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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 저 녀석들한테 붙자고?"
"워워. 진정해. 합류하자는 건 아니니까."
소녀는 물론, 쌍심지를 켜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들의 말에 여인이 양손을 내보여 들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농담도 못 하겠네.'
애초에 우정이고 뭐고 없이 오로지 일 시간의 이해와 득실을 위해 모인 녀석들.
임시 리더니 뭐니 하지만 자신의 제안이 본인들에게 실이 되는 순간, 그대로 들이받아 버릴 놈들이다.
후욱.
한번 숨을 고른 여인이 웃으며 플로어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들을 가리켰다.
"봐봐. 일단 우리 상황부터 확인하자고. 지금 풀려난 녀석들만 해도 거의 수만 명이지? 한데 우리가 돌아다니는 도중 먹을 거, 마실 거, 혹은 다른 물자 같은 것들 발견한 사람?"
"..."
여인의 말에 모인 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도 현재의 간략한 상황 정도는 알고 있었다.
싸우는 도중 사로잡은 놈들에게 간단한 고문 몇 가지를 한 결과 녀석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울부짖으며 말하는 통에 알아듣기는 조금 힘들긴 했지만 말이다.
2030년.
궤도 엘리베이터, 5층.
믿기 힘들지만, 그 <연방>이 무너지고 현재 인류는 웬 기계 깡통 쪼가리들에게 멸망 중.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인의 말대로 이 척박한 5층 대지에서는 어떤 먹을 것과 마실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설령 어느 정도 먹을 게 있어도 문제다.
현재 은빛 바다니 뭐니 그 위를 둥둥 표류 중이어서 도망칠 곳도 없다는데 해결해야 할 입은 최소 수만 개, 아마 며칠만 있으면 식인 파티가 벌어질 것이다.
기껏 자유를 얻자마자 굶어 죽고 싶은 놈들은 없을 테니까.
그런 이들을 향한 여인의 한마디.
"한데 이런 곳에서 저놈들은 이제까지 살아남았어. 또 확실하게 어떤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지. 최소한 녀석들은 먹을 게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는 거야. 그것도 수천 명 정도는 당분간 해결할 수 있는 양을."
그런 이들의 말에 주변 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말 그대로 저 녀석들이 단체로 뛰어내리기라도 하려고 이 플로어를 뚫고 어딘가로 강건히 향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목적지에는 분명 먹고 마실 게 있을 거라는 의미.
하물며 수천이라면 그 곁가지만을 얻는다고 해도 자신들 수십 정도에게는 충분할 것이다.
아니면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걸 기습해서 털어낸다거나 말이다.
하지만 꼭 이런 데는 덧붙이는 자가 있는 법.
"하지만 굳이 저놈들을 따라갈 필요 있나? 아까 전에 기계 거미를 데리고 다니던 놈들은 다른 방향으로 갔어. 그쪽에도 세력이 지낼만한 먹거리가 있다는 뜻이야. 거기가 더 풍족할 가능성도 높고."
누군가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
심지어 정황상 그 세력들 쪽이 물자건 뭐건 더 풍부할 가능성이 높다.
잠깐의 충돌만으로도 그들이 더 강한 이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이런 세계에서 힘이 강한 이가 더 풍족한 곳을 점유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굳이 저 녀석들을 쫓아가자는 이유는 간단하다.
"더 만만하잖아. 저놈들이. 안 그래?"
생존의 기본은 약한 놈을 물어뜯는 것.
자신의 제안에 문제점은 단 하나뿐이다.
풀려난 다른 집단 녀석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기에... 물어뜯으려는 녀석들이 너무 많으리라는 것.
"잘 뜯어먹어야 할 텐데 말이야. 다른 놈들보다."
크하하하...
입꼬리를 끌어올린 여인의 말에 모여있던 이들이 흉악하게 웃었다.
**
"으... 으으으... 내 사... 사사사... 사옥... 선이..."
끄드드득...
끄득...
앞장서 걸어가던 강태석의 옆, 스스로를 네온이라고 소개한 말더듬이 사내가 천장을 벅벅 긁으면서 지나가는 사옥선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데 천장까지 낮으니 최대한 고도를 조정하며 가려고 해도 위아래를 긁을 수밖에 없는 노릇.
때론 천장에, 따른 바닥에, 때론 가로막는 것을 밀어 부딪치며.
끄드드드득...
'자동 세차 돌린 외제차 주인의 심정이려나?'
안 그래도 숭숭 뚫린 구멍, 그 검은 표면에 기스란 기스는 모조리 내며 가고 있는 사옥선을 올려다보던 강태석은 이내 관심을 껐다.
어차피 필요한 건 내부 시설인 데다가 외장은 나중에 고치면 그만이니.
