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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42화 (14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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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이이익...

    문을 열고 나가니 협곡 안 천막들 쪽에서 숨을 죽이고 어둠 속에서 걸어오다 눈을 마주치고 움찔하는 중년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제법 큰 덩치를 숙이고 살금살금 걸어오는 모양새가 제법 우스운 꼴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쑤욱.

    걸린 걸 알자마자 사내가 되례 당당하게 허리를 쭉 피고는 허리춤의 칼을 꺼낸 후 성큼성큼 강태석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불어 억눌렀던 몸의 기도가 치즈를 펴 바르듯 몸 전체로 쭉 퍼지며 고르게 안정된다.

    한점 흐트러짐 없는 아우라.

    상당한 실력.

    "강도짓하려는 놈한테 아깝네."

    그런 강태석의 말에.

    "흠흠. 사람 잘못 봤군. 나는 강도짓 따위에는 별 관심 없다구."

    "?"

    "정식으로 청혼을 할까 해서 왔는데."

    이윽고.

    "하하."

    캠핑카 안쪽 창, 소녀를 흘긋흘긋 바라보는 중년 사내의 눈길에 강태석이 허허로이 웃었다.

    **

    천막 안

    "그놈이 잘해줄까?"

    여인의 말에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알 수 없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세상의 무게추는 제법 공평해서, 중년 사내는 지성이나 눈치 같은 건 밥 말아 먹었지만, 그 대신 실력과 재능만큼은 확실하게 받았다는걸.

    ‘무걸의 카민트’라고 하면 자신들 시대에도 제법 유명했던 강기 사용자.

    그 재능이 뛰어났다는 건 해동된 직후 몸의 회복 속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깨어났을 땐 자신들과 비슷했던 중년 사내의 실력이 이후로는 쭉쭉 벌어져 지금은 면검기를 사용하기 직전의 수준까지 달하고 있었으니까.

    그만큼 내면의 비틀린 욕망 역시 터질 듯 자라난 것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별일 없으면 알아서 재미 보고 오겠지. 우리는 모르는 척 하다가 뒤처리나 하자고. 약속했던대로 저 기체는 네가 가지고.”

    사내의 말에 여인이 웃었다.

    성향도 다르고 살아온 바도 다른 그들 셋이 나름 이렇게 문제없이 다닐 수 있었던 건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중년 사내는 욕망을.

    자신은 귀한 것들을.

    눈앞의 사내는 리더라는 자리와 야망을 원했다.

    이 한밤의 작은 사건은 중년 사내의 욕망과 자신의 욕심,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들 둘의 지지를 받을 사내의 야심을 조금이나마 충족해주리라.

    '어서 끝났으면 좋겠는데.'

    자신의 직감을 건드린 저 물건이 어떤 것인지 어서 확인해보고 싶다.

    여인이 애써 눈을 감으며 두근거림을 억눌러보려던 그때.

    쿠궁...

    쿠우우웅!

    가까운 데서 피어난 낮으면서도 묵직한 소리.

    선명한 충돌음.

    이에 여인이 결국 참지 못하고 감았던 눈을 반개했다.

    드디어 시작했으며... 이제 곧 있으면 끝날 것이기 때문.

    별것 없어 보이던 상대.

    반면 상대는 나름 자신들의 시절을 풍미했던 호걸.

    되려 왜 이렇게 망설이다 늦게 나섰는지 다시 한번 눈치 없다고 중년 사내, 카민트를 속으로 탓하던 상황.

    여인이 속으로 숫자 10을 세려던 그때.

    쿠궁...

    쿠구구궁!

    커억...

    아까 전과는 또 다른, 강렬한 소음과 그 속에 묻힌 짤막하고 아련한 비명에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나갈 준비를 하면 될 것 같았기 때문.

    하지만 여인이 천막 밖으로 나가기도 전.

    슈우우우욱...

    뭔가 날아드는 소리와 함께.

    쿠당탕탕!

    "크헉..."

    "!!!!!!!"

    피를 왈칵 토하며 천막 안으로 날아 들어와 처박힌 중년 사내의 모습에 졸지에 휘말린 사내와 여인이 눈을 부릅떴다.

    **

    괜찮아요, 아저씨?

    "자렴. 별거 아니니까."

    안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말에 밖에서 손으로 똑똑 두들기며 대답해준 강태석이 목을 풀었다.

    뭐 별것도 아닌 놈이 헛짓거리를.

    “뭐야! 뭔 일이야!”

    저 멀리, 난리가 난 협곡 사이 천막단지를 바라보던 강태석이 천천히 걸어가기 전 자신의 등 뒤, 캠핑카를 보았다.

