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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32화 (13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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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쉘터장들의 의견에 카티와 페리트란등이 이마를 짚었다.

    저 말에 동의는 한다.

    당장 말을 안 들으면 목을 쳐버릴 지도자가 필요한 것도 알겠고.

    하지만 카트란이 이 역할을 맡을까?

    자신들이 보기에 녀석은 필요하면 하기야 하겠지만, 굳이 그런 역할까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딱히 관심이 없다는 뜻.

    심지어 녀석은 안 그래도 지금 맡고 있는 일이 많다.

    지도자라면 응당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많아야 하는데, 현재 자신들이 그렇게 카트란을 황금 옥좌에 떡 앉혀 놓고 여유 있게 희희낙락거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앞으로 카트란은 최전선으로 나가야 할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무슨 동화나 구전에 나오는 정복왕도 아니고, 그러다가 카트란이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사망에라도 이르면 자신들 집단은 단번에 무너져버릴 수도 있다.

    예전 배신당해 무너졌다는 콜로니의 찬과 플래그라는 이들처럼.

    "큼흠. 그러면 차라리 내가..."

    "..."

    "..."

    "알았어 새끼들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슬쩍 손을 들어보았던 더그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길에 혀를 차며 불퉁히 중얼거렸다.

    자신도 안다.

    당장 군파츠같은 검기 사용자 녀석들뿐 아니라 쉘터 녀석들도 통제가 안될 거라는 걸.

    예전 문명이 멀쩡하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이런 세계에서 누가 자신보다 약하고 인정할 수 없는 상대의 말을 듣겠는가?

    심지어 지금은 말을 안 들으면 바로 목을 쳐야 조직이 돌아갈까 말까 하는 전시상황이다.

    자신이 칼을 휘두르려다 목이나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

    "..."

    천막을 그득 메운 침묵 속, 이를 바라보던 카티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회의 후 가서 말해보지. 일단 다른 안건들을 먼저 얘기 한 다음에..."

    "잠깐."

    "?"

    "그 역할. 내가 해도 되지 않나요?"

    금발에 상처가 인상적인, 아너스빌의 말에 천막 안에 모여있던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

    사옥선.

    쿠르르릉...

    '왠지 귀가 가려운데. 누가 내 욕하나?'

    "왜... 왜... 그런... 눈으로... 봅니까."

    슬쩍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태석의 눈길에 어느새 포박이 풀려 한 출입 개폐문 앞에 구부정히 서 있던 말더듬이 사내가 주춤 물러섰다.

    묘한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

    그런 사내의 태도에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러서자 그제야 사내가 다시 몸을 돌리고서는 띠딕거리며 개폐문을 조작했다.

    이어 열리는 출입문.

    키이이잉...

    스르르륵.

    사옥선 자체가 어지간한 건물만 했기에 구석구석의 공간들 역시 크기가 보통은 아니었다.

    높이 3m, 폭 3m의 개폐문이 열리자, 드러난 건 한 변이 10m 가까이 되는 널찍한 정육면체의 공간이었다.

    백색 타일로 가득 차있는 공간의 정중앙, 아까 철판마냥 가운데 둥둥 뜬 묵직한 쇳덩어리가 보였다.

    상어의 이빨 모양의 크기 1m짜리 칼날, 혹은 톱날.

    그런 칼날들 하나하나가, 손목처럼 굵은 철선에 꿰어진 게 총 18개.

    그렇게 칼날들을 꿰어낸 철선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사람이 쥐기엔 딱 좋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뻗어 나온 철선보다 얇아 기묘한 형태를 취한 손잡이.

    강태석이 이를 바라본 순간 눈앞에 선명한 창이 떠올랐다.

    띠링!

    <시제품-NO. 111.>

    > 기업, 아벨이 센트라의 강기병들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진행한 1,000개의 병기 개발 프로젝트 중 하나의 결과물입니다.

    > 현재 미완성이나 이 정도로도 1,000개의 프로젝트 중 랭킹 111위에 자리 잡아, NO. 111을 부여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역작입니다!

    > 경쟁 기업의 걸작, 포식장갑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 칼은, 각 톱날들이 상대를 먹어 치우면 먹어 치울수록 강해집니다.

    등급은 C+.

    촤르르르르르륵!

    강태석이 손을 뻗어 꼬리마냥 허공에서 추욱 내려앉아 있던 손잡이를 쥔 순간, 철선을 따라 한순간에 칼날들이 줄어들며 콰득콰득 서로가 서로와 결합하고 맞부닥쳤다.

    이어 나타난 건 폭 1m, 길이는 6m에 달하는 커다란 톱니칼.

