 반드시 역전된다는 뜻이니까.
심지어 지금 이걸 보여줬다는 건...
'우리가 앞으로 너희를 가로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상황이 급박해서?'
꽈득.
콰아아아아아앙!
저도 모르게 칼에 힘을 주어 달려들던 시체 곰 하나를 박살 내 버린 사내의 모습에 곁, 달리던 강태석이 덤덤히 말했다.
"힘 좀 빼고 갑시다. 당신들 말대로라면 우리가 적도 아닌데 왜 그럽니까?"
"..."
강태석의 말에도 사내의 심기는 좋아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원한 동맹은 <공평 공정>한 동맹이 아니었으니.
이 동맹은 반드시 자신들이 우위에 있는 동맹이어야 했다.
힘의 우위, 권리의 우위를 지닌 채 자신들이 주도권을 지니고 멋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관계여야만 했다.
한데 이렇게 된다면...
"..."
"일단 집중합시다. 도착한 거 같으니."
콰아아아앙!
길을 뚫어내던 파르스의 너머, 어느새 가까워진 절벽을 가리키는 강태석의 말에도 사내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뚫어지라 강태석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