    이걸 마냥 내버려 두고 가기엔 조금 그렇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키이잉..

    키이잉...

    우드드드득.

    흰빛 표면을 자랑하던 기체, 그 내부에 자리 잡은 금속 생명으로부터 순식간에 변화가 일어났다.

    기체 표면의 틈새는 마치 페인트를 바른 것마냥 빈틈없이 붙었고, 이어 외부 전체에서 촤르륵 소리가 나며 스스로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더 단단하게, 더 견고하게.

    마지막으로 그 위를 뒤덮는 몇 겹의 푸른색 코팅까지.

    텅텅.

    슬쩍 건드려 보았는데 흠집조차 안 난다.

    그 기쾌한 변화에 살짝 놀란 강태석이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게 좋은거지.

    금속 생명의 출신이 어디인지 몰라도 생각보다 격 높은 문명과 견줄 수준이었던 모양.

    하여간 순식간에 견고한 생명, 혹은 성처럼 변한 기체를 본 강태석은 안심하며 협곡 사이로 몸을 옮겼다.

    일단 시작은 했으니 뒤처리는 끝내야 하니까.

    "하여간 되도않는 개수작 부리는 놈들이 너무 많아."

    힘이 강해지면 절로 막 나가게 되는 건지.

    후우우웅!

    후웅!

    챠르르륵!

    어느새 공간 사이로 삐져나온 NO. 111의 손잡이를 챙겨 든 강태석이 그 커다란 물건을 야구 배트마냥 허공에 빙빙 휘두르며 천막 사이, 튀어나온 이들에게로 걸어갔다.

    **

    "아니 정신을 차리라고! 어떻게 된 거야?!"

    "쿨럭... 커흐..."

    여인이 날아들어 처박힌 중년 사내를 다급하게 재촉해 봤지만 들려오는 건 숨넘어갈 것 같은 신음과 입에서 터져 나오는 토혈뿐이었다.

    그런 중년 사내의 곁에서 심장과 목 부분을 짚어보며 몸 상태를 체크한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틀렸어. 내부 마력회로가 다 박살 났어.”

    투박하게 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잔혹하리만치 정교한 솜씨였다.

    내부 마력회로가 모조리 불타오른 것도 모자라 마력의 근원인 코어까지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앞으로 평생 마력을 못 쓰게 되는 것은 물론, 조금이라도 힘을 되찾으려고 할 때마다 전신 신경을 한가닥 한가닥 불로 구워버리는 듯한 격통이 치밀어 오를 것이다.

    말하자면 산지옥.

    하지만 사내의 표정은 급속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느긋해 보이던 상대의 실력과 손속이 예상외라는 건 의외였지만.

    어차피 그런 예상도 자신들의 선택지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통제하기도 힘든 중년 사내를 실험 패로 쓴 것 아니겠는가?

    "자던 사이에 이게 무슨 일인지... 합류 전이니 그렇게 건드리지 말고 좋게좋게 가자니까."

    "... 맞아. 그러게."

    사내의 말에 여인이 멈칫하다 부러 맞장구를 친 바로 그 직후.

    저벅.

    "좋게좋게 가자고?"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지척까지 다가온 상대의 말에 사내가 스윽 일어나 여인의 곁에 서며 담담히 말했다.

    "그럼. 우리가 굳이 분쟁을 일으킬 이유가 없으니. 앞으로 얼굴 보며 지내야 할 사이인데. 이렇게 된 건 유감이긴 하다만... 일단 미안하다고 하지. 우리 쪽 인원을 제대로 통제 못한 것에 대해서."

    사내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 난리를 치긴 했지만 상대도 더이상 자신들에게 손을 쓸 수 없을 것이라 여겼으니.

    그도 그럴 것이 지금부터는 무력이 아닌 정치의 영역.

    상대가 아너스빌 그녀의 수하라면 그녀가 불러들인 자신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

    상대 쪽 세력이 자신들처럼 찾아든 이들에게 막 대하는 걸 보이는 순간 안으로도 불만으로 난리가 나고 밖으로는 상대 쪽 세력으로 붙어버릴 테니까.

    명분도 없고 희생양도 생겼으니 아마 이쯤에서 끝날 터.

    '오히려 좋아. 통제하기 힘들던 골칫거리가 사라져줘서.'