    개인이 쓰기엔 지나치게 크고 묵직했지만, 강태석은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 G구역에서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썽둥썽둥 썰어버리려면 이 정도 크기로도 모자랄 수 있었기에.

    후우우우웅!

    "조... 조조조... 조심!"

    마음에 든다는 듯 큐브 안에서 칼을 부웅 휘둘러보는 강태석의 행위에, 옆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다급히 숙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저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아니나 다를까.

    찰칵!

    찰크덕!

    크르르르르륵!

    범위 안에 먹을게 있는 듯 하자 톱니를 이빨 마냥 철크럭거리며 그르렁거리고는 스스로 분리되려고 하는 톱니칼, NO 111을 보며 사내가 기겁을 했다.

    저 미친 물건은 잘못 휘두르면 사용자마저 잡아먹기 때문에, 자신도 개발하다 말고 여기에 처박아둔 물건이다.

    사이보그 검기 사용자에게 이걸 써먹어보게 하려고 시도하다가 <잡아먹힌> 녀석들만 일곱이다.

    그런 걸 저렇게 막무가내로 휘두르다니!

    하지만 고개를 숙이며 문밖으로 부리나케 피한 사내가 내심 기대 어린 눈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칼날과 그 안, 손잡이를 쥐고 멀뚱히 선 카트란을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난다긴다하는 자신의 실험작들도 마치 톱날의 뱀이 갉아먹는 것 처럼 녀석의 몸안으로 사라졌다.

    지금 눈앞의 녀석도 방심했다면 순식간에 스러질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이 사옥선을 몰고 유유히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콰르르르르르륵!

    촤르르르륵!

    순식간에 풀려난 칼날이 마치 해일처럼 휘몰아치며 강태석의 전신을 덮치려던 광경을 사내가 기대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캬아아아악!

    터어어어어어엉!

    "!!!!!!!!!"

    주먹으로 후려쳐 칼날의 뱀을 벽면에 처박아버린 상대를 보며 사내가 기겁을 했다.

    저게 무슨 장난감도 아니고 저런 식으로?

    게다가 거기서 끝난 것도 아니었다.

    이게 어딜...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앙!

    콰아아아앙!

    "아... 아아... 안... 돼! 다... 다 부서진다고...!"

    사정없이 백색의 벽면으로 칼날을 휘둘러 후드려 치기 시작한 상대의 난폭한 행동을 보며 사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NO. 111이 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박살 나는 건 자신의 사옥선!

    콰아아앙!

    콰앙!

    캬아아아악!

    사내가 미친 듯이 칼날을 휘두를 때마다, NO. 111이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큐브 벽면이 우그러지며 그 너머, 사옥선 내부 구조물들이 움푹움푹 패였다.

    튼튼하기에 완전히 박살 나지는 않겠지만 섬세하기에 모조리 망가질 것이다!

    "그... 그그그... 그만!"

    캬아아아악...

    사내와 칼날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이 덩달아 커지길 얼마나 지났을까.

    콰아아아앙!

    크륵...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큐브 바닥에 추욱 늘어진 칼날을 보던 강태석이 슬쩍 발을 들어 한 번 더 밟아버리려고 했다.

    그 순간.

    촤르르르르르륵!

    언제 그랬냐는 듯 축 늘어진 뱀 같던 상태에서 순식간에 줄어들어 이전의 온전하고 우뚝한 칼날 상태로 변한 NO. 111을 본 강태석이 그제야 혀를 차며 어깨에 들쳐멨다.

    "잔꾀가 많은 놈이구나. 원주인 녀석처럼."

    "나... 나나나나나... 왜... 왜요... 내가 왜..."

    말을 한층 더 더듬는 사내를 지긋이 바라보던 강태석이 이내 녀석을 반대편에 들쳐메고는 입구로 향했다.

    여기 놔두면 또 잔꾀 부릴 녀석이니 일단은 밖으로 빼놔야 한다.

    원하는 건 얻었으니 나갈 차례.

    '페리트란한테 맡겨놓으면 알아서 잘 쥐어짜 놓겠지?'

    물론 페리트란은 자신처럼 젠틀하게 말로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들을 본다면 말이다.

    터어어엉...

    텅!

    벽면, 들어올 때 보았던 실험관들이 늘어서 있는 복도를 지나 다시 철판을 작동시킨 강태석의 신형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길쭉하게 뻗은, 보는 사람이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거대한 톱니칼을 어깨에 들쳐멘 채로.

    그렇게 다시 지상에 내려앉은 강태석은 어깨에 메어진 녀석을 페리트란의 천막 쪽에 던져놓고 연구시설의 바깥, 울창한 수림을 향하려고 했다.