중요한 건 자신의 앞, 그리고 뒤.
휘익.
우선 뒤를 돌아본 강태석의 시선으로 지치고 긴장한 표정으로 무리 지어 걷고 있는 수천 명의 인원들이 보였다.
나름 피해를 줄였다지만, 전투로 인해 많은 탄약과 물자를 손실했고 부상과 피로 또한 누적되었다.
거기에 그 너머, 한참 뒤 쪽으로 드문드문 보이는 수상한 기척들.
슬금.
슬금슬금.
무너진 구조물 한켠.
혹은 바닥의 틈새.
좀 더 대담한 놈은 아예 중력이 역전된 천장에.
눈에 드문드문 보이는 것만 해도 수십, 수백이 따라붙고 있었다.
저놈들이 정찰대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보이지 않는 녀석들은 그 몇 배나 될 터.
마치 빙산의 일각처럼 말이다.
"..."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강태석의 곁, 걸어온 페리트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에나 패거리들이 따라붙었다고 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그런 수준이 아냐. 숫사자 수백 마리가 달라붙은 것 같군."
보통 굶주려 빈틈을 노리며 따라붙은 게걸스러운 패거리들을 하이에나 같다고 부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따라붙은 녀석들은 그 수준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작은 무리조차 검기 사용자들을 몇씩이나 끼고 있었다.
혹여 그 숫자가 수백에 가까우면 검기 사용자가 스물을 훌쩍 넘어가 버리는, 하나하나가 개인의 무력 수준으로 보면 자신들과 대등하거나 압도해버리는 무투 집단들.
아직은 자신들 집단이 가장 머리 숫자가 많았고 엑소 슈트들도 든든하기 때문에, 그리고 녀석들끼리도 서로 간 경계하며 사이가 좋지 않기에 쫓아오는 녀석들도 그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계속 숨기기에 저 녀석들은 너무 굶주려 있었다.
풀려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최고로 사나운 데다 물자마저 없는, 타이밍으로 치면 그야말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을 시기에 마주치게 된 녀석들이다.
실제로 전면전이 붙으면 초반에는 양측 모두에게 대학살이 벌어지겠지만, 이내 도륙당하는 쪽은 필시 자신들이 된다.
그리고 그런 페리트란의 걱정에.
"아직은 걱정 안 해도 돼. 일단 올라가면 어떻게든 할 수 있으니."
"... 이번에도 네 말을 믿고 싶은데 정말 쉽지가 않군."
쓰게 웃은 페리트란이 이내 손을 휘휘 저으며 뒤로 걸어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불안해하는 이들을 다독이고 혹시 모를 내부 갈등을 살피기 위함.
그리고 그런 페리트란을 보던 강태석은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앞을 바라보았다.
거진 지척까지 다가온, 자신들의 목적지를 살피기 위해.
통로.
쿠르르릉...
직경 300m, 높이 20m.
높이에 비해 여전히 기형적으로 두터운 원통형의 기둥.
"들어가지."
키이잉...
역장이 비치고 있는 통로 입구를 가리키는 강태석의 말에 뒤쪽으로 따라오던 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
통로는 역시 어마어마하게 컸다.
어느 정도냐 하면 꾸역꾸역 욱여넣어서 붕 뜬 사옥선과 바깥의 수천 명, 엑소 슈트들이 한 번에 들어 탈 수 있었을 정도였다.
물론 통로 안이 끝없이 방대한 건 아니니 쾌적할 리는 없었지만, 나눠 타는 선택지를 고르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아래 남겨진 이들은 저 너머, 바깥에서 호시탐탐 안쪽을 노려보고 있는 이들에게 습격당해 찢겨나갈 수도 있었으니.
키이이이잉.
철컥.
띠디디딕...
띠딕...
"조정했습니다. 이제 올라가요."
쿠우우웅...
수백 대의 엑소 슈트들이 통로로 들어오는 각 입구들을 이리저리 겨누며 경계하던 속, 벽면의 패널을 테크니컬 사내 온이 이리저리 매만지자 우웅 소리와 함께 역장이 발동하며 통로의 입구들이 막히고 넓은 원형의 바닥이 쿠르릉 진동하며 위로 솟구칠 준비를 했다.
이게 바로 통로의 진정한 쓰임새.
물자, 사람, 자원.
그 모든 것을 엘리베이터마냥 역장을 통해 대용량으로 한 번에 위로 주욱 실어 나르는 것.
4층에서 5층에서 올라왔을 때는 괴수들이 이미 우글거리고 있었기에 이런 방식을 쓰지 못하고 계단처럼 이용했지만, 원래는 이런 식으로 쓴다.
예전, 플래그가 이곳을 점령하고 이용했을 때도 그랬고 말이다.
잠시 후.
쿠르르르르릉!