    사내가 뒤쪽, 폐인이 되어버린 중년 사내를 흘긋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민트는 무력이 출중했고 덕분에 이 바깥 땅을 돌아다니며 괴물과 싸우고 다른 집단 녀석들과 대립할 때는 매우 쓸만하긴 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본격적으로 조직 안으로 편입되는 이때, 외부로는 말썽을 부리고 내부로는 자신의 권위를 침범하려들 중년 사내는 방해만 될 뿐이다.

    여기까지 떠올리자 웃음이 절로 나오려고 했다.

    이를 가까스로 억누른 사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이제 눈앞의 상대를 달래려던 그때.

    "야.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생각을 해봤거든? 앞으로 들어가면 너 같은 놈들이 우글우글거릴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

    "머리로는 한번 참아주는 게 맞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뭔가 깨달았거든, 내가."

    "... 뭘 깨달았지?"

    사내가 한껏 불안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의 표정과 기세가 실로 심상치 않았기 때문.

    챠르륵...

    저도 모르게 손안에 푸른 기운을 피워 올리며 몸의 긴장을 끌어올린 사내를 향해 강태석이 툭 한마디를 심드렁히 내뱉었다.

    "나 이미 한번 참았잖아. 아까?"

    "... 망할. 쳐라!"

    이미 늦었다.

    이익이건, 정치건, 대의적 시야건.

    상대는 철저하게 각오를 다지고 온 상황이었다.

    버럭 소리친 사내가 앞장서 달려들려던 순간.

    "괜찮아 괜찮아. 거기 있어. 내가 갈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촤르르르르르르륵!

    콰아아아아앙!

    캬아아아아아아악!

    NO. 111의 울부짖는 포효와 강철의 마찰음이 사정없이 협곡 사이를 후려치며 그득 메우기 시작했다.

    **

    연구시설, 본진.

    "서쪽으로 문제가 생겼답니다."

    "그쪽 섹터에서 마찰이라도 생긴 건가요?"

    천막 안, 집무를 보던 아너스빌이 갑자기 달려온 수하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문제가 생기는 거야 놀랍지도 않지만 들을 때마다 거슬리긴 한다.

    이미 연구시설 위, 집단 내부는 혼돈 그 자체.

    새로 들어온 녀석들의 껄렁함과 기존 생존자들의, 이번 결정에 따른 불만이 혼재되어 그야말로 인세의 작은 용광로를 만들어놓은 듯 했다.

    아주 그냥 십 분이 멀다고 사방에서 갈등, 충돌, 마찰!

    덕분에 연구시설과 사옥선의 시설을 일부 차용해 만든 의료시설이 지금도 물샐틈없이 들어차 있을 지경이었다.

    무슨 괴물들과의 전쟁이나 외부와의 마찰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아닌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누르며 일어나는 아너스빌의 말에.

    "아닙니다. 더 외부입니다. 서쪽 3km 지점."

    "?"

    아너스빌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냥 무시하기도 애매한 곳이다.

    혹여 자신들에게 합류하려던 이들과 이를 방해하려는 녀석들의 세력 충돌이라면 낭패였다.

    "준비하세요. 나가봐야겠으니."

    지금은 직접 움직이는 게 좋을 시기다.

    자신에게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아직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 이들이 많이 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철컥.

    허리춤에 칼 한 자루와 레일건 세 자루를 챙긴 아너스빌이 천막 밖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마르트와 적검 여인, 민트라.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서른 기의 엑소슈트와 이백의 무장병들까지 끌고 온 아너스빌이 눈앞, 협곡의 광경을 보며 눈을 꿈벅였다.

    이곳이 적의 함정일 확률이 있음에도 나온 이유는 아직 자신의 지위와 세력이 단단하지 않기에 직접 본을 보이며 이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대체할 이가 많기에 자신이 이러다 죽어도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대처할 테고.

    스스로를 대체할 이가 많기에 초창기엔 이런 식으로 해야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이 공고해진다.

    한데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며 달려온 장소, 눈앞의 광경은 예상 밖이었다.

    "어. 왔어?"

    촤르르르륵...

    터엉!

    마치 전쟁터의 한복판마냥.

    박살 난 진지, 쓰러진 수십 명의 남녀들 한가운데 철쇄 칼날을 움켜쥐고 우뚝 선 강태석의 반갑다는 듯한 인사에 아너스빌이 한숨을 푸 내쉬며 머리 아프다는 듯 자신의 옆머리를 문질문질 문댔다.

    이 충돌이 본진에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지 뻔했기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아너스빌의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나기 전.

    "이놈들이 날 무작정 습격하더라고. 분명 내 소속을 말했는데."

    "... ?!?!?!?!?"

    강태석의 말에 바닥에 쓰러진 채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던 사내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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