    새로 얻은 무기를 시험도 해볼 겸, 주변 정찰도 할 겸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려고 했기 때문.

    하지만 강태석이 한발 떼기도 전.

    "새 장난감인가 보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강태석이 금발, 천막 사이로 팔짱 끼고 선 아너스빌과 눈이 마주쳤다.

    **

    "이거? 빌려줄까?"

    어깨 위의 말더듬이 사내를 흘끗 보며 말하는 강태석의 태도에 아너스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 말고 칼 말한 거지. 그런 건 줘도 안 가져. 비슷한게 하나 있기도 하고."

    "그... 그그그... 그런...거라니..."

    항변하는 말더듬이 사내를 무시한 아너스빌은 상대, 카트란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직접 온 이유는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결정된 사안에 대한 통보일 수도 있고.

    "아까 회의에서 이 쉘터의 임시통령직을 정하자는 안건이 나왔어. 그리고 그 후보로 내가 올랐고."

    말을 하며 아너스빌이 속으로 호흡을 다잡았다.

    언제라도 카트란이 칼을 뽑아 들 수 있다고 생각하며.

    모두가 나름의 이유로 자신이 이곳의 장을 맡는 것에 찬성했다.

    하지만 카트란은 지금까지 이 집단을 끌고 오는데 가장 큰 지분이 있다고 스스로 여길 수 있는 인물이다.

    민주주의대로라면 고분고분 물러나야겠지만, 독재자를 뽑는 결정에 이를 바라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싸우면 이길 수 있으려나. 이길 수 있을 것도 같고.'

    후욱.

    아너스빌이 가문 특유의 호흡으로 전신의 긴장을 끌어올리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던 그때.

    "어 좋아. 딱 좋네."

    "...?"

    "생각보다 늦게 결정됐네. 앞으로 잘 부탁해. 나 이제 가도 되지? 아 맞다. 온 김에 이 녀석 좀 페리트란한테 던져주고 가고."

    털썩.

    어억!

    바닥에 말더듬이 사내를 내동댕이치다시피 내던지고 몸을 돌리려는 강태석의 태도에 아너스빌이 벙쪘다.

    권력이란 본디 부모 자식 간에도 나누지 없는 법이다.

    하물며 그 기반을 자신이 다졌다면 더욱.

    그리고 그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면 더더욱!

    한데 그냥 이렇게 넘겨버린다고?

    "뭐라고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터어어어엉!

    "..."

    칼날을 들고 수림 안, 어둠 속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강태석의 모습에 아너스빌이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파르르 떨었다.

    **

    터어어엉!

    "... 귀찮아질뻔 했네."

    단번에 몸을 날려 수림 안, 저주파 발생 장치와 그 바깥의 경계까지 도달한 강태석이 나무 중간쯤에 매달려 숨을 푸 내쉬었다.

    일단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정해 버린 다음, 상대가 승복할 때까지 설득하려 든다.

    이것이 바로 귀족가 출신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어야 하고, 이를 상대가 승복도 해야 하는 아주 귀찮은 성격!

    자신이 괜찮다고 하면 됐지 뭘 굳이 또 깊이 설득하려고 들려 하는지.

    그리고 아너스빌이 적임자라고 생각한 건 귀찮아서가 아닌, 강태석의 진심이었다.

    '넘겨줄 때가 됐었지.'

    강태석이 수림 너머, 연구 시설 위로 한층 더 커진 세력을 자랑하는 생존자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생존자 수준을 넘어 군벌에 가깝다.

    그리고 저 정도라면 이제 정말로 적합한 리더가 필요한 상황이다.

    실력, 명분, 비전, 재능.

    더 나아가 스스로 이를 더 강하게 키우고 싶다는 야망을 지니고 있으며, 이에 적합한 자격을 가진 자가 그곳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너스빌만큼 여기에 적합한 인물도 없다.

    귀족가 혈통이라는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사회적 배경만으로도 사기에 가까운 보정치를 부여하는 설정이니까.

    반면 자신은?

    일단 재능이고 혈통이고 다 떠나서 그냥 성격에 안 맞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자신은 그냥 혼자 돌아다니는 게 훨씬 더 편하니까.

    오히려 한결 홀가분한 느낌?

    "재료는 다 준비해 놨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중얼거린 강태석이 어깨에 칼을 걸친 상태에서 그대로 다음 나무로 뛰어 좀 더 깊은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지이이이익...

    "... 좀 빠르네. 요 도적놈들이."

    명백히 누군가 새겨놓은 것 같은 신호로 보이는 나무의 푹 패인 칼자국을 보며, 강태석은 뛰려던 걸 멈추고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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