수천 명의 인원과 엑소 슈트, 사옥선까지 실은 역장 바닥이 굉음을 내며 단번에 위로 솟구쳤다.
20m, 50m, 100m.
쭉쭉 뻗어 그 위쪽으로.
그리고 그 속에서.
"... 이렇게 올라가는데 5층 심부가 있다는 걸 몰랐단 말이야?"
서 있던 군파츠가 스쳐 지나는 검은빛 통로 벽면을 보며 이해 안 간다는 표정으로 온에게 물었다.
상식적으로 층계의 두께라는 게 있다.
5층 높이가 고작 20m인데 6층까지 100m도 넘게 솟구치면 그 사이에 비밀공간이 있을 거라고 예측할 수 있는 노릇 아닌가.
그런 군파츠의 말에.
"우리는 바보가 아닙니다. 올라가 보면 알 거예요. 왜 몰랐는지."
"..."
덤덤하게 말하는 온의 태도에 군파츠가 입을 닫았다.
하긴.
한두 명도 아니고 통로를 이용했던 수천, 수만 명이 바보일 수는 없다.
하물며 궤도 엘리베이터가 멀쩡했을 시절에는 그보다 몇십, 몇백 배는 될 숫자들이 이 통로를 이용했을 터.
이윽고.
쿠우우우우웅!
역장이 멈춰 서자 그 위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검은 통로의 중간에 멈춰 섰다.
그런 그들의 눈앞, 통로 벽면으로 난 바깥으로 향하는 입구.
저게 6층을 향하는 통로일 터.
키이이잉...
통로를 감쌌던 역장이 풀리며 통로 안과 밖의 차폐가 풀리고 연결된다.
그리고 그 입구를 통해 책임감 반, 호기심 반으로 가장 먼저 밖으로 나간 건 군파츠였다.
돌격조 포지션으로서 주변 위협의 우선적 방비라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 바깥의 풍경이 너무나 궁금했기에.
잠시 후.
<... 이게 지금 뭐래니.>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바이저를 쓰고 나온 군파츠가 주변의 풍경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꺄아아아아악...
꺄악...
천장부터 바닥까지 1km도 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높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이를 메운 푸르른 하늘과 태양빛.
그 아래, 시야를 가득 메우고 펼쳐진 푸른 숲과 산과 대지들.
천장과 지상 사이, 드넓은 세계들을 지탱하듯 드문드문 우뚝 선 검은색의 통로들까지.
마치 차폐된 콜로니가 아닌, 또 하나의 멀쩡한 생태계에 들어온 듯하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점.
촤아아아악...
<바다? 바다라고?>
그야말로 한 개의 세상을 구현한듯한 광경.
바깥으로 나온 군파츠가 눈앞의 대지와 그 옆의 시야로 펼쳐진,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바닷가를 넋 나간 듯 바라보았고.
저벅.
"6층. 에코 지대에 온 걸 환영합니다."
자신들이 빠져나온 통로, 그 위로 새겨진 문자와 숫자를 확인하며 온이 중얼거렸다.
드넓은 바다와 하늘이 공존하는 세계.
그 사이사이로 존재하는 수많은 섬이자 육지이자 구역들.
이곳에서는 바다 사이에 격리된 그 육지들 하나하나가 마치 작은 대륙의 역할들을 하며.
각 대륙들은 모두 각기 다른 생태계, 각기 다른 환경들로 구성되어있다.
혹한, 사막, 용암, 강.
그야말로 한 층계 안에 모여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고 특색 있게.
그리고 그런 온의 간단한 설명에.
치익...
"후우. 여긴 그래도 좀 살만해 보이는데. 여기 특색은 뭔데? 숲? 산?"
어느새 바이저를 벗은 군파츠가 자신의 뒤, 통로로 따라 나오며 마찬가지로 탄성을 내뱉는 이들을 보면서 여유 있게 몸을 풀며 물었다.
내리쬐는 햇살, 펼쳐진 바다, 푸르른 수림.
온통 지옥 같은 환경에 잿빛 천장, 빌어먹을 은빛 물결만 보다 이런 광경을 보니 절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
그리고 그런 군파츠의 말에.
"별거 아닙니다. 거대 생물종이죠."
G.
Giant의 약자.
43번 통로를 통해서 올 수 있는, 그리고 만약 자신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절대, 절대, 절대로 오지 않았을 구역.
온의 차분하면서도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을 담은 그 목소리에 군파츠의 눈썹이 꿈틀거린 순간.
쿠우웅...
꾸어어어어어어어어엉!
군파츠의 뒤쪽, 아주 먼 곳의 평원에서 땅을 뚫고 튀어나온 크기 300m의 거대한 지렁이가 사방을 향해 쩌렁쩌렁 괴성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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